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적십자회담 ()

남북 적십자회담 / 9차, 평양
남북 적십자회담 / 9차, 평양
정치
사건
1000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재결합을 주선해 주기 위하여 남 · 북적십자사 간에 열린 회담.
정의
1000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재결합을 주선해 주기 위하여 남 · 북적십자사 간에 열린 회담.
개설

1971년 8월 12일 최두선(崔斗善) 대한적십자사(약칭: 한적) 총재의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 제의로 성립되었다.

남북적십자 쌍방은 이산가족들의 ① 생사 소재 확인 및 통보, ② 상봉 및 방문, ③ 서신 거래, ④ 가족 재결합, ⑤ 기타 인도문제 해결 등 5개항을 의제로 삼아 서울과 평양에서 교대로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회담은 북한적십자회(약칭: 북적)측의 정치문제 제기로 말미암아 아무런 실질적 해결도 보지 못했으며, 그 동안 수많은 회담 중단사태만을 거듭해 오고 있다.

남북적십자회담의 배경

1945년 국토 분단으로 한반도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발생 원인으로 보아 이들 이산가족의 범주에는 ①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3년 휴전까지 사이에 북한 공산 학정을 피해 월남한 실향난민 약 500만 명, 6·25전쟁 중 납북된 남한의 각계각층 인사 8만5000여 명, 전쟁중 북한국에게 끌려간 ‘의용군’ 약 44만 명 중 살아남았으면서도 귀가하지 못한 수미상의 남한 출신 청소년.

② 1945년 이래 강제 납치당한 어선 33척, 항공기 3대, 양민 470명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게 각각 한 사람씩의 가족만 있다고 해도 그 총수는 1000만 명이 훨씬 넘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7월 휴전 이후, 이들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우선 한국 정부는 휴전협정 제3조 59항에 의해 진행된 ‘실향난민 귀향협조위원회’ 회의(1953.12.∼1954.3.)를 통해, 북한지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39명을 넘겨준 대신, 남한으로 귀향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두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내국인은 한 명도 보내지 않은 채, 외국인 19명만을 넘겨주었다.

북한과의 직접 교섭에 실패한 한국 정부는 이어, 1954년부터 적십자사 국제위원회의 중개를 통한 ‘남북자 송환교섭’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교섭에서도 수많은 납북자 중 377명의 생존을 확인하는 회답만 받았을 뿐, 송환에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남북적십자회담의 성립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였다. 통칭 ‘8·15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에서 박 대통령은 남북간의 군사적 대결을 지양하고, “어느 체제가 보다 국민을 더 잘 살게 하느냐?”고 하는 ‘선의의 경쟁’을 제의하면서 ‘인도적 문제의 해결과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획기적인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8·15선언’이 있은 후 1년 만인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최두선 총재는 특별성명을 발표, “남북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고 하면서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하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소식을 전해 주며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찾기운동만이라도 우선 전개할 것”을 북한에게 제의했다.

한적의 이러한 ‘남북적십자회담’ 제의에 북측은 그 해 8월 14일, 평양방송으로 이를 수락할 뜻을 밝히고 “가족만이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자유 왕래를 실현시키자.”고 역제의해 왔다. 이에 따라 그 해 8월 20일부터 9월 16일까지 판문점에서 5차례의 파견원 접촉이 이루어지고, 이어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개회하는 데 합의하였다.

남북적십자회담의 진행

예비회담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은 1971년 9월 20일부터 1972년 8월 11일까지, 약 1년 동안 판문점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쌍방 각 5명씩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총 25회 개최되었다.

제1차 예비회담(1971.9.20.)에서는 한적 제의로 판문점 내에 ‘상설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쌍방을 연결하는 ‘직통전화’를 가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제2차 예비회담(1971.9.29.)에서는 예비회담에서 토의 해결할 의제 5개 항(본회담의 장소, 일시, 의제, 대표단 구성, 진행 절차)에 합의하였다.

제3차 예비회담(1971.10.6.)에서는 한적 제의대로 본회담 장소를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회담은 본회담의 장소가 서울과 평양으로 결정되자, 곧 초기의 순조로운 진행과는 달리 지연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제4차 예비회담(1971.10.13.)이 개최되자 북적은 갑자기 본회담 의제와 남북 왕래 절차 등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당장, 예비회담을 이 달(10월) 안으로 끝내고, 12월 10일에 본회담을 개최하자.”는 엉뚱한 주장을 하였다.

