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 ()

유교
개념
중국의 송대에 발달한 정주학 또는 주자학을 가리키는 학문. 유학.
정의
중국의 송대에 발달한 정주학 또는 주자학을 가리키는 학문. 유학.
성립과 명칭

유학은 그 시대와 학파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이를 테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그리고 순자(荀子)를 중심으로 한 원초유학(原初儒學)은 한대(漢代)의 훈고학(訓詁學), 당대(唐代)의 문장 위주의 사장지학(詞章之學), 송대의 철학사상을 기본으로 한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 명대의 심학(心學)으로 발달한 양명학(陽明學), 그리고 청대에 와서 고증학(考證學)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 등 시대에 따라 특징을 달리해 발전하였다.

그 가운데 도학은 송대에 와서 크게 일어난 정주성리학의 별칭이니, 북송의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소옹(邵雍)·정호(程顥)·정이(程頤) 등 이른바 오군자(五君子)에 의해 창도, 전개되고, 남송의 주희(朱熹)에 의하여 집대성된 송학(宋學)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진(先秦)이나 한·당 시대의 유학은 도학이라 하지 않고, 송대에 이르러 새롭게 재구성된 유학을 일컬어 비로소 도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학을 일명 송학이라고도 하며, 그 대표적 완성자인 주희의 이름을 따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도학은 지난 8세기에 걸쳐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고려 말에 도입된 이래,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초석으로 기능했다.

도학 발생의 근거와 경위

중국 정신사에서 유학은 사상과 문화의 기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한대에는 노장(老莊)의 자연주의 사상, 그리고 당대에는 불교의 심성철학(心性哲學)이 성행하면서 세 사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송대 유학의 선구자들 또한 노장과 불교사상에 깊이 경도되엇다. 이를 두고 청대의 안원(顔元)같은 비판자들은 송학을 불학(佛學) 또는 선학(禪學)이라고 규정하지만, 이는 사태의 한 측면을 과장한 결과이다.

송학은 오히려 공맹의 근본 유학의 ‘도통(道統)’이 노장과 불교의 융성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끊어졌다고 본다. 한·당 시대의 학풍은 유학의 근본 정신에서 벗어나 본래적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희는 그러한 논지를 그의 <대학장구서 大學章句序>와 <중용장구서 中庸章句序>에서 특별히 밝히고 있다. 그는 속유(俗儒)들이 기송사장(記誦詞章)을 소학(小學)보다 더욱 힘썼으나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無用), 노불의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는 대학(大學)보다도 높았으나 실지가 없는 것(無實)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주희는 권모술수와 온갖 사설(邪說)과 기예(技藝)가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인의의 도(仁義之道)를 막아서, 군주로 하여금 진리의 방향을 모르고 백성들로 하여금 지치(至治)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주희는 지난 사상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비판하고, 공맹의 근본 유학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유학의 정통성, 이른바 도통 연원(道統淵源)을 강조했다.

주희는 <중용장구서>에서 요·순·우·탕·문·무·주공 등의 도통 연원을 기술한 다음,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 : 과거의 성인을 잇고 미래의 학문을 엶.)’의 성인으로서 공자가 세상에 나왔고, 그 도통이 증자(曾子)·자사(子思)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끊어졌으며, 그 후 오랜 단절을 겪은 후, 송대에 이르러 정호·정이 형제의 출현으로 다시금 밝아졌다고 기록하였다.

도학은 주자의 노력으로 완성되었고, 송나라의 원우(元祐)에서 순희(淳熙) 연간에 융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도학은 그 후 양명학의 융성 등으로 중국에서는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지만 그 전통은 조선의 문화와 사상에 접목되어 다시금 재해석되고 발전되었다.

도학의 기본정신

도학의 이념과 비판의식

유학은 본래 현실적 학문으로서 주로 윤리·도덕·정치·교육 등 실제적인 생활면에 응용되어 왔다. 그러나 유학의 이 현실 중시적 특성은 도가나 불가로부터 세속성을 벗어나지 못한 비속한 교설(敎說)로 비판받는 빌미가 되었다.

