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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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중 외호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중 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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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을 씌워 환원염에서 구운 조선 초기의 도자기. 분장회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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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을 씌워 환원염에서 구운 조선 초기의 도자기. 분장회청사기.
내용

분청사기의 태토는 근본적으로 청자의 태토와 비슷하나 한층 더 흑회색을 띠고 있다. 유약은 청자에 비하여 철분의 함유량이 적으며 담청색의 청자유와 황색을 띤 투명한 백색 유약이 입혀졌다.

그러나 분청사기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백토의 분장기법에 있다. 백토의 분장기법은 중국에서는 오대(五代)·북송대(北宋代)에 걸쳐 자주요(磁州窯)일대에서 한때 유행했으며 관기(官器)보다는 민간용기로서 생산되었다.

조선시대의 분장기법은 무늬를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며,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워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함께 다양한 기법이 고안되어 율동감 있고 활달한 분청사기만의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분장기법을 발생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우선 일정한 무늬를 도장과 같이 만들어 그릇 표면에 찍은 뒤 백토분장하는 인화기법(印花技法), 무늬를 선이나 면으로 파고 백토를 박아 넣은 상감기법(象嵌技法), 백토분장 뒤에 오목새김의 선무늬를 나타내는 음각기법(陰刻技法, 일명 彫花技法), 무늬의 배경을 긁어내어 하얗게 무늬만을 남기는 박지기법(剝地技法), 분장한 후에 철사안료(鐵砂顔料)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기법(鐵畫技法), 귀얄이라는 시문(施文)도구를 이용하여 백토분장하여 나타나는 귀얄기법,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넣어 분장하는 담금분장기법(일명 덤벙기법) 등으로 발전한다.

분청사기의 무늬는 활달하고 민예적인 것이 특색이다. 무늬로는 모란·모란잎·모란당초·연화·버들·국화·당초·인동·파초·물고기·어룡(魚龍)·화조무늬 등이 주로 시문되었으며, 그 밖에 나비·매화·빗방울·여의두(如意頭)·돌림무늬[雷文] 등도 있다. 특히 무늬의 재구성과 추상적인 변형은 조선시대 도공(陶工)들의 예술적인 탁월성을 보여 주고 있다.

기형은 고려 말 청자의 기형을 토대로 해서 풍만한 율동적인 형태로 변형하고 있으며, 안정감이 있는 실용적인 기형들이 많다. 특히 장군·자라병·편병(扁甁)·매병(梅甁) 같은 특수형의 병 종류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에서도 매병은 고려시대 청자매병과는 달리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지고 어깨 부분에서 굽에 이르기까지 S자 모양의 굴곡을 나타내어 대단히 동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다. 대접은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지고 아랫부분이 풍만해지며 같은 시대의 백자대접에 비하여 양감이 있다.

인화무늬 분청사기에는 관사명(官司名)·제작지방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 많아 편년자료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제작지를 알 수 있어 분청사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태종실록≫ 17년 4월조에 보면, 장흥고(長興庫)와 사옹방(司饔房)에서 시행하는 공납사기(貢納沙器)와 목기에 관한 폐해를 상계하고 있는데, 이 상계문이 용납되어 장흥고 공안(貢案)은 사기·목기에는 금후 ‘장흥고’ 3자를 새기게 하였고, 다른 관사에 봉납하는 사기·목기에도 장흥고의 예와 같이 사호(司號)를 새겨 조작상납(造作上納)하도록 하였으며 왕의 윤허를 얻어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볼 때 1417년(태종 17) 이후에 상납된 사기는 각 사호가 새겨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관사명에는 공안부(恭安府)·경승부(敬承府)·인수부(仁壽府)·덕녕부(德寧府)·사선서(司膳署)·장흥고·내섬시(內贍寺)·내자시(內資寺)·예빈시(禮賓寺)가 있다. 이 밖에 지방이름으로는 경주·경산·밀양·부산·무장·영선·성주·양산·언양·예안·울산·진주·창원·합천·삼가·진해·청도·함안·군위·고령·의령·선산·김해·곤남·의흥·흥해·해주·삼척·광주 등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영남지방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청자로부터 변모 발전하여 조선의 태조·정종을 거쳐 태종 때에는 분청사기의 특색이 현저해져서 15·16세기의 약 200여년간 제작되었다.

청자의 모습은 14세기 중엽경부터 무늬가 흐트러지고 소략한 인화기법으로 시문되는 등 퇴락한 면을 보인다. 그러나 태종 때에 이르면 이러한 고려 말 청자와는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는 도자기들이 생산되기 시작한다.

