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哈爾濱]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일제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 안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집필 계획은 ① 서(序) ② 전감(前鑑) ③ 현상 ④ 복선(伏線) ⑤ 문답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논책 완성에는 약 1개월이 소요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는 공소권을 청구해 그 기간에 집필을 마치려 하였다.
이를 안 일제 고등법원장이 논책이 완성될 때까지 수개월이라도 사형집행 일자를 연기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안중근이 ① 서 ② 전감을 쓴 직후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해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집필된 부분의 내용으로 볼 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파악할 수 있다.
안중근에 의하면 그의 시대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시대이다. 동서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각국이 서로 경쟁하고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면서 침략을 일삼는 것은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이다.
동양은 서양의 침략을 받기 이전에는 학문과 덕치를 중시하고 자기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서양을 침략할 사상은 없었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의명분으로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당시는 서세동점시대였으므로, 이것은 대의를 얻은 것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일본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과 청국 양국 국민이 일본의 선전 명분을 믿고 일본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은 한국과 청국을 전쟁마당으로 했기 때문에 이 요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한·청 양국 국민은 옛 원한을 접어두고 일본군에게 운수·도로·철도건설·정탐 등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이 선전포고문에서 ‘동양평화’유지와 ‘한국독립’ 공고화를 약속했으므로 그 대의가 청천백일 같이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로 ‘동양평화’ 유지와 ‘한국독립’ 공고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한국의 국권을 빼앗아서 한국 국민과 원수가 되었다. 이에 한국 국민들은 일본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군대를 파견해 이미 수만의 의병과 수백의 의병장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은 국권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결사적으로 일본과 싸웠다. 청국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다음에는 만주와 중국 관내를 차례로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해 경계와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만주와 청국에 야욕을 가졌기 때문에 동양평화가 깨지게 된 것이다. 이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 독립한 한국·청국·일본의 동양3국이 일심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동양3국이 서로 화합해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그의 국권회복운동 전략인 독립전쟁전략 배후 근저에 있던, 동양과 세계의 평화론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