나주시 ()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나주, 영암 부분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나주, 영암 부분
인문지리
지명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
정의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33'∼126°54', 북위 34°53'∼36°03'에 위치한다. 면적은 608.32㎢이고 인구는 9만 818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1개 읍, 12개 면, 7개 행정동(34개 법정동), 446개 행정리(154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에 있다.

자연환경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금성산(錦城山, 450m)·신걸산(信傑山, 368m) 등이 있다.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이다.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주평야는 전라남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평야와 화순평야 등의 주요 미곡산지를 관개한다.

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하는데, 이 지석강의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 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이 댐은 작물 성장에 알맞은 온도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면에서 3m 이내의 표면수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과,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유량조절장치를 설치한 국내 최대의 관개용수 댐이다. 댐에 의해 조성된 호수에는 붕어·잉어·뱀장어·날치 등 담수어족이 많아 낚시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 수해지역이 되고 있다. 이들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가 발달되고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영산강의 지류인 문평천 유역과 이 하천이 합류한 영산강 북안에 다시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 평야는 크게 나주평야의 일부라 할 수 있으며, 총면적은 1,400ha에 이른다. 문평천을 가로막아 만든 백룡제라는 저수지가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이 평야의 특색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며,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8℃이다. 연강수량은 1,491㎜로 하절기인 6·7·8·9월에 70∼80% 이상이 내린다. 서리는 11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역사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일부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해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반남면 대안리·흥덕리·신촌리 일대와 다시면 회진마을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독무덤의 존재들이 주목된다. 독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비교적 강대한 정치권력체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백제시대에는 발라군(發羅郡)·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 협력하여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에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무안·남평·담양·낙안·곡성의 5군을 속군으로 거느렸는데, 여기에 현웅현이 남평으로 고쳐져 예속되었다. 또,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의 11현이 속현으로 예속되었다. 이 속군·현들은 1172년(명종 2) 이후 점차 독립하거나 다른 지방에 이속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하면서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96년 2월 10일 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되었다.

유물·유적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동강면 장동리, 공산면 봉룡리, 산포면 신도리 등 20여 곳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다시면 가흥리 늪지대에서 벼화분이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석묘만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150여 곳에 1,2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 중 왕곡면의 나주신포리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1990년 지정)을 비롯해 다도면 판촌리·마산리 지석묘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북방식 지석묘인 다시면의 신풍리지석묘에서는 석검과 채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세지면 오봉리·벽산리, 남평읍 동사리·교촌리의 것이 대표적이다.

고분으로는 다도면 마산리에서 토광묘와 옹관묘가 조사되었다. 거대한 봉분을 한 고총 고분으로는 반남면에 나주신촌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나주대안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나주덕산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등의 옹관고분군이 있다. 석실고분으로는 다시면에 복암리고분군(전라남도 기념물, 1963년 지정), 세지면의 나주송제리고분(전라남도 기념물, 1994년 지정), 반남면에 나주흥덕리석실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94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동강면·공산면·왕곡면 등 영산강 하류지역에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옹관고분에서는 금동관·금동시발·환두대도 등 신분을 상징하는 금속유물과 많은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복암리석실분에서는 금동신발과 관이 출토되었다.

성터로는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진 다시면 신풍리의 나주회진성(전라남도 기념물, 1986년 지정), 반남면 대안리·신촌리의 나주자미산성(전라남도 기념물, 1986년 지정), 남내동의 나주읍성(사적, 1990년 지정), 금성산성지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성북동의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보물, 1963년 지정), 과원동의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봉황면의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보물, 1968년 지정)·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8년 지정), 경현동의 다보사대웅전·다보사석탑·다보사괘불탱(보물, 2002년 지정), 대호동의 심향사(전라남도 문화재, 1984년 지정)·심향사 아미타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심향사삼층석탑·불두사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남평읍 동사리의 석등, 세지면의 나주 송제리 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 다시면 가운리의 복암사이층석탑, 남평읍 풍림리의 죽림사 극락보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탑재·석불좌상·부도군, 다도면 마산리의 불회사 대웅전(보물, 2001년 지정)과 부도군, 봉황면의 나주 만봉리 석조여래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운흥사의 부도군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교동에 나주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63년 지정)·나주향교 대성전(보물, 1963년 지정), 남평읍 교원리에 남평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안창동에 미천서원(전라남도 기념물, 1999년 지정) 등이 있다. 그리고 금계동에는 우복룡(禹伏龍)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운 정수루(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97년 지정)와 나주목사내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가, 과원동에는 객사 건물인 나주금성관(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남아 있다.

또한, 남산공원 내에 정렬사(旌烈祠), 남문동에 나씨삼강문(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석현동에 계간사(谿磵祠), 송월동에 금강사 등이 있다. 이 밖에 노안면 영평리의 설재서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금안리의 경렬사(景烈祠), 다시면 영동리의 보산정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무열사(전라남도 기념물, 1981년 지정), 문평면 오룡리의 봉강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송재사(松齋祠)·거평사(居平祠)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가옥으로는 다도면 풍산리의 나주 계은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나주 우남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나주홍기창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1986년 지정), 덕동리의 나주홍기종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1986년 지정) 등 풍산홍씨의 고가옥이 남아 있다.

또한, 남대동의 나주박경중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송월동의 나주최석기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8년 지정), 문평면 오룡리의 나대용생가 및 묘소(전라남도 기념물, 1977년 지정)도 보존되어 있다.

정자로는 노안면 금안리의 쌍계정(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세지면 벽산리의 벽류정(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봉황면 철천리의 만호정(전라남도 기념물, 1992년 지정), 다시면 신풍리의 영모정(전라남도 기념물, 1987년 지정), 신석리의 창주정(滄洲亭), 문평면의 사벽정(四碧亭) 등이 유명하다.

비석으로는 다시면 가흥리의 최희량장군신도비(전라남도 기념물, 1981년 지정), 과원동의 사마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금성토평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가 대표적이다.

송월동에 왕건과 나주오씨에 얽힌 전설이 있는 나주완사천(전라남도 기념물, 1986년 지정), 남평읍 풍림리에 남평문씨와 관련된 나주문바위(전라남도 민속자료 , 1995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최희량 임란 관련 고문서(보물, 1979년 지정)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영동의 염제신 초상(보물, 1991년 지정)도 전한다. 등록문화재로는 금성면에 구 나주경찰서, 노안면에 나주노안천주교회가 있다.