한적은 이에 대해 “본회담 개최 일자는 모든 준비가 다 끝나가는 예비회담 마지막에 토의 해결하자.”고 했으나 북적은 이를 거부, 제5차 예비회담(1971.10.20.)에서도 역시 같은 주장만 반복하였다.

제6차 예비회담(1971.10.27.)에서는 타협안으로 한적이 “제1차 본회담을 예비회담이 끝나는 날로부터 1개월 내에 개최한다.”고 제의, 겨우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 다음 ‘본회담 의제문제’에 대한 토의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더 큰 난관에 부딪쳤다. ‘본회담 의제문제’ 토의에서 가장 큰 난제는 ‘친우’ 문제와 ‘자유 왕래’ 문제였다. 이 두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제6차 예비회담부터 제20차 예비회담까지 무려 15차의 공식회담과 13차의 막후접촉(의제 문안정리 실무회의)을 거쳐야 했으며, 전체 예비회담 기간의 2/3에 해당하는 8개월을 소비해야만 하였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의 총수는 친척·친우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1000만 명이 넘는다. 정부 도움 없이 적십자의 힘만으로 이들을 모두 찾아 주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북적은 이들 이산가족들을 찾아 주기도 전에 친척과 친우들을 더 찾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 심지어는 그들의 ‘자유 왕래’까지 요구하였다.

북적이 요구하는 ‘자유 왕래’란, 적십자의 중개 없이 당사자들이 직접 남북을 왕래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대상자들을 찾다 다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우의 자유 왕래’를 요구하는 북적의 의도가 이산가족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훈련된 공작원을 대량으로 남파하여 남한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참고: 북적은 제3차 본회담에서 이산가족들을 찾아 주기 전에 수만 명의 ‘요해해설인원(了解解說人員)’부터 먼저 파견할 것을 주장, 그들의 인신 불구속과 휴대품 불가침 보장을 요구하였다].

국제 적십자활동의 기본 원칙은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동서 냉전과 이념 대립이 격렬한 지역에서 사람을 찾아 주는 심인(尋人)사업을 원만히 진행시키려면 상대방이 싫어하는 ‘정치적 행동’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친우 문제와 자유 왕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회담은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적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비공개 ‘실무회의’를 제의하고 북측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탐색하려 하였다. 이른바 ‘비밀 막후접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막후접촉에서는 쌍방의 정치적인 의도가 좀더 솔직한 형태로 표현되고 전달되었다.

상당 기간 토론이 진행된 후, 쌍방은 적십자회담과는 다른 정치적 대화 통로를 별도로 가질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북측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적십자회담에 나왔던 것이며, 남측은 친우나 자유 왕래 문제같은 북측의 정치적 요구를 따로 떼어내기 위해 대화 통로를 따로 만들려던 것이 서로 합치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남측에서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측에서는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7·4남북공동성명까지 발표되었다. 남북관계가 이처럼 크게 발전하자 적십자 예비회담도 급진전하였다.

제20차 예비회담(1972.6.16.)에서는 난제였던 5개 항의 ‘본회담 의제’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고, 제21차 예비회담(1972.7.10.)부터 제23차 예비회담(1972.7.19.)까지는 ‘본회담 대표단 구성’ 문제가 해결되었다. 제24차 예비회담(1972.7.26.)과 제25차 예비회담(1972.8.11.)에서는 ‘본회담 진행 절차 및 본회담 개최 일자’ 문제에 합의, 예비회담을 모두 마무리짓게 되었다.

본회담 개최 준비를 위한 그 밖의 ‘실무회의’로는 ‘남북전신전화 가설 및 운용에 관한 통신기술 실무회의’와 ‘남북직통전화 운용 절차에 관한 남북적십자 연락관회의’가 별도로 진행되어, 실무기술상의 준비들도 모두 마무리되었다.

본회담

국토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 이루어진 남북대화라는 벅찬 감격과 기대 속에서 본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모두 7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본회담(1972.8.29∼9.2., 4박 5일, 평양)과 제2차 본회담(1972.9.12.∼16., 4박 5일, 서울)은 분단 이후 첫 남북 왕래라는 벅찬 감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축제 분위기 속에서 행사 위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남북간에 기본적인 인식 차이가 있다는 것이 차츰 드러났다.

