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보성 부분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보성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전라남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군.
정의
전라남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순천시, 서쪽은 화순군·장흥군, 남쪽은 득량만과 고흥군, 북쪽은 화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58'∼127°29', 북위 34°38'∼34°59'에 위치한다. 면적은 663.53㎢이고, 인구는 4만 534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10개 면, 316개 행정리(126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에 있다.

자연환경

소백산맥에서 ‘팔(八)’자 모양을 이루는 두 지맥의 흐름이 지세에 영향을 미쳐 군 전체에 높은 산과 얕은 구릉이 연이어 있다. 지질은 화강편마암계에 속한다.

동쪽에는 존제산(尊帝山, 704m)·망일봉(望日峰, 652m)·백이산(白夷山, 584m) 등이 있으며, 서쪽에는 제암산(帝巖山,779m)·천봉산(天鳳山, 609m)·천마산(天馬山, 407m) 등이 있다.

이 동쪽 산맥이 고흥반도를 향해 남쪽으로 달리고 있으며, 벌교읍은 이 능선의 동쪽에 위치한다. 보성만에 면한 남쪽에도 동서방향의 해안산지가 달리고 있어 북류하는 보성강 유역과 남류하여 남해안으로 흘러드는 여러 하천들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협소한 해안지대와 보성강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다. 이들 산지가 거의 연봉으로 이어져 산세가 매우 수려하고 웅장하다.

웅치면 대산리 에서 발원한 섬진강 상류인 보성강은 장흥군 장동면을 북류하다가 동류하여 노동면·미력면을 거쳐 다시 북류하면서 겸백면·율어면·복내면·문덕면 등을 통과, 순천을 거쳐 곡성과 구례의 중간지점에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특히, 보성강은 노년기의 느릿한 흐름을 보이는 다른 하천과는 달리 장년기의 당당한 모습으로 풍부한 수량과 수려한 경관을 이루면서 군의 중앙부를 흐르며, 유역에 있는 농경지의 관개용수로도 유용하게 이용된다.

보성강과 유로를 달리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도 있다. 벌교만으로 흘러드는 벌교천·칠동천(七洞川)과 득량만으로 흘러드는 조성천·대곡천·득량천·회천천·영천(聆川) 등이 있다. 이들 하천들은 유로의 길이가 짧고 수량도 적은 편이지만 보성의 해안 간척평야를 관개하는 귀중한 물줄기이다.

유인도 4개, 무인도 17개가 속해 있다.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난류와 남동 몬순의 영향을 받아 온난다우한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12.5℃, 1월 평균기온 -1.2℃, 8월 평균기온 24.9℃를 보인다. 연강수량은 1,843㎜이다. 우리나라 다우지역의 하나이며, 1972년에는 2,099㎜의 강수량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역사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로는 간돌·돌화살촉이 보성읍·득량면 등에, 세형동검이 웅치면에, 고인돌군이 노동면·득량면·벌교읍 등지에 산재해 있다.

마한 54소국 중 하나인 불운국(不雲國)의 위치를 현 복내면 일대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백제 때는 복홀군(伏忽郡)이라 했는데, 그 유지가 미력면 화방리에 있다. 757년(경덕왕 16)에 보성군으로 개칭되었다.

996년(성종 15) 패주(貝州)라고 개칭하여 자사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 다시 군으로 고치면서 보성이라고 한 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명 산양(山陽)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보성군의 속현으로는 낙안군(樂安郡)의 영현이었던 남양현(南陽縣)·태강현(泰江縣), 능성군의 영현이었던 복성현(福城縣)·조양현(兆陽縣)·도화현·풍안현 등이 있었다.

도화현은 원래 타주부곡이었는데 1197년(명종 27) 현으로 승격되었고, 풍안현도 식촌부곡이었는데 1310년(충선왕 2)에 원나라의 환관이었던 대순(李大順)의 청에 의해 승격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이웃 고흥현이 왜구로 인해 조양현으로 옮겨온 적이 있다. 또, 1441년(세종 23)에는 고려시대에 내속되었던 남양·태강·풍안·도화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흥양현(고흥)으로 이속되었으므로 보성군의 관할영역이 대폭 축소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보성군의 호구수는 253호, 인구는 1,245명(男丁만의 숫자임)이었다. 1597년(선조 30) 이순신(李舜臣)은 정유재란으로 와해된 수군의 재건에 힘썼는데, 우천리의 조양창에서 군량을 내고 회령포에서 전선(戰船)을 제공하였다. 이 때 박광전(朴光前)·소상진(蘇尙眞)·선거이(宣居怡) 등의 의병장이 나와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안방준(安邦俊)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729년(영조 5)선암사 승려인 초안(楚安) 등에 의해 벌교홍교(筏橋虹橋)가 축조되었다. 정조 때 편찬된 『호구총서』에 의하면 당시 호구수는 4,651호, 인구는 2만 2274명이었다.

1895년 관제개혁으로 군이 되었고, 1908년낙안군의 4개 면을 합하였다. 1914년장흥군 소속이었던 천포·회령·웅치의 3개 면을 편입하였다. 1929년에 순천 관내의 일부 지역을 벌교면에 편입함으로써 현재의 군지역과 거의 같은 영역을 갖추었다.

한편, 1930년에 경전선 철도가 보성을 통과하게 되었고, 1931년겸백면에 보성강저수지가 건설되었다. 1936년에는 득량면에 보성강발전소 건설이 시작되는 등 산업시설이 크게 확충되었다. 1937년벌교면이 읍으로,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의 발간 및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서재필(徐在弼)과, 1908년 비들고개전투에서 왜병을 크게 무찌른 안규홍(安圭洪)·염재보(廉在輔) 등의 의병장이 유명하다. 이들 의병장의 업적은 광복 후 건립된 전승비에 남아 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계정(愚溪亭)이 소실되었고, 1950년 12월 8일문덕면 용암리 쌍치 부근에 은거하면서 준동하던 공비들에 의해 대학살의 참극이 일어났다. 1951년 3월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공비들은 완전히 섬멸되었다.