문평면 계로리에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있고, 다시면 가운리·죽산리에 각각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교육·문화

전 근대 교육기관의 출발은 나주목을 포함한 12목에 경학박사 등을 파견하여 자제를 교육케 했던 고려조 성종대로부터 시작하여 별도의 향학 진흥책을 도모한 인종이나 공민왕 대로 이어지는 교학의 오랜 전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조선 초기 이래 전라우도(全羅右道) 교육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온 나주향교는 교관의 품계나 성현을 모신 대성전의 규모면에서 호남 최대를 자랑한다. 건물 배치 양식에서 대성전 뒤로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배치,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를 취하였다. 『향교지』에는 건립연대가 1398년(태조 7)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조의 흥학책이 당대에 연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평읍 교원리의 남평향교는 1420년(세종 2)에 당시 남평현 동문 밖에 창건되었다가 1534년(중종 29)에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 그 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0년(선조 33)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들 두 향교는 향안(鄕案) 등의 자료에서 향촌의 여론수렴과 향강(鄕綱)을 수립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설립추세는 이 지역 유림세를 반영하여 1583년(선조 16) 서문밖 경현동에 창건된 경현서원(景賢書院)을 필두로 1590년남평읍 서산리에 봉산서원, 1664년 죽봉사우(竹峯祠宇)와 월정서원(月井書院), 1678년 장연서원, 1688년 설재서원 등이 설립되었다.

1702년 송재사우(松齋祠宇)의 설립에 이어 서하사우(西河祠宇)·용강사우(龍岡祠宇)·창계서원(滄溪祠宇)·반계서원(潘溪書院)·미천서원·정렬사·금성사·영강사우(渶江祠宇) 등으로 연결되면서 탄탄한 유림 문화를 구축하였다. 이 중 사액서원은 경현서원·월정서원·정렬사 등 세 곳이다. 이들 모두는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뒤 현재 대부분 복원되었다. 한편, 1601년(선조 34)경 입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안동 향약은 유교문화권의 지역공동체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갑오개혁 직후인 1897년에 공립나주심상소학교가 세워진 것을 필두로 1906년에 사립 남평영흥학교(永興學校)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07년에는 나주소학교가 나주보통학교로, 1910년에는 영흥학교가 보조지정학교로 인가된 뒤 1911년 공립으로 바뀌어 식민지 제도권에 편입되었다.

1면 1교 설치 정책이 완료되던 1938년에는 총 20개 교의 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어 있었다. 특히, 1920년에 반남학술강습소가 문을 열었다가 1925년에 폐쇄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1920년대의 민중계몽에 의한 실력배양운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1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고, 고구려대학교·동신대학교·광주가톨릭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공도서관, 나주배박물관, 시민회관, 사회복지관, 문화원 외에 실내체육관, 테니스와 사격장 등 경기시설, 유선방송시설 등의 문화복지시설이 있다.

민속

이 지방의 민속놀이로는 어른들의 놀이인 농악·소태우기,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즐기는 놀이인 줄다리기·씨름·고누·꿩치기·윷놀이, 부녀자들의 놀이인 강강술래·널뛰기·그네뛰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소태우기는 일년 벼농사 중 만드리(세벌논매기)를 끝낸 농군들이 흥겨운 들노래 가락에 맞추어서 행하는 놀이이다.

고누는 말판을 그려놓고 말이 앞으로 나가면 이기게 되는 놀이이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꼰’이라고 부르며, 곤지꼰·정자(井字)꼰·호박꼰 등 종류가 다양하다. 일명 장치기라고도 하는 꿩치기는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데,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각기 1.5∼2m 가량의 장대를 가지고 나무로 만든 공을 쳐서 적진에 들여보내는 놀이이다. 윷놀이는 정초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행해지는 놀이로, 이 고장에서는 밤알만한 크기의 작은 나뭇조각으로 된 밤윷을 사용한다.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서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널뛰기 또한 정초·추석·단오 등의 명절에 많이 행해진다. 그 밖에도 아이들의 놀이인 제기차기·튕김질(땅재먹기)·비사치기(비석차기)·닷짝거리(콩주워먹기·공기놀이)·자치기 등이 있다.

나주에서는 거의 모든 마을마다 늙은 거목을 신체(神體)로 하여 당산제가 행해진다. 그 가운데 다시면 죽산리 화동마을의 당산제는 규목나무를 당산목으로 삼고, 동민 가운데 부정하지 않은 사람을 제주로 선정하여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에 제사를 지낸다. 제물로는 돼지 한 마리를 사용하는데, 사정이 넉넉지 못할 때는 돼지머리만을 쓰기도 한다. 제사에 참석하는 동민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제사가 끝나면 농악을 치고 그 이튿날에는 마을사람끼리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다.

이와는 달리, 공산면 금곡리의 당산제는 수백 그루의 늙은 소나무 전체를 당산목으로 삼고 있으며, 다시면 신광리(속칭 보광골)에서는 은행나무와 규목나무로 된 두 그루의 당산목에 제사를 지낸다. 이 두 마을 모두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농악을 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올린다. 제단은 보통 산 위에 있고, 제사가 끝나면 마을 부녀자들에 의해 파묘가 행해진다. 묘를 파서 시체를 내놓고 신역(神域)을 부정하게 하여 산신으로 하여금 비를 내려 씻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전염병으로 죽은 귀신들을 위해 방역제(防疫祭, 혹은 除厄祭)를 지낸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역사상의 인물과 관련된 설화와 지명유래담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반남면 신촌리에 전해지는 「벌명당전설」이 유명하다. 반남박씨의 시조 박응수(朴應洙)의 아들 의(宜)는 아버지가 죽자 지관을 불러 명당을 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지관은 명당을 잡았으나, 그 자리를 소개하면 천지조화의 비밀을 누설했다 하여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박의에게 거짓 명당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박의는 지관이 소개해준 거짓 명당을 버리고, 지관이 숨긴 명당을 택해 묘를 쓰고자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파고 있던 땅 속에서 커다란 벌이 솟아나와 지관을 쏘아 죽이고 말았으며, 반면 박씨의 집안과 후손은 날로 번성하였다. 그 뒤로 이곳을 벌명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강면 월송리에 전해 오는 「몽탄강전설(夢灘江傳說)」은 고려 말 왜구토벌에 나선 이성계(李成桂)가 꿈에 어느 노인의 계시를 받고 이 강을 건너 왜구를 섬멸할 수 있었다. 그 뒤 꿈여울이라는 뜻에서 몽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불회사의 대웅전과 일봉암(日封庵) 전설은 고려의 국사 원진(圓眞)이 신라 때 창건한 불회사의 대웅전을 중건할 때의 이야기이다. 원진에게 은혜를 입은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의 중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 사이에 하루해가 저물고 말았다. 그러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때 원진이 기도했던 자리에 지은 암자가 일봉암이다.

이 밖에도, 옛날 어느 장군이 싸움터에 나가던 중 신을 삼아 신고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는 다도면 덕동리의 「신틀바위전설」, 어느 효자가 선녀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병을 고치고, 어머니의 사후에는 선녀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일봉산의 「상여바위전설」, 검은 소 열 마리의 간을 지관에게 바치고 얻었다는 「명당전설」이 공산면에 전한다.