한적은 될 수 있는 대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회담을 진행하고 토의내용도 정치성을 배제한 가운데 ‘가족찾기사업’이 실질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려 하였다. 그러나 북적은 ‘윤기복의 축하연설(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주체사상과 김일성만을 찬양)’ 때문에 서울 시민의 분노를 샀던 것처럼, 처음부터 회담을 정치적인 방향으로 끌고가려 했으며, 특히 북측 대표단 단장까지도 ‘통일은 최고의 인도주의’ 운운하면서 ‘외세 배격’을 강조하고 정치 선전을 본격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치투쟁을 본격화하려는 북적의 태도는 제3차 본회담(1972.10.23.∼26., 4박 5일, 평양)부터 더욱 노골화되었다. 원래 제3차 본회담에서는 의제 제1항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의 주소와 생사를 알아내어 알리는 문제’부터 토의, 해결할 참이었다.

한적은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이미 성공의 경험이 많은 ‘국제적십자 활동’의 관례을 원용, ‘적십자 주관하에 심인의뢰서(尋人依賴書)와 심인회보서(尋人回報書)를 작성, 교환하는 방식’으로 추진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적은 이에는 관심조차 표시하지 않고, ‘남측의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부터 먼저 개선해야 한다.’는 이른바 ‘선결조선’의 이행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뿐 아니라 북적은 “이산가족찾기운동을 선전할 수만 명의 ‘요해요설인원’을 먼저 상대방 지역 이동(里洞) 단위까지 파견하자.”고 주장하였다.

북적이 말하는 이른바 ‘조건환경 개선’이란, 제6차 본회담(1973.5.8∼11., 서울)에서 남한의 ① 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② 반공기관 및 반공단체 해산, ③ 반공교육 및 반공정책 중지 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요해해설인원’에 대해서는 ① 언론·출판·집회 등 활동의 자유와, ② 휴대품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할 것을 더 요구하였다.

북적의 이러한 주장은 결코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한 공산화를 위한 정치 공작원을 대량 남파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북적의 주장을 날이 갈수록 더 강경해지고 회담은 점점 좌초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한적은 회담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제7차 본회담(1973.7.10.∼13., 평양)에서 시범사업으로 ‘추석성묘 방문단’을 상호 교환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적은 이를 ‘지엽적인 문제’라면서 거절하고, 본질 문제인 ‘선결조건’부터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돌파구를 못찾아 진전이 없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은 결국, 1973년 8월 28일 북한의 전면적인 대화 중단 선언과 함께 단절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 재개 노력

대표회의

북한의 대화 중단 선언과 함께 남북조절위원회와 남북적십자회담 등 두 갈래로 진행되어 온 남북대화는 모두 중단되었다. 한적은 중단된 본회담 재개를 위해 1973년 11월 15일 ‘전화통지문’으로, “제8차 본회담의 연내 개최를 희망한다.”고 하면서 “세부 일정 협의를 위해 연락책임자회의를 갖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11월 21일 판문점에서 ‘연락책임자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한적은 “제6차 본회담을 1973년 12월 19일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했으나, 북적은 본회담 재개 문제에는 응답조차 하지 않고 “차기 회의부터는 본회담 대표 1명씩이 나와서 회담하자.”고 역제의해 왔다. 북적의 이 제의에 한적이 동의, 남북간에는 본회담 중단 이후 4개월 반 만에 ‘대표회의’가 새로 성립되었다.

이 ‘대표회의’에는 한적에서 김달술 대표, 북적에서 조명일 대표가 각각 참석한 가운데 1973년 11월 28일부터 1974년 5월 29일까지 만 6개월 동안 7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한적은 ‘무조건 본회담 재개’를 촉구하고 서울에서 개최할 회담 일자를 두 번(1973년 12월 19일과 1974년 4월 10일)이나 제시하였다.

그러나 북적은 본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① 한적 대표단을 개편할 것, ② 반공법 위반자를 석방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제8차 본회담을 서울 대신 평양에서 개최하거나, 아니면 쌍방 교체 수석대표를 책임자로 하는 ‘본회담·예비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주장하였다.