1973년에 문덕면의 한천리가 승주군 송광면에, 문덕면 동교리가 복내면으로 이속되었다. 1983년에 고흥군 동강면 장도리가 벌교읍에 편입되고, 1990년에는 벌교읍 장도리 일부(죽도)가 고흥군 동강면으로 편입되었다. 1993년에 예당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95년에는 벌교읍 천치리를 옥전리로 개칭하였다.

유물·유적

보성강 유역과 벌교읍·조성면 등 남해안지역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집되어 있다. 문덕면 덕치리 고인돌군에서는 돌도끼·돌화살촉·어망추가, 복내면 봉천리에서는 어망추가 나왔다. 문덕면 양동리와 복내면 시천리 등지에서는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시천리에서는 백제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산성으로 보성읍 보성리 동륜마을의 망미산성(望美山城)·복홀군성(伏忽郡城), 득량면 오봉리의 오봉산성(五峰山城), 벌교읍의 부용산성(芙蓉山城), 조성면 우천리의 조양현성(兆陽縣城)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불교 문화재로는 문덕면 죽산리에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대원사와 대원사 극락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대원사자진국사부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가 있으며, 벌교읍 고읍리에 취송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조성면에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보물, 1988년 지정)·보성 봉능리 석조인왕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율어면의 보성 유신리 마애여래좌상(보물, 1988년 지정), 복내면의 보성 반석리 석불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보성 봉천리 오층석탑(보물, 1992년 지정)·보성 계산리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 노동면의 보성 옥마리 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금화산의 마애석불 등이 있다.

유교 문화재로는 1397년(태조 6)에 건립된 보성읍 보성리의 보성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와 대계서원지가 있으며, 보성읍 보성리 동륜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선거이(宣居怡) 등을 모신 선씨오충사가 있다.

또, 벌교읍 장암리에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전사한 박천붕(朴天鵬)과 그의 네 아들의 충절을 기린 박씨오충각이, 벌교리에 주사선연도 등 신여량장군유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7년 지정) 등이 남아 있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은 율어면 율어리에 보성 율어리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 득량면 오봉리에 보성 이정래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보성 이진래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보성 이준회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과 보성열화정(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 등이다.

보성읍 옥암리 에는 보성 이승래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보성 이용우 고택(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보성 이종선 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1986년 지정), 보성리에 보성 임진영 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등이 있다.

득량면 보성 비봉리 공룡알 화석산지(천연기념물, 2000년 지정)가 있다. 노거수로는 벌교읍의 벌교 고읍리 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1994년 지정)와 백천사(柏川祠)의 소나무가 있어 신목으로 일컬어진다.

벌교읍 벌교리 에는 정교하게 축조된 벌교홍교(보물, 1963년 지정)가 있으며, 문덕면 구산리에는 고려청자 가마터가 남아 있다. 벌교읍 득량면에는 해평리석장승(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는 벌교읍 징광리의 한상춘은 유기장(중요무형문화재, 1983년 지정)으로, 미력면 도개리의 이내원이 옹기장(중요무형문화재, 1990년 지정)으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97년김유양(金有讓)이 창건한 보성향교가 보성읍 보성리에 있다. 이 향교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1849년(헌종 15) 관리들의 부당행동에 항거한 복합사건(伏閤事件)이 일어났고, 1921년에는 향교의 제주(祭酒)를 밀주로 단정, 세무서 직원이 술항아리를 봉인하자, 조선총독부의 주세령에 항의해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미력면 우곡천 의 용산서원(龍山書院)은 1607년(선조 40)박광전에 의해 창립되어 1707년(숙종 33)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657년(효종 8)에는 지방 유림들이 안방준을 제향하기 위해 보성읍 보성리에 대계서원을 세웠으며, 1704년(숙종 3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들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훼철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9년에 사립 광신학교(지금의 보성초등학교)와 사립 유신학교(지금의 벌교초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11년에는 보성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보성중학교, 1951년보성농업고등학교, 1952년벌교상업고등학교, 1968년조성고등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다.

사회문화단체로 도서관 및 문화원이 있다. 문화원은 군민의 문학계도에 힘쓰는 한편, 해마다 5월 12일에 다향제(茶鄕祭)를 주관해 오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다리밟기·강강술래·풀차기 등이 있다. 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에 하는 놀이로, 큰 줄을 꼬아 양쪽 머리에 작은 줄을 달고 여러 마을이 양편으로 나뉘어 잡아당겨 이긴 편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강강술래는 정월이나 추석 달밤에 부녀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손을 잡고 뛰며 즐겼던 놀이이다.

풀차기는 어린이들이 여름에 나뭇잎으로 덩어리를 만들어 양쪽 발의 안쪽으로 차올리면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는 놀이이다. 지치면 풀뭉치를 차올려 머리 위에 올려놓고 한참 쉰 다음 다시 계속하게 된다. 많이 차올린 편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밖에 대포갯귀신제·장좌기받이별신제·문덕풍년놀이·노동들득놀이 등이 있다.

이 고장의 당산제는 보통 음력 정월 보름밤에 제를 올린다. 동회에서 마을의 중심인물 가운데 제례에 통한 자로 제관을 선정하면 제관은 문전에 적토를 뿌리고 3일 전부터 목욕재계하며 부정을 피한다. 제물은 술·과일·고기·포·떡 등이며 제사 후 신역에 묻고, 축문은 없다. 당일 사고가 나면 다음달 15일로 연기된다.

벌교읍 대포리에서는 전주민이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마을 공동으로 동제를 행한다. 전년도 음력 12월경에 날받이[擇日]를 하나 가급적 음력 정월 15일로 정해 첫날 밤은 당집에서, 뒷날 밤은 하당(下堂)이라 하여 제수(祭需 : 소머리)를 바다에 바치는 당산제로 이틀간 지낸다. 제주·축관·헌관 등은 제일을 중심으로 생기·운·유고 관계를 본가·처가·외가까지 따져 마을 유지들이 엄선한다.

제일 3일 전에 주민 전체가 마을·당집·우물을 대청소하면 다음 날 아침부터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집집마다 황토를 뿌린다. 그 날부터 주민들은 액운을 쫓고 행운을 비는 마당밟이 농악을 시작하여 집집마다 방문하면 각 가정에서는 정화수를 떠놓고 쌀과 돈을 내놓는다. 모은 돈은 마을 기금으로 활용한다. 농악이 끝나면 당산제에 들어간다.