또, 인물에 관한 전설로는 남평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이 등과 배에 ‘문(文)’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채 장자연(長者淵) 가의 돌상자 속에서 태어났다는 「문바위전설」, 조선시대의 문인에 관한 「박상(朴祥) 이야기」, 임진왜란을 예언한 의병장 「김천일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나주 지방은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전승되는 민요도 들노래나 벼농사와 관련된 노동요가 주를 이루고, 종류별로도 잘 전승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모판을 만들기 전에 논에 물을 대면서 두레질을 하는데, 이때 「물두레질소리」를 한다. 「물두레질소리」는 육자배기 선율에 흥얼거리면서 혼자 부르는 소리도 있으나 대개 한 사람이 “하나요 둘이요……”하면서 세어나가면 상대편 사람이 “어이” 하면서 받는 소리를 한다.

모판에 뿌린 볍씨가 자라 이종할 때가 되면 모심기를 하기 전에 모판에서 모를 뽑아 한 단씩 묶는 ‘모찌기’를 한다. 이때 「모찌기소리」를 부른다. 이 지방의 「모찌기소리」는 긴소리와 자진소리가 있다. 둘 다 3분박 4박자로, 긴소리는 자진중중모리장단에 맞고 자진소리는 느린자진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첫새벽에 일어나”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오헤라 사뒤여” 하며 일정하게 받는데, 이는 긴소리나 자진소리나 같다. 「모찌기소리」의 선율은 두 소리가 다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모찌기가 끝나고 한 단씩 묶은 모단을 모심기할 논에 듬성듬성 던져놓으면 모꾼들이 들어가 주위의 모단을 한 단씩 들고 모를 심기 시작한다. 이때 ‘모방구’라고 하는 농악북을 치며 「모심기소리」를 한다. 이 지방의 「모심기소리」는 3분박 4박자로 느린자진모리장단에도 맞고 자진타령에도 맞는다. 이 소리는 리듬이 특이하여 ‘덩덕궁이장단’ 또는 ‘모방구장단’으로도 불린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울러보세 울러보세”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헤 헤 헤루 사뒤요” 하며 같은 장단에 받는다. 「모심기소리」의 자진소리는 속도만 빠를 뿐 긴소리와 같다.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으나 ‘꺾는목’이 심하지 않으며 「농부가」로 알려진 「모심기소리」와 조금 다르다.

옮겨 심은 모가 어느 정도 자라면 김매기를 하는데, 이 지방에서는 주로 열흘 정도 간격으로 세 번 김을 맨다. 초벌을 맬 때는 처음에 긴소리를 하고 끝에 「덜래기소리」나 「절사소리」로 빠르게 몰아 끝낸다. ‘긴소리’는 선소리꾼이 편한 가락으로 느리게 “불러보세 에헤에 이허히 불러불러 이십전에 배운노래”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일제히 “그렇지요” 하고 받는다.

다시 선소리꾼이 “아아 이히 히허 허허” 하는 구음을 하다가 낭송조로 “이십전에 배운노래 삼십안에 불러보세” 하면 일꾼들이 “아리시구나 오호이 헤헤 헤헤이 호어히 헤에아하 마뒤여” 하며 길게 받는다. 이 소리의 구성음은 ‘솔·라·레·미·솔·라’로 되어 있고 선율이 육자배기토리와 다르다.

두벌을 맬 때는 「절사소리」를 하는데, ‘두레굿’이라 하여 농악으로 반주한다. 이 지방의 「절사소리」는 2분박 5박자로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절사소리는 어디를 갔나”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같은 장단에 “어헐사하 저리시고나”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이루어진다.

두벌매기 때 주로 부르는 노래는 「덜래기소리」인데, 긴소리와 자진소리가 있다. 「덜래기소리」의 긴소리는 3분박 4박자로 중중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풍년이왔네 풍년이왔네”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오호 헤야 덜덜래기요”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하루종일 김을 매고 해질녘이 되면 「덜래기소리」 자진소리를 한다. 박자는 긴소리와 같으며 빠르기만 조금 빨라 느린자진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흥이났네 흥이났네”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허야 허야 덜덜래기야” 하며 같은 장단으로 받는다. 「덜래기소리」의 구성음은 경토리와 비슷하나 선율의 특징은 육자배기토리와 같다.

세벌김매기는 ‘만드리’라고도 한다. 이때는 주로 「절사소리」를 하며 때로 「뜰모리」를 부르기도 한다. 「뜰모리」는 원래 전문 소리꾼들의 소리였는데, 이 지방에서는 김매기소리에 포함되어 불린다. 3분박 4박자로 중모리장단에 가깝지만 간혹 장단이 늘어나서 불규칙하게 박자를 이어가기도 한다.

선소리꾼이 한 장단 반에 “저건너 갈미봉 비몰아오네” 하고 메기면 일꾼들은 반 장단에 “어리사” 하며 받고, 선소리꾼이 다시 “우장 삿갓을 허리에 매고” 하며 한 장단 반에 메기면 일꾼들은 다시 “저리사” 하며 반 장단을 받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우장 삿갓을 허리에 매고” 하며 메기면 일꾼들이 “무슨 소린줄 네어헤 몰라 어리사 저리사 하하 저리사” 하고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경토리와 비슷하다.

저녁에 김을 다 매고 논둑에 올라서서는 「뜰모리」나 「돈들타령」을 부르면서 논다. 「돈들타령」은 「뜰모리」와 같은 전문 소리꾼의 소리이던 것이 이 지방의 김매기소리에 포함되어 불린다. 「돈들타령」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면서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다. 3분박 3박자로 세마치장단에 맞지만, 간혹 3분박 4박자의 장단이 끼여 불규칙하게 장단이 이어진다.

선소리꾼이 네 장단에 “골골이 삼천석 실어를 갖고 영광의 법성 어에라 돈실러가 헤 헤에 에라 돈절인가 소식이 좋아 어어 어허 돈절인가” 하고 메기면 다른 사람들은 같은 장단에 “돈실러가세 돈실러가세 영광의 법성 어어에라 돈실러가 헤 헤에 에라 돈절인가 소식이 좋아 어어 어허 돈절인가”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육자배기토리와 경토리가 섞인 형태를 보여준다.

이 지방에서는 ‘만드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서 그해 벼농사에 장원을 한 집의 수머슴을 소에 태우고 놀면서 장원질을 한다. 이때 ‘에롱데롱’이라는 소리를 한다. 이 소리는 3분박 4박자로 느린중중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한 장단에 춤을 추며 “풍년새 운다네 풍년새 울어” 하고 메기면 농군들이 같이 춤을 추며 한 장단에 “에롱데롱 기와자 좋네”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이 소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 볏단을 지어 나르면서는 「등짐소리」를 한다. 이 소리는 자유리듬으로서 받는소리는 “상사뒤요 뒤요”로 일정하다.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산업·교통

시를 관류하는 영산강을 따라 나주평야가 발달해 있다. 비옥한 토지와 기후, 수리가 농업에 적합해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지역에는 나주호·영산강이 있어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면적 가운데 전답의 경지율이 38%에 해당될 정도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경지면적 가운데 논과 밭의 비율은 7:3이다. 2008년 현재 농업인구수는 3만 6449명이다.