도가의 자연주의 사상과 불교의 고묘(高妙)한 심성철학은 특히 한당시대에 지식인과 민간에 이르기까지 넓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가와 불가가 그 개인적이고 초월적인 지향으로 말미암아 건실한 윤리 의식과 생활 규범을 방기한 무책임한 교설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중심 역할을 한 사상이 바로 송대의 도학이다.

도학파는 유학의 근본 정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도가나 불가를 이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철학 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도불에 대해서는 인륜에 어긋나는 이단사상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도학은 인륜적 세속성과 개인적 초월성을 분리하지 않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높은 정신적 진리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묘한 진리를 말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을 떠난 것이라면 오히려 공허한 것이다. 도불이 바로 그렇게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비현실적 도를 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과 비판이론이 도학의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로 전개되어갔다.

도학이 발흥한 이래 800년이 지나도록 성리학의 이론이 깊이 천착되고 발전되었지만, 도학적 견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의 실천 문제였다.

유학의 현실 중시 사상은 건전한 인륜성에 기반을 두는 것이며, 이는 개인에서 가정·사회 국가 및 천하로의 연속적 범주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심은 활동하는 주체로서의 개개인의 인격적 자아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도학은 고래(古來)의 유학적 이상인,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하는 수양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 이른바 ‘격·치·성·정(格物·致知·誠意·正心)’은 개인적 수도(修道)의 요체이며, ‘수·제·치·평(修身·齊家·治國·平天下)’은 사회적 행도(行道)의 강령이다. 도학은 이러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본령으로 하여 성립되어 있다.

이이는 이 같은 도학의 이념을 요약해, “격물·치지로 선(善)을 밝히고 성의·정심으로 몸을 닦아, 자기 자신에게는 천덕(天德)이 되고 정사에 베풀어지는 왕도(王道)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른바 진유(眞儒)란 나가서는 그 시대 현실에서 도를 행해 백성들로 하여금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行道), 물러서서는 만세(萬世)에 가르침을 내려주어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垂敎)”이라고도 하였다.

도학의 도통론(道統論)은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요·순(堯舜)으로부터 문·무·주공(周公)까지를 실제로 도를 행해 민중에게 혜택을 입힐 수 있었던 행도의 시절로 보고, 공자와 맹자의 경우는 행도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물러나 학문과 교육으로 후세에 가르침을 베풀어 주었던 수교의 경우로 파악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방식의 차이는 있었으나 ‘행도’와 ‘수교’라는 도학적 인식은 같은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한·당대 이후로는 도학적 표준의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침체한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고 판단한다.

이이는 송대에 이르기까지의 유학적 전통을 도학의 견지에서 매우 상세하게 비평했다. 이를테면, 순경(荀卿)·모장(毛萇)·동중서(董仲舒)·양웅(揚雄)·제갈량(諸葛亮)·왕통(王通)·한유(韓愈) 등 맹자 이후 한·당시대의 인물들은 그 언론과 행동이 세교(世敎)에 도움이 되었지만, 순경과 양웅은 그 이론이 치우치거나 혼잡되어 있고, 또 모장은 뚜렷한 공이 없었으며, 왕통은 식견이 적고 급히 서둘렀다고 낮게 평가했다.

그는 오직 동중서의 정의(正誼), 명도(明道)와 제갈량의 유자기상(儒者氣象)과 한유의 노불 비판이 비교적 탁월하지만, 그들 모두 ‘순유(醇儒)’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동중서는 재이설(災異說)에 흐르고, 제갈량은 신한의 법술(申韓之術)에 가깝고, 한유는 실천의 학문(踐履之學)에 소원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학의 도통 의식은 재래의 유학 전통은 물론, 도불 및 이른바 ‘이단사설’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주희가 여조겸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 近思錄≫에는 ‘변이단(辨異端)’장, 그리고 제자들과 더불어 논의한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노씨(老氏)’나 석씨(‘釋氏)에서 이 점을 잘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선진시대에 맹자가 요·순과 주공·공자를 존숭하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이단으로 비판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인도정신과 의리사상의 발양

공자와 맹자는 각기 춘추와 전국의 혼란기에 살면서 인(仁)에 입각한 인도주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도학파는 이 정신을 이어받아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고 도불을 비판하는 새로운 학문의 체계를 세웠다.