당주는 연 3일 기우를 하는데 그 동안 문 밖 출입은 물론이고 외인과 일체 접촉을 엄금하며 찬물로 목욕한 뒤 당주 내외가 제물을 마련한다. 제일 저녁부터 유고 없는 득주댁(得主宅) 마당에서 ‘식궂이’를 행한다. 주민들은 마당에서 성화를 피우고 굿머리 순서에 따라 1체굿부터 7체굿을 밤 12시 안에 마친 뒤 헤어진다. 다음 날 1시부터 2시 사이에 제주 내외와 축관·헌관 등 4명이 당산할아버지·당산할머니·지신·고인 중 마을유공자상의 4개 제상을 차리고 당집에서 차례를 지낸다. 제차는 초헌·아헌·종헌·독축으로 헌관이 소지를 올리며 마을에 재액을 막고 행운을 가져오도록 일 년의 무사함을 빈다. 상당 제사를 마치면 다음 날부터 큰 당산, 작은 당산, 들당산, 날당산 등 곳곳에서 당산굿을 하고 샘굿을 친 다음 저녁부터 하당날 헌식에 들어간다.

당주집에서 큰 당산 마당을 향할 때는 헌식밥상·농악·횃불 순서이며 별도 제청을 짓고 제사를 모신다. 처음 당산 마당에 들어서면서 당산할머니께 “각황재배 문안이요!”하고 재배를 한 다음 성화를 피우고 전날밤과 같은 축제를 벌인다.

자정에는 “각황재배 하직이요.” 하고 재배를 한 다음 헌식을 앞세우고 바닷가 선착장으로 가서 신을 달래며 헌식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이틀간의 당산제는 끝이 난다. 헌식이 바다에서 멀리 떠내려가야만 마을이 일 년 동안 평안하다고 믿는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지명유래담, 자연물과 역사적 인물에 얽힌 설화 등이 전한다. 문덕면 주름방죽에는 자라에게 적선하고 보은받은 관노(官奴)의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한 관노가 중요한 문서를 가지고 문밭[文田 : 지금의 문덕면]으로 가는 길에 용문교 근처에 이르렀다. 그 때 한 청년에게 잡혀 고기구덕에서 떨고 있는 자라를 불쌍히 여겨 돈을 주고 사서 물속에 넣어주었다.

관노가 볼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아이가 “나를 따라오세요.”하며 막대기로 냇물을 두들기니 냇물이 갈라지며 길이 나타났다. 관노는 그 길을 따라서 대궐 같은 기와집에 이르렀다. 자라는 바로 용왕의 딸이었다. 용왕은 딸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 딸을 데리고 살라고 권하면서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아름다운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은 관노는 그 뒤 재산이 계속 늘어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고을 원님이 관노의 처가 예쁜 것을 알고 관노를 죽이기 위해 이무기가 사는 연못의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관노의 아내가 예쁜 구슬을 입에 물고 연못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였다. 관노가 물고기를 무사히 잡아오자 이를 이상히 여긴 원님이 관노의 몸을 뒤져서 구슬을 빼앗고 다시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하니 이번에는 이무기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관노의 아내가 연못으로 달려와 “나군아!” 하고 외치니 이무기가 물 밖으로 나와 죽었다. 관노의 아내는 이무기의 배를 가르고 남편의 시체를 꺼내 장사를 지냈다. 그 뒤 원님은 관노의 아내를 여러 차례 불렀도 오지 않자 부하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붙들려온 관노의 아내는 마지막으로 영혼을 위로하고 돌아오게 해달라며 소원을 간청하였다. 이에 원님이 갔다 오도록 놓아주니 그 길로 도망치려 하였다.

원님이 부하를 시켜 뒤쫓아 잡게 하니 위기를 느낀 관노의 아내는 깊은 연못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원님이 보낸 부하들은 겨우 치맛자락만 움켜잡았을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비가 뿌려 연못은 오늘날의 방죽이 되었으며, 그 뒤로 ‘주름방죽’이라 불려오고 있다.

연산군 때의 인물인 이장곤과 물에 버들잎을 띄운 것이 인연이 되어 혼인한 처녀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장곤이 혼란한 정국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미력면 도개리 정자마을에 당도하여 냇가에서 물긷는 처녀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였다. 그런데 처녀가 물에 버들잎을 띄워주므로, 이상히 여겨 연유를 물으니 갈증이 심한데 급히 냉수를 마시면 해를 입을 것 같아 천천히 물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장곤이 감격하여 처녀를 따라가 데릴사위를 자청하여 유기장이의 사위가 되었다. 3년 뒤 중종반정의 소식을 듣고 유기를 납품하러 관가에 갔다가 옛 동료인 원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가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벌교에서 고흥으로 통하는 선근교에는 효행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열가촌 건너편 마을에 홀로 된 노인이 선근(善根)이라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아들 몰래 내 건너쪽의 한 노파와 외로움을 달래느라 차가운 냇물을 건너다니는 것을 아들이 엿보게 되었다.

선근이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징검다리를 아버지 모르게 놓아드려 신을 벗지 않고 건너다니게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선근이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다리를 놓고 선근교라 하였다. 1915년에는 현대식 교량이 이 자리에 놓여졌다.

웅치면 예양마을 뒤쪽에 있는 남매바위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정유재란 때 아버지는 수군에 자원 입대하고 남매만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왜군이 들어와 이들 남매를 잡아다가 희롱하려 하였다.

그러자 왜놈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며 어린 동생은 왜군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결했고, 누이는 돌에 부딪쳐 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전에 없던 두 개의 하얀 바위가 솟아났다. 그 뒤부터 남매의 의로운 넋이 바위가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남매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종류가 다양하며 양도 풍부하다. 특히, 농업노동요·장례의식요는 전 지역에서 고루 불린다. 농업노동요는 지역에 따라 모내기노래에서부터 논매기노래를 모두 지칭하기도 하고, 「들노래」라 하여 논매기노래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모내기노래는 모찌기노래와 서로 넘나드나 작업과정을 노래하는 사설만 따로 불린다. 사설 내용은 작업과정이나 풍년 기원, 충·효가 중심을 이루고 다른 고장에 비해 연정·상사가 적은 편이다. 보통 느린 「농부가」계나 상사디여계의 가락을 사용해 선후창방식으로 부르며, 뒷소리는 “오이 어허 몬들 모부세”, “에해해루 상사디여”등 다양하다.

