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정치단체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결성되었던 우익 청년운동단체.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대한청년단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대한청년단 여행 증명서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결성되었던 우익 청년운동단체.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948년 12월 19일 좌익계 청년단체의 통합체인 민주청년동맹(民主靑年同盟)에 견줄 수 있는 연합체로서 결성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설립목적
난립한 청년단체들의 성격은 각기 달랐지만, 사상적으로는 우익청년단체와 좌익청년단체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활발한 활동을 편 것은 주로 좌익청년단체들로서 이미 1946년 4월 25일 조선민주청년동맹(후의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의 결성대회를 치르고 통합되었으나, 우익청년단체는 그렇지 못하였다. 또한,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李承晩)은 자기를 절대적으로 지지해 줄 조직적인 지지기반을 갖지 못하여 정당이 아닌 정치 외곽에서의 지지집단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당시 우익청년단체의 대표격인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조선총동맹(靑年朝鮮總同盟)·국민회청년단(國民會靑年團)·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이외 전국에 산재한 각 청년단체들을 대동단결한다는 명분으로 한 데로 흡수, 통합하여 이 청년단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된 이범석(李範奭)이 이끌던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은 이에 반대하여 출발 당시는 참가하지 않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는 등의 선서문을 채택하면서 출발한 대한청년단은 총재에 이승만, 최고 위원에 장택상(張澤相)·지청천(池靑天, 본명 池大亨)·전진한(錢鎭漢)·노태준(盧泰俊)·유진산(柳珍山)·서상천(徐相天)·강낙원(姜樂遠)·신성모(申性模)를 추대하고, 광범위한 조직망을 이용하여 200만 명에 달하는 단원을 규합하였고, 사상운동과 사상계몽사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민족청년단은 여전히 반대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결국 이승만의 강압에 못 이긴 이범석은 1949년 1월 20일 민족청년단을 대한청년단으로 합류시켰다. 이리하여 대한청년단은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청년단이 되었다. 그러나,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이 ‘족청’과 ‘비족청’으로 나누어져 암투가 벌어졌다.
1950년 1월 대한청년단은 내부 분열로 최고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장제로 바꾸어 신성모가 단장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안호상(安浩相)으로 바뀌었다. 6·25전쟁중인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설치법」이 공포되어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들이 이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청년단은 방위군으로 개편되어 단원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제2국민병 해당자들은 방위군으로 소집되어 군사훈련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51년 5월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산되자, 대한청년단은 그 운영 및 활동이 침체되었다.
1952년 8월에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 이후 집권당인 자유당 내분의 격화로 대한청년단의 내분도 격화되자, 이승만은 1953년 9월 10일 대한청년단의 해산을 선포하고 청년단원들은 민병대에 편입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광복 이후 광복조국을 국제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투쟁을 하였던 우익애국청년운동도 그 종말을 고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1948년조선연감  (조선통신사, 1949)

  • 韓國靑年運動史  (鮮于基聖, 錦文社, 1973)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윤세원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