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역사적 변환기이자 시련기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한국 문학비평은 누적된 과거의 유산과 새로운 논리 지향의 요구 사이에서 극히 어려운 모색의 과제에 당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19세기까지의 전통적 유산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서구의 문학과 비평에 강한 관심을 두는 조류가 팽창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적 논리의 기반 위에 서거나 서구 문학비평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을 비판하면서, 당대의 상황에 부응하는 문학의 논리를 추구한 노력도 있었다.
20세기 초기 이후의 문학비평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갈등과 더불어 문학의 사회적·이념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에 관한 여러 전망들을 어떻게 온당한 균형과 전망 위에서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20세기의 한국 문학비평은 보통 개화기라 불리는 계몽적 이념의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에 나타난 신소설, 역사·전기물, 그리고 풍자적 단편의 작가들과 논평자들은 당대의 상황적 요구와 관련하여 문학의 기능과 효용을 파악하였다.
이해조(李海朝)의 「화의혈 花之血」의 서문, 량치차오(梁啓超) 원작인 「서사건국지 瑞士建國誌」의 서문, 이상협(李相協)의 「재봉춘 再逢春」의 서문,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1908.11.18.) 등 이 무렵의 대표적 문학론은 문학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효용성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문학, 특히 소설은 가장 가깝고도 구체적인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깨우치는 데 다른 무엇보다 큰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인심을 맑게 하고 풍속을 개량하며, 나아가서는 사회적·정치적 자각을 전파하는 현실적 효용을 가진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이러한 논리는 문학의 공용성을 중시한 유가적 관점의 바탕 위에 사회적 격변기의 요구가 결합된 결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론은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따른 이념성의 억압이라는 외적 요인과 주정주의적 문학론의 등장이라는 내적 요인에 의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비평가인 이광수(李光洙)는 인간의 정신이 지(知)·정(情)·의(意)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은 이 중에서 정의 요구를 표현, 충족하는 기능을 맡는다는 주정주의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전통적인 유교 문학에 대하여 격렬한 거부의 논조를 보인 당시의 이광수는 19세기까지의 문학과 문학론이 인간의 이지(理智)만을 존중하고 정을 낮게 봄으로써 잘못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유교적 도덕주의에 대한 반명제로서 일종의 감정주의·반도덕주의를 지향한다.
이에 따라 개화기의 문학론이 지닌 도덕적·사회적 효용주의의 논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은 퇴색하고, 대신 문학의 심미적 가치와 정서적 감응 및 개성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몇 편의 문학론을 쓴 신채호(申采浩)는 이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문학의 교육적·사회적 가치를 중시하고, 당대의 문학이 현실도피적 환각의 유희에 기울어지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그는 예술주의의 문예이든 인도주의의 문예이든 그 시대의 현실이 안고 있는 절실한 문제로부터 유리되어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리는 유가적 문학론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종래의 단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 예컨대 민중의 생활, 조선의 현실 등을 도입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성격과 기능을 중시하는 비평으로 진전을 거둔 것이었다.
이렇듯이, 서로 다른 지향은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 문학관과 프로비평 사이의 갈등으로 계속되었다. 1910년대 이광수의 문학론에서 예비단계를 거친 주정주의적 문학관은 1920년대 초기의 문학운동을 거치면서 박영희(朴英熙)·황석우(黃錫禹)·김억(金億)·박종화(朴鍾和) 등에 의하여 낭만주의적·유미주의적 문학론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엽에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경향파, 즉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계열의 비평가들은 문학의 사회적 의의와 투쟁적 기능을 제창하였다.
초기는 김기진(金基鎭)·박영희에 의하여, 1920년대 말 이후는 임화(林和) 등에 의하여 주도된 이들 카프계열의 비평가들은 이전의 문학과 문학론을 자본주의적 사치와 허위의식의 소산이라 비판하고,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기여하는 문학의 의의를 역설하였다.
한편, 이에 대응한 이광수·염상섭(廉想涉)·김억 등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 또는 계급에 우선하는 민족의 일체성을 논거로 하여 이에 대응하는 논리를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현대비평은 문학의 본질과 기능 및 평가 기준에 관한 이론적·실제적 쟁론과 심화의 계기를 얻었다.
그러나 당대의 비평 자체는 연역적 논리의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여, 대립의 양면에서 모두 구체성이 부족한 도식주의나 인상주의에 빠진 예가 많았다. 김기진의 평론 「문예시평 文藝時評」을 도화선으로 하여 일어난 ‘내용·형식 논쟁’은 이 시기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적 쟁점을 보여 준다.
