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

노동자 파업 집회
노동자 파업 집회
사회구조
개념
노동자들의 경제적 · 사회적 지위를 안정 · 향상시키기 위한 계급운동.
정의
노동자들의 경제적 · 사회적 지위를 안정 · 향상시키기 위한 계급운동.
개설

노동자들의 상호부조적 공제노력인 동시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자본가에 대하여 고용안정·노동조건개선·임금인상·복리증진 등을 위하여 전개하는 자위적이며 대항적인 활동으로,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국가·사회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운동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생존을 유지해야 하며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임금수준·노동시간·노동강도·노동조건·재해 등과 같은 구체적인 거래조건이 자기자신의 생활과 품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정되기를 요구한다.

반면 자본가는 기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하여 생산원가의 절감을 통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노동력을 싸게 구입하고,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복리증진에 힘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노동자와 고용주의 대립관계가 일어나 노사문제가 생긴다. 고용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훨씬 불리한 노동자들은 집단적 대항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고용주도 노동력의 보존을 위하여 일정한 한도 안에서 노동운동을 인정하게 된다.

노동조합(약칭 노조) 외에도 협동조합·공제조합·정당을 통한 노동운동도 있지만, 노동조합이 가장 중추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사회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두 계급의 대립관계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과 같은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법률로써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국가의 이러한 노동관계법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실제 운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의 성격과 양상은 그 사회의 자본주의의 발전수준과 국가권력의 성격, 그리고 노동자의 의식과 투쟁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의 역사

우리 나라의 근대적인 노동운동은 개항 이후 외세의 침입에 따른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근대적 임금노동자층이 형성되면서 비롯되었다. 노동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기본요인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공업화에 따른 급속한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식민지배하의 가혹한 노동조건이었다. 더욱이 민족해방투쟁과 새로운 시대사조 및 국제노동운동의 영향은 노동운동을 한층 격화시켰다.

임금노동자의 형성과정은 전자본주의시대인 18, 19세기에 고공(雇工)·임용사공(賃用私工)·용민(傭民)·점민(店民)·장공(匠工) 등으로 불린 자생적 임금노동형태의 성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그러한 산업노동은 임금만으로 생활하지 않고, 신분적으로 고용주에 예속되어 있었다. 또한 대체로 동일장소에서 집단적으로 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임금노동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들이 근대적 임금노동자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신분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운송과 토목 부문의 막일꾼, 수공업 장인, 광부와 같은 노동자들은 계(契)·패(牌)와 같은 독점적·자위적 조직을 통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점이 많다.

즉, 전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상부상조가 가장 큰 목적이었으며, 그 대항대상도 자본가가 아닌 외부의 구직자였다. 또한 그들의 독점권·자위권도 기본적으로는 국역(國役)을 부담한 대가로 국가로부터 얻는 것이었고, 계·패 자체가 노동편제 혹은 경영조직으로도 기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과 운동은 개항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근대적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으로 전환, 발전되었다.

