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묘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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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중 조선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목릉 문인석 정면
구리 동구릉 중 조선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목릉 문인석 정면
조각
개념
능묘를 옹위하기 위하여 능묘 앞에 배치하는 문무석인과 석수, 봉분의 호석에 장식된 부조상 등의 조각.
내용 요약

능묘조각은 능묘를 옹위하기 위하여 능묘 앞에 배치하는 조각이다. 문무석인과 석수, 봉분의 호석에 장식된 부조상 등 능묘 주위의 석조물들이다. 우리나라에서 능묘조각은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문무석인과 십이지상이 배치되는 능침제도가 성덕왕릉에서 처음 도입, 800년경 원성왕릉에서 완성된다. 고려·조선 시대의 능침제도와 능묘조각은 신분 제도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능묘조각은 제작 연대가 뚜렷하여 조각물의 양식적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석조물이다. 이런 점에서 능묘조각은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목차
정의
능묘를 옹위하기 위하여 능묘 앞에 배치하는 문무석인과 석수, 봉분의 호석에 장식된 부조상 등의 조각.
내용

능묘 주위에 석조물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시작된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작품은 전한 무제 때의 명장이었던 곽거병(霍去病)의 묘 앞의 조각들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능묘조각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기 시작하여 신분에 따른 능침제도(陵寢制度)가 확립되었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성덕왕릉에서 처음으로 문무석인과 십이지상(十二支像)이 배치되는 능침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하여, 800년경의 경주 원성왕릉(사적, 1963년 지정)에서 완성을 보게 된다.

8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에 걸친 문무석인·석사자(石獅子)·십이지상 등 능묘조각은 그 당시의 뛰어난 불교 조각 기술에 힘입어 힘찬 모델링, 정교한 세부 조각, 사실적인 신체 묘사 등으로 우리나라 능묘조각의 전래에 있어 절정을 이룬다. 그 뒤에는 점차 형식화되고 평면화되어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능침제도가 해체된다.

고려시대에도 봉분의 호석과 난간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호석에 부조된 십이지상은 사라지고 봉분의 주위에 배치되던 네 마리의 사자도 두 마리로 줄어들어 봉분 앞 양편에 배치된다. 또한 능 앞에는 문석인 한 쌍만이 있을 뿐 무석인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도 태조의 현릉(顯陵)에서만 정비되었을 뿐, 그 뒤에는 능묘조각이 갑자기 퇴화되어 극히 간략해지거나 아예 없어진다. 또한 문석인과 석사자의 모습도 사실적인 요소가 매우 약해져 형식화·도식화의 과정을 거치다가 마침내는 장승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14세기 중엽의 충목왕릉인 명릉(明陵)에 이르러서 능묘조각이 다시 정비되기 시작한다. 14세기 말의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그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에 이르면 고려의 능침제도가 완성되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즉, 호석과 난간이 정비되고 호석에는 구름무늬와 인물상이 부조된다.

석사자와 석양(石羊)이 봉분 주위에 한 쌍씩 배치되고, 문석인·무석인 한 쌍씩이 능 전면에 늘어서게 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기본적으로는 공민왕릉의 능침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양과 호랑이상이 두 쌍씩 봉분 주위에 배치되고, 문무석인 뒤에 석마(石馬)가 등장한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서 보이는 이러한 배치의 정형은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를 따른 것으로서, 그 기본 형식은 조선시대 전시대를 통하여 계속된다. 그런데 신분에 의한 능침제도는 호석에 차이를 드러낸다. 즉, 왕릉이나 왕비릉 모두 석물 조각에는 차이가 없으나, 왕비의 능에는 호석이 나타나지 않는다.

왕족이나 사대부의 경우에는 능묘조각의 규모가 작아지거나 일부가 생략된다. 형식과 양식적 면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능묘조각은 전반적으로 크기가 작고 조각 수법이 치졸하여 장승 같은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공민왕릉에 이르러 크기가 갑자기 커지면서 기념비의 성격을 띠게 되며, 인체의 표현도 상당히 사실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입체감 있는 원주형(圓柱形)의 석인 조각은 조선시대 석인의 모형이 되어 건원릉까지 그대로 계속된다. 그 뒤 형식화 과정을 거쳐 16세기에 이르면 머리는 더욱 커지고 하반신은 짧아지며, 목과 허리의 표현이 없어져 각주형(角柱形)의 신체로 변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면 하반신이 길어지면서, 전체적으로도 길어진다. 얼굴에 표정이 생겨나고 옷 끝은 움직이는 듯 표현된다. 이러한 양식은 형식화 과정을 다시 겪게 되지만 20세기 초의 순종의 유릉(裕陵)에 이르러, 서양 조각의 영향으로 사실적이며 개성적인 석인 조각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호석에는 구름무늬 속의 문관이나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 계속 이어진다.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 일대에, 고려시대에는 개성 일대에, 조선시대에는 서울 일대에 각각 집중되어 있다. 이는 조영(造營) 당시의 수도권의 문화적 상황이 왕릉의 능침제도에 반영될 여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능침제도는 엄격한 신분 제도에 따라 규정되었으므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나라의 능묘조각은 처음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지만,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능침제도 위에 중국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이므로 독창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역인(西域人)을 모델로 삼은 무석인은 당시 서역과의 밀접한 교류 관계를 보여 주며, 특히 봉분의 호석과 그 호석에 부조된 무복(武服)의 십이지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산물이다. 다만, 문석인과 석사자의 조각 양식이 당나라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조선시대의 능침제도와 능묘조각은 송나라의 영향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독창적인 전통 위에 우리 나름의 발전적 전개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능묘조각은 제작 연대가 뚜렷하여 능침제도와 조각물의 양식적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석물지』 상(은광준, 민속원, 1985)
「이조왕릉의 석인조각-이조조각양식의 변천-」(김원룡, 『아세아연구』 4,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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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십이지상의 양식적고찰」(강우방, 『고고미술』 154·155, 1982)
「통일신라시대의 묘의석물·석인·석수 연구」(박경원, 『고고미술』 154·155, 1982)
「경주괘릉인물상 재고」(권영필, 『미술자료』 50, 19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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