그 예로는 조선 초기의 공안·공안부·경승부 등의 관사명이 들어 있는 3점의 대접과 작은 접시가 있는데, 이 3점의 예는 분청사기의 상감무늬와 인화무늬의 편년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즉 유약·태토가 밝아지고 고려 말의 상감청자와는 다른 연당초상감무늬와 인화무늬가 조밀하여지면서 초기 분청사기의 모습을 현저히 띠게 된다.

이 가운데 공안부는 1400∼1420년 사이에 설치되었던 정종의 상왕부(上王府)였고, 경승부는 1402∼1418년 사이에 있었던 세자부(世子府)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분청사기의 성격은 15세기 초에 뚜렷해진다.

15세기에는 정소공주묘(貞昭公主墓) 출토 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粉靑象嵌草花文四耳壺, 1412∼1424), 분청상감연어문정통5년명대반(粉靑象嵌蓮魚文正統五年銘大盤, 1440), 분청박지연어문고봉화상골호(粉靑剝地蓮魚文高峯和尙骨壺, 1430), 분청귀얄성화14년명호(粉靑―成化十四年銘壺, 1478), 분청귀얄철화가정15년명묘지편(粉靑―鐵畫嘉靖十五年銘墓誌片, 1536) 등의 예에서 보다시피 인화무늬와 상감무늬수법이 조선 초기부터 거의 동시에 발달하였고, 이어서 박지기법·귀얄기법·철화기법의 순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 준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인화기법·상감기법·박지기법·음각기법 등이 더욱 세련되어 갔고 철화기법·귀얄기법·분장기법은 15세기 후반에 성행했다. 16세기에 들어오면 인화기법과 귀얄기법이 함께 사용되고 귀얄기법과 분장기법이 더욱 증가한다.

따라서 무늬보다는 백토분장이 주가 되고 차츰 태토와 표면분장 상태가 백자화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외적 요인과 사기 제조 제도상의 문제 등 내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분청사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1) 인화기법

국화·나비·연판(蓮瓣)·여의두·연권문(連圈文) 등의 모양을 도장으로 찍은 뒤 백토로 분장하고 닦아내면 도장이 찍힌 부분에는 백토가 감입되어 흰 무늬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상감기법으로 이 중에서도 국화무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려 말 청자상감은 유약·태토·기형에서 모두 퇴락한 모습을 보였고 무늬에서도 몇 개의 소략한 인화무늬와 몇 줄의 선만이 상감되고 있다.

조선 초에 들어와서는 분청사기의 모습을 상당히 갖추어 인화기법도 다소 조밀하게 정비되고 그릇 외면에도 소략하나마 무늬가 들어가고 있다. 나비무늬·돌림무늬·여의두무늬·연판무늬가 등장하나 크고 작은 국화무늬가 가장 많다.

이러한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 분청사기인화기법의 발생과정으로 ‘공안부명대접’과 ‘경승부명접시’에서 엿볼 수 있다.

세종부터 단종 때까지는 인화기법이 발전, 완성되는 시기인데 정통3년명묘지와 함께 출토된 ‘장흥고명대접’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주무늬인 국화무늬가 작아지고 무늬 사이에 여백이 보인다.

세조대가 되면 ‘덕녕부명대접’, ‘삼가(三加)인수명대접’, ‘군위인수부명대접’, 그리고 천순6년(1462) 명월산군태지와 함께 발견된 ‘분청인화국화문호’ 등에서 인화무늬는 최고의 세련미를 보인다.

전면이 인화기법으로 메워져 백토의 분장이 증가하고 무늬도 개체의 국화무늬·집단무늬 내지는 원권무늬로 세련된다. 따라서 국화무늬 자체에 여백이 없어지고 질서정연한 무늬대가 성립된다. 또 여의두무늬는 없어지고 돌림무늬도 현저히 감소한다.

성종대로 추정되는 것으로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가마터에서 발굴된 세련된 분청인화기법 그릇들이 있으며, 인화무늬는 귀얄무늬·상감무늬·박지무늬·음각무늬와 병용되기도 한다. 성종대 이후부터 16세기가 되면 귀얄기법과 분장기법이 늘어난다.

인화기법은 매우 얕아지고 백토분장 없이 그대로 나타나기도 하며 귀얄로 얇게 분장한 뒤 닦아내지 않고 그 위에 유약을 입히는 등 쇠퇴해 가는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또 각 무늬대의 구획도 사라져 퇴조현상을 보인다.