논매기노래는 「만드레」 등과 같이 각 작업과정마다 다른 노래가 있으나 “저건너 갈미봉에/어두침침 오는 것이 비아닌가……”라는 전형적인 「육자배기」가 중심이 된다. 다른 논매기노래의 사설은 “다되어가네 다되어가네 이논글수 다되어가네.” 등과 같이 작업내용을 중심으로 하며, 많은 사설이 모내기노래와 넘나든다.

뒷소리는 “에∼헤∼야 에∼헤∼허 마 뒤어 불러보소.”와 같이 여음과 사설이 섞인 것도 있지만 주로 여음이 중심이 된다. 문덕면 말치에서는 “아롱저롱(我農彼農의 뜻이라고 함)”이라는 특이한 뒷소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밖에 「타작노래」 등이 불린다.

여성노동요 중 길쌈노동요는 삼짜기에서부터 베짜기를 끝내고 여흥을 하는 과정까지의 노래들이 문덕면 말치에 잘 보존되어 전승된다. 흥얼거리듯이 부른다고 하여 「흥거리」·「흥글」·「흥걸」이라 하는 타령조의 노래는 주로 밭매기나 혼자 하는 각종 노동에서 불리는 서사민요류이다. 사설 내용은 대개 “어매어매 울어매는/뭣할라고 나를 낳아서/이 가문에 숨거주었노.”로 시작해서 시집살이나 밭매기 등의 고달픔을 노래한다.

잡역노동요는 주로 숫자 세는 것을 중심사설로 한다. 그 종류로는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릴 때 부르는 「두레박질노래」, 풀 벨 때 부르는 「산타령」 등의 초군노래가 있으며, 가마를 멜 때 부르는 「걸메당소리」가 회천면에 전승되고 있다. 의식요로는 장례의식요가 전지역에서 불린다. 대개 “어화넘차”나 “어화” 같은 보편적인 뒷소리와 함께 “관암보살”·“관세음보살”이 사용된다.

비기능요로는 농업노동요에 두루 사용되는 상사디여계의 「농부가」가 많이 전하는데 판소리의 영향이라 짐작된다. 「청춘가」·「백발가」 등이 여러 잡가들의 사설과 여음으로 불리고, 「진도아리랑」계의 「아리랑」, 「장모은공」이라는 「징거미타령」 등도 많이 불린다.

동요로는 「메뚜기노래」가 특이하다. “한 다리 없는 땅개비/에포 한점 짊어지고/앵두고개 넘어가다/작두고개/자빠지고 얻었구나 얻었구나…….”와 같이 곤충의 일생을 해학적으로 그리면서 그 배경에는 인생에 대한 짙은 연민을 깔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문덕면에 전승되는 들내기소리의 「아롱저롱」은 “아롱저롱 아롱저롱/아롱소리 어데가고 풍년만 들어오네/태고라 천황씨는 목덕으로 왕을 했고 염제 신농씨는 농사짓기를 가르쳐/불사약이 어디있나 오곡실이 불사약일세/머슴은 가래메고 황소만 타네/농군은 흥에 겨워 너울너울 춤만추네.”로 되어 있다. 이 고장의 들노래는 가사가 밝고 낙천적이며 농토에 대한 애착과 풍년을 기약하는 것이 많다.

이 밖에 「회심곡」·「백발타령」·「시집살이」·「한탄가」·「사위노래」 등이 전한다. 「사위노래」는 불행한 처지를 당한 사위의 이야기와 사위를 지성으로 섬기는 딸의 애틋한 마음이 내용의 줄거리를 이룬다.

산업·교통

산지가 많은 편이지만 농경지 개발에 의해 총 경지면적은 2007년 현재 1만 6,176㏊이며, 논과 밭의 비율은 약 7:3이다. 농가인구는 2007년 현재 2만 1,667명이다. 보성강 댐과 보성강 수력발전소(4,500㎾ 용량)가 있어 득량면, 조성면 일대 1,700정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전력을 생산해 호남지방에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해안지방인 득량면·조성면일대의 간척지에서는 밥맛이 좋은 양질의 쌀이 생산된다. 이 밖에 콩·고구마·감자·파·마늘·배추·오이·수박·배·감 등이 산출되며, 인삼 재배도 행해지고 있다.

이 고장의 차(茶)와 용문석(龍文席)은 옛날부터 특산품으로 이름이 나 있다. 보성읍 봉산리에 있는 보성다원(寶城茶園)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일본인 차 전문기술자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적의 홍차 재배지로 선정되었고, 1940년에는 ‘베니오마레’라는 인도산 차 종자를 수입, 29.7㏊의 밭에 씨를 뿌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2006년 현재 생산량은 1,111㏊에 1,572톤이다. 그리고 조성면 축내리의 용문석은 조선시대 궁중 진상품으로 유명했으며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연안의 바다에서는 새우·굴·김·멸치 등이 대량으로 어획 또는 채취되고 있다. 또, 여자만(汝自灣)·득량만의 해안 일대는 조개류의 양식업이 성하다. 특히, 순천만에서 채취되는 벌교 고막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염전에서는 소금의 생산도 많다. 어가 인구는 2,132명이다.

광물로는 보성읍 주봉리와 노동면 명봉리에서 무연탄, 문덕면·복내면에서 금·은, 조성면에서 규석, 벌교읍에서는 고령토가 각각 산출된다. 주요 공업으로는 벽돌·레미콘 등 건축재 생산과 어구 및 수산물 가공업 등을 들 수 있다.

상업 활동은 보성읍과 벌교읍의 상설시장과 각 지역의 5일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정기시장으로 2·7일의 보성장, 4·9일의 벌교장·복내장·회령장, 1·6일의 율어장·득량장, 3·8일의 문덕장·조성장, 5·10일의 예당장이 열리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교통이 편리해지고, 농촌인구가 감소되는 등의 이유로 문덕장·득량장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시장은 아직도 규모가 큰 편으로, 농수산물의 집산지이자 공산품의 판매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보성장·벌교장은 인접 군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가축시장을 겸하고 있다.

