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삼권분립하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하여 사법제도는 독립적으로 조직·운영되는 것이 원칙이다.
- 1. 고대부족국가의 사법제도초기 부족사회에서는 민중집회에서 재판을 하였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과 10월의 집회 등은 부족들의 연중대회로 가무와 향연을 즐기며, 제천의 종교행사와 아울러 부족적 중대사를 결정하였다.영고집회에서는 재판을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부족장인 가(加)들의 회의에서 재판을 하였다. 특히 삼한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여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걸어 ‘별읍(別邑)’이라는 성역을 만들고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으며, 죄인이 이 성역으로 피난, 망명한 경우에는 추적, 체포할 수 없게 하여 일종의 비호권이 인정되었다.부족에 공통되는 법의 제정이나 재판은 영고와 같은 부족집회에서 결정하였고, 부족연맹국에서는 부족평의회를 개최하였다. 신라의 화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회의제적 특징은 왕제국가로 발전한 뒤에도 전제적 왕권이 확립될 때까지 존속하여 왕(부족연맹의 장)이나 재상의 선출·파면·재판, 기타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였다. 그 뒤 관료제적 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부터 일반적 재판업무는 관료제 조직의 일정한 기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 2. 삼국시대의 사법제도율령제적 통치체제의 확립으로 최고의 재판권을 왕에게 귀속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나, 일반적·구체적으로 어떠한 조직 아래 어떻게 재판권이 행사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구려 초기에는 감옥이 없었으며, 부족장인 가의 회의에서 평의하여 처결하였다. 이는 당시의 최고 재판기관이었으며, 각 부족에서는 부족장인 가가 재판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백제는 고이왕 때 6좌평 중에 형옥을 주관하는 조정좌평(朝廷佐平)이라는 사법기관이 설치되었으며,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처결하지 못하고 반드시 중앙에서 신중히 심리하고 5회에 걸쳐 왕의 재가를 받은 뒤에 결정하도록 하였다.신라도 일찍부터 커다란 사건은 여러 관리들이 평의하여 처결했으며, 화백이나 남당(南堂)에서 국왕의 임석하에 재판권을 행사하였다.따라서 일찍부터 지방관이 재판권을 행사하였고, 수시로 염찰사(廉察使)를 파견하여 재판사무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사건 가운데 중대하거나 의심스러운 것은 중앙의 남당에서 합의하여 처결했으며, 특히 중대한 죄는 왕의 재가를 얻도록 하였다.대체로 율령체제 초기에는 중죄 아닌 사건을 도사(道使)·성주(城主)·군태수(郡太守) 등 지방관이나 촌락공동체에서 고래의 관습법에 따라 재판권을 행사했을 것이며, 율령체제가 확립된 뒤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질서 있는 조직을 통하여 행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3. 고려시대의 사법제도사법과 행정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행정관청이 민사·형사 사건을 재판하였다. 중앙정부의 재판기관을 보면, 태조 때 태봉의 제도에 따라 의형대(義刑臺)를 두었다가 뒤에 형관(刑官)으로 고쳤고, 다시 성종 때의 개혁으로 형부(刑部)라고 하였다.형부는 법률에 관한 사항과 민사재판인 사송(詞訟) 및 형사재판인 상언(詳讞)을 관장하였으며, 뒤에 전법사(典法司), 형조, 언부(讞部), 이부(理部)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문종 때는 노비에 관한 소송을 관장하는 도관(都官)을 설치하였고, 충선왕 때 언부에 병합되었다가 노비송(奴婢訟)이 폭주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원종 때부터는 형조 외에 필요에 따라 특수한 사건을 관장, 재판하는 임시관청을 두었다.즉, 1269년(원종 10)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1281년(충렬왕 7)의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 1318년(충숙왕 5)의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과 1320년의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 1365년(공민왕 14)의 형인추정도감(刑人推正都監) 등이었다.지방재판기관으로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는 개경부윤이 공양왕 때부터 일체의 민사사건을 재판하였다. 