따라서 벼농사가 발달되어 있으며, 연간 쌀생산량은 7만 21384M/T에 이른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옛날부터 품질이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영산강 간척지에서 생산된 동강면 간척미는 뛰어난 밥맛과 영양가로 품질인증을 받아 판매될 정도로 그 명성이 높다.

그 밖의 주요 농산물은 보리·조·수수·옥수수·콩·팥·고구마·감자 등이다. 또, 배·복숭아·포도 등의 과일이 예로부터 특산물로 생산되고 있다. 특히, 배와 복숭아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복숭아·포도·배·양송이 등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크고 작은 제조업체에서 통조림도 생산하고 있다.

과일류 외에도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원예와 채소재배가 성하여 인근의 광주와 목포 등의 도시는 물론, 서울·대전·부산까지도 출하되고 있다. 또한 1977년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머스크멜론은 맛과 향이 뛰어나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수출되어 농가소득의 증가에 도움을 준다.

옛날에는 남평읍과 다도면 일대에서 질이 좋은 남평숯이 많이 보급되었으나 지금은 벌목 중단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또, 왕곡면에서는 특용작물로 생강이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나주시는 전국 제1의 배산지이며, 금천면·노안면·왕곡면·봉황면·세지면 등이 주요 산지로 손꼽힌다. 동수·오량·봉황 등 3개 농공단지가 1990년에 준공되었다.

한편, 군내에는 47개의 광구가 가동되어 납석·고령토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공산면 덕음금광에서 생산되던 은은 일제 때 이후 채굴되지 않았고, 금은 1980년대 중반까지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생산량이 거의 없다. 또한, 품질이 좋은 인초 돗자리의 특산지로서, 1986년에는 영산포에 한일합작으로 인초돗자리회사가 설립되어 연간 1억 원 이상의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수공예인 나주반(羅州盤)과 부채도 지방특산물로 제조, 판매되고 있다. 세지면에서 생산된 토하젓은 조선시대 궁중진상품으로 유명하다.

한때 영산강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상류 광탄(廣灘)까지 거슬러 올라와 장어(구진포 장어)·숭어·명란(明卵)·해파리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의 축조로 예전과 같지 않다. 내수면 양식업으로 남평읍에 뱀장어와 미꾸라지 양식장이 있으며, 나주에 통조림공장이 있다. 중소기업 육성과 농가소득 보장의 일환으로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가동 중이다.

상업활동은 시장과 기존 도로를 따라 형성된 상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장으로는 2개의 상설시장과 10개의 정기시장이 있다. 한때 육로와 수운이 편리한 영산포시장이 유명했으나 1975년 영산강 하구언 축조로 목포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끊기고 육로교통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상설시장은 옛 나주읍의 중앙시장과 옛 영산포읍의 영생시장이다. 정기시장으로는 나주장(4·9일)·영산포장(5·10일)·동창장(2·7일)·반남장(4·9일)·공산장(1·6일)·동강장(3·8일)·다시장(3·8일)·문평장(1·6일)·남평장(1·6일)·봉화장(4·9일)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다시장은 맛이 좋기로 유명한 다시쌀을 거래하는 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평장은 소의 거래로, 반남장은 돼지의 거래로 유명하다.

나주는 광주와 인접해 있어서 전기전자제품·의류·가구 등 고가 품목은 흔히 광주에서 구입하고 있다. 따라서 상권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또, 정기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상설시장의 활동이 위축되므로 상설시장의 상인들이 정기시장으로 옮겨와 상업활동을 하기도 한다.

한편 17개 기관이 나주 혁신 도시로 이전할 계획이고, 2009년 한국전력의 본사가 나주로 이전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많은 인구 유입과 관련 산업의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1913년 호남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설치된 나주역·영산포역이 서울·대전·목포를 연결하고 있다. 1930년 경전선의 개통과 함께 남평역이 개설되어 순천∼부산 방면과 연결되고 있다. 국도 1호선인 광주∼목포간의 4차선 고속화도로가 나주시를 거쳐 군의 중앙부를 서쪽으로 달린다.

그리고 광주·송정리·나주를 잇는 4차선 국도와 지방도의 도로망이 나주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나주는 화순·함평·강진·해남·영암·완도·진도·장흥 등을 연결하는 국도도 있다. 나주의 도로는 완만한 구릉과 평야 지대를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좋은 편이다.

관광

나주시는 호남의 고도(古都)로서 목사골로도 불리며, 자연관광자원보다는 문화관광자원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동문 밖 석당간, 북문 밖 삼층석탑, 나주향교 대성전, 철천리의 칠불석상과 석불입상, 반남면의 고분군·사마교비·정수루·미천서원 등이 있다.

명소로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과 영산포 가야산 기슭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절벽이 영산강의 푸른 물과 장관을 이루는 앙암(仰巖)바위, 그 부근에 있는 창랑정(滄浪亭) 등이 대표적이다. 영산강 하구에 있는 다시면의 구진포(九津浦)는 영산강의 명물인 장어로 유명하다.

금성산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르고 단풍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우며, 녹차와 난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광주의 무등산과 남쪽으로 영암의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도도히 흐르는 영산강의 푸른물과 확 트인 나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기슭에는 다보사(多寶寺)를 비롯해 심향사·태평사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암자가 있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나주호는 그 주위 경관이 뛰어나다. 주변에 다양한 야생 동물과 식물의 서식군락지가 있어서 휴양지로 적합하다. 또, 나주호를 둘러싸고 불회사와 운흥사 등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어서 문화유적 답사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1980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영산강 상류의 지석강에는 아름다운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팔각정과 1950∼1960년 된 울창한 송림, 맑고 깨끗한 물이 어우러져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전라남도 지방의 유일한 민물욕수장 유원지로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

이 밖에 나주의 특산물인 배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배와 관련된 재배역사와 민속자료를 보여주는 나주배박물관이 개관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배의 재배단지인 금천면 석전리에 위치하며, 하얀색의 배꽃이 눈부시게 만발할 때면 장관을 이룬다.

나주는 영산강에서 어획된 물고기로 만든 어팔진미(魚八珍味: 조금물 또랑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뱅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와 자라, 수문리 장어, 복바위 복어)와 남새(채소)로 만든 소팔진미(蔬八珍味: 동문안 미나리, 신월 마늘, 흥룡동 두부, 사마교 녹두묵, 전왕면이 생강, 솔개 참기름, 보광골 열무, 보리마당 겨우살이)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나주의 토속음식으로는 원래 서민들이 즐기던 국밥이 ‘나주곰탕’이라 하여 새롭게 명성을 얻고 있다. 나주는 학술문화유적, 자연휴양지을 비롯한 관광자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석강과 나주호를 중심으로 한 나주 일원에는 야영장·숙박기관·음식점 등 각종 편의시설과 위락시설이 정비되어 있다.

