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Brazil)

외교
지명/국가
남아메리카 중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이칭
이칭
브라질연방공화국,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
정의
남아메리카 중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브라질연방공화국(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으로, 해안선의 길이가 7491㎞에 달한다. 면적은 남미대륙의 47%인 851만 4877㎢로 세계 제5위이며, 인구는 2억 425만 9812명(2015년 현재), 수도는 브라질리아(Brasilia)이다.

주민은 유럽계 백인 52.1%, 혼혈인종 41.4%, 흑인 5.9%, 인디안 1%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며,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교 신자이다.

기후는 북부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기후로부터 아열대와 남부의 온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국토의 60% 이상이 정글 또는 산림으로 덮여 있어 임산자원이 무한하고, 철광석·보크사이트·망간·석면 등 30여 종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커피·대두·사탕수수 등의 농산물 생산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어 경제적 잠재력이 매우 큰 국가이다. 또한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군수산업이 발달하여 제3세계국가 중 가장 두드러진 군수품생산국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무리한 고도성장정책과 석유의 과도한 대외의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외채가 누증되는 등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대외개방·민영화추진과 더불어 고금리·달러연동제정책을 병행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조 77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650달러이다.

브라질의 정치체제는 왕정에서 1889년 합중국으로, 다시 1964년 연방공화국으로 바뀌어왔다. 현재는 임기 4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연방공화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8년의 상원(81석)과 임기 4년의 하원(513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은 노동자당(PT), 민주운동당(PMDB), 사회민주당(PSDB), 자유전선당(PFL) 등이다.

약사

브라질은 1500년 포르투갈의 까브랄(Cabral, P. A.)이 발견하면서 식민지로서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개척 초기 포르투갈의 주요 관심은 당시 동양에서 수입하던 직물용 붉은 염료를 대신하는 염료용 나무(빠우 브라질)를 채취하는 데 있었다. 브라질이라는 국명도 이 염료용 나무를 칭하는 말로부터 온 것이다.

이후 사탕수수붐(16∼17세기), 금광발견(17세기 말∼18세기), 커피수요 증대(19세기)가 브라질의 개척과 근대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개척 초기에 포르투갈의 인구는 200만 명을 밑돌았으며 아프리카와 인도의 경영에 노력이 경주되었기 때문에 브라질의 초기 개척은 매우 더딘 것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사탕수수붐이 일면서 본격적인 식민이 이루어지고, 원주민 노예에 더하여 아프리카 흑인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노예로 팔렸다.

초기 식민은 대부분 남자로만 구성된 까닭에 백인과 원주민·흑인 사이의 혼혈이 널리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게 되자 왕실을 브라질로 천도하였다.

이 천도는 브라질에 유럽문화를 유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브라질의 경제는 금의 산출량은 격감하고 커피의 수요가 증대하기 전이었으며, 인구는 300만 명 가량이었으나 그 가운데 100만 명이 노예였고, 자유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으므로 반영구적 실업빈민의 수가 많았다.

이에 포르투갈 왕실은 산업진흥을 위해 중상주의정책을 완화하였다. 1821년 포르투갈 왕실은 황태자 돈 페드로(Dom Pedro)를 섭정으로 남겨 두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을 맞은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하여 중상주의정책을 다시 강화하였다. 여기에 맞서 브라질의 대지주와 보수주의자들은 돈 페드로 황태자를 옹립하여 1822년 9월 7일 독립을 선언하고, 1824년 3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1850년 국내외의 압력에 따라 노예수입이 금지되었으며 1888년 노예해방령이 선포되었다. 다음해에 노예해방으로 타격을 받은 대토지 소유자의 지지를 받은 군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의 브라질에는 쿠데타와 독재정치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는데 특히 1930년부터 1955년까지의 바르가스(Vargas, G.)에 의한 독재는 유명하다. 1964년에는 다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대통령에 브랑꼬(Branco, C.) 대장이 취임한 뒤 군장성의 권력승계로 군사정권이 지속되었다.

