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유품
김정희 유품
회화
물품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
내용 요약

붓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짐승의 털을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 또는 목축에 고정시킨 것이다. 서기전 중국 은·주시대부터 사용되었다. 붓은 털의 품질이 중요한데 여우, 토끼, 이리, 담비, 개 등의 털이 이용되었다. 털이 뻣뻣하고 뾰족한 것, 오래 써도 힘이 있는 것 등이 기본 조건이다. 특히 높고 험준한 산속에 사는 산토끼의 털이 가장 좋다. 우리나라 붓은 족제비 털로 만든 낭미필이 좋다고 중국 문헌에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붓은 일찍부터 중국에 수출되어 애용되었을 만큼 품질이 좋았다.

정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
개설

일반적으로 짐승의 털을 추려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주1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킨 것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이다.

연원 및 변천

붓의 기원에 대해서는 서기전 3세기에 진(秦)나라의 주2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설(說)이 구구하다. 『사기(史記)』의 「몽염열전(蒙恬列傳)」에는 붓의 발명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다만 서기전 221년 진나라의 천하 통일 후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몽염의 발명설에 대해 송대(宋代)의 소이간(蘇易簡)은 『문방사보(文房四寶)』에서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자기들의 치세(治世) 동안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발명설을 주장한 것 같다.”고 비판하였다. 우형(牛亨)도 “모필(毛筆)은 서사(書寫)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하여 몽염이 붓의 발명자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근대의 학자들은 “몽염은 붓의 발명자가 아니라 개량자일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기』에 몽염이 내사라는 직책을 맡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사는 국가의 법전을 관장하며 조서(詔書) 및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을 말한다. 즉 공문서의 기초나 서사 · 복제 따위의 일을 맡은 직책이었다. 그러므로 몽염이 맡은 일을 위해 서사 용구(書寫用具)를 개량하였을 것으로 본 것이다.

몽염의 붓 발명설은 3세기 진(晉)나라의 학자 주3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 “몽염조필(蒙恬造筆)”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데서 연원된 것 같다. 그러나 이 내용은 주5주4주6 · 공전(孔傳) 공편의 『백공육첩(白孔六帖)』, 그리고 주7에 인용되어 있을 뿐 현존하는 『박물지』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몽염에 의한 붓의 발명설은 증거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문헌이나 출토품을 통해 그 이전 은 · 주시대(殷周時代)부터 붓이 사용되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그 예로 은 · 주시대 청동기의 문자는 붓으로 쓴 주8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은대(殷代)의 복사(卜辭) 갑골 주9도 뼈의 표면에 먼저 붓으로 쓴 다음 새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뭇가지나 댓가지에 먹을 묻혀 필사하였으나, 그것이 불편하여 뒤에 부드러운 짐승 털로 바꾼 것이다.

특징

붓의 형태는 축(軸) · 수(穗) · 초(鞘)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축은 죽관(竹管)이 많으나 목봉(木棒)이 사용되기도 한다. 수의 재료로는 양, 여우, 토끼, 호랑이, 사슴, 산돼지, 살쾡이, 이리, 담비, 개, 말 등의 털이 사용되었다. 이들 털을 추려 모아서 그 끝을 주11로 감아 칠로 굳힌 다음 축의 주10에 붙여 만들었다.

붓은 모양과 용도에 따라 장봉(長峰) · 중봉(中峰) · 초필(抄筆), 그리고 심을 박은 것과 박지 않은 것 등으로 나누어진다.

붓은 털의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 털이 뻣뻣하고 뾰족한 것, 털이 많으며 가지런한 것, 털 윗부분이 끈으로 잘 묶여서 둥근 것, 오래 써도 털에 힘이 있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재료는 산토끼 털이 좋은데,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 속에 사는 토끼의 털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 붓은 족제비 털로 만든 낭미필(狼尾筆)이 좋다고 중국의 문헌에 소개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이 붓으로 백추지(白硾紙)에 쓴 것을 특이한 외국의 산물로 꼽았다. 이 낭미필은 황모필(黃狼毫筆) 또는 황서필(黃鼠筆)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문헌에서 서랑모필(鼠狼毛筆) 또는 성성모필(猩猩毛筆)이라 하는 것도 바로 이 붓을 뜻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붓은 일찍부터 중국에 수출되어 애용되었을 만큼 품질이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文房四寶』(蘇易簡 撰)
『겨레과학기술 조사연구(IX) -붓과 벼루-』(국립중앙과학관, 2001)
『中國古代書籍史:竹帛に書す』(錢存訓, 宇都木章, 法政大學出版局, 1981)
주석
주1

대나무로 만든 관. 우리말샘

주2

중국 진(秦)나라의 장수(?~B.C.209). B.C.221년 제(齊)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웠다. B.C.215년 흉노(匈奴) 정벌 때 활약이 컸으며, 이듬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시황제가 사망한 후 조고의 음모에 의해서 태자 부소와 함께 사사당했다. 우리말샘

주3

중국 서진(西晉)의 문학자ㆍ정치가(232~300). 자는 무선(茂先). 서진의 의례(儀禮), 헌장(憲章)의 대부분을 초(草)하였다. 저서에 ≪박물지≫ 10권이 있다. 우리말샘

주4

중국 당나라의 구양순이 편찬한 유서(類書). 고래(古來)의 고사(故事)를 천(天), 세시(歲時), 지(地), 주(州), 군(郡), 산(山), 천(川) 따위의 48부로 나누어 사실을 기록한 다음, 이에 관계되는 시문(詩文)을 실었다. 625년에 간행되었다. 100권. 우리말샘

주5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557~641). 자는 신본(信本). 왕희지의 서법(書法)을 이어받아 해서(楷書)의 모범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황보탄비(皇甫誕碑)>,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GT#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6

중국 당나라의 시인(772~846).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ㆍ취음선생(醉吟先生). 일상적인 언어 구사와 풍자에 뛰어나며,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은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로 통칭된다. 작품에 <장한가>, <비파행>이 유명하고, 시문집에 ≪백씨문집≫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7

중국 송나라 때에, 이방(李昉) 등이 황제의 명에 따라 지은 백과사전. 고금의 사실을 널리 옛날 책 따위에서 구하고 1,860종의 서적으로부터 발췌하여 형법(刑法), 예악(禮樂), 의식(儀式) 따위의 55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977~983년에 간행되었다. 1,000권. 우리말샘

주8

흔적을 새김

주9

고대 중국에서, 거북의 등딱지나 짐승의 뼈에 새긴 상형 문자.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로 점복(占卜)을 기록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우리말샘

주10

앞쪽의 끝. 우리말샘

주11

삼 껍질에서 뽑아낸 실.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