북적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서울평양을 왕래하는 본회담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판문점에서 회담하려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그만둬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북한은 당초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평양을 왕래하면 자기들에게 매우 유리한 정세가 조성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6∼7차에 걸쳐 서울·평양을 실제로 왕래해 본 결과, 오히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점들이 더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한적은 북측의 이런 난처한 입장을 감안하여 타협안으로 판문점 ‘임시회의’를 개최하자고 수정 제의, 토론 끝에 ‘남북적십자 실무회의’를 판문점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

실무회의

① 본회담 의제의 예비적 토의와, ② 본회담 재개 문제를 토의·해결하기 위한 남북적십자 실무회의는 쌍방 교체 수석대표를 중심으로 3명씩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판문점에서, 1974년 7월 10일부터 1977년 12월 9일까지 3년여 동안 모두 25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한적은 이 회의에서 제8차 본회담을 이미 합의한 대로 조속히 서울에서 개최하는 데 동의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만약 북측이 이산가족 문제를 한꺼번에 모두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우선 60세 이상의 노부모들부터 시범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해 나가자고 제의하였다.

‘노부모사업’은 우선 본회담 의제의 순서에 따라 60세 이상 되는 이산가족에 한해서 생사 소재 확인, 상봉, 방문 등을 실현시키자는 것이며, 이를 위해 판문점에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를 설치하고, 설날 또는 추석명절을 전후해서 15일간 정도로 ‘성묘방문’ 또는 ‘고향방문’을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북적은 제8차 본회담의 개최나 노부모사업 등에는 관심조차 표시하지 않았다. 북적은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이 먼저 개선되어야 한다.”는 이전 주장만을 되풀이하면서 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반공단체 해산, 반공정책 철폐, 군사도발 중지, 정당사회단체들의 적십자회담 참가 등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하자는 등 엉뚱한 주장만을 되풀이하였다.

적십자의 영역을 벗어나는 이러한 북적 주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심지어는 6·23선언 철회, 주한 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면서 “이산가족 문제는 통일이 되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말까지 하였다.

북적은 1978년 3월 20일로 예정된 제26차 회의를 하루 앞둔 3월 19일, 평양방송을 통해서 ‘회담의 무기 연기’를 일방적으로 선언, 실무회의마저 중단시키고 말았다.

수재물자 인도 인수

한적은 판문점 실무회의가 중단된 이후에도 꾸준한 대화 재개 노력을 경주하였다. 1978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제의 제8주년에 즈음한 한적 총재의 대북 성명, 1980년 9월 회담 재개 제의, 1981년 9월의 남북적십자 총재 접촉 제의, 1982년 8월의 대북 성명, 1983년 8월 한적 총재의 회담재개촉구 담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북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며, 1983년 10월에는 ‘버마 폭탄테러’사건까지 일으켜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다가 북한은 1984년 9월 8일 평양방송으로 갑자기 남한 수해와 관련하여 쌀 5만 석, 천 50만m, 시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한적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북한이 버마사건으로 자초한 국제적 비난과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미 수해 복구가 다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남측은 1986년 아시아게임, 1988년 올림픽경기 등의 대회를 원만하게 치르려면 남북관계를 호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고려, 북측 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정하고 1984년 9월 18일 판문점에서 실무 접촉을 갖는 데 동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적은 ‘1984년 10월 중 서울에서 제8차 본회담이 개최될 것을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북적도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표시하여 ‘본회담 재개를 위한 예비접촉’이 열리게 되었다.

1984년 11월 20일 판문점에서 열린 예비접촉에서 쌍방은 ‘제8차 본회담은 서울에서, 제9차 본회담은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회담 개최 일자는 추후 전화통지문으로 협의키로 하였다.

남북적십자 본회담의 재개

제8차 본회담(1985.5.27.∼30., 서울)이 회담 중단 12년 만에 개최되었다. 한적은 이 회담에서 의제 5개 항을 해결하기 위한 종합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한편, 이미 합의한 남북적십자 공동위원회와 판문점공동사업소의 조속한 발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우선, 시범사업으로 8월 15일을 기해 일정 규모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상호 교환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적은 이에 대해 “이미 합의한 의제 5개 항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으로 해결하고, 그 중핵사업으로 자유 왕래를 실현시키자.”라고 주장하였다.