그 뒤 1985년 1월, 1964년에 제정된 헌법의 대통령간선제 규정에 따라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야당인 브라질민주운동당의 네베스(Neves, T.)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21년간의 군정이 막을 내렸다. 1985년 4월 네베스가 죽고 싸르네이(Sarney,J.)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이후 까르도조(Cardoso) 대통령이 1995년 1월 1일 취임하였고, 2003년 1월 취임한 룰라(Luiz Inacio Lula da Silva) 대통령이 2007년 1월 재선에 성공하여 집권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종래 친미적인 외교정책을 견지하고 있었으나, 룰라 대통령 취임 후 중도좌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한국과의 관계

한편, 우리나라는 1959년 10월 31일 국교를 수립하고, 1962년 7월 주 브라질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여 2006년 현재 존속하고 있다. 1970년 10월에는 상파울루총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브라질은 1965년 5월 주한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브라질 이민사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6·25전쟁 후에 50명의 반공포로가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이주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가 브라질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1962년 보건사회부차관을 단장으로 한 우리나라 이민관계 시찰단이 브라질을 방문하여 브라질정부로부터 우리나라의 이민 30세대를 접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63년 2월 이민 17세대 92명이 제1차 이민단으로 산투스항에 도착한 후 상파울루 근교농장에 정착하였고, 1964년 5월 제2차 이민 68세대 350명이 브라질에 건너갔다.

그러나 이들은 농지와 환경에 대한 사전지식의 결여로 대부분 상파울루 등 대도시에 집결하여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브라질정부는 우리 나라의 농업이민 접수를 중단하고 기술계 이민만을 접수하였다. 브라질 이민이 사실상 중단되자 국내 이주희망자들은 개인초청, 직계초청 등을 남용했으며, 한편으로는 파라과이 등 제3국을 통해 불법으로 이주하여 브라질정부에서 입국사증을 거부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뒤 1981년 1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브라질내 불법체류자에 대한 임시등록이 실시되어 약 4,800여 명의 교민이 임시거주허가를 취득하였다.

또한 브라질정부는 이들 임시거주자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1983년 12월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임시거주허가자들은 영주권을 발급받았다.

기술협력 분야에서는 1978년 이후 6명의 브라질 연수생을 초청하여 훈련시켰고, 우리나라의 전문가 2명을 브라질에 파견한 바 있다. 1982년 4월에는 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처장관과 양국 간 과학·기술협력을 증진시키기로 합의하였으며, 그 후속조처로 1984년 12월 브라질 수산청장을 단장으로 한 5명의 과학기술협력사절단이 방한한 바 있고 1992년 12월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앞서 1976년 9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대한상공회의소와 브라질상의연합회 간에 경제협력의정서가 교환되었으며, 1978년 5월 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1979년 10월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2차 합동회의가 개최되었다.

1997년에는 9월과 11월에 한·브라질 21세기위원회가 개최된 바 있고, 제1차 고위정책협의회가 같은 해 11월에 개최되었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대한우호정책을 취해왔으며 최근 양국간 통상증진 및 자원협력 등 실질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다.

양국은 1963년 5월 무역 협정, 1966년 2월 문화 협정, 1991년 8월 과학기술협력 협정, 1991년 9월 항공 협정, 1991년 11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3년 12월 상몽투자 및 취재복수사증 협정, 1995년 9월 범죄인인도 협정, 1996년 9월 관광협력 협정, 상용복수사증발급 협정, 2002년 5월 사증면제 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2002년 2월에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발효되고, 2006년 2월 형사사법공조조약이 발효되었다.

친한단체로는 한·브라질문화협회 외에, 1977년 7월 양국 의회간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결성된 한·브라질 의원친선협회가 있으며, 양국 간 의원교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1977년 4월에는 서울특별시와 상파울루시 간에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브라질 수출액은 54억 9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승용차 및 부품·핸드폰부품·LCD·칼라 TV 부품·건설중장비 등이고, 수입액은 40억 6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광석·펄프·천연섬유·금속광물·농산물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242명의 브라질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07년 현재 브라질에는 KOTRA를 비롯하여 외환은행, 대한항공, 포스코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4만 9424 명의 한국민 교민과 826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 3월 9일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이에 앞서 1995년 10월 브라질·북한 의원친선협회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1995년에 출범한 브라질의 까르도조 정부는 대외개방·안정화, 공기업민영화, 긴축정책에 진력하는 한편, 대외정책에서 실리추구 외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2007년 현재 북한의 대 브라질 수출액은 6980만 달러로 주종목은 제작기계·제어장치 등이고, 수입액은 1억 6993만 달러로 주종목은 철강석·사탕수수·강판 등이다.

브라질 안의 한국 문화

1963년 8월 발족한 한·브라질 문화협회는 매년 강연회·영화상영 등으로 양국간 문화교류에 힘쓰고 있다. 1966년 2월 우리나라는 브라질과 문화 협정을 체결하였고 그동안 문화단체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국립무용단이 1995년과 1996년에 브라질에서 공연하였다.

참고문헌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중남미사』(김창환, 송산출판사, 1980)
Brazilian Political Analysis(Flynn, P., Westview Press, 1979)
Brazil(Dickenson, J. P., Dawson, 1978)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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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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