이 논쟁에서 김기진은 문학이 관념(투쟁의식)만으로 성립할 수 없고, 마땅히 내용에 상응하는 예술적 육체를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 박영희는 일정한 과도기에서는 내용과 의식이 형식상의 고려에서 독립하여 선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상황적 요인에 의하여 후자의 정당성이 카프 안에서 공식화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으나, 그 기본적 숙제만은 해결되지 않은 채 1930년대의 창작방법론 논쟁,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1930년대 초기의 이른바 ‘외부정세의 악화’와 함께 프로비평의 흐름은 일단 활기를 잃었는데, 이 무렵 박용철(朴龍喆)과 김환태(金煥泰) 등의 비평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비평적 관점은 멀리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유미적 문학론의 흐름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면서, 1920년대 중엽 이래의 프로비평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문학이 다른 어떠한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자립적 예술품이며, 따라서 외재적 기준을 통하여 문학을 이해하고 평가함은 비평의 마땅한 길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 대신 이들은 시인·작가의 개성, 창조의 신비, 그리고 세련된 언어와 감각적 경험의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은 심미주의적 비평의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특히 김환태)은 문학의 예술적 신비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감상의 소중함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기울어졌고, 가치 평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프로비평의 교조적 객관주의에 대조되는 주관주의로 치우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들보다 조금 늦게 등장하여 1930년대 중엽 이후 중요한 활동을 보인 김기림(金起林)과 최재서(崔載瑞)는 현대영미비평의 경향을 소개, 원용하면서 김환태류의 주관주의적 경향과 프로비평의 도식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최재서는 비평의 가치 기준을 중시하여, 문학에 있어서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윤리적 가치를 통합하는 비평이론의 구성을 모색하였다.
김기림은 시인이자 시론가로 활동하면서 이론 비평보다는 시에 관한 실제 비평 작업에 치중하였다. 193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도 프로문학의 기본 입장을 유지하고 있던 임화와 김남천(金南天)은 1930년대 중엽에 와서 예전의 과격한 관념성을 지양한 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나 임화의 낭만주의·리얼리즘론·신문학사연구 등과 김남천의 장편소설론이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그들은 프로비평이 늘 동반하고는 하였던 도식적 교조주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특히, 소설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이 최재서 등과 함께 집중적으로 탐구한 리얼리즘의 문제는 이 시기의 중심적인 주제로 주목된다. 1945년 이후 남북분단까지의 현실 상황은 문학비평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양분법 속에 편입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비평은 과거의 성과를 정리하여 출간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념의 선택과 지향을 둘러싼 선언서적 논쟁에 지배되었다. 남북분단이 고정화되고 6·25를 겪은 뒤 정치적·사회적 제약과 비평가들의 분리로 인하여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문학비평의 주요 문제에 관한 논리의 대립과 상호 심화 및 지양의 기회는 희박하여졌다. 이에 따라 1950년대는 작품론에 있어서의 일부 성과를 제외하고는 비평에 있어서 뚜렷한 진전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1960년대의 비평은 이에 비하여 다소 활기를 띠었고, 내용 또한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영미 신비평이 소개되고 형식주의적 문학론이 시도되는 한편, 1960년대 초의 사회적·정치적 격변의 체험을 계기로 문학의 사회적 의의와 기능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커지면서 순수·참여논쟁을 통하여 비평적 쟁점이 날카롭게 부각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또한, 1960년대 말에는 서구적인 문학사조와 이론에 대한 일방적 편향에 대한 회의적 관점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전통의 계승과 단절 문제를 둘러싼 문화사적 논의가 계속되면서 문학비평의 주체적 근거와 의미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의 비평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비평적 전제와 이론구조의 차이를 좀더 첨예하게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문학의 역사성과 현실적 의미와 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문학의 자율성과 내면적·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논리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이와 같은 양분법적 구도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여러 경향들까지 공존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 집권한 신군부(新軍部)에 의해 1970년대의 유신체제(維新體制)보다 더 가혹한 정치적 억압이 행해지고, 『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 같은 주도적 계간지가 폐간되는 등 비평적 기반의 황폐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신진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비평 조류의 일부에서는 급격한 좌편향(左偏向)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문학은 진보적 당파성에 입각하여 당면한 계급적 모순의 타파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명제가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나타난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하고, 국내적으로는 군사정권의 타협적 문민화(文民化)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급진적 흐름은 퇴조했다.
그 뒤를 이어 관심을 끌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는 기존의 비평적 주제와 스타일로부터 탈출 내지 해체를 모색했으나, 새로운 감성 및 화법에 대한 열망에 비해 그 내용적 실질과 논리구조는 아직 불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는 비평적 주류가 불분명한 동시에 문학적 담론의 터전 자체가 극히 분산적인 관심의 파편으로 분화된 모색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 비평이 지닌 과제는 이러한 상황을 생산적 토론에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문학의 내면적·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통합하는 한편, 서구 비평에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것을 지양하여 한국 문학의 체험과 과제에 바탕을 둔 비평이론 및 실천을 확립하는 데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