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은 경산지역과 대구지역을 가르는 병풍산(해발 523m), 성암산(해발 469m), 자양산(해발 450m), 안산(해발 432m) 등으로 연결된 산지에서 북으로 뻗는 능선들과 북쪽에 고립되어 솟아 있는 고산(해발 95m) 사이에 형성된 소분지형태의 선상지에 형성되어 있다. 주변에는 이 유적과 관련된 많은 고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북쪽의 고산에 있는 고산토성, 동쪽의 지금 경산과 경계가 되는 성암산에서 북으로 뻗는 구릉에 있는 중산동 고분군과 중산동 토기가마터, 남쪽의 안산에 있는 욱수동 산성(자산산성), 서쪽의 안산에서 북으로 길게 뻗는 구릉과 그 주변에 있는 욱수동 고분군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청동기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유적을 포함한 주변지역은 1992년대구도시개발공사에 의해 택지개발이 시작되어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때 확인된 주변의 고분군과 지석묘 등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택지개발 전 지구에 대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어 유적의 존재와 범위가 확인되었다.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와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다.
시지동과 매호동에 있는 고인돌은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곳으로 사월동(沙月洞) 고인돌과 함께 대구-경산간 국도 북편에 동∼서 방향으로 약 1.8㎞에 걸쳐서 일렬로 평지에 분포한 24기의 고인돌이 있다. 시지동 고인돌 Ⅰ은 모두 18기의 유구(遺構)로 되어 있고, 3개의 덮개돌(上石) 아래에서 돌널(石棺) 2기, 돌덧널(石槨) 1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덮개돌 없는 돌널이 15기 노출되었다. 장축방향은 남∼북 장축 2기, 동∼서 13기, 북서∼남동이 3기로 동∼서 장축이 압도적이다. 가장 큰 덮개돌 크기는 장축, 단축, 두께가 2.2×1.6×0.8m이며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길이, 너비, 깊이가 2.2×0.8×0.9m이다. 출토유물은 이단병식간돌검(二段柄式磨製石劍) 1점,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 붉은간토기(紅陶) 2점 등이다.
시지동 고인돌 Ⅱ는 고인돌 1기와 돌널무덤 2기가 있고, 장축방향은 북서∼남동, 동∼서 등이고, 큰 덮개돌은 2.6×1.5×1.0m(4톤)이고, 매장주체부는 최대치가1.45×0.45×0.2∼0.5m이다. 출토유물로는 붉은간토기 1점, 돌화살촉 1점, 대롱옥(管玉) 11점이 있다.
매호동 고인돌(梅湖洞 支石墓) Ⅰ은 덮개돌 아래에 매장시설이 없는 고인돌 4기와 그 주변에 있는 2기의 돌널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2기의 돌널 가운데 하나는 토광(土壙)을 파고 청석(靑石)을 깐 다음 청석으로 수평쌓기(平積)를 하여 벽체(壁體)를 만든 후, 그 위에 뚜껑돌(蓋石)을 덮고 있었으며, 부석시설(敷石施設)은 없었다. 돌널의 크기는 1.35×0.4×0.2m로, 간돌화살촉 15점이 출토되었다.
매호동 고인돌 Ⅱ는 2호 고인돌 덮개돌에서 알구멍(性穴) 2개가 확인되었다. 덮개돌은 2개이나 아래에는 매장시설이 없고 주변에 돌널 2기, 돌덧널 1기를 두었으며, 구조는 토광을 파고 판돌(板石)을 깐 다음 네 벽을 만들어 뚜껑돌을 덮은 형식이다. 1호 돌널의 장벽은 판돌을 세우고 단벽은 수평쌓기를 하였으며, 붉은간토기 1점, 간돌화살촉 3점이 출토되었다. 크기는 1.3×0.45×0.15m이다. 2호 돌널은 토광바닥에 청석을 깔고 판돌을 수직으로 세워서 네 벽을 만들었으며, 크기는 0.15×0.16×0.17m로서 극히 소형이다. 돌덧널은 토광바닥에 청석을 깔고, 네 벽은 아래쪽을 냇돌(川石)로, 윗쪽을 판돌(板石)로 쌓고 뚜껑돌을 덮고 있다. 크기는 2.05×0.6×0.8m이고, 간돌검 1점, 간돌화살촉 4점이 출토되었다.