경전선 철도가 군의 서부와 남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목포와 순천을 잇는 국도가 보성읍·벌교읍을 통과하며 화순·장흥·곡천과 고흥에 연결되는 지방도가 각각 보성과 벌교를 지나고 있다. 따라서 해안지방은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산간지방은 아직도 교통이 불편하다.

관광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는 없으나 제암산과 보성강이 어우러져 수려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잠재적인 관광자원이 많다. 보성읍 봉산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차밭이 있다. 이곳은 마치 온 산이 녹색의 카펫을 깔아놓은 듯 계단식의 녹향 짙은 다원이 150만 평 규모로 전개된다.

벌교읍 벌교천에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길이 27m, 높이 3m의 홍교가 있다. 세 칸의 홍예(虹霓)로 이루어진 이 무지개다리는 1729년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이 다리는 긴 벽돌 모양의 돌을 맞물리게 쌓아올려 힘의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역학적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축조 당시에는 다리 밑으로 작은 어선이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개펄이 차올라 사람의 통행만 가능하다.

문덕면과 화순군의 남면 사이에 위치한 천봉산과 그 북쪽 중턱에 있는 대원사는 주목받는 경승지이다. 신라 때의 사찰인 대원사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대원사극락전 및 대원사자진국사부도가 있고, 극락전 안쪽 벽에는 수월관음도와 달마도가 그려져 있다. 천봉산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철에는 대원사 계곡에 고운 단풍이 들어 찾는 이가 더욱 많다.

득량만은 해안경관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연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만에 면해 있는 회천면 율포리의 율포해수욕장은 너비 60m, 길이 1.2㎞의 은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50∼60년생의 송림이 줄을 이어 여름 한때 인근 주민들이 즐겨 찾는다. 이 군에서 유일한 해수욕장으로 앞바다인 득량만이 청정해역이라 맑은 바다를 즐길 수 있으며 모래찜질하기에 좋다. 숙박·휴게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관광객이 늘고 있다.

보성읍에서 서쪽으로 약 9㎞ 가면 군내에서 가장 높은 제암산에 이른다. 웅치면 대산리에 있는 이 산은 둥그렇고 판판하여 10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산마루에‘제(帝)’자 모양으로 약 33m 높이의 3층 바위가 단정하게 서 있고,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작은 바위들이 마치 임금에게 공손히 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제암산(帝巖山)이라 칭했다고 한다.

이 산의 기슭에는 용추골이 있는데, 이곳에서 숲이 울창한 계곡을 따라 2㎞ 가량 오르면 보성강의 발원지인 용추폭포(龍湫瀑布)에 이른다. 이 폭포는 높이 15m의 석벽간에서 맑은 물이 세차게 쏟아져 내려 큰 못을 이룬다. 깊은 계곡의 정적을 깨뜨리며 흘러내리는 장관이 소금강의 절경을 연상하게 한다.

율어면 율어리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남도 내륙민가의 특성을 잘 간직한 문형식 가옥을 볼 수 있다. 보성다원이 주관하는 다향제, 서편제보성소리축제, 득량만의 해상경관, 은은한 차 향기 같은 보성의 단아한 자연경관이 각종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면 훌륭한 문화관광지가 될 것이다.

읍·면
  1. 벌교읍(筏橋邑)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102.59㎢, 인구 1만 3925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벌교리이다. 본래 낙안군 지역으로 낙안군의 옛 고을이 있었으므로 고읍면이라 하여 굴치(堀峙)·토산(兎山) 등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에 보성군에 편입되어 고상(古上)·고하(古下)의 2개 면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상면(南上面)·남하면(南下面)과 흥양군(興陽郡) 동면(東面) 하송리 일부, 순천군 동하면(東下面) 봉림리와 동상면 세곡리 일부를 병합해 벌교리의 이름을 따서 벌교면이라 하였다. 1929년순천군 동초면 일부를 편입했고 1937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에는 고흥군 동강면 장도리를 편입했고, 1995년에는 천치리가 옥전리로 개칭되었다.

동쪽에 순천시의 제석산, 서쪽에 존제산, 남쪽에 두방산, 북쪽에 백이산 등이 읍을 둘러싸고 있다. 북동부에 벌교천이 남류하면서 넓은 낙안분지를 형성했고 하류에 벌교읍의 시가지가 전개된다. 21㎞의 해안선을 끼고 있으며 4개의 유인도와 17개의 무인도를 보유하고 있어 수산업도 발달하였다. 순천만 연안의 갯벌에서는 낙지와 고막이 많이 채취되며, 특히 벌교 고막은 그 쫄깃한 맛으로 유명하고,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기도 하다.

약 60㏊의 염전에서는 연간 134톤의 소금을 생산한다. 회정리에 수산물 가공업체와 배합사료를 생산하는 사료공장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그 밖에 참깨 등의 생산이 많고, 오이·딸기 등의 원예작물 재배도 활발하다. 교통은 철도의 경전선이 읍의 남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도양∼벌교간의 국도와 목포∼순천간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읍내는 상업도시적 성격이 뚜렷하다.

문화유적은 벌교리에 벌교홍교와 벌교리성지가 있으며, 전동리에 벌교도마교·석비, 고읍리에 취송정·은행나무가 있다.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광유기장(한상훈)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분교 2개 교), 중학교 3개 교, 고등학교 3개 교가 있다.

벌교(筏橋)·전동(典洞)·고읍(古邑)·지동(池洞)·낙성(洛城)·추동(秋洞)·징광(澄光)·옥전(沃田)·봉림(鳳林)·회정(回亭)·장양(壯陽)·칠동(七洞)·척령(尺嶺)·마동(馬洞)·장좌(長佐)·영등(永登)·장암(長巖)·대포(大浦)·연산(蓮山)·호동(虎東)·장도(獐島) 등 21개 리가 있다.

