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성전투 ()

고대사
사건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정의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640년대 접어들면서 백제는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642년(의자왕 2)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전투는 이러한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달한 사건이었다.

경과

642년 8월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인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 도독(都督)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김품석은 재지세력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대야성 지방의 상당한 재지세력들이 이탈하였다. 검일은 이 일을 원망하다가 백제군과 내통해 창고에 불을 질렀다.

백제 군사가 대야성을 공격해 왔을 때 재지세력인 죽죽(竹竹)과 용석(龍石)은 백제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으나 김품석은 싸우지도 않고 보좌관인 아찬(阿飡) 서천(西川)의 주장에 따라 항복하여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대야성의 남녀 1천여 인은 사로잡혀서 백제의 서쪽지방으로 천사(遷徙)되었다.

결과

이 전투의 공으로 윤충은 의자왕으로부터 말 20필과 곡식 1천석을 받았다. 반면 신라는 죽죽과 용석에게 각각 급찬(級飡)과 대나마(大奈麻)의 벼슬을 추증했으며, 처자들도 상(賞)과 함께 왕도인 경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서부 국경지역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대백제 방어선도 압량(押梁: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정치능력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야성의 책임자는 선덕여왕의 세력기반인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반대파들의 정치공세가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의 정치는 대신(大臣)으로 불리는 소수 귀족들에 의해 구성된 회의체를 통해 운영되고 있었다.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국가의 중대사는 결정되었다. 진평왕(眞平王) 사후 남자로서 적절한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女主)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갈등하였고, 결국 그들 간의 정치적인 타협에서 나온 정치운영 형태였다. 여왕지지파와 여왕반대파는 균형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였는데, 대야성의 함락으로 여왕지지파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수세에 처한 신라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방면으로 대응하여 나갔다. 먼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해 외교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영토할양을 강요당하며 원병요청에 실패하였다. 다음으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새로이 압량주(押梁州: 경산)를 설치하고 군주(軍主)에 김유신(金庾信)을 임명해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을 비롯한 7성을 함락시키는 등 상실된 대야성 지역은 김유신에 의해 점차 탈환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압량주 도독(都督)을 역임한 지역과 새로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김유신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라는 당면한 직접적인 위기는 일단 벗어날 수 있었으며, 김유신의 대백제 군사활동의 성공은 여주지지파들의 정치적인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데 큰 몫을 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김유신은 백제군을 대야성 밖으로 유인해 격파하고,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고 1천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사로잡은 8인을 대야성 전투 때 죽은 김품석 부부의 유해와 교환하는 한편, 백제의 경내를 공격해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이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飡)의 벼슬을 받고 더하여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倭)에 대한 외교노력은 실패했지만 입당(入唐)한 뒤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간 목적은 단순히 외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당제(唐制)의 적극수용[漢化政策]이라는 정치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대고구려 원정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백제 공략을 위해 당을 끌어들이는 원병 요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만 구원군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야성 전투의 결과, 일시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이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몰리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군권(軍權)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중대(中代)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 하에 삼국통일(三國統一)이 성취된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사강좌』Ⅰ-고대편-(이기백·이기동, 일조각, 1982)
「김춘추의 외교활동과 신라내정」(주보돈, 『한국학논집』20,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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