읍·면
  1. 남평읍(南平邑)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읍. 면적 54.26㎢, 인구 8,011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남평리이다. 본래 남평군 지역으로서 남평 읍내가 되므로 군내면(郡內面)이라 하여 오창(五昌)·서원(書院)·동문(東門)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촌면(東村面)의 광리(光利)·어전(於田)·수청(水淸) 등의 13개 리와 두산면의 노가(老柯)·반월(半月)·상촌(上村) 등 10개 리, 등포면(等浦面)의 등수리(等樹里) 일부와 도천면(道川面)의 유촌(柳村) 일부, 능주군 도장면(道藏面)의 회포리 일부, 대곡면(大谷面)의 점촌(店村)·평촌(坪村) 일부, 화남면(花南面)의 이곡리(耳谷里) 일부 등을 병합해 남평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16개 리로 개편하였다. 1995년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9년산포면 덕례리·등수리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중봉산(中蜂山)과 정광산(淨光山) 등이 솟아 있고, 산지 사이로 지석강이 흐르면서 광활한 남평평야가 발달하였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당근·오이·파 등의 과채류·소채류의 생산과 잎담배의 생산이 활발하며 양잠업도 성하였다. 특산품으로는 청무쌀·딸기·서양난이 생산된다. 남평숯은 단단하고 오래 타며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 특색이나 현재는 벌목을 하지 못하므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수원리에서는 실뱀장어와 미꾸라지 양식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도로는 읍 소재지를 중심으로 국도와 지방도가 교차하고 북동쪽에 경전선이 통과하고 있어서 인근지역의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노동리의 고인돌, 동사리의 선돌·석등, 풍림리의 죽림사 세존 괘불탱(보물, 1998년 지정)·극락보전과 장연서원, 서산리의 봉산서원(蓬山書院)과 봉암사(鳳巖寺), 우산리의 모선재(慕先齋), 교촌리의 육림사지(六林寺址), 교원리의 남평향교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고, 광주가톨릭대학교가 있다.

남평(南平)·대교(大橋)·동사(東舍)·교촌(橋村)·교원(校院)·서산(書山)·오계(五溪)·상곡(上谷)·우산(雨山)·남석(藍石)·풍림(楓林)·노동(蘆洞)·광촌(光村)·수원(水院)·광리(光利)·평산(平山) 등 16개 리가 있다.

  1. 공산면(公山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32㎢, 인구 2,73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곡리이다. 본래 나주군의 지역으로서 공수면(公水面)이라 하여 금곡(今谷)·흥복(興福)·용연(龍淵)·삼장(三長)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산면(吳山面)의 운하(雲下)·가흥(佳興)·석계(石溪) 등 18개 리와 곡강면(曲江面)의 와룡촌(臥龍村) 일부, 반남면의 영안리(永安里) 일부를 병합해 공수와 오산의 이름을 따서 공산면이라 하고, 10개 리로 개편하였다.

동쪽과 서쪽 면의 경계인 저산성 산지를 제외하고는 구릉지가 많아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삼포강(三浦江) 하류의 화성리 일대에 넓은 충적평야인 공산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주산물은 쌀·보리·콩류 등이며 유채의 생산이 많다. 배·복숭아·감·자두 등의 과일류와 잎담배, 약초인 패모, 그리고 고추·수박 등이 재배되어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논이나 방죽에서 서식하는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가 특산품이지만 농약의 남용으로 새우의 생존량이 적어 생산량이 많지 않다. 대신 맛좋은 갈게가 많이 난다. 신곡리의 덕음광산에서는 일제시대부터 금과 은을 생산했으나 지금은 생산량이 없다. 교통은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가송리·남창리·백사리·상방리·중포리 등지에 고인돌 48기, 화성리와 중포리에 고분 6기, 가송리에 영효재(永孝齋) 등 10개의 재와 남창리에 원사정(遠思亭) 등 3개의 정자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금곡(今谷)·남창(南昌)·백사(白沙)·신곡(新谷)·중포(中浦)·가송(佳松)·동촌(東村)·화성(花城)·상방(上方)·복룡(福龍) 등 10개 리가 있다.

  1. 금천면(金川面)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66㎢, 인구 5,19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강리이다. 본래 남평군의 지역으로서 어천면(魚川面)이라 하여 상촌(上村)·화기(花基)·변죽(邊竹) 등 2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마산면(金馬山面)의 연곡(蓮谷)·추동(楸洞)·본촌(本村) 등 10개 리와 죽곡면(竹谷面)의 옥산리(玉山里) 일부, 두산면(頭山面)의 신평리(新坪里) 일부, 지량면(知良面)의 평죽(平竹)·성정(成丁)의 각 일부와 광산군 대지면(大枝面)의 이천리(伊川里)를 병합해 금마산과 어천의 이름을 따서 금천면이라 하고 11개 리로 개편하였다.

면의 동쪽과 남쪽에 구릉지가 많고 북쪽 원곡리 부근에서 지석강과 영산강의 본류가 합류해 서쪽경계를 이루며 남류한다. 이 영산강 유역에는 금천평야가 있어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산물은 쌀·보리·무·배추·딸기이며 배·사과·복숭아·포도 등도 많이 생산된다. 특히, 과수단지(果樹團地)가 대규모로 조성되어 아리랑배로 명성을 얻은 나주배의 산지로 이름이 높으며, 연간 1만 5000톤을 생산하고 있다. 과수의 품종개량과 재배기술 개선 및 과실의 이용기술 향상을 위해 원예시험장(園藝試驗場)이 개설되어 있다. 석전리에 나주배박물관이 있다.

한때 원곡리 원촌마을에서 재배되던 원촌무는 수분함량이 김장용으로 알맞고 맛이 좋아 생산이 활발했으나 지금은 더 좋은 개량종이 많아 재배되지 않고 있다. 배·복숭아·포도 등을 가공하는 식품공업과 인초를 원료로 한 돗자리공업도 촌곡리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다.

도로는 광주∼목포 간의 국도뿐만 아니라 지방도·군도가 면을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광암리·죽촌리의 고인돌 10기를 비롯해 신천리의 김해김씨 삼왕묘(三王廟)와 지선당(至善堂), 광암리의 은행정사(銀杏亭祠), 죽촌리의 충효사(忠孝祠)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오강(烏江)·고동(古洞)·광암(廣巖)·신천(新川)·죽촌(竹村)·월산(月山)·동악(洞岳)·석전(石田)·촌곡(村谷)·신가(新加)·원곡(院谷) 등 11개 리가 있다.

