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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대표적인 오락 프로그램으로서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는 허구물인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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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방송의 대표적인 오락 프로그램으로서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는 허구물인 드라마.
내용

드라마의 구성요소는 동작·대사 및 줄거리이며, 일반적으로 인간의 갈등관계, 즉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는 형식이나 표현수법,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시대에 따라 구분하면 사극·시대극·현대극 등으로, 드라마의 길이에 따라서는 단막극·연속극·대하드라마·미니시리즈 등이다.

또한 대상과 소재에 따르면 청소년드라마·전쟁드라마·농촌드라마·수사드라마·홈드라마·무협드라마·괴기드라마·정치드라마·멜로드라마·경제드라마 등으로 분류할 수 있고, 심지어 수법에 따라 심리드라마·사이코드라마·테마드라마·인간드라마 등으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이러한 드라마(특히 TV 드라마)는 흔히 ‘방송의 꽃’으로 불리면서 방송국들이나 시청자들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다른 어떤 유형의 프로그램보다도 재미를 줄 수 있고, 따라서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그리 큰 노력을 요구하지 않고도 다른 어떤 형태의 예술양식에 못지않는 예술적 감수성과 오락적 재미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비춰진다.

문학의 창조적 기능과 영화의 영상적 기능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펼쳐지는 우리 삶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른바 강력한 ‘자기동일시(identification)’와 ‘정화감(catharsis)’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1) 광복 이전

최초의 방송극은 1925년 체신국 시험방송 당시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에 의하여 이루어진 연극대사 낭독식의 방송극을 들 수 있다. 1926년 6월에는 라디오극연구회가 조직되어 시험방송 때부터 방송극을 방송하였다.

1927년 2월 경성방송국(JODK)이 개국한 뒤 5월 23일에 입센의 <인형의 집>이 방송된 것을 비롯하여 <현해탄>·<은행수 銀杏樹>·<춘향전>·<여성 女性>·<베니스의 상인>·<기야 其夜>·<유모레스크>·<복면의 의사> 등이 계속하여 활발하게 방송되었다.

또한 어린이 방송극도 자주 발표되었는데, 1927년 12월에는 <콩이 삶아질 때까지>가 방송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시체제로 들어간 방송 프로그램도 음악·연예 프로그램 대신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군가나 강연 프로그램이 주로 방영됨으로써 방송극은 사라지게 되었다.

(2) 라디오 방송극시대(1945∼1960)

광복 이후 나타난 최초의 방송극은 1946년 4월 미군정청 공보과로 중앙방송국이 이관된 뒤 방송된 홍은표(洪銀杓) 극본, 윤준섭(尹駿燮) 연출의 <화랑관창 花郎官昌>이었다.

또한 한 주일의 뉴스나 사회·교양 프로그램을 극화하여 방송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뉴스 리뷰’·‘군정청시간’·‘노동자의 시간’ 등이 있었다. 어린이 연속극으로는 <똘똘이의 모험>이 있었는데, 1946년 10월경부터 약 3년간 계속되었다.

1947년 8월 기본 방송순서가 대폭 개편되면서 방송의 개화기를 맞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대표적인 방송극으로는 윤백남(尹白南)이 각색한 <임꺽정 林巨正>이 있었다.

1948년 3월에는 방송희극 극본을 현상모집하였는데, 김희창(金熙昌)의 <꿈의 공덕>을 비롯한 여러 편이 당선되어 그 해 전반기에 주 1회씩 모두 방송되었다.

광복 직후에는 교양 및 보도 부문에 주력했던 탓으로 방송극은 비교적 부진한 형편이었다. 1949년 4월부터는 연속방송극으로 박종화(朴鍾和)의 <다정불심 多情佛心>이 각색, 방송되었다.

본격적인 라디오 방송극의 시대는 6·25전쟁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1956년 12월 2일부터 시작한 일요연속극인 조남사(趙南史)의 <청실홍실>이 크게 히트하면서 연속방송극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 전기 사정이 호전되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오락을 요구하던 사회분위기와 방송극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매주 일요일 밤 그 시간에 최요안(崔要安)의 <느티나무 있는 언덕>, 주태익(朱泰益)의 <개나리꽃짐에 봄비 온다> 등 많은 방송극이 발표되었다.