도학은 특히 불교에 대해 ‘비슷하지만 실상은 다른 것(似是而非)’이라고 평가했다. 즉 불교가 인간의 주체적·내면적 세계를 강조하느라 인간의 인륜적 사회관계와 국가 현실의 문제에 대처하고 경륜하는 구체적 적응원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경(敬)’으로써 ‘안[內]’을 곧게 하는(敬以直內) 노력은 있으되, ‘의(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하는(義以方外) 실질은 없다는 것이다.

주희는 ‘안’과 ‘밖’은 본시 뗄 수 없는 것인데 ‘밖’이 없으니 결국 그 ‘안’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도학파가 유학 본래의 정신이라 할 인간의 현실적 문제와 사회 국가에 대한 책임 의식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학파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우선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과 도덕·문화 의식의 고양(高揚)이며,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공공성(公共性)의 기반 위에 자신과 공동체를 성립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일찍이 공자가 그러했듯이 개개인의 인격을 완성시킨 다음, 그렇게 인격적으로 닦여진 ‘군자’들에 의해 정치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렇게 되어야만 사심 없는 정치에 의해 민중이 복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현실은 항상 이상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도학파는 늘 당대의 현실에 대해 첨예한 비판 정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도학파는 대내적으로 인도주의에 입각한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며, 이에 역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항거하며, 대외적으로 외침의 위험이 있을 때에는 국가 민족을 위해 순사하는 충렬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실제로 도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는 금(金)나라에 의해 상실된 북부의 국권 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타국의 권리를 침해함도 잘못이요, 자기 나라의 국권을 침탈 당하는 일도 잘못이라고 보는 까닭에 민족 주체성의 고취와 국권의 수호는 도학파의 중요한 과제였다.

여기서 도학적인 민족관·국가관은 한갓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도학파는 국가 이기주의에 입각한 국수주의나 침략적 제국주의를 동시에 배격하면서 개별자의 자존적 특성을 살리고 전체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평화 공존의 이상을 제시했다.

도학파에서 수용했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화이론(華夷論)은 대국적 중화주의나 자존적 배타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으나, 도학파의 역사 의식은 자주 독립과 상호 존중이라는 춘추학(春秋學)의 기본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학사상과 그 역사적 전개

고려 말 조선 초의 도학사상과 사회적 기능

우리 나라에 유학사상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 이전이었다. 상고(上古)로부터 한·중 관계는 여러 형태로 교류했으며, 전·후한(前後漢)대에 걸쳐 한문자(漢文字)가 전래되면서 유학도 그와 더불어 더욱 활발하게 전래되었다.

일각에서는 유학의 실질적인 유학의 수입 연대를 고구려에 태학(太學)이 건립되던 372년(소수림왕 2)으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유학의 경전을 근본으로 이를 해석, 응용하였고, 삼사(三史)를 통해 중국문화전통을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그러한 전통과 더불어 문장(文章)을 중시하여 사장(詞章)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유학을 더욱 성행시킨 계기가 되었다.

유학은 외래사상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의식·무의식간에 가치관의 바탕을 이루면서 우리 나라 문화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가 ‘주자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유학으로서의 도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인 충렬왕 때 안향(安珦)과 백이정(白頤正) 등에 의해서이다.