  1. 노안면(老安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2.54㎢, 인구 5,42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동리이다. 본래 나주군의 지역으로서 이로면(伊老面)이라 하여 석정(石丁)·괴정(槐丁)·우산(牛山) 등 4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안면(金安面)의 구축(九丑)·고정(古丁)·영안(永安) 등 24개 리와 복암면(伏巖面)의 금암(今巖)·추동(秋洞) 등 24개 리, 서부면(西部面)의 마지촌(馬池村) 동산(東山) 일부, 마곡면(馬谷面)의 용동 일부, 조곡면(鳥谷面)의 용동(龍洞) 일부를 병합해 이로와 금안의 이름을 따서 노안면이라 하고 13개 리로 개편하였다.

서쪽에는 망산(望山, 270m)·옥산(玉山, 334m)·금성산 등의 구릉성 산지가 많다. 장성천(長城川)이 중앙을 통과하여 영산강에 합류하는 하천변에 나주평야가 발달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가 좋다. 주요 농산물로 쌀·보리·무·배추 등을 생산하고, 구릉지에서는 배·복숭아 등의 과일 생산이 활발하다. 특산품으로는 돌미나리·방울토마토가 있다. 공업으로는 학산리의 식품제조업, 오정리의 적벽돌공장 등 중소기업이 있다.

도로는 광주∼나주 간의 4차선 포장도로가 면의 외곽을 통과하고 중앙부를 나주 시내로 통하는 국도가 관통해 광주나 나주 시내에 접근하기가 편하다. 또, 호남선 철도도 통과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금안리의 쌍계정·설재사(雪齋祠)·월정서원·경렬사·귀래정(歸來亭)·효사재(孝思齋), 영평리의 만향정(晩香亭)·호남사(湖南祠)·경현서원, 계림리의 영묘재(永墓齋)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금동(錦洞)·장동(長洞)·학산(鶴山)·도산(道山)·유곡(柳谷)·계림(桂林)·안산(安山)·용산(龍山)·구정(九亭)·영평(永平)·금안(金安)·오정(五亭)·양천(良川) 등 13개 리가 있다.

  1. 다도면(茶道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73.14㎢, 인구 2,22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동리이다. 본래 남평군의 지역으로서 도천면(道川面)이라 하여 궁원(弓院)·규동(閨洞)·취송(翠松) 등 2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소면(茶所面)의 척동(尺洞)·진동(陳洞)·도롱(都弄) 등 25개 리와 저포면(猪浦面)의 상촌(上村)·고마(叩馬), 등포면(等浦面)의 당촌(塘村) 일부, 능주군 호암면(虎巖面) 일부지역을 병합해 다소와 도천의 이름을 따서 다도면이라 하고 12개 리로 개편하였다.

1971년 다도출장소가 설치되어 방산·마산·덕림·도동의 4개 리를 관할하였다. 풍악산·국사봉(國師峰, 440m)·각시봉(261m) 등이 솟아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구릉성 산지가 많으며, 평야가 적다. 대초천 유역에 비옥한 평야가 있었으나, 1976년 판촌리에 대초 댐이 건설됨으로써 대초·궁원 등지의 농경지와 취락들이 수몰되었다. 이에 따라 평야는 송학천과 은사천 유역에 소규모로 분포하고 있을 뿐이다.

논밭이 차지하는 비율도 낮고 밭이 논보다 더 많으며 인구도 적다. 따라서 산업에 있어 농경의 비중이 작으며, 참깨·고추 등의 생산이 많다. 특산물로는 취나물·대봉감·다도녹차 등이 이 있다. 양잠업이 활발했으나 최근에 크게 감소하는 추세이다. 암정리에 비자나무군락이 자생하고 있어 비자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면의 일부지역을 국도가 통과하고 지방도도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암정리 운흥사(雲興寺)의 부도군(浮屠群)·석장승·석불, 마산리 불회사(佛會寺) 대웅전(大雄殿)·석장승과 백제고분, 풍산리의 계은정(溪隱亭)·영호정(永護亭)·모남정(慕南亭)·귀래정(歸來亭)·홍기웅가옥·홍기헌가옥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분교 1개 교가 있다.

신동(新洞)·판촌(板村)·송학(松鶴)·풍산(楓山)·덕동(德洞)·궁원(弓院)·방산(芳山)·마산(馬山)·암정(巖亭)·덕림(德林)·도동(都洞) 등 11개 리가 있다.

  1. 다시면(多侍面)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6.70㎢, 인구 4,18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월태리이다. 본래 나주군의 지역으로서 고려 때의 수다소(水多所)가 조선 때 수다면(水多面)이 되어 월곡(月谷)·동촌(東村)·반계(半溪) 등 2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죽포면(竹圃面)의 신기(新基)·죽지(竹池)·산두(山頭) 등 17개 리와 시랑면(侍郞面)의 동강(東江)·사직(社稷) 등 12개 리, 거평면(居平面)의 평산리(平山里) 일부, 남평군 욱곡면(郁曲面)의 방축리 일부를 병합해 수다와 시랑의 이름을 따서 다시면이라 하고 12개 리로 개편하였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평면의 청정리·운봉리·신광리가 편입되어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북부에 백용산, 북동부에 신걸산이 솟아 있어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였다. 남동쪽 거마산(112m)에 이르러 고도가 낮아지며 서부에도 청림산(187m) 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남부에는 영산강이 흐르고 문평천 유역에 넓은 다시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농토가 비옥하고 수리가 좋아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산업은 쌀생산의 주곡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배·복숭아 등의 과일과 보리·수박·무·양파·고추·참깨 등이 재배된다. 예전에 보광골이라 불리던 보덕(寶德)마을에서 재배된 열무는 ‘보광골 열무’라 하여 목화밭이나 콩밭에 간작으로 심었다. 다른 지역의 열무와는 다르게 김치를 담으면 잘 시지 않고 맛이 좋았다.

특산물이던 보광골 열무는 최근 거의 심지 않고 있다. 한때 특산물로 명성을 날리던 구진포의 장어도 지금은 생산량이 적어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또, 옛날에는 혼수감에 물들이던 ‘쪽물감’ 생산지로 가흥리 일대가 유명했으나, 지금은 각종 화공염료의 발달로 몇 세대만이 맥을 잇고 있다.

도로는 광주∼목포 간의 국도가 통과하고 호남선 철도가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가흥리에 신석기시대유적과 무숙사(武肅祠)·최희량장군신도비, 동당리에 석곶정(石串亭)·모인재(慕忍齋), 회진리 사직마을에 백제시대 토성인 회진성(會津城), 문동리에 송촌사(松村祠), 복암리에 고분 4기, 동곡리에 고분군·임란첩보서목, 송촌리에 영사재(永思齋), 회진리에 매곡재(梅谷齋)·영모정, 죽산리에 장춘정(藏春亭), 영동리에 무열사(武烈祠)·보산사(寶山祠)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샛골나이 노진남고와 쪽염색장 정관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고, 나주대학이 있다.

