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군정부 ()

근대사
단체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
정의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
설립목적

1911년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가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대전학교(大甸學校)라는 사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러시아의 극동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 군영지(軍營地)를 조차하는 한편,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인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를 운영하였다. 그 결과 1914년 권업회 의사부 신임의장 이상설(李相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훈련받은 무장 병력 약 3만여 명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해로,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개전설이 나돌았다. 이에 발 맞추어 권업회는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에 널리 퍼져 있는 무장력을 갖춘 각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독립전쟁을 구현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또한 이 해는 우리나라 사람이 시베리아에 이민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여, 이를 크게 기념하기 위한 기념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많은 군자금을 모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정부 수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기능과 역할

정부 수립은 권업회 중심 회원인 이상설·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상설·이동휘가 각각 정·부통령에 피선되었다. 산하에 편성된 광복군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군경에 압수당한 독립운동 관계 문서에 의하면, 1914년 당시 이상설 주관하에 있던 시베리아 병력을 제외하고도 만주 길림(吉林)에 26만명, 무송현(撫松縣)에 5,300명, 왕청현(汪淸縣)에 1만 9,507명, 통화(通化)·회인(懷仁)·집안(集安)지역에 39만명, 미국에 855명 등의 한인이 훈련을 받고 무장을 갖추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산하에 편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립 뒤 국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정부에 의해, 러시아 내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모든 정치·사회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9월 정부 수립의 모체가 된 권업회가 해산을 당하자 큰 타격을 받아 더 이상 활동을 못하고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 Ⅰ(한국일보, 1987)
『한국근대사료론』(윤병석, 일조각, 1979)
『조선통치사료』(김정주 편, 한국사료연구소, 1970)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윤병석, 『한국사학』8, 1986)
『독립신문(獨立新聞)』
집필자
강진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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