지방에서는 서경은 분대(分臺), 기타는 수령인 유수관(留守官), 부사·목사·지주군사(知州郡事)·현령·감무(監務), 동서의 주진(州鎭)에서는 각계의 병마사(兵馬使)가 초심기관이었으며, 안렴사(按廉使, 按察使)와 계수관(界首官)은 관내 수령의 형정을 감독함과 동시에 2심 재판기관이었다.성종 때는 각 도의 전운사(轉運使)도 형정사무를 관장하였고, 각 도에 파견되는 안무사(按撫使, 巡撫使)나 공양왕 때 경기지방에 파견되던 염문사(廉問使)도 민형사사건의 상소심으로서 재판하였다.그 밖에 충렬왕 때 몽고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둑 체포와 금란(禁亂)사무를 관장하도록 설치한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도 민간인이 서로 다투는 사건과 소나 말 살해사건은 물론 실제로 권한을 넘어서 노비송을 관장한 일이 있었다.심급이나 재판 절차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며, 형사재판에서는 작은 일은 5일, 그다지 크지 않은 일은 10일, 큰일은 20일, 도형(徒刑) 이상에 해당하는 죄는 30일 안에 판결하도록 하는 형사재판 정한법(定限法)이 있었다.그리고 일정한 근친간에는 재판관과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없게 하는 상피제도(相避制度), 일반 형사사건은 반드시 3인이 합의하여 처결하게 하며,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는 왕에게 세 번 상주하여 왕과 함께 합의 후 재판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그러나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의 폐단이 심하였고, 형사정책은 엄격하지 못하여 사면령이 빈번했으므로 형벌의 권위를 잃었다.행형제도로 중앙에는 전옥서(典獄署)가 있고, 이를 대리시(大理寺)라고 칭한 때도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수령이 관장하였다.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둥근 집이었고, 수금중인 승중자(承重者: 아버지·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장손)가 부모·조부모상을 당하거나 처가 부상을 당하면 귀휴하게 하고, 수금중인 부인이 산월을 당하면 귀휴하게 하는 휼형제도도 있었다.민사소송 절차는 조선 초기의 법에 의하여 추정할 수 있다. 당사자주의이고 변론과 증거, 특히 서증(書證)에 따라 재판하였으며, 판결문은 2통을 작성하여 1통은 승소자에게, 1통은 관에 비치하였고, 판결의 확정력의 제도는 불안정하였다. 민사재판에서 적용되는 실체법은 대부분이 확립된 판례법이나 관습법이었다.
- 4. 조선시대의 사법제도실체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판도 민사와 형사로 완전히 분화되어 있지 못하였으며, 모든 재판은 무겁고 가벼움의 차이는 있으나 형벌을 결과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재판은 형사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재판은 옥송(獄訟)과 사송(詞訟)으로 구별된다. 옥송은 오늘날의 형사상의 범죄를 다루는 재판으로 재판의 최종 목적이 공형벌을 과하는 데 있었으며, 사송은 오늘날의 개인간의 생활관계인 민사상의 분쟁을 다루는 재판으로 분쟁 해결이 재판의 최종 목적이었다.사송을 재판하는 것을 청송(聽訟) 또는 청리(聽理)라고 하여 부동산·노비·소비대차에 관한 것이며, 전토송(田土訟)·산송(山訟)·노비송·채송(債訟) 등이 사송에 속한다.법전에도 그 절차에 관한 규정을 소원 혹은 청리라는 편목 밑에 규정하였다. 옥송을 재판하는 것을 결옥(決獄) 또는 절옥(折獄)이라 하여, 옥송은 사송과 제도상으로 형식 절차로나 실질적으로 구별되었다.그러나 사송상의 분쟁, 예컨대 상속재산의 독점, 토지가옥의 침탈, 채무 변제의 불이행 등에는 행위의 반도의성·반사회성이 수반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그러한 행위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소송 진행중에 또는 소송 종결 뒤에 부수적이나 병행적으로 형사 처벌을 과하였다. 또 당사자도 소장(訴狀)에서 민사적 분쟁 해결을 요구함과 동시에 형사 처벌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다.제도나 사안이 민사적 관계를 내포하지 않은 순수한 형사적인 것이 있고, 한편으로는 형벌과 관계없는 순수한 민사적인 것이 있어 둘이 대별되었다.그러나 사송이라는 하나의 절차에서 사안(事案)의 민사면과 형사면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처리될 수 있었다는 점에 특성이 있으며, 형사적인 사안이 부수될 때마다 처벌함으로써 관령(官令)의 위엄을 세우고, 또 승소자는 같은 소송에서 같은 절차를 통하여 민사적 구제를 받았으며, 동시에 패소자를 처벌함으로써 분쟁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재판기구에서는 근대적 삼권분립이 없었으므로 국가의 행정기관이 재판을 관장하였다. 중앙집권적이고 전제적인 통치기구에서 사법적·행정적 통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궁극적으로 국왕으로부터 권한이 부여되고, 임면되는 관료에 의하여 행해졌다.