월태(月台)·영동(永洞)·가운(佳雲)·회진(會津)·복암(伏巖)·가흥(佳興)·신석(新石)·죽산(竹山)·문동(文洞)·동당(東堂)·송촌(松村)·동곡(東谷)·운봉(雲蜂)·신광(新光)·청정(淸井) 등 15개 리가 있다.

  1. 동강면(洞江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89㎢, 인구 3,04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동리이다. 본래 나주군 지역으로서 영산강이 구부러져 있으므로 곡강면(曲江面)이라 하여 회룡(回龍)·마현(馬峴)·운흥(雲興) 등 2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동면(豆洞面)의 천동(泉洞)·진상(辰上)·진서(辰西) 등 25개 리를 병합해 두동과 곡강의 이름을 따서 동강면이라 하고 11개 리로 개편하였다.

백연산·성산·옥룡산의 삼대산(三大山)이 있고, 면의 중앙에 남북으로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삼면이 영산강에 둘러싸여 반도 형태를 이룬다. 영산강에 접한 북서부의 곡강평야와 남해안에 접한 남동부의 진천평야 등 광활한 옥토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오이·고추 등의 원예농업도 근년에 활발하다. 참깨·마늘·잎담배 등도 생산되며, 배를 비롯한 과일도 재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삼 재배도 시작되었다. 영산강을 끼고 있어서 몽탄의 숭어·장어·운저리 등이 잡혔으나 영산강 하구언 준공으로 지금은 어획되지 않고 있다. 특히, 몽탄강에서 잡은 숭어의 어란은 특산물로 명성을 날렸으나 지금은 그 이름만 남아 있다.

전라남도 도청이 인근으로 이전해 와 교통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삼면이 강에 접하고 있어 나루터를 이용하는 북서쪽의 교통은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월량리 신양·본촌마을 일대에 백제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분 5기와 일왕사(一王寺), 장동리에 나주장동리고분, 양지리에 경모재(景慕齋), 옥정리에 용운사(龍雲寺), 운산리에 원모재(遠慕齋), 인동리에 영목재(永睦齋)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인동(仁洞)·월량(月良)·진천(辰泉)·대전(大田)·장동(長洞)·옥정(玉亭)·곡천(曲川)·대지(大池)·월송(月松)·양지(良池)·운산(雲山) 등 11개 리가 있다.

  1. 문평면(文平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99㎢, 인구 2,21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안곡리이다. 본래 나주군 지역으로서 거평부곡(居平部曲)이었고, 조선시대에 거평면이 되어 남산(南山)·평산(平山)·고호(古湖) 등 2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문면(用文面)의 본촌(本村)·청계(淸溪) 등 15개 리와 아계면(芽界面)의 백룡(白龍)·복룡(伏龍) 등 18개 리, 도림면(道林面)의 방동(方洞)·신량(新良) 등 4개 리, 시랑면의 문암동(文巖洞) 일부와 목포부(木浦府) 금동면(金洞面)의 장동(壯洞)·중사지(中沙地)·양산(陽山)·금곡(金谷) 일부, 함평군 식지면(食知面)의 은구리(殷九里) 일부, 평릉면(平陵面)의 죽림리(竹林里) 일부를 거평면과 병합해 용문과 거평의 이름을 따서 문평면이라 하고 15개 리로 개편하였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청정리·운봉리·신광리가 다시면에 편입되어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면의 서남부에는 산호평야가 펼쳐져 있으나 비교적 산지가 많아 동부는 금성산·옥산, 북쪽은 국사봉, 남쪽은 신걸산 등의 산지가 발달해 있다. 고막천(古幕川)과 문평천 등 하천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시설원예를 이용해 각종 소채류를 재배하며, 구릉지에서는 참깨 등 특용작물과 과일을 생산하고 있다. 학교리 방동마을에서는 잠업이 활발해 농가의 주소득원이 되고 있다. 중소기업의 육성의 일환으로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축협(畜協) 나주배합사료공장 등이 가동중이다.

도로는 광주∼목포 간의 국도와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고, 고막원역(古幕院驛)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오룡리의 나대용(羅大用) 생가 및 묘소와 봉강사(鳳岡祠), 북동리·학동리의 선돌, 동원리의 송재사(松齋祠)를 비롯해 사·재 20여 개소가 있다. 무형문화재로 쪽염색장 윤병운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안곡(安谷)·송산(松山)·북동(北洞)·동원(東院)·대도(大道)·계로(桂老)·학동(鶴洞)·학교(學橋)·국동(國洞)·옥당(玉堂)·산호(山湖)·오룡(五龍) 등 12개 리가 있다.

  1. 반남면(潘南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35㎢, 인구 1,74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흥덕리이다. 본래 반남현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반남면이 되어 송내(松內)·신정(申丁)·청룡(靑龍) 등 2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공수면(公水面)의 용연(龍淵)·흥복(興福) 일부와 영암군 북이종면(北二從面) 수장(水長)·덕림(德林) 일부, 북이시면(北二始面)의 방두리(芳頭里) 일부, 종남면(從南面)의 갈마리 일부를 병합해 7개 리로 개편하였다.

중앙에 자미산(紫微山)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구릉지와 평지가 발달되어 있다. 삼포강이 동남쪽에서 북류하다가 대안리를 질러 서류하며, 유역에 비옥한 반남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해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의 곡류와 상추·고추·무·생강·딸기·토마토 등 소채류, 그리고 과일 등이다. 또, 포도단지가 대규모로 조성되어 그 생산량이 많다. 교통은 두 개의 도로가 면을 교차하여 가로지르고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신촌리의 고분군·반계정(潘溪亭)·반남서원(潘南書院), 흥덕리의 자미정(紫微亭)·상로재(霜露齋)·석실분, 청송리의 영사재(永思齋), 대안리의 고분군·자미산성, 덕산리의 고분군, 석천리의 석천사(石泉寺)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흥덕(興德)·덕산(德山)·석천(石川)·성계(聖溪)·신촌(新村)·대안(大安)·청송(靑松) 등 7개 리가 있다.

  1. 봉황면(鳳凰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9.96㎢, 인구 4,94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죽석리이다. 본래 남평군의 지역으로 대실(竹石)의 이름을 따서 대실면 또는 죽곡면이라 하여 분동(粉洞)·와우(臥牛)·본죽(本竹) 등 2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욱곡면(郁谷面)의 방동(方洞)·장산(長山)·탑동(塔洞) 등 34개 리와 덕곡면(德谷面)의 송촌(松村)·문현(門峴) 등 11개 리, 지죽면(枝竹面)의 신덕(申德)·봉동(奉洞) 등 4개 리를 병합해 봉황산(鳳凰山)의 이름을 따서 봉황면이라 하고 18개 리로 개편하였다.

