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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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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신문사.
연원 및 변천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으며, 당시 임원진은 사장 박영효(朴泳孝), 편집감독 유근(柳瑾)·양기탁(梁起鐸), 주간 장덕수(張德秀), 발행인 겸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 등이었다. 1920년 7월 제2대 사장에 취임한 김성수(金性洙)는 신문사의 재정적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지방 유지를 찾아나서 주식 인수에 협찬을 얻었고, 이듬해 9월 14일 신문사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로 정식 발족시키고 사장직을 송진우(宋鎭禹)에게 넘겼다.

1924년 5월 제4대 사장에 이승훈(李昇薰)이 취임하여 약 반년간 재임하였고, 10월에는 김성수가 재취임하였다. 1926년 12월 광화문 사옥이 준공되었으며, 1927년 10월송진우가 사장에 재취임하여 그 뒤 10년간 신문사를 이끌었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 되었으며, 이듬해 5월 제7대 사장에 백관수(白寬洙)가 취임하고 6월 속간되었으나, 1940년 8월 10일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당했다. 그간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4회, 판매금지 63회, 압수 489회, 삭제 2,423회 등의 언론통제를 당하였다.

『동아일보』는 지면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자체사업을 통해서 많은 공헌을 남겼다. 창간 벽두 첫 사업으로 단군영정(檀君影幀)을 공모한 것을 비롯하여 물산장려운동, 일제의 언론·집회탄압 규탄운동, 민립대학운동 등 국내의 대중적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재외동포 위문모금운동,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의 고국방문비행(1922), 전국여자정구대회(1923)·전국학생웅변대회(1924)·신춘문예공모(1925)·전국학생수영경기대회·전국학생미술작품전람회(1929), 「조선의 노래」 제정과 충무공 이순신 유적보존운동 및 브나로드운동(1931), 한글철자법채택과 『신철자법편람』 반포(1933) 등 민족정신과 근대문화의 계몽에 중점을 둔 사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의 자매지로서 1931년 11월 월간종합지 『신동아』를, 1933년 1월 월간여성지 『신가정』을 각각 창간하였다. 그러나 이 두 잡지는 1936년 8월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 처분됨에 따라 함께 휴간되어 회생하지 못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일 중간되었는데, 중간사(重刊辭)에서는 창간 당시의 사시인 민족주의·민주주의·문화주의를 재천명하였다. 당시 임원진은 사장 송진우, 주간 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고재욱(高在旭) 등이었다.

광복 직후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공민주입국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고, 1945년 12월 30일 사장 송진우가 피살되어 1946년 1월김성수가 제9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7월에는 주식회사 동아일보사로 재발족하게 되었으며, 1947년 2월에는 사장 최두선(崔斗善), 주필 고재욱, 전무 국태일(鞠泰一) 등으로 새로운 진용을 갖추었다.

5·10총선거를 이틀 앞둔 1948년 5월 8일, 공산주의자의 방화로 서울 공인사(公印社)에 자리잡고 있던 편집국과 공장 일부가 불에 탔다. 1950년 6·25전쟁과 1951년 1·4후퇴로 발행을 중지하기도 하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속간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8월 서울로 복귀하여, 1940년 8월 폐간 이후 처음으로 광화문 세종로의 옛 사옥에 자리잡았다. 1963년 7월최두선 사장이 물러나고 이희승(李熙昇)이 뒤를 이었고, 2년 뒤에는 40여 년간 몸담아 온 고재욱이 제1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당시의 간부진용은 부사장 겸 전무 김상만(金相万), 상무 겸 총무국장 김두일(金斗溢), 상무 겸 공무국장 이언진(李彦鎭), 상무 겸 방송국장 김상기(金相琪), 주필 천관우(千寬宇), 편집국장 변영권(邊永權) 등이었다.

1964년 6월「앵무새」 프로그램 사건을 비롯하여 간부사원 피습사건, 편집국 피습사건, 1968년 12월『신동아』 필화사건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1966년 11월에는 주월특파원 백광남(白光男)이 월남에서 순직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1971년 2월 제13대 사장 김상만이 취임하였고, 이듬해 10월 여의도 별관사옥이 준공되었다. 1974년 12월 하순부터 ‘광고해약사태’라는 한국신문사상 초유의 광고탄압을 당하였고, 소위 ‘언론자유 수호운동’과 ‘언론자유 실천운동’이 계속되면서 134명의 기자가 해직되기도 하였다. 1977년 2월 제14대 사장에 이동욱(李東旭)이 취임하였고, 이듬해 10월 주간지 『스포츠동아』가 창간되었다.

1980년 11월 자매방송국인 동아방송이 한국방송공사(KBS)로 흡수·통합되어 폐국되었다. 1981년 2월 김상만을 명예회장, 이동욱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제15대 사장에 김상기가 취임하였다. 1983년 2월 제16대 사장에 오재경(吳在璟), 1985년 2월 제17대 사장에 김성열(金聖悅)이 취임하였다.

1981년 10월 동아문화센터를 발족하여 문화·예술·레저 등의 종합교양교육을 시도하였다. 1984년 4월 1일 『음악동아』, 같은 해 5월 1일 월간 『멋』, 1986년 1월 『과학동아』를 창간하였으며, 1989년 3월 25일 제18대 사장에 김병관이 취임하였다.

1993년 4월 1일부터는 석간제를 조간제로 바꾸었고, 1994년 4월 1일 이후 전 지면을 CTS로 제작하고 있다. 1995년 9월 주간 『News+(현재 주간동아)』, 10월 월간 『Let’s』를 창간하였고, 1996년 6월 3일 제20대 사장에 오명이 취임하였다.

현황

2009년 현재 해외에 도쿄(東京)를 비롯한 총 5개 지사와 런던을 비롯한 총 16개의 지국을 두고 있다. 자매지로는 『소년동아일보』(1964년 7월), 주간지 『주간동아』(1995년 9월), 월간지 『신동아(新東亞)』(1964년 9월 복간)·『여성동아』(『신가정』을 1967년 11월에 개제)·『과학동아』(1986년 1월) 등이 있으며, 1967년부터 해마다 『동아연감』을 발행하고 있다. 또한, 1968년 설립된 부설 안보통일문제조사연구소에서는 『중공의 어제와 오늘』·『80년대의 4강과 한반도』·『분단 후의 대화』·『제3세계』 등을 발간하였다.

현재 주관하고 있는 연례 주요 행사로는 전국여자정구대회, 신춘문예작품공모, 전국남녀학생수상경기, 동아마라톤, 황금사자기고교야구대회, 바둑국수전, 동아음악콩쿠르, 동아무용콩쿠르, 국제사진살롱, 4·19기념전국일주사이클, 국제판화비엔날레, 동아미술대전 등이 있다. 또한, 1968년부터 국제학술세미나가, 1971년부터 3·1운동 유적지기념비 건립이 비정기적으로 추진 중에 있다.

2011년 4월 채널A를 설립, 같은 해 12월 개국하였다.

참고문헌

『2009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언론재단, 2009)
『동아일보사사』1∼6(동아일보사, 1975∼2005)
『1998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언론연구원, 1998)
『1998동아연감』(동아일보사, 1998)
『한국신문백년지』(윤임술 편, 한국언론연구원, 1983)
『한국언론사연구』(정진석, 일조각, 1983)
『한국신문사연구』(이해창, 성문각, 1971)
『한국신문사』(최준, 일조각, 1965)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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