북적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남북이산가족찾기 사업의 기본틀로 되어 있는 ‘본회담 의제 5개 항’을 모두 백지화하고, 그 대신 자유 왕래를 새로운 의제로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자유 왕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나 그것은 진정으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북적은 또한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실현하기보다는 축하공연에 더 큰 관심을 표시하고, 1985년 8월 15일을 기해 ‘100명 정도의 예술공연단 교환’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회담은 이 때문에 다시 경직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산가족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려는 일념으로 한적이 다시금 새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본회담 의제 5개 항은 순서에 따라 마땅히 제1항부터 하나하나 토의·해결해야 하나, 북적 주장을 고려하여 ‘의제의 일괄 토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② 북적이 다시 정치적인 ‘조건환경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이산가족 문제의 한 해결방법으로써 자유 왕래를 채택할 수도 있다. ③ 1985년 광복절을 기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을 동시에 상호 교환한다 등이었다.

쌍방은 이 타협안에 대체적인 의견 일치를 보고, 별도의 ‘실무대표 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의제의 일괄 토의와 자유 왕래 채택이라는 제8차 본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적은 제9차 본회담(1985.8.26.∼29., 평양)에서 ① 의제 5개 항의 사업 실시에 관한 합의서, ② 남북적십자 공동위원회 및 판문점공동사업소의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 ③ 자유 왕래 절차에 관한 합의서 등 3개 합의서 안을 종합적으로 제안하였다.

그러나 북적은 이 회담에서 구체적인 사업 실시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의제의 일괄 토의와 자유 왕래를 강조하는 이전의 원칙론만을 되풀이 주장하였다.

또한 북적은 제2일 회의에서 ‘모란봉 경기장’사건을 거론하면서 회담 의제는 토의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다. ‘모란봉 경기장사건’이란 그 전날, 북측이 10여 만 관중을 모란봉 경기장에 동원, 김일성 우상화 매스게임을 벌인 데 대하여 한적 대표단이 관람을 거부하고 퇴장했던 사건을 말한다. 북측은 이 퇴장사건을 두고 자기들을 모욕한 것이라고 사과를 요구하면서 회의 진행을 거부하였다.

한적은 이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인내성 있는 태도를 유지, 제10차 본회담(1985.12.2.∼5., 서울)에서 지난 회담 때 제안한 <종합적인 합의서>안의 취지와 내용을 다시 설명한 후 적십자 회담을 마무리짓고, 조속히 사업 실천단계에 들어갈 것을 촉구하였다.

적십자회담이 시작된 지 1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의제 문제에 대해 타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더 이상 사업 실천을 뒤로 미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적은 「자유왕래 합의서」안과 「자유왕래 이외의 기타방도에 관한 합의서」안이라는 엉뚱한 제안을 새로 내놓았다. 이것은 쌍방이 이미 합의한 대로 「의제 5개항」을 기준으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업대상자인 이산가족들을 자유왕래자와 비자유왕래자라는 엉뚱한 기준으로 구분하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본말이 전도된 억지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북적이 이처럼, 목적과 수단을 전도하면서까지 자유 왕래에 집착한 제안을 내놓은 것은 언젠가는 다시 조건환경론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이산가족찾기 사업을 교착시키거나 중단시키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적은 또한, 서울∼평양 왕래회담에서 자동차 편을 이용하던 이전의 관례를 깨뜨리고, 갑자기 항공 편을 이용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갑작스러운 모란봉사건의 제기, 본말을 전도한 의제 해결방안의 제시, 엉뚱한 비행기 이용 주장 등으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북측은 점차 회담 진행을 가로막아 교착상태로 몰고가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개최된 제10차 본회담에서 남북 쌍방은 제11차 본회담을 1986년 2월 26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정식 합의하였다. 그러나 북측은 1986년 초에 들어서자 곧 팀스피리트 훈련을 핑계삼아 적십자회담을 비롯하여 경제회담, 국회회담 예비접촉 등 모든 회담을 무기 연기한다고 발표하고, 12년 만에 재개된 남북대화를 또다시 모두 중단시켰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5월~6월간에 다양한 분야의 회담이 진행되었고, 남북적십자회담 역시 6월에 진행되어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제8차 본회담의 합의에 따라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서울·평양 교환방문이 이루어졌다.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3박 4일로 이루어진 이 교환방문단은 쌍방 적십자 총재 인솔하에 각각 151명씩으로 구성되었다. 평양 방문 한적측 고향방문단은 이산가족 50명 중 35명이 41명의 북한 거주 가족·친척들과 상봉하였고, 서울 방문 북적측 고향방문단은 50명 중 30명이 51명과 상봉하였다.