1957년 가을부터는 일일연속극이 기획되어 첫번째 작품으로 조남사의 <산너머 바다건너>가 방송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라디오극장’이라고 하여 많은 연속극을 계속 방송하였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임희재(任熙宰)의 <애정산맥>, 이서구(李瑞求)의 <장희빈>, 한운사(韓雲史)의 <어느 하늘 아래서> 등이 있다.

한편, 이러한 일일연속극이 주로 흥미 위주의 것이었다면 이에 비해 ‘KBS 무대’를 통해서 발표된 단막극은 훨씬 사실성이 있고 문학성이 풍부한 순수극 형태를 갖추었다.

그 시간에 발표된 대표 작품을 보면 김희창의 <깊은 산속에서는>, 김영수(金永壽)의 <눈오는 밤>, 조남사의 <낙엽> 등을 들 수 있다.

1957년 12월 10일 남산연주소(南山演奏所)의 개소(開所)를 계기로 프로그램이 대형화하는 경향을 보여 1시간짜리 대형 연속극이 제작, 방송되기도 하였다. 김희창의 <코리안 파이프>, 최요안의 <도라지고개의 전설>, 임희재의 <산아금지 産兒禁止> 등이 그것이다.

1959년 11월 6일부터는 기독교방송국(CBS)에서 최초의 실화극인 주태익의 <이것이 인생이다>를 금요방송극으로 방송하였다.

1959년 12월에 실시된 방송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연속방송극을 듣는 사람이 전체의 21%를 차지하여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는 단연 우세함을 보이고 있어,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오락매체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방송극은 큰 변동 없이 제작, 방송되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4·19혁명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위령제방송극이 발표되었는데, 4월 29일에 방송된 특집방송극 김영수의 <나는 보았다>가 그것이다.

1960년 5월 31일에는 최초의 연속사극인 김희창의 <당쟁비화 黨爭祕話>를 방송하였다. 이 당시 대표적인 방송극으로 1960년 8월 7일부터 약 6개월간 방송된 한운사 작 문수경(文秀京) 연출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그 당시 커다란 인기와 화제를 낳았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혁명완수를 주제로 한 문예물 현상공모를 통한 방송극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민간방송시대가 열림에 따라 방송극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각 민영방송국은 개국 초창기부터 방송극에 큰 비중을 두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화방송국(MBC)은 당시 서울에서 최초로 등장한 상업방송으로 처음부터 연예와 오락 부문에 주력하였다. 개국기념 방송극으로 한운사의 <하늘과 땅 사이에>를 방송한 이래 연속방송극을 비롯, 각 요일마다 색다른 형식의 방송극을 시도하였다. 또 입체 낭독·모험극·가정극 등도 방송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1964년의 <전설따라 삼천리>가 있었다.

동아방송국(DBS)은 그때까지 애정극 위주의 방송극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기획을 시도했는데, 특히 ‘실화극장’이나 ‘사건세계사’와 같은 다큐멘터리형식의 방송극을 발표하였다. 동양방송국(TBC)도 개국 전에 방송문예작품을 공모하는 등 방송극에 주력했는데, 특히 애정극을 많이 방송하였다.

1963년도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행복을 획득하는 불굴의 인간상을 그린 방송극이 유행했는데, 중앙방송의 <양지를 찾아서>, 문화방송의 <절망은 없다>, 동아방송의 <이 사람을>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각 방송국에서 방송극이 고정된 시간대를 갖게 되었는데, 특히 동양방송에서 20분대의 애정극(멜로드라마)을 편성하고 방송극의 선주(先走)를 꾀하였다.

이에 따라 각 민간방송간의 치열한 방송극 경쟁이 일어나서 멜로드라마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 당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남사의 <언덕 위의 하얀집>, 이재우(李載雨)의 <쥐띠부인>, 임희재의 <상감마마 미워요>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멜로드라마의 범람은 청취자를 식상하게 하였고, 따라서 각 방송국은 새로운 방송극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형식의 방송극이 시도되었는데, 특히 각 방송국마다 다큐멘터리 방송극의 붐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복 20년>(TBC), <태평양전쟁>(DBS), <북한 7천3백일>(MBC), <대한민국 20년>(KBS)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사극·추리극·수사극·가정극·뮤지컬극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텔레비전시대의 본격적인 도래와 함께 라디오 방송극은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3) 텔레비전 방송극시대(1970년대 이후)

우리 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1956년 5월 12일 개국한 대한방송주식회사의 HLKZ·TV이다.