종래의 유학이 도불과 병행, 교섭(交涉)해왔던 데 비해 고려 말에 수입된 주자학은 송대 유학자들의 경우처럼 점차 도불을 비판하고 유학을 정통사상으로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성균관이 재정비되면서 이색(李穡)을 비롯해 주자학을 으뜸으로 하는 신진 유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몽주(鄭夢周)와 정도전(鄭道傳)을 들 수 있다.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東方理學之祖)’라 불리었으며, 당시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고려 말의 사회 국가를 지탱하는 중추적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은 도불의 이념과 사회적 병폐를 맹렬히 비판하고 주자학을 이념화해 조선조를 유교 국가화하는 데 앞장섰다.

안향을 비롯한 고려 말의 유학자들은 다같이 주희를 존숭하였다. 그들은 당시에 이르기까지 성행하던 불교에 대해 교단적·이념적 비판을 가했으며, 주자학을 근거로 하여 사회 국가를 개혁하고 국내외적인 문제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안향은 민간의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금지했으며, 정몽주 역시 불교가 인륜을 거부하는 점을 들어 비판하였다.

정몽주는 공양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삼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에서 “유자의 도는 다 일용평상한 도이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이 다 마찬가지이지마는 그 가운데 지극한 이치가 있다.

요·순의 도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동정어묵(動靜語默)이 정상으로 이루어지면 요·순의 도이다. 처음부터 고원(高遠)하고 어려운 행위가 아니다.

저 불씨(佛氏)의 교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을 떠나고 남녀를 끊으며 바위구멍에 홀로 앉아 초의목식(草衣木食)하고 관공적멸(觀空寂滅)로 종지를 삼으니, 어찌 평상한 도라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진리는 음식과 남녀 등의 인간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에서 하나하나의 생활을 바르게 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학을 사회 국가적으로 확충해 성균관·향교 등 학교제도를 확대하고, 불교 및 몽고식의 의식과 풍속 및 생활 전반을 주자학적 방식으로 개혁시켰다.

정도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전환기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일찍부터 불교 비판에 적극적이었다. ≪심기리편 心氣理篇≫·≪불씨잡변 佛氏雜辯≫ 등의 논술과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경제문감 經濟文鑑≫ 등의 저술을 통해 이단을 비판하고 조선조 건국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였다.

권근(權近)의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입학도설 入學圖說≫ 등도 주자학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본격적인 경전 해석과 학술 저술이었다.

한편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국내외적인 현실 인식에 있어서, 고려조를 존속시키면서 개혁을 도모하고자 했던 정몽주로 대표되는 개량수정적 입장과, 고려조의 천명이 다했다고 보고 새 왕조인 조선조의 창업을 주도했던 정도전·조준(趙浚) 등으로 갈라졌다.

전자의 계통을 ‘의리파(義理派)’, 후자의 계통을 ‘사공파(事功派)’라 일컫는다. 사공파는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전면으로 드러나고, 의리파는 고려의 종언과 함께 물러서서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의리파는 정몽주로부터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등으로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조선조 도학의 태두(泰斗)인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을 바탕으로 국가사회를 이끌어 크게 영향을 주고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광조 이후로 사림(士林)의 전통은 도학의 정맥을 의리파에서 찾았고, 이들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조광조(趙光祖)의 도학과 이이·이황(李滉)의 성리사상

주자학은 조선이 유교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는 법전과 헌장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세종은 전대미유의 학술 문화와 정치제도를 꽃피운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고, 세종시대의 황금기는 전대의 문화전통을 배경으로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주자학은 당시에 수입된 ≪사서오경대전 四書五經大全≫과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통해 전국에 널리 퍼져 응용되었던 것이다. 세조·성종조를 거치면서 계속 국정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훈구파(勳舊派)라 불리게 되었고, 세조의 찬탈과 더불어 사육신·생육신 등의 절의파(節義派)가 등장하게 된다.

한편 정몽주 계통의 의리파는 내면적으로 그 학맥을 이루면서 조광조에 이르는 동안 특히 연산조 이래로 무참히 사화를 당했던 사류(士類)들이 중심이 되었으니, 이들을 사림파(士林派)라 일컫는다.