근대적 임금노동은 19세기 말엽 개항장에서 발생한 부두노동자와 전국 각지의 광산지대에서 형성된 광산노동자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뒤 운송·제조 부문의 순서로 각 산업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주요 산업의 노동자수는 1911년에 6만6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18년에는 2배 이상이나 되는 14만6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임금노동계급의 형성을 기반으로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노동쟁의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당현광산(堂峴鑛山)과 1901년 운산광산(雲山鑛山)에서는 채광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간 것에 반대하여 광부들이 노동을 거부하는 항쟁을 벌였고, 1898년 9월부터 1903년 12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목포항의 부두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반대하는 파업을 일으켰으며, 1901년 2월에는 경인철도회사 종업원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노동운동은 비조직적·자연발생적·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우리 나라에서의 본격적인 근대적 노동운동은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 차츰 발전하였다. 3·1운동 이전에 이미 약 30여 개의 노동회·노동조합이 있었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노동운동은 3·1운동을 통하여 경제투쟁과 더불어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19년 3월 7일의 서울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500여 명의 파업, 3월 9일 전차운전수 및 차장들의 시위적 파업, 3월 27일 직산금광 노동자들의 헌병주재소 습격, 11월 4일의 겸이포제철소(兼二浦製鐵所)의 용해공(溶解工) 250여 명의 파업 및 헌병과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1919년에는 다수의 노동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의 수적 증대와 의식수준의 고양에 따라 노동조합의 결정에 의하여 집단행동을 할 때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민족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이 깨닫게 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치부한 자본력으로 식민지에 대한 자본수출단계에 들어섰다. 이것은 일본 내의 주식회사 불입금이 1914년에 17억7000만 원에 불과하던 것이 1921년에는 25배에 가까운 80억 원에 이르렀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20년 <회사령 會社令>을 철폐하였고, 그 결과 1930년까지 18억800만 원 이상의 일본자본이 우리 나라로 들어왔다. 이러한 자본으로 1920년대에는 식민지공업이 발전하였고, 공장노동자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1920년대초에 5만6279명이던 공장노동자의 수가 1925년에는 8만375명, 1929년에는 10만명을 초과 하였다. 광산노동자는 1924년경에 1만8273명이던 것이 1929년에는 2만9484명으로 늘었고, 부두노동자는 1920년초에 1만명이던 것이 1929년에는 2만50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리하여 1928년에는 산업노동자의 총수가 18만5004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그들의 단결된 조직을 기반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은 물론 사회혁명과 민족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본격적인 근대적 노동운동의 효시는 1920년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와 노동대회(勞動大會)의 창립에서 찾을 수 있다. 박중화(朴重華) 등이 조직한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이 사회의 근본이라 선언하고, 회의 목적을 ‘자력으로 자아를 의식하는 동시에 애정으로써 상호부조하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여 공동의 공영(公榮)을 기함’이라고 정하였다.

또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동자의 교육·경제·위생의 향상이 시급하다고 보고, 그 실천대책을 지식계발·저축장려·위생지식향상·품위향상·환난구제·직업소개 등으로 파악하였다. 김광제(金光濟) 등이 조직한 노동대회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인격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두 조직은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조직이라는 점에서 우리 나라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 회장인 박중화가 체포, 투옥된 뒤 차금봉파(車今奉派)와 윤덕병파(尹德炳派)의 갈등이 있었으나, 그 해 10월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나 노동대회가 비록 전국적인 조직이지만 잡다한 개인자격의 노동자·소작인의 모임인 데 반하여, 조선노동연맹회는 노동자만으로 조직된 직업별 노동조합들과 지역적 공제회의 명칭을 가진 합동노동조합들로 결성된 노동단체들의 연합체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강령에서도 ① 오인(吾人)은 사회역사의 이화이법(理化理法)에 따라 신사회건설을 기도함, ② 오인은 공동의 힘으로 생활을 개조하기 위하여 이에 관한 지식의 계발, 기술의 진보를 기도함, ③ 오인은 현사회의 계급적 의식에 의하여 일치단결을 기도함이라고 하였다.

이는 막연하나마 식민지배하의 자본주의의 결함을 느끼고 신사회건설과 계급의식에 의한 일치단결을 강조한 것이었다.

1923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직업별 노동조합의 결성이 이루어져 노동운동단체는 양적으로 증가되고, 그 투쟁이 활발해짐에 따라 보다 효율적인 운동을 펴기 위하여 노동단체의 통합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동운동·농민운동의 통일적인 단합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통합운동의 열기로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조직되어 조선노동연맹회의 구실을 대행하게 되었다. 그 해 4월 중순 182개의 단체 대표가 모여 창립총회를 열고, 노동자·농민계급의 해방, 완전한 신사회건설, 자본가계급과의 철저한 투쟁, 노동자·농민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 등을 강령으로 선언하고, 노동문제해결을 위한 당면과업으로서 각지에 노동자단체의 조직, 이류단체(異流團體)의 파괴, 노동자계급의식의 고양, 8시간 노동제와 1일 1원의 최하임금제의 실시를 내세웠다.

그러나 동맹의 결성목적이 노동운동에 있다고 하여 사상단체에는 가입자격을 주지 않아 167개 단체만 가입되고,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를 통합하여 조직하였던 데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할 수 없어, 1925년 11월 9일 이 동맹은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일본경찰의 집회불허로 분리집회를 열지 못하고, 1927년 9월 서면결의 형식으로 분리를 마무리했다.