개국 당시에는 제대로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아 방송극 형식을 띤 프로그램은 국극단(國劇團)의 창극을 스튜디오에 옮겨다 재현시키는 형태였다. 그래서 유치진(柳致眞)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조국> 등이 극단 신협(新協)의 출연으로 각색, 방송되었다.

개국 후 최초의 본격적인 텔레비전 방송극은 홀워시의 <사형수 死刑因>를 최창봉(崔彰鳳) 연출로 제작, 방영한 것이다.

1958년 3월 1일부터는 ‘화요극장’을 마련하여 창작극·번역극 등 단막극을 방영했으며, 1958년 7월 17일부터 연속국악극 <별들>을 방영하였다. 그러나 1959년 2월 2일 화재로 전소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 텔레비전 방송극은 1961년 12월 31일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TV)이 개국하면서 재개되었으나, 초기의 어려운 제작 여건 때문에 ‘금요극장’과 토요일의 ‘유머클럽’ 등 2개의 주간극을 방영하는 데 불과하였다.

1964년 12월 7일에는 동양텔레비전방송국(TBC·TV)이 개국하면서 개국특집극으로 유호(兪湖) 작, 허규(許圭) 연출의 <초설 初雪>을 방영하였다.

또한 동양방송국은 최초의 텔레비전 일일연속극으로 1964년 12월 9일 한운사 작, 황은진(黃垠軫) 연출의 <눈이 내리는데>를 방영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당시의 방송극은 주간극 또는 단막극 형식을 띤 것으로 일일연속극이 정착하기에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중앙방송국은 1969년 5월 21일에 와서야 일일연속극으로 임희재 작, 이남섭(李南燮) 연출의 <신부1년생>을 방영했으나 역시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텔레비전 방송극의 시대가 열린 것은 1969년 8월 8일 문화텔레비전방송국(MBC·TV)이 개국됨에 따라 3대 텔레비전방송국시대가 시작되는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것의 시발점이 된 방송극은 1970년 3월 2일부터 동양방송국에서 방영된 임희재 작(후에 이철향이 대필), 고성원(高盛源) 연출의 <아씨>였다.

이 방송극은 253회의 최장수 기간 동안 방영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텔레비전의 일일연속극시대가 열렸다. 그래서 각 방송국에서는 다투어 일일연속극을 신설, 한 방송국에서 무려 4, 5편씩 방영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일일연속극으로 중앙방송국의 <아버지와 아들>·<북간도>·<여로>·<파도> 등과, 동양방송국의 <여보 정선달>·<어머니>·<연화>·<사모곡> 등, 문화방송국의 <정>·<새엄마>·<장희빈>·<아버지> 등 수없이 많았다.

이 중 이남섭 작·연출의 <여로>는 <아씨>의 인기를 능가하면서 커다란 화제를 낳았던 방송극이었다. 일일연속극의 강세로 주간극은 퇴조했는데, 그 중에서도 <실화극장>·<꽃동네 새동네>·<수사반장> 등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일방송극의 홍수는 결국 방송국간의 과열 경쟁을 낳았고 내용의 저질화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73년 7월 16일 문화공보부장관은 일일극의 창설에 비해 교양 프로그램이 너무 적다고 지적하고, 각 방송국에 일일극을 1편씩 줄이도록 종용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일일연속극은 방송극의 주종을 이루었다. 1976년에는 세 방송국이 각기 3개 이상의 일일극과 주간연속극·단막극 등을 방영하면서, 특히 두 민간방송 텔레비전은 극심한 경쟁을 하였다.

1976년 가을에 당국의 강력한 지시로 일일극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면서 주말연속극 등의 주간극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주간극은 가장 드라마성이 강한 것으로 각 방송국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소재 및 제작여건의 한계로 인하여 미흡한 감을 주었다.

한편, 반공물과 수사극은 꾸준한 시청률을 확보하였는데, 이는 일일극의 한계성에 싫증을 느끼면서 자극적이며 강렬한 것을 요구하는 시청자의 기호와 맞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78년부터는 3·1절, 6·25전쟁, 8·15광복 등의 기념일에 즈음하여 특집극이 나오면서 방송극의 대형화가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12월 컬러방송이 시작되면서 방송극은 더욱 활기를 띠었는데, 기술의 미비로 인하여 제작상의 한계점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는 경제극·역사극·다큐멘터리방송극·문예물 등이 많이 방영되면서 상황극(situation drama)·단막극·특집극·미니시리즈 등 여러 형태로 변화를 꾀하였다.