한편, 서울예술단은 평양대극장에서, 평양예술단은 서울국립극장에서 9월 22일과 23일, 각각 2회씩의 공연을 가졌다. 남북이산가족들의 첫 교환방문은 그 규모나 방문지역에서 여러 가지 제한이 있었으며, 추진과정에도 교섭 및 준비면에서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매우 큰 것이었다. 남북간에는 과거에는 회담 대표단과 보도진만 왕래가 있었으나, 이산가족이 직접 왕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를 토대로 남북간 인적 왕래의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편, 예술공연단의 교환공연도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오랜 단절 끝에 이루어진 예술단의 교환공연은 남북 문화예술의 그 동안의 변화를 비교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문제점 발굴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상호 교환은 1985년 7월 15일부터 8월 22일까지 3차례에 걸친 쌍방 실무 대표간의 접촉으로 타결되었다. 총 20개 항의 합의사항이 이 실무 대표 접촉에서 타결되자 쌍방은 9월 8일부터 20일 사이에 또다시 18회에 걸친 연락 대표 접촉을 갖고 합의사항 이행을 위한 실무문제들을 별도로 해결하였다.

이산가족찾기운동의 현황

이산가족찾기운동은 우방국만이 아니라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도 이루어지는 순수한 인도주의 문제이다. 대한적십자사는 남북이 같은 동족으로써, 서로 전쟁을 치른 사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사상과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 반드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북측에게 회담 재개를 촉구하고, 국제적십자 기구와 활발한 접촉을 벌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한국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도적인 과제일 뿐 아니라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북적십자회담을 지원하고,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비롯한 공산권 및 해외 거주 동포들의 모국 방문 실현에 매우 열성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북한의 거부로 남북 정부간 대화가 그 동안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남북 고위급회담이 성립되자 1992년 2월에는 쌍방 총리들 사이에 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이 합의서 제18조에는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서신 거래, 상봉 및 방문을 실시하고 자유 의사에 의한 재결합을 실현하며,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에 과한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남북 두 정부가 직접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국측에서 “이제 쌍방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 결과 기본합의서의 한 조항으로 채택된 것이다.

한편, 적십자와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찾기 사업은 그 동안 별로 구체적인 진전이 없었다. 그러자 최근에는 이산가족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가족을 찾는 일에 직접 나서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남한에 거주하는 북한 출신 이산가족들은 1982년 8월 12일을 이산가족의 날로 제정, 같은 해 12월 20일에는 ‘1000만 이산가족 재회 추진위원회’(사단법인)를 결성하였다.

또한 남한에서도 ‘남북 이산가족찾기운동’ 이외에 ‘해외 이산가족찾기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이러한 단체활동 이외에 중국을 통한 ‘개별적인 가족찾기활동’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한국 정부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방북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개별적인 가족찾기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띨 수 있도록 점차 여건이 마련되어 가고 있다(<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1990.8.1. 제정 및 지원금 대책 마련 등).

이상과 같이 남북 이산가족찾기운동은 1970년대 이후 오늘까지 여러 갈래로 발전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① 적십자를 통하는 방법, ② 정부를 통하는 방법, ③ 민간단체를 통하는 방법, ④ 개별적으로 가족을 찾는 방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4가지 방법 중 1998년 말까지 ①·②의 방법은 북한측의 거부로 사실상 가족찾기 사업을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으며, 현재는 ③·④의 비공식적인 방법만이 통용되는 실정에 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통일백서』(통일원, 1997.12.26.)
『남북대화 백서』(국토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 1988.12.26)
『남북적십자회담 회의록』(국토통일원, 1987.11.)
『남북대화사료집』(국토통일원, 1987)
『이산가족 백서』(대한적십자사, 198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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