매호동 고인돌 Ⅲ은 고인돌 4기, 돌널무덤 6기로 구성되어 있다. 고인돌 Ⅲ의 장축방향은 동∼서 3기, 서북∼동남 3기, 북서∼동남 2기 등인데, 가장 큰 고인돌의 덮개돌은 3.7×2.8×1.2(16ton)이며, 매장주체부는 1.35×0.5×0.27m이다. 1호 돌널은 토광을 파고 수평쌓기로 네 벽을 만들고 바닥에 청석을 깔았으며, 뚜껑을 덮었다. 출토유물은 붉은간토기 1점이 있다. 2호 돌널은 판돌을 수직으로 세워 네 벽을 만들었으며, 3·4호 돌널은 한쪽 장벽만 판돌을 수직으로 세우고 다른 세 면은 수평쌓기를 하였다. 5·6호 돌널은 네 벽 모두 수평쌓기를 하고 바닥에 청석을 깔고 뚜껑을 덮었다. 5호 돌널의 규모는 1.35×0.5×0.27m이며 간돌검 1점, 간돌화살촉 7점이 출토되었고, 6호 돌널은 1.3×0.35×0.1m 규모로 붉은간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영남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한 택지지구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주도로와 그 주변 부지는 유적의 중심부로 생각되는 곳으로, 굴립주건물지(堀立柱建物址), 도로, 도랑(溝), 석열(石列), 부정형의 구덩이(竪穴遺構), 우물, 연못, 석조구조물 등과 많은 기둥구멍(柱孔)이 조사되었다. 굴립주건물지들은 방형(方形), 장방형(長方形), 원형(圓形) 등으로 형태도 다양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기둥구멍을 배치한 것이 있는 반면, 커다란 기둥구멍을 2열 또는 3열로 배치한 것들도 있다. 그리고 이 기둥구멍의 바닥에 돌을 깔고 기둥을 세운 것들도 조사되었다. 도로는 4개가 확인되었는데, 자갈과 작은 깬돌(割石)을 깔아 축조한 것으로 그 내부에는 너비 1.5m 정도의 마차바퀴흔과 같은 오목한 흔적이 나란하게 패여 있다. 도로의 너비는 약 1.8m 정도가 보통이다. 도랑은 독립되어 설치된 것들도 있었으나 대다수가 중앙부에 부정형의 구덩이군을 두고 반원형으로 돌려졌다. 석열은 담장과 같은 석축의 하단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땅을 파서 축조한 것들이다. 부정형의 구덩이 유구는 수십 기가 조사되었는데, 크기도 길이 0.75m내외의 작은 것에서부터 17m에 이르는 대형의 것까지 다양하다. 이 구덩이들에는 소토가 채워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고, 많은 연질토기편, 신라토기편, 흙구슬, 토관, 숫돌 등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물은 15기정도가 조사되었는데, 약 25m 간격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우물은 대부분 땅을 파고 냇돌(川石)과 깬돌을 둥글게 쌓아 축조한 것이고, 둘레에 4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우물을 보호하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들도 있었다. 우물의 내부에서는 목재 및 목탄편, 토기편, 흙구슬,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孤山池로 명명)은 발굴구역의 중앙부에서 조사되었다. 이것은 남쪽이 넓고 북쪽이 좁은 평면 사다리꼴의 형태로 장축은 북동∼남서 방향이다. 흙을 파고 냇돌을 5∼8단으로 종평적 또는 횡평적하여 축조한 네 벽은 많이 무너져 있었다. 크기는 동 · 서 · 남 · 북벽의 길이가 13.0×12.8×12.1×7.85m이고 깊이는 1.2m 내외이다. 입수구(入水口)와 출수구(出水口)는 발견되지 않았다. 내부에서는 돌구슬, 흙구슬, 각종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되는 토기편은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의 것으로 편년되는 신라토기 양식의 것들이다. 석조구조물은 부정형의 구덩이 내에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지상에 한쪽 단벽을 제외한 세 벽을 냇돌(川石)이나 깬돌을 모로 세우거나 2단으로 쌓아 장방형(長方形)이 되게 만든 것이다.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1.5∼3.3×0.7∼0.9×0.2∼0.6m 내외인데, 위에 판석을 덮은 것도 있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발굴구역은 영남대가 발굴한 주도로부지의 서편인 공동주택지구 구간과 동편의 욱수초등학교 부지이다. 공동주택지구 구간은 부정형의 구덩이, 도랑, 석열, 4개의 기둥구멍이 3열로 배치된 장방형의 굴립주건물지 등이 조사되었고 굽다리접시(高杯)를 비롯한 각종 토기편, 쇠손칼(鐵刀子)과 쇠화살촉(鐵鏃)을 비롯한 각종 철기, 흙구슬, 흙방울 등의 토제품, 숫돌 등의 생활용구가 출토되었다. 욱수초등학교 부지의 조사에서는 영남대학교 발굴구역에서 연결되는 도로, 원형이나 부정형의 구덩이유구, 우물, 수많은 기둥구멍 등이 조사되었고, 굽다리접시 · 항아리 · 목긴항아리(長頸壺) · 시루 등의 토기류, 낫 · 도끼 · 손칼 등의 철기류, 가락바퀴(紡錘車) · 흙방울 · 토관 · 마형토우(馬形土偶) 등의 토제품, 숫돌 · 돌구슬 · 홈돌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토기 가운데 연질의 시루가 많이 발견되고 기타 유물들도 생활용구로 볼 수 있어 유적의 성격을 가늠하는데 좋은 잣대가 되고 있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의 조사는 서편의 단독택지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앞의 것들과 같은 구덩이유구, 구, 우물, 도로 등과 함께 수많은 기둥구멍이 조사되었다. 또한 구덩이유구 내부에 석조구조물을 설치한 경우도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굽다리접시 · 목긴항아리 · 항아리 등의 토기류, 화살촉 · 도끼 등의 철기류, 토관 · 흙구슬 등의 토제품, 돌구슬 · 홈돌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유적은 길이 1㎞정도에 달하는 대규모의 생활유적으로 유적의 형성시기는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중심시기는 출토되는 토기편들로 보아 6세기와 7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다. 유적의 전체 모습은 중간중간에 정형화된 굴립주건물이 자리잡고 20∼30m 간격으로 우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연못이 위치한 대규모의 취락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형화된 구덩이를 가진 집자리가 발견되지 않아 거주를 위한 생활유적이라기보다는 연못이 있고 우물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업이 시행되던 곳으로 판단된다. 한편 주변에 있는 고분군은 이 생활유적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묘지로 볼 수 있는데, 서편의 욱수동 고분군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도 1,500여 기에 달하고 있다. 이 고분들의 크기와 출토되는 유물들로 볼 때, 이 유적을 사용한 집단은 임당동 고분군을 정점으로 한 경산지역의 한 읍락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생활유적과 고분군이 세트를 이루고 있어 이 유적은 앞으로 삼국시대 문화의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