(2) 상감기법

분청사기 상감기법은 고려상감청자와 직결되며 조선 초기의 상감청자와는 구분이 어렵다. 그러나 태토·유약·기형·기법에서 분청사기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분청상감공안명연당초문대접은 흑백상감으로 무늬가 흩어지면서 특이한 율동감을 보이고 있다. 또 분청상감의성고(義成庫)명병도 분청상감공안명연당초문대접과 더불어 상감무늬의 형태를 보여주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다.

정소공주묘 출토의 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는 인화기법의 국화무늬가 약간 곁들인 활달한 초화무늬로 그릇 전체를 메웠고, 회색 태토에 담청색 유약을 입힌 전형적인 상감기법의 분청사기이다.

1440년 작품인 분청상감정통5년명연어문대반은 일종의 묘지로서 그릇 안에 연어(蓮魚)무늬와 지문(誌文)을 흑백상감하고 있다. 태토와 유약은 고려청자와 유사하나 무늬와 상감기법은 분청사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 밖에 15세기 중엽의 상감기법의 자료로는 광주광역시 충효동 출토의 도편들이 있다.

(3) 박지기법

박지기법은 귀얄로 백토분장하거나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낸 뒤 무늬를 그리고 무늬 이외의 배경을 긁어낸 뒤 생기는 무늬로, 태토의 검은색과 백토무늬의 대비가 선명히 나타나는 효과를 보인다.

박지기법의 성립·발전·쇠퇴의 과정을 밝힐 자료가 현재로는 불충분하나 송광사의 고봉화상의 사리탑에서 발견된 분청박지연어문호가 있다.

고봉화상은 1430년(세종 12)에 입적하였으므로, 이 항아리는 1430년 이전의 작품으로 연어무늬의 능숙한 표현과 연판무늬의 배치가 상당히 세련되어 1430년 이전부터 박지기법이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측하게 한다. 광주직할시 충효동 가마터로부터 박지기법 도편이 수집된다.

(4) 음각기법

음각(오목새김)기법은 박지기법과 함께 사용되고 있으므로 특별히 따로 취급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선조(線彫)의 음각수법만으로 백토분장한 표면에 무늬를 그린 것을 박지기법과 구별해서 특별히 음각기법이라고 한다. 결국 백색의 배경에 흑색선의 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병·편병·항아리 등에 많이 사용되었고 호남지방에서 성행하였다.

(5) 철화기법

철화기법은 회흑색의 태토 위에 귀얄로 백토분장을 한 뒤에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입힌 것을 말한다. 철화기법의 편년자료로는 1927년 계룡산록 도요지 발굴조사 때 출토된 묘지편이 있다.

즉 성화23년(1487)·홍치3년(1490)·가정15년(1536) 등인데 이들 묘지편을 통해 볼 때 철화기법은 인화기법이나 상감기법보다는 다소 늦은 15세기 후반경에 발전하여 16세기 전반경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기형으로는 병·항아리·장군·대접 등에 많이 이용되었고 무늬는 당초·연화·연당초·모란·삼엽·버들 등의 식물무늬가 많으며 이 밖에 물고기·연지어조(蓮池魚鳥)무늬가 있다. 특히 무늬의 재구성과 추상화는 주목할 만하다.

가마터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와 화산리 일대 계룡산 기슭에서 출토되며 인화기법·귀얄기법·상감기법의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제작되었다.

(6) 귀얄기법

귀얄기법은 분청사기에 있어서 모든 백토분장기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분청사기귀얄기법이라 함은 귀얄자국 외에 다른 기법이 첨부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회흑색의 태토 위에 귀얄로 힘있고 빠른 속도로 바르기 때문에 백분의 백토 흔적과 태토색과의 대비로 운동감을 줄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무늬 효과까지 나타내므로 신선한 분위기를 보인다. 특히, 16세기에 성행하여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지방에 따라 귀얄기법의 차이가 있다.

(7) 분장기법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가 꺼낸 뒤 유약을 입힌 것이므로 백토분장의 효과는 매우 침착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풍겨 주며, 대개의 경우 손으로 굽을 잡고 거꾸로 담그므로 굽 언저리에 백토가 묻지 않아 상하로 암회색의 태토와 대비를 이루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전라도지방에서 많이 생산했으며, 16세기 백자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한국의 미』-분청사기-(정양모 감수, 중앙일보사, 1979)
『世界陶磁全集』-李朝-(鄭良謨, 東京小學館, 1980)
『분청사기연구』(강경숙, 일지사, 1986)
『한국도자사』(강경숙, 일지사, 1989)
『분청사기명품전』(호암미술관, 1993)
『鷄龍山麓陶窯址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29)
집필자
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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