특히, ‘TV문학관’이나 ‘베스트셀러극장’과 같은 형태의 방송극은 우리 나라 방송극사(放送劇史)에서 획기적인 일로 인원 및 제작비의 과감한 투자, 세련된 영상미의 표출, 좋은 내용의 극본 등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 방송극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84년 이후 방송극은 약간 쇠퇴하는 기미를 보이는데, 특히 문화방송국은 1984년 가을 개편 이후 일일연속극을 폐지하였다. 또 한국방송공사도 일일연속극을 대폭 줄이고 주간극에 치중함으로써 일일연속극은 KBS의 두 채널에만 존속하게 되었다.

주간극의 경우에는 주 2회 방영으로 굳어져 드라마 포맷의 지배적인 구조로 정착,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는 텔레비전이 라디오적인 편성을 벗고 텔레비전 고유의 편성 패턴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어린이 프로그램과 일부 일일극을 제외하고는 모두 50분 단위의 대형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대형극의 소재를 단기 시리즈로 연결하는 이른바 ‘미니 시리즈’가 활성화되었다.

이 포맷은 텔레비전이 갖는 연속성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면서 여러 가지 주제를 소화해 냈고, 조기 기획에 따른 충실한 내용과 대형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비 등의 장점을 지녀 방송사들이 애용하는 장르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종종 전체적인 밀도가 떨어지고 미니 시리즈로서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 작품도 나타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와서는 장기 기획에 따른 드라마의 대규모 제작 경향이 강도를 더해 대형 장편으로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면, MBC·TV의 <여명의 눈동자>나 SBS·TV의 <머나먼 쏭바강>과 같은 엄청난 제작비와 인력, 시간이 소요되는 작품도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신세대 감각의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가 유행하였고(MBC·TV의 <질투>가 원조),

최근에는 기본적인 상황과 인물을 설정해 놓고 그때 그때 조금씩 내용을 변형하고 인물을 추가하는 형식인 ‘시트콤(sitcom)’이라는 코믹 드라마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SBS·TV의 <오박사네 사람들>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1997년 가을 개편 이후 각 방송사의 드라마 편성 현황을 살펴보면, KBS·1TV는 일일극 1편, 아침 일일극 1편, 주간극 2편(주 1회 1편, 주 2회 1편) 등 총 4편이고, KBS·2TV는 아침 일일극 1편, 주간극(주 2회) 4편, 일일 시트콤 1편, 일요 아침드라마 1편, 단막극 1편 등 총 8편이 방영되고 있다.

또 MBC·TV는 일일극 1편, 아침 일일극 1편, 주간극 5편(주 1회 2편, 주 2회 3편), 단막극 1편, 일일 시트콤 1편, 일요 아침드라마 1편 등 총 10편, SBS·TV는 일일극 1편, 아침 일일극 1편, 주간극(주 2회) 3편, 주간 시트콤 2편, 단막극 1편 등 총 8편 등으로 나타났다.

이 외에도 세 방송사는 이미 예전에 방영된 것을 다시 리바이벌하는 형식의 드라마 프로그램 시간을 별도로 갖고 있으며, 기념일이나 명절 등에는 특집극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이렇듯 드라마는 방송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상품’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시도함으로써 인간의 지적 충족이나 정서 함양을 도모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현실이 드라마의 존재 의미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제작 여건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소수 작가에 대한 의존, 연기자의 부족, 제작비 및 인원, 시간의 제한, 그리고 컬러화에 따른 제작기술의 미비 등을 들 수 있다.

또 하나는 방송사간의 과열 경쟁과 시청률 지상주의의 태도이다. 이러한 지나친 상업주의는 결국 흥미 위주의 내용을 유발시키고 사회적 윤리성의 결여나 대사의 저속화로 이어져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드라마는 주제나 소재를 어디에서 얻든지 간에, 형식과 기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 인간과 인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 즉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밝혀 주는 것, 요컨대 ‘우리 삶의 반영’인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할 때 드라마의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한국TV방송의 현황과 바람직한 방향』(크리스찬아카데미, 대화출판사, 1981)
『TV방송과 대중문화』(이상회, 전예원, 1983)
『매스미디어와 문화발전』(원우현, 범우사, 1984)
『한국방송원론』(최창섭, 나남, 1985)
『’86한국신문방송년감』(한국언론연구원, 1986)
『한국방송70년의 평가와 전망』(한국방송학회, 커뮤니케이션북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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