1920년대 전반의 노동쟁의건수는 1920년에 81건, 1921년에 36건, 1922년에 46건, 1923년에 72건, 1924년에 45건, 1925년에 55건이고, 이 시기의 대표적인 노동운동사례로 1921년 8월에 일어난 부산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각 운수관계 노동자 5,000여 명의 파업이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대규모파업으로서 15일간이나 계속되었으며 10∼15%의 임금인상에 성공하였다. 1923년 8월에는 평양양말직공조합원 1,000여 명이 임금인하를 반대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일제는 장시간노동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가축처럼 혹사하였으므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이 드높아졌고, 그에 따라 노동운동이 위협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당국은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탄압을 강화하였다. 특히 노동운동을 공산주의운동과 동일시하여 더욱 탄압하였다.

그렇지만 1926년에는 81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연차적으로 94건, 119건, 102건으로 증가하여 1930년에는 160건이나 되었다. 이 기간 중의 노동운동으로 대표적인 것은 1928년에서 1929년에 걸쳐 일어난 원산부두노동자의 총파업이다.

이 파업은 어느 파업보다 대규모적이었고 80일간이나 지속되었으며 조직이나 방법도 획기적이었다. 특히 전국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그 뒤의 반일투쟁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반면 일제는 이 총파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더욱 혹독하게 탄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920년대의 노동운동은 싹이 트는 단계에 불과하였으므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의식의 계발과 투쟁역량이 미흡하였고,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통하여 경제투쟁에 치중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뒤에 일어난 노동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소시민·지식인 출신이 많았으므로 노동자와의 실질적 연대가 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파벌투쟁을 심하게 하고 개량주의적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지만, 노동계몽운동과 노동야학 등을 통하여 노동자의 의식을 일깨우고 노동운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1925년에는 재일한국인노동자들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결성하여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평등의 신사회건설을 위하여 매진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는 일본제국주의의 위기와 노동운동의 격화기였다. 1931년 일제는 만주침공을 감행하였고,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만주를 식민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륙침공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제는 우리 나라를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민족독립운동은 물론 노동운동을 철저히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산업합리화라는 미명으로 임금인하, 노동강화, 각종 부담금의 강제징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열악한 노동자의 생활을 더욱 파탄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수탈과 착취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전보다 노동쟁의는 훨씬 늘어나 1931년에는 201건, 다음해는 152건, 그 뒤로 해마다 176건, 199건, 170건, 138건이 일어났지만, 철저한 탄압에 의하여 1937년에 99건, 1938년 90건으로 감소되었다.

이 시기의 큰 사건으로는 1931년 함흥의 가타쿠라제사공장(片倉製絲工場) 노동자들의 파업, 그 해 3월에 일어난 청진부두노동자들의 파업과 6월 경성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등이 있다.

이 시기 이후 1945년 8·15광복 때까지의 노동운동의 특색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노동운동이 지하화하였다는 데 있다. 또 정치적 색채를 농후하게 갖게 되고, 적색노동조합이 나타나 공산주의활동의 일환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적색노조함흥회·부산적색노동조합·함흥자유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한편 조직형태는 공장분회를 바탕으로 지부를 결성하고 각 산업별 조합의 지부는 지부협의회를, 지부협의회는 도협의회를, 도협의회는 중앙전국협의회를 구성하는 산업별 조합형태를 취하였다.

광복 후에는 1945년 11월 5일 체제개혁을 목표로 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산업별 조직하에서 결성되어 활동을 개시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반공적인 노동조합주의에 입각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이 다음 해 3월 10일에 기업별 조직하에 결성되었다.

전평은 1946년 9월에 철도총파업을, 1947년 3월에는 전국총파업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2,388건의 쟁의를 일으켜 피살자 26명, 피검자 8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미군정당국이 1947년 3월 포고령을 발하여 전평을 불법화하자, 전평조직은 지하투쟁을 벌였으나 대한민국정부수립 때에 이르러 그 조직이 와해되었다.

전평은 출발 당시에는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도 돌본다고 하였으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극렬투쟁만 일삼다가 붕괴당했고, 그 기반까지 철저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후퇴하게 되었다.