우리 나라의 도학파를 말할 때 비록 정몽주를 ‘이학의 조(理學之祖)’라 하고 그로부터 의리파가 계승되어 왔으나, 조선에서 실질적인 도학의 시발은 조광조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이는 도학이 조광조에게서 시작했으며, 이황에 이르러 ‘유자의 모양(儒者模樣)’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진유(眞儒)로서의 도학자는 한갓 한 나라의 신하인 ‘사직지신(社稷之臣)’에 그치지 않고 ‘천민(天民)’ 또는 그 이상의 ‘대인(大人)’으로서 ‘성현의 도(聖賢之道)’와 ‘제왕의 법(帝王之法)’을 함께 체득한 자에게만 주어졌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탐구의 대상이기는 하나, 도학의 입장에서는 인륜적 가치의식을 기반으로 한 인간학을 중심 개념으로 하는 까닭에, 자연철학적인 ‘기수지학(氣數之學)’에 몰두하였던 서경덕(徐敬德)과 같은 실재론자는 문묘(文廟)에 배향될 수 없었다.

조광조는 중종조에 4년 간의 짧은 기간 출사(出仕)하면서 도학정치를 실시해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사습(士習)과 민풍(民風)을 바로잡아 차원 높은 도의국가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도학을 높이고(崇道學), 인심을 바루며(正人心), 성현을 본받고(法聖賢), 지치를 일으키고자(興至治) 했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格君心), 올바른 언로를 열며(闢義路), 왕도를 펼치고(陳王道), 사리의 근원을 봉쇄함(塞利源)을 자신의 본무로 하였다.

또한 “학자는 반드시 성현을 목표로 하고……임금은 요·순과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정치를 목표로 하여 이같이 뜻을 세우고 격(格)·치(致)·성(誠)·정(正)으로 힘쓰면 차차 성현의 경지와 요순의 다스림에 이르를 것이나, 한갓 고원함에 힘쓰고 실공(實功)을 하지 않으면 날로 부허(浮虛)한 데로 나아갈 것이다.”고 하고, “임금의 학문은 한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실제로 시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여 이념과 실제를 갖춘 도학정신을 누누이 피력했다.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한 신진 사류들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운동은 기성 훈구파와 갈등을 빚었으며, 급기야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새로운 기풍의 도학정치는 좌절되고 사류들은 일시에 참화를 입었다.

당시의 도학파의 도학적 의욕과 정치적 시행은 선후완급(先後緩急)에 치밀하지 못하고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적 이상주의는 이황·이이와 같은 현철(賢哲)로부터 높이 추숭(追崇)되었다.

선조 즉위 초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로 증직되는 등 최고의 영예로 복권되기에 이르렀다.

조광조는 우리 나라에서 도학의 태두로서 숭앙을 받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다. 이이가 <도봉서원기 道峯書院記>와 <정암선생묘지명 靜庵先生墓誌銘>에서 적고 있듯이, 조광조는 학문 저술로서보다는 도학의 실천적 측면에서 순정성(醇正性)을 발휘해 치명수지(致命遂志 :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룸.)한 데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도학에서 학문 저술의 수교적(垂敎的) 측면을 발휘한 사람으로 이황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황은 나이 50에 가깝도록 갑자·기묘·을사 사화 등 어지러운 사화의 시대를 살면서, 나아가 도를 행하기보다는 물러서서 전도수업(傳道授業 : 도와 업을 전수함.)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그는 수많은 종파(宗派)와 교설(敎說) 가운데 무엇이 정학(正學)이며, 본래적 인간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 천명해 그 모범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편으로 조광조를 존숭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학문과 저술을 중히 여겨 이언적(李彦迪)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도 하였다.

이언적은 조한보(曺漢輔)와의 서신을 통한 논쟁에서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라는 논설을 펴서 유가의 본령을 밝히고 도·불을 변척했으며, 유저로서 ≪구인록 求仁錄≫·≪대학속혹문 大學續或問≫·≪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演義≫ 등을 남겼다.