남쪽에 용제산·덕룡산 등이 산지를 이루고 중부·북부 쪽으로 낮아져 봉황산(54m) 등 저산성산지로 변하여 북서부에 이르러서 구릉지가 전개된다. 만봉천(萬峰川)과 용전천(龍田川)이 각각 북서류하면서 유역에 죽석평야(竹石平野)·봉황평야를 형성하여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참깨·무·배추·땅콩·마늘 등이고, 목단·작약·담배 등 특용작물의 생산도 활발하다. 특히, 수박·고추가 원예작물로 재배되어 봉황면의 특산물로 생산된다. 배도 특산물로 재배되며 비육우가 사육되고 있다. 여러 개의 지방도로가 교차하고 있어 인접 지역으로의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철천리의 용강사(龍剛祠)·칠불석상·석불입상, 죽석리의 고분·불상·현충사(顯忠祠), 만봉리에 석조여래입상, 와우리의 집성사(集成祠), 운곡리의 운곡정(雲谷亭), 철전리의 만호정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죽석(竹石)·철천(鐵川)·각동(閣洞)·송현(松峴)·장성(長盛)·유곡(柳谷)·옥산(玉山)·용전(龍田)·와우(臥牛)·황룡(黃龍)·신동(新洞)·욱곡(郁谷)·오림(烏林)·운곡(雲谷)·덕림(德林)·용곡(龍谷)·만봉(萬峰)·덕곡(德谷) 등 18개 리가 있다.

  1. 산포면(山浦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0.45㎢, 인구 4,02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매성리이다. 본래 남평군의 지역으로서 두산면(頭山面)이라 하여 구등(溝嶝)·정자(亭子)·매화(梅花)·쌍산(雙山)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등포면의 원옥(元玉)·산제(山齊) 등 12개 리와 어천면의 상야(上夜)·원동(元洞)·월정(月汀) 일부, 군내면의 석교리(石橋里)·방축리(防築里) 일부, 광주군 대지면 승촌 및 양촌·판촌리 일부를 병합해 두산과 등포의 이름을 따서 산포면이라 하여 9개 리로 개편하였다.

동남쪽 식산(286m)를 제외하고는 구릉지와 평야가 많다. 북쪽에 지석강이 흐르고 있으며 산포천이 지석강에 합류한다. 이 두 강의 유역에 산포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수리(水利)가 좋아 농업·고등원예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무·배추·수박 등이며, 원예작물과 과일의 생산도 활발하다. 특히, 원예단지에서 호박·오이·상치·고추 등이 시설원예로 재배되어 사계절 생산되고 있다. 광업은 호남광산에서 고령토를 생산하고 있다.

도로는 국도 1호선인 광주∼목포간의 고속화도로가 평야 중심부를 통과하고 지방도와 군도가 서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산제리의 선돌·풍산사(楓山祠)·부조사, 신도리의 팔충사(八忠祠)·모충재(慕忠齋), 내기리의 영모재(永慕齋), 화지리의 삼강문(三綱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가 있다.

매성(梅城)·신도(新道)·송림(松林)·화지(花池)·산제(山霽)·등수(等樹)·등정(嶝亭)·내기(內基)·덕례(德禮) 등 9개 리가 있다.

  1. 세지면(細枝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0.02㎢, 인구 3,28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봉리이다. 본래 나주군의 지역으로서 지죽면(枝竹面)이라 하여 삼미(三美)·상원(上元)·개로(介老) 등 3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세화면(細花面)의 도두(島頭)·벽류(碧流)·산계(山溪) 등 25개 리와 욱곡면의 구천리(九川里)를 병합해 세화와 지죽의 이름을 따서 세지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하였다.

동남부에 산지가 있으나 그 밖의 지역은 구릉지와 평지가 발달해 있다. 면의 중앙을 금천(錦川)이 통과하며 만봉천(萬峰川)이 오봉리에서 합류, 북류하면서 왕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금천과 만봉천 유역에는 넓은 나주평야가 전개되어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무·배추·수박 등의 원예농업과 배·사과·자두·감·복숭아 등 과일의 생산도 활발하다. 또한, 논과 방죽에서 서식하는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젓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토하는 예전과 같이 자연산이 적으나 양식으로 쉽게 구할 수 있어 농가의 소득에 도움을 준다.

도로는 광주∼영암 간의 4차선 국도가 통과하며 지방도와 군도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성산리와 벽산리의 선돌, 송제리의 오층석탑, 교산리·벽산리·송제리 고분, 벽산리의 영사재(永思齋)·벽류정(碧流亭), 대산리의 오봉사(五峰祠)·여재각(如在閣)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오봉(五峰)·대산(大山)·내정(內亭)·동곡(東谷)·죽동(竹洞)·송제(松堤)·교산(橋山)·벽산(碧山)·성산(城山) 등 9개 리가 있다.

  1. 왕곡면(旺谷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0.12㎢, 인구 3,46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산리이다. 본래 나주군의 지역으로서 전왕면이라 하여 구사(九巳)·동산(東山)·덕곡(德谷)·사동(沙洞) 등 3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산면의 용교·화곡 등 15개 리, 욱곡면의 월봉·옥동 등 15개 리, 상곡면의 용련·동령·사동 일부, 지량면의 대박리 일부를 병합해 전왕과 욱곡의 이름을 따서 왕곡면이라 하고 12개 리로 개편하였다.

서쪽의 공산면계의 산지를 제외하고는 구릉지와 평지로 되어 있다. 논과 밭의 비율이 2:1이다. 주요 농작물은 쌀·보리와 원예작물, 배·복숭아·포도 등의 과일, 인초·유채·생강 등의 특용작물이다. 특히, 인초는 나주 전체 생산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장산리에 인초를 가공해서 돗자리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광물로는 금·은을 산출하며, 신포리에 세봉(世鳳)광업소가 있다.

면내에 각 방면의 도로가 통하고 나주 시내와 인접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신포리의 봉련사(鳳連寺)·추원재(追遠齋)·두봉사(斗峰祠)·경앙당(景仰堂)·지석묘, 송죽리의 금사정(錦社亭)·사모재(思慕齋)·김효병가옥, 화정리의 영모재, 옥곡리의 모선당(慕先堂) 등이 있다. 장산리에는 공산면토지사건으로 유명한 항일농민운동기념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가 있다.

덕산(德山)·본량(本良)·옥곡(玉谷)·송죽(松竹)·월천(月川)·화정(化丁)·행전(杏田)·신원(新院)·양산(良山)·장산(長山)·신가(新佳)·신포(新浦) 등 12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대동지지(大東地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與地圖書)』
『나주통계연보』(나주시,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지방행정구역연감』(한국도시행정연구소, 2003)
『한국지방자치백서』(한국언론인협회, 2002)
『내고장의 미 찾기·전남』(한국이동통신, 1995)
『나주시의 문화유적』(목포대학교박물관, 1989)
『마을유래지』(나주군, 1987)
『나주군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1985)
『전라남도지1·2·3』(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82∼1984)
『내고장전통가꾸기』(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2)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2)
『나주군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0)
나주시(www.naju.jeonnam.kr|www.naju.go.kr)
나주교육청(www.najued.or.kr)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