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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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생활
개념
두발을 길게 땋아 늘인 머리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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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두발을 길게 땋아 늘인 머리모양.
개설

편발(編髮)·승발(繩髮)·삭두(索頭)라고도 하며, 유목민족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승(繩: 먹줄)과 같이 땋음으로써 얻은 명칭으로 주로 북방 민족의 풍속이다.

내용

아시아 북부의 우랄알타이 민족의 변발은 흉노에서 발생하여 동서로 전파된 것으로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변발의 방법으로는 본인의 머리만을 땋는 것, 가발을 넣어 땋는 것, 끝에 첨발(添髮)을 하는 것이 있으며, 그 형태로는 땋아서 늘인 것[辮髮後垂], 땋아서 얹는 것[辮髮髻], 깎고 땋는 형태[開剃辮髮]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서 변발계(辮髮髻)가 보이고 백제의 미혼녀(未婚女)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한 가닥, 출가녀(出嫁女)는 두 가닥 늘어뜨렸다는 『주서(周書)』의 기록에서 변발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고려 말에는 개체변발(開剃辮髮)의 풍속이 있었다.

개체변발은 몽고 특유의 풍속으로 머리의 주위를 깎고 머리카락을 정상만 남겨 땋아 묶고 늘인 것으로 몽고어로 겁구아(怯仇兒: kekül)라고 불린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 1272년(원종 13)에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변발호복(辮髮胡服)인 것을 보고 모든 백성이 탄식하고 울었다고 하며 이 때의 변발은 몽고풍의 개체변발이었다.

세자 심은 왕이 되어 1277년(충렬왕 4) 개체령(開剃令)을 발표하여 나라 전체에서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며, 개체변발은 공민왕 원년인 1389년 개체령 해제까지 100년 정도 계속되었다.

이후 본래의 고유한 수발양식(修髮樣式)인 상투와 얹은머리로 되돌아갔으나 원의 영향으로 머리를 땋아 늘이거나 계(髻)로 만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관례(冠禮) 전 처녀, 총각에게 머리를 땋아 늘인 후 처녀는 홍색, 총각은 검은색 댕기를 늘이게 했는데, 이 같은 형태는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중국은 원나라 때 개체변발 후 명나라 때에 한족(漢族)의 전통적인 중국식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청나라 때에 다시 변발이 등장했는데, 이 때의 변발은 전치후변(前薙後辮)으로 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를 땋아 늘이는 만주족(滿洲族)의 변발양식이었다.

청조는 변발령을 내려 중국인에게 변발을 강요하였으나 머리를 땋아 올려 관(冠)을 쓰는 것을 의관(衣冠)의 풍속으로 여긴 한족(漢族)은 맹렬한 반발과 저항을 했다. 이는 단순한 두발 형태의 문제가 아닌 전통의 사활로 여겼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주서(周書)』
『연행록선집』(국역연행록선집, 민족문화추진회, 1976∼1977)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中國服飾史』(華梅著, 朴聖實·李秀雄 共譯, 耕春社, 1992)
『中國古代服飾史』(周錫保, 臺北:丹靑, 1984)
『東洋服裝史論考』(杉本正年, 東京:文化出版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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