  1. 보성읍(寶城邑)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49.06㎢, 인구 9,55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보성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보성 읍내가 되므로 용문면이라 하여 연봉(蓮峰)·강산(康山) 등 2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암면(玉巖面)과 미력면·웅치면·회령면 일부, 장흥군 장동면 일부 지역을 편입해 보성면이라 했으며, 1941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지형은 동쪽과 남쪽이 높고, 서쪽과 북쪽은 낮다. 동북부를 보성강이 북류하면서 유역에 평야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유채·차 등이다. 특히, 봉산리의 보성다원은 녹차 생산에 있어 전국의 40%를 차지한다. 농가부업으로 누에치기를 많이 하여 연간 2만㎏ 정도의 누에고치를 생산한다. 주봉리에는 무연탄을 채굴하는 탄광이 있다. 경전선이 통과하며, 목포∼순천간, 광주∼보성간 국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보성리에 봉수대터·보성향교·선씨오충사·하마비·대계서원지와 우산리에 선사유적, 보성리에 망미산성지, 옥암리에 이범재 가옥과 이용우 가옥, 이종선 가옥, 보성리에 임진영 가옥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보성(寶城)·우산(牛山)·옥평(玉坪)·봉산(烽山)·쾌상(快上)·옥암(玉巖)·대야(大野)·원봉(元峰)·주봉(珠峰)·용문(龍門) 등 10개 리가 있다.

  1. 겸백면(兼白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47.35㎢, 인구 1,33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호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운림리의 배실(白也) 또는 우무실(井谷)의 이름을 따서 백야면 또는 정곡면이라 하여 입석(立石)·자포(子抱)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겸어면의 금곡(琴谷)·신기(新基)·대겸(大兼)·도림(道林) 등 12개 리와 복내면의 사평리 일부지역을 편입하고 겸어와 백야의 이름을 따서 겸백면이라 하였다.

동쪽에 초암산(草庵山, 575m)이 조성면과 율어면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석호산(石虎山, 425m)이 미력면과, 남쪽으로는 방장산(方丈山, 536m)이 득량면과, 북쪽으로는 천마산(天馬山, 407m)이 복내면과 경계를 이룬다. 이와 같이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간지대여서 평야가 적고 급경사지가 많아 농경지가 협소하다.

면의 중앙부를 보성강이 관류하고 운림리 부근에서 율어천이 합류되어 이 면과 율어면의 경계를 짓는다. 하천 양쪽으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밤 등이며, 대마 재배와 양잠이 행해지고 있다. 도로는 득량∼복내를 잇는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사곡리초암산에 백제 때 세웠다는 금화사터의 축대가 남아 있고, 마애석불이 있다. 산의 절벽 사이에 베틀굴이라는 길이 20m의 동굴이 있다. 용산리에 광산김씨, 은덕리에 제주양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석호(石湖)·운림(雲林)·은덕(隱德)·평호(平湖)·도안(道安)·용산(龍山)·남양(南陽)·사곡(沙谷)·수남(水南) 등 9개 리가 있다.

  1. 노동면(蘆洞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95㎢, 인구 1,20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광곡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가리실(노동)의 이름을 따서 노동면이라 하여 영신(靈新)·감정(甘井)·신의(申義) 등 2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암면 상청리 일부와 장흥군 부평면 금동리 일부지역을 편입해 현재의 10개 리로 개편하였다.

북부에 봉화산(烽火山, 456m)·벽옥산(碧玉山, 485m), 남부에 황아산(黃鵞山, 487m) 등을 중심으로 산지가 중첩해 있으며, 보성강 상류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고 정자강 등 많은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참깨·고추·대마·당근·토마토·버섯 등이 생산되고 젖소 사육과 양잠도 행해지고 있다. 명봉리에는 명봉탄광이 있었으나 개발가치가 적어 현재는 폐광되었다. 교통은 경전선과 광주∼보성간의 지방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예재터널이 뚫려 광주생활권에 들게 되었다.

문화유적은 옥마리의 벽옥산에 월림사지(月林寺址)와 벽옥탑(碧玉塔)이라 불리는 오층석탑이 있으며, 광곡리 정자촌에 죽천정(竹川亭), 금호리에 충효정려각이 있다. 또, 금호리에 밀양손씨, 명봉리에 진원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광곡(廣谷)·대련(大蓮)·감정(甘井)·금호(錦湖)·옥마(玉馬)·용호(龍湖)·거석(擧石)·신천(新泉)·학동(鶴洞)·명봉(鳴鳳) 등 10개 리가 있다.

  1. 득량면(得糧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3.93㎢, 인구 4,60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봉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쇠실[松谷]의 이름을 따서 송곡면이라 하여 심송(深松)·신전(薪田)·국치(局峙)·성재(成才) 등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촌면(道村面)의 전지역과 조내면(兆內面)의 동곡(東谷)·신촌(新村)의 각 일부지역을 편입하고 득량만의 이름을 따서 득량면이라 개칭하였다.

동쪽으로 고흥군, 남쪽으로 득량만, 서쪽으로는 보성읍과 인접해 있다. 방장산·오봉산(五峰山, 284m) 등의 산지 사이로 득량천이 흘러 면의 중앙을 지나 득량만으로 흘러들면서 득량천변에 좁은 평야가 형성하였다. 득량만의 간척사업으로 1,700㏊의 농토가 조성되어 예로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한 ‘예당쌀’을 생산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참깨·고추·양송이·느타리버섯·참다래 등이 생산된다. 정흥리에서는 오이·딸기 등을 재배하며, 해평리·비봉리 일대에는 조개류 양식장이 있다. 또, 삼정리에 건설된 보성강 수력발전소는 3,300㎾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으며, 득량만 간척지 1,425정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 철도와 목포∼순천간의 국도가 면의 북부를 지나고 득량을 중심으로 겸백면의 석호, 회천면의 율포, 고흥군 대서면의 장전으로 연결되는 지방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비봉리에 조선 명종 때 관방(關防)의 선소(船所)가 남아 있고 해평리석장승, 오봉리에는 원효대사가 한때 도를 닦았다는 칼바위와 오봉산성지, 그리고 이용욱 가옥, 이금재 가옥, 이식래 가옥과 열화정 등이 있다. 송곡리에 청주양씨, 마천리에 진주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오봉(五峰)·송곡(松谷)·예당(禮堂)·삼정(三亭)·해평(海坪)·비봉(飛鳳)·도촌(道村)·마천(馬川)·정흥(正興) 등 9개 리가 있다.