이황은 기대승(奇大升)과 8년에 걸쳐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벌였고, 문인들과의 개별적인 교분을 두텁게 하면서 인정 넘치는 서신왕복을 수없이 계속해 후학을 계도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와 ≪자성록 自省錄≫을 편찬하고, ≪송원명이학통록 宋元明理學通錄≫·≪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 등을 저술하였다.

특히 만년에 제진(製進)한 ≪성학십도 聖學十圖≫와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는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의 요전(要典)으로서 학문을 통해 우도(憂道)·우국(憂國)하는 이황 도학사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위 퇴계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도학에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지닌 철인(哲人)이요 경세가였다.

그는 성혼(成渾)과의 성리문답을 통해 이기(理氣)·사칠[四端七情], 인심·도심의 논의를 전개했고, ≪격몽요결 擊蒙要訣≫·≪학규 學規≫ 등을 지어 안으로는 철학과 기초 교육의 문제를 튼튼히 하였다.

또한 밖으로는 사회·정치적으로 유용한 ≪서원향약 西原鄕約≫·≪해주향약 海州鄕約≫·≪동호문답 東湖問答≫·≪학교모범 學校模範≫의 논저와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비롯한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엄정한 공인으로서 국가경영의 경륜을 폈다.

이렇듯 수기에 기초를 두고 가정·사회·국가로 확대해나가는 방향은 그의 주저라 할 ≪성학집요 聖學輯要≫의 편차(① 統說, ② 修己, ③ 正家, ④ 爲政, ⑤ 聖賢道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위와 같이 도학을 ‘행도’와 ‘수교’라는 차원에서 볼 때 학자들 사이에는 그러한 정신이 근본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나, 조광조는 행도적이고, 이황은 수교적이며, 이이는 행도와 수교를 겸하는 성향을 띠는 점에서 시대 상황과 인물에 따라 개성을 달리하는 도학정신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성리사상도 각기 특이한 점이 있다. 조광조는 도·불과 구별되는 순유(醇儒)로서 도학의 기반 위에서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는 ≪계심잠 戒心箴≫에서 기록한 대로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가 다 내 마음의 운용(運用) 가운데 있다.”고 하고, “마음은 살아 움직이는 것(心是活物)”이라 하여, 인간의 주체적 각성을 바탕으로 일체를 수용해 실천적 행위로 나가는 방향을 형이상학적으로 정초했는데, 그러한 정신이 책문과 계사(啓辭)를 통해 절실히 드러나고 시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황과 이이는 우리 나라 성리학의 쌍벽으로서, 일반적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특징지어진다. 다같이 도학파요 주자학자이지만, 이기설과 사칠론 그리고 인심도심설에서 둘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황의 설은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로 갈라보는 호발론(互發論)에, 그리고 이이의 설은 ‘이통기국(理通氣局)’과 ‘기발이승(氣發理乘)’에 특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은 인간 존재의 해명에서 순수 정신적인 면과 육신의 면을 엄격히 구별하고, 그 둘을 결코 혼동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두 면을 ‘이’와 ‘기’에 분속(分屬)시킨 다음, 다시 같은 방식으로 사단과 칠정, 도심과 인심을 분별해 나갔다.

그러나 이이의 경우는 정신과 육신을 ‘이’와 ‘기’로 나누는 이분적 귀속법에 동의하지 않고, 양면을 포함한 일체의 실질적 존재를 ‘기’로 파악하는 까닭에 ‘기’의 개념이 보다 포괄적이며, ‘이’를 그 존재 근거로 보는 견해이다.

이이는 사단칠정에 대해서도, 칠정이란 사단을 포함하는 전체의 개념이며, 사단도 칠정으로 표현되는 정(情)의 일면으로 보았다. 인심·도심을 포괄적인 ‘기’의 개념에 포함시킨 것도 이같은 발상의 연장에 있다.