대한노총은 미군정과 우익진영인사의 비호로 조직되어 전평과의 대립을 기도하였다. 특히 정부수립 후에는 유일한 합법노조로 인정을 받아 1949년 6월에는 683개의 단위노동조합, 12만8018명의 조합원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들 중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동조합은 2개에 불과하였다.

대한노총은 민주적 노동운동의 사회적·경제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자본가들이나 국영기업체 관리인 및 정부관료들과 투쟁해야 하였고, 지도부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파벌싸움을 종식시켜야 했다.

대한노총의 산하단체인 철도연맹은 전평을 타도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지만, 정부수립 후 조합원들은 국영철도의 공무원이라고 간주되어 집단적 행동을 규제당하였다. 그리하여 철도연맹은 국회에 결의문을 보내기도 했으나 무효였다.

결국 철도연맹의 반공투쟁공로를 크게 인정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의하여 노동조합으로 존속할 수 있었고, 그 뒤 계속 발전하여 우리 나라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또한 1948년 12월 조선전업회사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하자 사장 서민호(徐珉濠)와 임영신(任永信) 상공부장관은 회사가 국책회사라는 명분으로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단전파업 등도 불사할 것임을 결의하면서 사용자측과 투쟁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양쪽 대표를 모아 의견을 듣고 직장의 노동조합결성은 합법적이라는 해석을 내림으로써 조선전업회사의 노동조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의 사례는 대한민국정부수립 직후 노동운동에 대한 보장입법이나 또는 정책의 확립 없이 다만 대통령의 권위적 지시로 겨우 노동운동이 존속할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게다가 민주적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대한노총은 위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두 파로 완전히 분열되고 말았다.

이 문제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활약으로 미봉적으로나마 해결되었지만, 1950년 6·25전쟁으로 노동운동의 발전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전시하(戰時下)에 노동운동의 억제는 노동쟁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였고, 여기에 파벌싸움이 덧붙여져 정상적인 운동발전을 저해하게 되자 대한노총은 몇몇 간부들만의 조직체로 전락하여 정치적 이용대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회사의 노동자들은 사장 강일매(姜一邁)의 횡포를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적 여론까지 분분하게 되었고, 국회에서도 산업민주화를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당국은 사장을 옹호하며 노동조합을 탄압하였고 어용노조(御用勞組)를 만들도록 하였다. 대한노총은 조선방직회사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지휘하였으나, 결국 600여 명의 여공이 해고되고 노동조합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이 쟁의는 대한민국 수립 후 가장 치열하고 또 가장 대규모적인 것으로 우리 나라 노동조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조선방직회사의 투쟁은 대한노총의 분열을 더욱 조장하였고, 여기에 노동운동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을 위하여 대한노총 안의 추종세력을 이용하자 분열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하여 1952년 11월 대한노총은 이승만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한노총은 완전히 자유당(自由黨)의 하부단체로서 정치도구화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대한노총의 위원장 전진한(錢鎭漢)은 민주주의적 노동운동이 가능하려면 우선 노동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고 그 제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위원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던 1952년 12월에 <노동조합법>·<노동위원회법>·<노동쟁의조정법>의 심의를 우선적으로 상정하자는 긴급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를 통과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의 노동운동은 발전을 이룰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얻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1953년에 제정된 민주적인 노동법에도 불구하고 그 발전이 저해되고 지루한 과도기를 가져야 하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노동조합원의 숫자는 차츰 증가하였고, 정치적 이용물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으로 전환시키려고 힘썼다. 이와 같은 경향은 노동조합의 연맹체나 중앙조직에서보다 각 기업체 안의 단위조합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각종 쟁의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1953년에 불과 9건에 참가인원 2,271명이던 것이 1957년에는 45건에 9,394명, 1959년에는 95건에 4만9813명이 참가하였고, 1960년에는 227건에 6만4335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쟁의의 원인별 상황을 보면 대부분 임금관계이며, 그 다음은 해고반대였다.

이 가운데 중요한 노동쟁의로서, 1954년 10월 대한석탄공사 산하 각 탄광노동자들이 밀린 임금의 지불과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쟁의를 일으켰는데, 회사측은 자금난을 구실로 조정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회부의 고발까지 받았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고, 직장을 이탈하자 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노사관계의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강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실정을 깨닫고 상공부를 통하여 임금을 융자하도록 하여 쟁의를 일단락시켰다.

