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주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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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개념
작업장과 생산도구를 가지고 있는 소상품생산자들에게 물주가 원료 또는 생산도구를 선대하여 생산활동을 하게 하는 사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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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작업장과 생산도구를 가지고 있는 소상품생산자들에게 물주가 원료 또는 생산도구를 선대하여 생산활동을 하게 하는 사회제도.
내용

생산지배형 물주제와 생산비지배형 물주제라는 두 가지 유형의 역사적 범주가 있다. 앞의 것은 물주가 생산도구를 소유하거나 때로는 작업장을 건설하여 소유하고, 덕대(德大:광주와 계약을 맺고 그 광산의 일부를 맡아 채광하는 사람) 또는 장인(匠人)을 노동자로 고용하여 생산활동을 벌이는 제도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물주가 생산과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한편, 덕대는 더 이상 상품을 팔지 못하고 노동 이외에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것은 바로 상인물주가 자본가로 되는 길을 뜻한다.

반면, 뒤의 것은 물주가 덕대 혹은 장인에게 원료와 임금을 선대하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생산활동을 영위하게 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덕대경영의 주체는 덕대이며, 상인물주는 단지 생산물의 유통경로만을 장악한다.

이 경우 덕대가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으며, 덕대가 자본가로 변하는 첫길이다.

한편, 생산비지배형 물주제 중에는 상품의 유통과정을 장악하지 않고 단순히 원료 및 임금(식량 및 짚신·담배·옷 등), 또는 자금을 선대하여 고리대적 착취에 머무르는 유형도 있다.

우리 나라에 물주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7,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물주제라는 새로운 경영방식이 확대된 이유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첫째, 조선 후기의 전반적인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유통의 확대에 따라 사상(私商)이 급성장하여 일정한 자본을 수중에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상인 상호간의 경쟁이 심화되어 차차 유통과정에서의 주기적 이윤이 감소되자, 상인들은 관심을 생산부문으로 돌려 농업·수공업·광업 등에 진출하여 직접생산자를 자신의 자본 밑으로 예속시켜 나갔다.

둘째,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농업·수공업의 상품화가 전개되고, 특히 수공업분야에서 소상품생산양식이 발전되었다.

셋째, 한편으로는 봉건적 재정위기로 가속화되는 농민수탈,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광작의 확대로 인하여 농촌부문에서 수많은 영세빈농과 이농민이 배출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만 생계를 의존해야 하였으므로, 상업자본과 결합하거나 농촌이나 수공업장 및 광산에 사공(私工)·고공(雇工) 및 연군(鉛軍) 형태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광범위한 노동력의 존재는 물주제와 같은 새로운 경영방식을 활성화시키는 주요 기반이 되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봉건경제질서의 와해와 관련해, 우선 수공업분야에서 새로운 경제질서가 편성된다.

이 시기의 수공업의 특징은 관청수공업이 쇠퇴하는 반면, 민간수공업이 급성장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관청수공업은 그 존립기반이었던 무역제도·공물제도와 더불어 쇠퇴하였고, 반면 민간수공업은 처음부터 민중의 수요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품생산의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띠었다.

한편, 상인들은 유통과정에서 얻어지는 이윤보다도 상품의 매입가격을 떨어뜨려서 얻어지는 이윤을 획득하고자 하였으므로, 그들은 차차 수공업자를 경제적으로 예속시켜 다만 공전(工錢)만 받는 처지로 만들어가는 반면, 자신은 물주로서 수공업을 지배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 광업부문에서도 시장에서 축적된 상인자본은 봉건제도와 모순을 야기시키면서 새로운 경제질서를 구축시켜 간다.

이전까지는 별장제(別將制) 아래서 노동자에게 생활자료를 대여해 주고 그 대가로 금·은을 수취해 가는 상인고리대적·소극적 방식으로 광산에 침투하였던 상업자본은 그뒤 물주로서 광산경영을 직접 지배하게 된 것이다.

유통과정에서 이윤을 축적한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은 더 나아가 믿을만한 사람을 덕대로 고용하여 생산과정을 관장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자본을 생산자본으로 전화시키고 있었다.

덕대는 자본주인 물주로부터 조달받은 자금으로 농민층 분화과정에서 대량으로 창출된 이농민을 고용하여 자기 책임 아래 생산조직을 관리, 운영하였다. 이 경우 물주-덕대-연군의 관계는 경제외적 강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경제적 고용관계의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물주제에 의한 광업경영은 비합법적인 잠채(潛埰)에서 발생하였으나, 1775년(영조 51)의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의 성립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보편화되었다.

우리 나라의 물주제는 공장제 수공업과 함께 광범하게 발전하고 있었으며, 특히 사금광업 분야에서 급성장하고 있었다. 이를 토착적 자본가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이 시기는 개항을 계기로 식민지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그리하여 특히 사금광업 분야에는 외국자본 물주제가 성립하였는데, 반식민지화의 초기 상태에는 생산비지배형인 청상물주제(淸商物主制)가 등장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식민지 과정이 진행되고 외국자본, 특히 일본자본이 침투하면서 생산지배형인 일상물주제(日商物主制)가 광범위하게 성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부터 일본자본가는 광주(鑛主)로 등장하여 광업유통경로뿐 아니라 생산과정까지 완전히 지배하는 생산지배형 물주제로 진행하였다.

한편, 개항기에 생산지배형 물주제와 생산비지배형 물주제 중 어느 것이 지배적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서양 광업사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경우도 생산지배형 물주제로부터 생산비지배형 물주제로의 이행이 일반 수공업과 구별되는 특징일 것이라는 시사를 받을 뿐이다.

또한,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반식민지상태에서 물주가 예속자본인지의 여부도 명확히 해명되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예속자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덕대제

참고문헌

『이조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송찬식, 한국문화연구소, 1973)
「조선후기 광업경영의 발전-금·은광업을 중심으로-」(임병훈, 『한국사연구』 32, 1981)
「조선후기 금·은·동광업의 물주제연구」(유승주, 『한국사연구』 36, 1982)
「한말 금수출과 금광업 덕대경영에 관한 연구」(박찬일, 성균관대학교박사학위론논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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