  1. 문덕면(文德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9.33㎢, 인구 99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곡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보성강물이 감돌아 흐르므로 문밭면 또는 문전면이라 하여 덕봉(德峰)·척치(尺峙) 등 2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전면과 보성군 봉덕면(鳳德面)의 전지역, 순천군 송광면 죽산리 일부지역을 편입해 문전과 봉덕의 이름을 따서 문덕면이 되었다. 1973년동교리를 복내면에, 한천리를 승주군 송광면에 분할하였다.

동쪽의 망일봉(望日峰, 652m)을 경계로 순천시와 접하고, 서쪽의 동소산(東巢山, 467m)을 경계로 율어면과 접하며, 서북쪽은 천봉산(天鳳山, 609m)이 화순군과 경계를 이룬다. 1985년주암댐 건설로 경지면적의 40%가 수몰되어 보성군에서 가장 작은 면이 되었다. 평지는 대부분 수몰되고 경사지대의 농경지만 잔존하고 있어 경지면적이 협소하다.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는 보성강은 죽산리에서 화순의 동복천과 합류하여 주암댐으로 흘러들어 담수된 뒤 섬진강으로 흐른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 등이며, 봉갑리에서는 마포와 한지가 생산된다. 그 밖에 양잠과 한봉도 행해지고 있다. 도로는 보성∼원산을 연결하는 국도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지난다.

문화유적은 죽산리천봉산 밑에 대원사극락전과 자진국사부도가 있고, 그 근처에 우계정의 옛터와 백민미술관, 서재필박사기념관이 있다. 용암리에 성주이씨, 양동리에 파주염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운곡(雲谷)·용암(龍巖)·덕치(德峙)·죽산(竹山)·봉갑(鳳甲)·봉정(鳳亭)·양동(陽洞)·구산(龜山)·동산(桐山) 등 9개 리가 있다.

  1. 미력면(彌力面)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0.77㎢, 인구 1,70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도개리이다. 본래 미력[彌勒]이 있으므로 고려 때 미력소라 하다가 조선시대에 면이 되어 미력·은곡·구기·평촌 등 2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암면 송암리와 겸어면 둔기리 일부, 용문면의 정자리·입석리 일부와 노동면 광탄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현재의 7개 리로 개편하였다.

동쪽은 석호산·대룡산(大龍山, 440m)으로 겸백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복고개재로 노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은 보성읍과 접해 있다. 동남쪽은 그럭재로 득량면과, 북쪽은 미력재로 복내면과 경계를 이룬다. 중산간지대로서 겨울에 추위가 심하여 소득작목의 개발이 여의치 못한 형편이다. 보성강 댐을 끼고 보성강이 중앙을 관류하고 있으나 수면이 낮아 면내 농경지에 용수 혜택을 주지 못하고 매년 상습 수해를 주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 등으로 주곡작물 위주의 영농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산지에서 맛이 뛰어난 밤이 생산된다. 50% 이상의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는 삼[大麻]은 그대로 시장에 판매하거나 마포(삼베)를 생산함으로써 순마포고장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농촌 인력난으로 쇠퇴해 가고는 있으나 양잠도 행해지고 있다. 도개리와 덕림리에서 생산되는 무와 배추는 타지역 출하품에 비해 맛이 월등하여 호평받고 있다. 이 밖에 옹기와 석물(石物)이 생산되고 버섯·더덕 재배와 축산 등 소득원 개발에 힘쓰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 철도와 목포∼순천간 국도가 면의 남단을 가로지르며, 보성∼월성을 잇는 국도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1987년에는 보성·미력·이양을 잇는 지방도가 확장 또는 포장되어 광주와 1시간대의 생활권에 진입하게 되었다.

문화유적은 도개리 우봉촌에 문익점(文益漸)의 위패를 모신 부조묘(不祖廟) 삼우당이 있고,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미력옹기장이 있다. 화방리 장동에 백제시대의 복홀군 성지가 있다. 용정리에 남평문씨, 반룡리에 하동정씨, 도개리에 함양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도개(道開)·미력(彌力)·화방(華榜)·용정(龍亭)·덕림(德林)·반룡(盤龍)·초당(草堂) 등 7개 리가 있다.

  1. 복내면(福內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81㎢, 인구 1,93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복내리이다. 고려 태조 때 복성현(福城縣)이라 했는데 복내면 봉천리가 그 중심지였다.

고려 때 보성군에 편입되고 조선시대에는 복성 읍내가 되므로 복내면이라 하여 회룡(回龍)·평주(平舟)·상진(上津)·죽동(竹洞) 등 3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천·계산·유정 등 11개 리로 개편되었고 1973년문덕면의 동교리를 편입하였다.

사방이 천봉산·계당산(桂堂山, 580m)·장재봉(550m)·천마산 등으로 둘러싸여 산지가 많으며, 보성강이 흐르는 면의 동부 복내리 일대에 평야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 등이고, 그 밖에 젖소도 사육하며 농가부업으로 마포를 생산한다. 도로는 복내리에서 보성∼예당으로 통하는 국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봉천리의 오동사지·오층석탑, 유정리의 덕암재(德巖齋), 동교리내접산의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일봉리 일와마을에는 도적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도대문(都大門)이 있다. 봉천리에 광주이씨, 유정리에 칠원윤씨, 용동리에 평강채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복내(福內)·계산(桂山)·동교(東校)·시천(詩川)·용동(龍洞)·용전(龍田)·유정(楡亭)·일봉(日鳳)·장천(獐川)·진봉(眞鳳)·봉천(鳳川)·반석(盤石) 등 12개 리가 있다.

  1. 웅치면(熊峙面)

군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39.41㎢, 인구 1,22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산리이다. 본래 장흥군 지역으로 곰재[熊峙]의 이름을 따서 웅치면이라 하여 강산·구암·연향·토동 등 2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암면 강산리 일부 지역을 병합해 보성군에 편입되었다. 곰재라는 이름은 장흥과의 접경에 있는 제암산 산령의 곰바위에서 유래한다.