주·부·군·현은 관료기구의 말단으로서 수령인 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이 사송과 태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을 직결하였고, 재판·금령·형구·죄수·감옥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는 형방서리인 아전(衙前)이 수령의 재판사무를 보좌하였으며, 사송도 형방을 경유해야 했기 때문에 아전의 판결에 대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수령은 심급적으로는 제1심이며, 동시에 관찰사로부터 반려된 사건과 전임 관리의 심리사건을 재판하였다. 도(道)에서는 관찰사가 관내의 행정·사법·군사를 통할하고 수령의 감독기관이었으며, 검률(檢律)과 형방서리가 사법사무를 보좌하였다. 관찰사는 도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을 직결하고, 그 이상의 중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사송사건에 관해서는 제2심이며, 수령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의송(議送)주 01)의 절차에 따라 항소할 수 있으며, 의송에 대하여 관찰사는 실질적 복심은 하지 않고 당해 수령에게 재심 여부를 지시할 뿐이었다.한성부는 수도의 일반 행정기관인 동시에 사법기관이지만 뒤에 이르러서는 한성부 관할 밖의 토지·가옥에 관한 사송에 대하여 전국에 걸쳐 재판권을 행사하였으며, 제1심·제2심의 기능도 하여 형조와 대등한 기관이 되었다.형조는 법률·상언·사송·노비를 관장하여 사법 행정의 최고감독기관인 동시에 수령이 관장하는 일반 사송사건의 상소심으로서의 재심기관이며 합의제기관이었다. 유죄(流罪) 이하의 옥송은 직결하나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 범죄의 재심기관이었다.형조 밑에는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례사(掌隷司)·율학청(律學廳)·전옥서·보민사(保民司)·장례원(掌隷院) 등의 예하 관청이 있고, 장례원은 노비송만을 관장하는 독립 관청으로, 1764년(영조 40)까지 존속하다가 형조에 병합되었다.의금부는 왕족의 범죄, 국사범, 모역반역죄, 관기문란죄, 사교(邪敎)에 관한 죄, 다른 모든 재판기관에서 적체되거나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 등을 심리하는 특별 형사재판기관이었고,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에 대해서는 제3심이었으며, 왕명에 의해서만 개정하였다.사헌부는 원래 행정 규찰과 시정 논핵 등 일종의 검찰사무를 관장하며, 재판기관은 아니었으나 판결이 심히 부당한 경우에는 사헌부에 상소할 수 있었다. 사헌부는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재판관을 규탄하며, 이 규탄에 따라 왕명에 의해 지정된 관청 혹은 관리들이 재판했으므로 일종의 검찰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국왕은 위 모든 기구 위에 모든 권한의 근원으로, 최고·최종의 재판권은 국왕이 보유, 행사하였으며, 국왕에 대한 상소를 상언이라 하고, 신문고·격쟁(擊錚)·상언 등 특례도 인정되었다.이상과 같은 일반적 재판기구 외에도 필요에 따라 특별재판기관을 설치하는 일이 있었고, 병사(兵使)·수사(水使)를 비롯한 각 하위 관청, 그리고 형조 이외의 각 조 등에서도 각기의 관할에 관계되는 사소한 민형사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따라서 특별재판 관청과 형조에서만 사법기관의 분화가 있었을 뿐이고, 국왕과 지방관에서는 재판도 행정사무 일반과 함께 같은 사람에 의해서 처리되었다.형조는 사법기관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사무의 분장이라고 하는 일반적 현상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기구는 행정기구의 한 측면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어떻든 가장 통일적으로 일관성 있고 명확하게 이용, 운용된 것은 한성부와 도 이하의 지방관청 뿐이었다.이와 같이 재판권은 일반 행정기관이 관장하지만, 그 기구 및 심급구조는 법전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에 반하는 경우는 월소(越訴)라고 하여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수령-관찰사-형조, 또는 사헌부-상언의 순서를 밟아야 하며, 그것도 그 기관에서 소송을 수리하지 않거나 폐소하여 소송을 심히 지연시킨 경우에 한해서 상소해야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일이 많았으며, 봉건적 신분관계, 인간관계, 파벌 등으로 자의적 운영에 기울기 쉬웠으므로 재판의 독립성이 약하였다.요컨대, 사법제도의 특색은 기본적으로 제도로서의 객관적 구조를 갖지 못했으며, 사법권의 내용이 광범하여 행정권을 포함한다기보다는 행정권의 내용에 재판권이 포함되어 있는 점, 즉 행정권의 일부분으로 나타난 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