이황은 선악이 혼재한 육신의 요소보다는 순수 정신에서 인간 존엄의 근거를 발견하고, 이이는 인간의 다면성을 하나의 마음에서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사고 방식을 지님에 따라 서로 학설의 차이를 보였다.

이에 따라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대해서도 이황은 매우 엄격히 비판한 반면, 이이는 다소 개방적이고 경우에 따라 억양(抑揚)을 달리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는 개성적 차이일 뿐, 이황과 이이의 도학정신을 근본적으로 상위(相違)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리학은 도학의 이론적 탐구라 할 수 있는데 조광조·이황·이이에 이르는 기간을 전후해 수많은 도학파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갑자사화에 희생된 김굉필과 더불어 참시(斬屍)된 정여창(鄭汝昌), 성균관 대사성으로 ≪대학잠 大學箴≫과 ≪성리연원촬요 性理淵源撮要≫를 지은 유숭조(柳崇祖), 그리고 성혼의 아버지인 성수침(成守琛)을 비롯해 이항(李恒)·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송익필(宋翼弼) 등 그 밖에도 성리학에 종사했던 수많은 ‘도학군자’들이 굴기(崛起)해 학문 저술을 남기었다.

도학의 유파(流派): 의리학과 예학 그리고 후기 성리학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파는 연산조 이후 무너진 국정과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 지치중흥(至治中興)을 이루고자 했으나 기묘사화로 인해 중단되었고 말았다.

이황은 인심이 퇴폐한 사화기에 살면서 악의 근원인 ‘인욕(人欲)’의 말폐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연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양심과 도덕성의 회복을 교시했으며, 이이는 개인의 수양과 정치적 실천을 통합하는 일대 경장론을 펴서 사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학파의 이상과 노력은 충분히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발전한 의리학·예학 그리고 실학 등은 그러한 사회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학은 국내적으로는 불의에 대해 항쟁하고, 외침에 대해서는 국가를 수호하는 강력한 의리(義理)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임진·병자 양란을 거치면서 의리학파는 더욱 뚜렷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 수많은 도학자들은 높은 학식을 갖춘 학자요 선비로서 국난 극복의 경륜과 방책을 제시했으며, 난에 임해서는 선비들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헌은 부자가, 그리고 고경명은 삼부자가 함께 순절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나 진주성의 김시민(金時敏)도 모두 도학사상과 의리정신으로 충일한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충렬정신은 병자호란 때에도 의연히 발휘되었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의 의리정신과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등 삼학사(三學士)의 충렬정신은 두드러진 사례라 할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宋時烈)의 북벌론(北伐論)도 복수설치(復讐雪恥)하여 민족적 수치를 씻고자 하는 의리사상의 발로였다.

의리사상은 그 후로도 맥맥히 흘러 조선조 말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른 서양의 충격에 대해서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을 펴 우리의 문화전통과 민족 주체성을 수호하고자 했으며, 일제침탈기에는 거국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창의호국(倡義護國)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항로(李恒老)와 그 문하에서 나온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과 영남의 곽종석(郭鍾錫)은 한말에 있어서 의리사상으로 구국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한편, 예학은 도학의 중요 분야로서 이는 조선조 초기로부터 유교 경전인 ≪의례 儀禮≫와 ≪가례 家禮≫, 그리고 ≪대명률 大明律≫의 정신에 입각해 제정된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와 ≪경국대전≫을 비롯한 여러 법전에 반영되어 있다.

관혼상제 등 의례의 발달은 가족·사회·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결속을 다지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병자 양란 이후로 사회 질서와 윤리 의식이 무너졌던 혼란기에는 예학에 대한 요청이 더욱 절실하였다.

이미 고려 말 조선 초에 정몽주를 위시한 주자학자들에 의해 ≪가례≫의 엄격한 실천이 강조되었고, 권근의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과 같은 저술이 나왔다. 이 처럼 예학은 오랜 전통과 내원(來遠)이 있지만 조선조에서 예학이 본격적으로 성립되는 것은 역시 임진·병자 양란을 겪었던 17세기 초반부터라 할 수 있다.