1955년 6월에는 부산부두노동조합에서 재해보상의 실시를 요구했으나, 회사측에서 이에 응하지 않자 1만4000명의 부두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부에서는 전국 수입품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부산부두노동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직접 중재에 나서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하였다.

1956년에는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구대한방직쟁의가 일어났다. 귀속기업체이었던 대한방직을 불하받은 설경동(薛卿東)은 사장으로 취임한 뒤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부당해고하고 어용노조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분개한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간부를 축출하고 새 위원장을 선출한 뒤 임금인상, 노동운동에 대한 불간섭, 부당해고자복직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회사측은 폭력배를 동원해 탄압하는 동시에 매수와 해고 등으로 쟁의를 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 쟁의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어 진상조사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설경동은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강력한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요구대로 정당하게 해결하도록 하라는 국회의 대정부결의안까지 무시하였다. 해고노동자들은 법정투쟁까지 불사하였으나 그것마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 대한방직쟁의도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지만, 대구의 노동자들은 쟁의과정에서 어용적 태도를 취한 대한노총 경북지구연맹에 반발하여 대한노총 대구지구연맹을 구성하였다. 이 연맹은 그 뒤 1959년 광산노조연맹과 함께 대한노총 자체의 부패와 어용화를 반대하고,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기수가 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국노협)의 주축이 되었다.

한편 1958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우리 나라 경제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쟁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59년 2월 섬유노조의 쟁의를 시작으로, 부산부두노동자의 파업, 석탄광노조연합회의 쟁의, 남선전기주식회사노조의 쟁의, 부산택시노동조합의 파업 등으로 이어졌다.

자유당 독재정치하에서 대한노총은 고질적인 파벌싸움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판에는 대한노총회관에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의 정·부통령 당선을 위한 선거추진위원회의 간판까지 붙이고, 끝내 1960년 3·15부정선거에까지 가담하고 말았다.

이와는 달리 노동자들을 진실로 위하는 노동조합들이 차츰 등장하여 노동운동의 주체가 되었으며, 어용적 노동귀족에 대하여 투쟁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바로 전국노협이었다.

그러나 전국노협이 1960년 11월 대한노총과 통합대회를 열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라는 새로운 노총을 결성하게 되자 우리 나라의 노동계는 또다시 파벌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4·19혁명 이후 노동운동의 특징은 우선 쟁의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 형태도 가두시위가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어용노조를 규탄하는 노조민주화운동과 새로운 노동조합의 결성이 활발하였으며, 특히 교사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투쟁이 주목되었다.

학원민주화를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교사들의 주장은 정부당국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교사와 학생들의 투쟁은 날로 격화되었으나 끝내 합법화되지는 못하였다.

4·19혁명 당시 고양되었던 노동운동은 5·16군사정변으로 일시 후퇴하게 되었다. 군사정부는 노동쟁의를 일절 금지하였고, 모든 기존의 노동조합 및 노동단체를 해체시키고 노조간부들을 구금하였다.

그 뒤 군사정부는 다시 8월에 노동조합을 재조직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재건조직위원회의 위원 9명을 직접 지명하였다. 이 결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약칭 한국노총)이 결성되었고, 그 뒤 하향식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한편 1963년에는 공익 중심의 노동행정과 쟁의행위의 제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법> 개정이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폐기시키지 못하여 오늘날까지도 노동운동을 제약하는 요소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노동운동의 주체는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로 변하였다. 또한 빈부의 격차와 노사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사회적 불균형이 확대되면서 노동자의 소외의식은 심화되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국내외자본의 강한 반발, 정부의 노사관계 개입, <노동법> 개정 등은 노동운동에 있어서 경제투쟁과 더불어 정치투쟁을 행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었다.

1962년 쟁의권 부활투쟁을 비롯하여 <노동법> 개악반대투쟁, 자본시장육성법안제정 반대투쟁, <외국인투자기업에 있어서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 반대투쟁 등은 노동조합이 중심이 된 정치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개발의 밑천이 ‘양질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이었으므로 저임과 장시간 노동은 우리 나라 임금노동의 특징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투쟁도 격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기업가와 정부의 대응도 무자비하였다.