면의 동쪽에 활성산(活城山, 465m), 서쪽에 제암산·사자산(666m), 남쪽에 일림산(日林山, 627m)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이곳이 보성강의 시원(始源)이 되고 있다. 중앙부에 평야가 형성되어 있지만, 평균 200m의 고원분지로서 기온이 낮기 때문에 가을철 수확기가 빠르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는 쌀을 웅치 올벼쌀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참깨 등이며 고랭지채소를 재배한다. 산이 많아 축산업도 성하다. 강산리에 있는 웅치관광농원에서는 표고버섯 재배와 사슴 사육을 주로 하고 있다. 또한, 민물새우인 토하도 양식하고 있으며, 농원 가까운 곳에 제암산 자연휴양림도 있다. 도로는 회천면에서 보성읍과 장평면으로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유산리활성산의 토성이 대표적이며 1992년에 복원한 장춘재가 있다. 명승지로는 제암산에 용추폭포가 있다. 강산리에 진주정씨, 유산리에 광산김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중산(中山)·강산(江山)·대산(大山)·봉산(鳳山)·용반(龍盤)·유산(柳山) 등 6개 리가 있다.

  1. 율어면(栗於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9.07㎢, 인구 1,38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문양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율어면이라 하여 고음(古音)·죽포(竹苞)·광천(光川)·하빙(下冰) 등 34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성군 율어면이라 개칭하고 9개 리를 관할하였다.

동쪽에 존제산, 남쪽에 초암산, 북쪽에 동소산(桐巢山, 464m) 등의 줄기가 뻗어 있어 율어천 상류의 장수·서하·서상과 보성강의 합류지점인 우정·자모·참샘마을 등을 제외하고는 산세가 험하고 산지가 많다. 존제산에서 발원한 율어천은 서쪽으로 흘러 보성강과 합류한다. 율어천을 중심으로 농경지와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 등이며, 그 밖에 고추·밤·감 등이 생산되고, 부분적으로 대마 재배와 양잠업이 행해지고 있다. 벌교읍 대판과 겸백면 석호를 잇는 도로가 있지만, 군내에서 교통이 가장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문화유적은 율어리에 문형식 가옥이 있고, 존제산 중턱에는 고려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성 유신리 마애여래좌상(보물, 1988년 지정)이 있다. 문양리에는 천안전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문양(文陽)·고죽(古竹)·율어(栗於)·금천(金川)·선암(船巖)·유신(柳新)·이동(梨洞)·장동(長洞)·칠음(七音) 등 9개 리가 있다.

  1. 조성면(鳥城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4.62㎢, 인구 4,13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조성리이다. 본래 보성군 지역으로 대곡면이라 하여 사월(莎月)·원촌(院村)·월평(月坪) 등 2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조내면의 대부분 지역과 송곡면(松谷面)의 호동리 일부, 흥양군 대서면 남당리 일부 지역을 병합해 조성원(鳥城院)의 이름을 따서 조성면이라 하였다.

면의 동부에 봉두산(鳳頭山, 427m)·장군봉(將軍峰, 415m), 서부에 방장산, 북부에 존제산 등이 에워싸고 있어 동부·서부·북부에는 산지가, 중앙부와 남부에는 평야가 분포한다. 바다와 인접한 관계로 기후가 온화하며 경지면적의 일부는 간척지로 정지된 논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고, 그밖에 시설원예 및 화훼작물의 재배도 활발하다. 특히, 축내리 삼정마을에서는 특산품으로 용문석을 생산한다. 옛날에는 해운이 발달했던 곳으로 지금도 성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는 보성읍과 벌교읍으로 통하는 4차선 등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우천리에 삼층석탑과 조양폐현의 터, 매현리에 마애약사여래입상, 봉능리에 석조인왕상, 축내리에 백천당(白千堂)이 있다. 대곡리에 광주이씨, 축내리에 장흥임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조성(鳥城)·매현(梅峴)·은곡(隱谷)·신월(新月)·구산(龜山)·축내(築內)·대곡(大谷)·우천(牛川)·봉릉(鳳陵)·덕산(德山)·동촌(東村)·용전(龍田) 등 12개 리가 있다.

  1. 회천면(會泉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53.64㎢, 인구 3,36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율포리이다. 고려 때 회령현(會寧縣) 지역으로 1545년(인종 원년)에 장흥군을 신설하면서 장흥군회령면이 되어 우암(牛巖)·동촌(東村)·상률(上栗) 등 2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천포면(泉浦面)의 전지역과 관암(冠巖)·청포(靑浦) 등 30개 리, 도촌면의 청포리를 병합해 회령과 천포의 이름을 따서 회천면이라 하고 보성군에 편입하였다. 남서부에 일림산, 북동부에 봉화산의 줄기가 뻗어 내려오고 있다. 영천(永川)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보성만에 유입하고 비교적 낮은 해안지형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감자·쪽파·양다래 등이 재배되고 있다. 보성만에 면해 있어서 해산물의 생산도 많으며, 특히 전어 내장으로 만든 돈배젓갈이 널리 알려져 있다. 토속주로는 강하주가 유명하다. 재료로 생강을 많이 쓰기 때문에 강하주라 불리는데 대추·곶감 등에서 우러나는 유기물과 비타민이 다른 약주에 비해 풍부하여 마시고 난 뒤에 취기가 덜하다.

도로는 율포에서 장흥·보성·득량 등으로 연결되는 지방도가 있다. 율포리의 율포해수욕장은 송림이 우거지고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해수가 청정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국민관광 휴양지이다. 영천리와 회령리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32㏊의 녹차산지가 조성되어 날로 증가하는 수요량을 공급할 뿐 아니라 외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전일리에는 팽나무의줄나무(지방기념물, 1987년 지정)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율포(栗浦)·벽교(碧橋)·전일(全日)·봉강(鳳崗)·회령(會寧)·영천(聆川)·동률(東栗)·군농(郡農)·화죽(花竹)·천포(川浦)·서당(書堂)·객산(客山) 등 12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보성통계연보』(보성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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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구역연감』(한국도시행정연구소, 2003)
『한국지방자치백서』(한국언론인협회, 2002)
『답사여행의 길잡이』 5-전남-(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6)
『내고장의 미찾기』-전남편-(한국이동통신, 1995)
『마을유래지』(보성군, 1990)
『전라남도지역자원조사』(전라남도지역개발협의회,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내고장전통가꾸기』(보성군, 1982)
『전라남도지』 1·3(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82·1984)
『보성군향토사』(보성군향토사편찬위원회, 1974)
보성군(www.boseong.jeonnam.kr)
보성교육청(www.jnbs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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