예학은 거의 모든 성리학자들에게 필수적이었다. 그 가운데 조선조 예학의 대종(大宗)으로 일컬어지는 김장생(金長生)은 이이와 송익필의 제자로 ≪가례집람 家禮輯覽≫·≪의례문해 儀禮問解≫·≪상례비요 喪禮備要≫ 등 수많은 예서(禮書)를 저술했으며, 그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金集)과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에게 전수되었다.

이황의 계통인 정구(鄭逑)는 ≪오선생예설 五先生禮說≫·≪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 家禮集覽補註≫·≪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 등을 지어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 밖에도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정치적 판세에 따라 심각한 예송(禮訟)을 빚기도 했지만,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실학의 대가의 예론을 포함해 예학은 조선조 도학의 학맥을 잇는 중요한 학파로서 조선조 예교 문화의 기저를 이루었다.

끝으로 도학파의 이론철학적 발전으로서 조선후기 성리학을 지적할 수 있다. 이황·이이 시대를 지나 유학은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동서분당(東西分黨)과 직접 관계는 없지만, 동인 계열은 영남학파로서 이황을, 그리고 서인 계열은 기호학파로서 이이를 존숭하였다. 후일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그것들은 또다시 분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파는 당쟁이나 정쟁과 관련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그러한 명칭 모두가 순수 학술적 특성을 나타내는 학파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학술 문화의 바탕을 주자학으로 하고 학문을 지극히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는 한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수많은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찬, 탐구했으며, 학문적 논쟁과 논문 저술을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영남학파는 이황의 문제자인 김성일(金誠一)과 유성룡(柳誠龍)의 계통으로 이른바 호론(虎論)과 병론(屛論)을 제시했고, 그 주요한 학자로서 정경세(鄭經世)·이현일(李玄逸)·장현광(張顯光)·정구·허목(許穆)·이상정(李象靖) 등 이외에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기호학파로는 김장생·김집·송시열이 그 적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송시열의 제자로서 권상하(權尙夏)와 김창협(金昌協)을 꼽을 수 있다. 그 밖에 조성기(趙聖期)와 임영(林泳)이 유명하다.

기호학파 가운데 송시열의 제자이며 권상하의 문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벌어진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미발심체론(未發心體論)’의 문제를 발단으로 하였다. 윤봉구(尹鳳九)·이현익(李顯益) 등은 호론(湖論)으로, 김창흡(金昌翕)·이재(李縡)·어유봉(魚有鳳) 등은 낙론(洛論)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임성주(任聖周)·오희상(吳熙常)·홍직필(洪直弼)·이항로, 그리고 기정진(奇正鎭) 등 조선의 도학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끈기 있는 철학적 사색의 전통을 유지해나갔다.

조선 후기의 사상계는 때로 학파나 사승관계(師承關係)를 벗어나 학문적으로 이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혹은 양 학설을 절충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는 등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호남의 전우(田愚)와 영남의 곽종석은 조선조 성리학의 말미를 장식한 학자로 꼽히고 있다.

도학이 고려 말에 우리 나라에 전래한 이래 조선조에 걸쳐서 600여 년 동안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고려 말 조선 초는 불교에서 유교에로의 사상적·사회적 전환과 더불어 국가적 규모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열었다.

초기에는 사공파 및 훈구파가 기능하였으며, 중종·선조 시대부터는 의리파 또는 사림파가 다시 전면에 나와서 국가적으로 지도적 책무를 담당하였다.

학문은 도학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시대에 따라 성리학·의리학·예학 등이 연관 관계를 가지면서 중점을 달리해 발달하였다.

도학은 철학을 근본으로 한 학술 문화의 발달과 도의 문화의 형성, 그리고 민족 국가의 수호라는 기본 동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임진·병자 양란을 전후로 전개된 실학의 발단은 역시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이라는 도학적 이상에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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