이렇게 누적된 노동문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폭발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체를 분류하면 우선 한국노총을 들 수 있으나, 이 단체는 노동자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중립을 포기함으로써 유신체제(維新體制)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결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발생적 노동쟁의가 자주 일어났으며, 잔혹한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속에서 전태일분신자살사건(全泰一焚身自殺事件)으로 대표되는 자각한 노동자들의 자살·분신 등의 극한적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노동쟁의로는 한진상사 파월기술자들의 체임청산 요구와 대한항공빌딩 방화사건, 현대조선 노동자들의 시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민주노조가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민주노조는 주로 파업과 시위, 그리고 농성을 통하여 정부와 기업의 탄압에 대항하면서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거나 기존의 어용노조를 민주화함으로써 성립하였다.

청계피복·동일방직·삼원·반도·원풍·와이에이치노조(YH勞組) 등을 들 수 있다. 산업별 노동조합체제가 유명무실하여진 상태에서 이와 같은 기업별 노조의 활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종교단체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깊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이 시기의 또다른 특징이다.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에 대한 투쟁의 일환이기도 한 것이다.

1979년의 10·26사태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정치적 공백상태에서 노동자들은 억눌렸던 욕구를 일시에 분출시키면서 신규노조결성, 임금 및 근로조건 개선, 휴폐업반대, 노동조합민주화, 해고자복직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노동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합법적인 과격한 폭력적인 사북탄광노동쟁의(1980.4.)가 일어났고 뒤이어 인천제철, 동국제강 등의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1980년 5월초 대학생 중심의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시위가 일어나자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쿠데타로 전두환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정화운동이란 이름아래 노동계 인사의 축출, 지역지부의 해산 등을 통한 노조의 탄압, 1980년말 노동법개정에 의한 산업별의 기업별노동조합체제로의 전환 등 전반적인 노동통제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제도화의 이른바 비합법적인 민주노동운동이 조직화되었다. 그리고 강력한 노동통제로 조직근로자수는 1980년 8월말 111만9572명이던 것이 1981년 12월말에는 85만3289명으로 1983년 8월말에는 78만5735명으로 감소되었다.

노동쟁의는 1980년에 407건이던 것이 1981년에 186건, 1982년에 88건으로 감소했다가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선 1986년에는 276건이 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쟁의로는 1988년대 전반기의 청계피복노조복구 및 합법성쟁취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결성운동, 대구, 부산택시기사파업농성, 대우자동차파업, 구로지역동맹파업, 그리고 1986년의 서울, 인천, 안양 등지 인부사업장의 임금인상투쟁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운동과 해고된 노동운동인 및 학생운동출신의 위장취업자에 의한 노동운동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 6·29 민주화선언 이후 1980년대 전반기에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동조합 수, 노동조합원 수, 노동조합조직률, 산별연맹 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리고 노총에 소속되지 않은 사무금융노련이 법적 지위를 획득한 독립산별노련으로 1987년 8월에 발족되었고 한국노총이나 재일노동세력에 속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취하는 지역별·업종별 노조협의회도 결성되었다.

1990년초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어 기존 노동조합운동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무직·전문기술직 및 공공 부문 노조도 조직되어 생산직 위주의 노동조합운동이 그 범위를 넓혀갔다.

6·29선언 후 자연발생적, 폭발적인 대규모노동쟁의가 일어났는데 1987년에는 총쟁의건수가 3,749건이나 되었다. 노동쟁의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처음에 창원, 울산 등 경남지역에서 제조업 특히 중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경인지구에서는 제조공업 분야에서, 호남·충남지역에서는 주로 버스·택시 등 운수업 분야에서, 강원지역에서는 탄광업 분야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노동쟁의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노동자들의 욕구불만이 6·29선언을 계기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면서 불법적인 쟁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어용노조 시비를 둘러싼 노조분쟁이 일어났다.

② 노동쟁의가 종전과는 달리 중소기업 여성노동자가 아닌 중화학공업지역의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일어났고 기타 산업, 기타 지역으로 파급·확산되었다.

③ 노동쟁의에 있어서 요구내용이 경제적 차원에 머무른 것으로서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노조결성과 노조민주화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④ 노동쟁의가 대중적, 대규모적인 연대투쟁의 형태를 취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현대그룹쟁의와 운수부문의 지역연대파업이다.

⑤ 사무직·전문기술직·서비스직분야 등에서 노동쟁의와 노동조합결성이 일반화되면서 서비스 비제조분야 노동운동이 생산직 노동운동과 함께 노동운동의 한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87년 이후 이상과 같이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기본 원인은 6·29민주화선언에 의한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이 풀린 데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1986년 이후 3년간 지속되었던 이른바 3저호황과 국제수지 흑자라는 경제적 배경이다.

6·29선언 후 앙양되었던 노동운동은 1989년을 정점으로 1990년대 초에 위축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1989년 초의 공안정국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 노동운동에 대처한 기업노무관리의 전략적 변화, 경제적 불황에 의한 불리한 노동운동환경 등에 기인하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노동조합수, 조합원수, 노동조합 조직률이 떨어짐은 물론 노동쟁의 발생건수가 급격히 감소되었다. 1988년 1,873건이던 노동쟁의건수가 1989년에 1,616건, 1990년에 322건, 1995년에 88건으로 줄어들었다. 협약 임금인상률을 보더라도 1987년 이후 17.2%, 13.5%, 17.5%로 높게 나타나던 타결인상률이 1990년에 9%로 낮아지고 1992년에 6.5%로 낮아졌다.

1987년의 대노동쟁의는 다음 해의 임금인상투쟁, 노동법개정투쟁으로 이어지고 1989년에는 전노협결성이 운동목표가 되면서 노동운동이 보다 조직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서 정부의 태도가 강경해졌다.

1988년말의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조치를 계로 1989년 초에는 풍산금속 안강공장, 서울지하철공사, 현대중공업 등의 노동쟁의를 공권력투입으로 진압하였다. 5월 1일의 총파업설과 관련하여 재야노동단체와 노조간부에 대한 수색, 연행, 구속 등의 강경조치가 취해졌다.

그리고 1989년 이후 경제위기의 노동자책임론이 주장되고 고통분담론이 제기되면서 임금인상 자제론이 크게 홍보되고 산업구조조정과 더불어 신경영전략으로서의 새로운 인사노무관리의 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 노동운동노선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3저호황이 끝나면서 경제침체가 본격화되는 가운데서 국제경쟁력 강화를 강제하는 경제의 세계화는 노동운동을 어렵게 하는 환경적 조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경제의 급속한 세계화 속에서 노동시장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이 또한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비용절감을 위한 노동의 유년화정책은 노동운동을 어렵게 한다. 위에서와 같이 노동운동이 양적으로 위축되는 면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 노동운동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자기반성을 하고 새로운 대란을 모색하는 가운데서 노동운동이 질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노동운동의 위기가 노동운동의 주체적 조건에 기인한다는 자기비판이다. 즉 노동조합지도부의 역량부족과 전문성 결여, 조직의 불안정성이 대내외적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 위에서 조직정비, 노동운동의 방향모색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 노동운동의 큰 변화는 1996년 4월에 발족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활동과 노동법개정과 관련된 1996년 말에서 1997년 초에 걸친 조직적 파업사태에서 엿볼 수 있다.

노동법개정은 두 측면에서 요구되었다. 그 하나는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기인하는 경쟁력 약화를 극복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이 ILO(국제노동기구) 가입,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에 따라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이들 기구로부터 노동기본권을 국제수준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압력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노동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한 개별노동관계법의 개정이 필요하고 후자를 위해서는 후진적인 노사관계를 선진적인 노사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그 활동과정에서 그간 노사정간에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노동관계의 주요 쟁점을 한국노총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노총까지도 참여시킨 가운데 공존화하여 합의도출에 힘썼다.

1996년 11월에 노개위는 합의사항과 미합의사항은 공익안을 중심으로 한 노동법개정안을 정부내 임시기구인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이하 노개추)로 넘겼고 노개추는 노개위노동법개정안을 기초로 손질하여 12월 3일 노동법개정안을 확정하여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의 노동법개정안이 확정되자 노동계는 반개혁적 노동법개정안을 수용할 수 없다며 총파업 돌입을 선언하였고, 12월 26일 신한국당이 노동관계법개정안 및 안기부법 개정안 등이 단독 처리됨에 따라 같은 날 총파업이 일어나 1997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여야의 영수회담에서 노동법재개정과 파업노조지도부 불구속합의를 계기로 총파업은 유보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는 파업을 선언하고도 파업행동을 유보하면서 압력만을 행사하는 전략전술의 유연성을 보여주었고 필요에 따라서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집회를 갖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의 정부주도형 경제개발에 의해 벌어진 관치경제의 폐단은 지나친 내외자(內外資)의 차입(借入)경영과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나타났고, 이것은 결국 1997년말의 외화금융위기를 자아내 IMF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단행된 구조개혁은 대량의 정리해고를 양산했고 전반적인 경제후퇴를 초래하였다.

대량실업과 고용불안이라는 사태를 반영하여 고용안정 대신 임금삭감 및 임금동결, 그리고 노사화합선언이 자발적이라기 보다 정치경제적인 외적강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1998년 8월 24일 일어났던 현대자동차노사분쟁이 공권력개입에 따른 후유증없이 마무리되었고 같은 해 9월 29일의 금융노동자총파업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합의에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음은 물론이지만 주체적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정부는 1998년 1월 15일 당면한 경제위기를 사회적 합의와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국민적 합의기구인 노사정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동위원회는 외자도입과 투자활성화를 통해 당면 금융·외환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그 선결조건으로서 노사정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보아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6일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라 할 수 있는 ‘경제위기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노사정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기업의 경영투명성확보 및 구조조정촉진, 물가안정,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 사회보장제도확충, 임금안정과 노사협력증진, 노동기본권보장, 노동시장의 유연성제고, 수출증대 및 국제수지개선,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기타사항, 국민대통합을 위한 건의사항 등이 있다.

정부에 의하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양대노총 참여 하에 출범한 제1기 노사정위원회는 재벌개혁, 실업대책, 노동기본권신장, 노동시장유연성제고 등 90개 항목에 걸친 고통분담방안에 관한 대타협을 도출하여 대외신인도를 높여 외자유치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함에 따라 끊임없는 노력과 고통분담을 하기 위해 대통령직속 상설자문기구로 제2기 노사정위원회가 1998년 6월 3일 발족되었다. 동위원회에는 정부와 정당대표가 노사와 대등한 주체로 논의과정에 참여함에 따라 정책협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성과여부는 그만두더라도 사회적 합의기구가 설립되어 대화의 공간이 마련되었다는데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정부의 강력한 노동통제와 전근대적인 기업경영 하에서 극도로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은 1987년 6·29 민주화선언을 계기로 한때 크게 활성화된 후 1989년을 정점으로 하강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조합수, 조합원수, 조직률, 임금상승률, 파업건수 등 통계수치로 헤아려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반드시 노동운동의 침체로만 볼 수 없고 사회경제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내용상의 질적 발전이란 새로운 면을 찾아볼 수도 있다. 우선 산업구조와 노동시장구조의 변화에 따른 노동운동의 주체적 조건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제조업 및 생산직 노동자의 비중이 감소된 반면 화이트칼라, 공공 부문을 포함한 서비스직 노동자가 늘어남에 따라 생산직 중심의 전통적 노동운동방식은 침체될 수밖에 없고 또한 생산직 노동자들도 생활수준향상에 따라 그들의 의식이 변화하고 있다.

서비스직 노동자들의 증가와 그들의 조직화는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요구내용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한 노동운동은 당연히 종전보다 전문성, 유연성을 보여주어야 하며 그만큼 질적 성숙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의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의 노동운동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단순한 임금인상요구뿐만 아니라 권리분쟁과 관련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쟁의가 종전보다는 적법절차에 따른 합법성을 지니고 있다.

민주노총의 합법화가 가능해짐에 따라 우리 나라 노동운동계는 양대노총으로 조직분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노총이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반영한 노동운동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방향성이 동질화해가는 면이 엿보이고 때로는 공동보조를 취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노동운동은 상업사회의 발전성숙과 노동자계급의 성숙에 대응하여 전문성을 지니고 정책대응을 하는 유연성 있는 운동을 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권리와 책임을 함께 지녀 한 나라 사회경제발전에 공헌할 사회통합성을 보여줄 운동으로 커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동운동이 사회의 지지를 받아 국민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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