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조 ()

사회구조
개념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 집단의 짜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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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 집단의 짜임새.
개설

한 사회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혀야 하는 바, 사회구조란 바로 이러한 용도에 적합한 표현이다.

이 개념은 원래 서구에서 발생한 것으로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의미의 변화를 겪어 왔다. 영어의 원래 의미에서 ‘구조’란 건축물의 구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조의 개념은 당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던 해부학에서 널리 쓰였다.

수세기 후 그것은 해부학에서 사회학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유기체론적 유추를 통하여 사회구조를 이해했던 것은 그것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사회학에서 사회구조가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확한 생각은 스펜서(H. Spencer)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해부학에서의 상을 염두에 두고 구조를 기능에 직접 연관시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뒤르켐(E. Durkheim)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유기체적 강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용례는 마르크스(K. Marx)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비유에서 보듯이 그는 유기체가 아닌 건조물의 비유를 통하여 구조의 개념을 이해하고자 했으나, 사회구조의 개념을 사회질서나 사회체계, 또는 사회형태와 같은 다른 개념들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사회구조의 개념은 그것이 발생한 역사적·국가적 맥락 안에서 연구자들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16세기 맥락과 18세기의 개념이 다르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 이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회구조는 사회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정의가 사실 불가능한 측면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구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해방식은 인간적 유전이나 자연적 환경만을 근거로 해서 설명할 수 없는 집합적 인간 현상 유형들의 총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일반화된 정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사회구조라는 용어가 사회과학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이에 따라 어떠한 형태로 질서를 잡은 사회현상의 배열도 사회구조로 일컬어졌다.

1960∼1970년대 이래 사회구조라는 용어는 흔히 사회행위와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이전까지의 구조개념이 지나치게 구조에 의해 결정되어 왔던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거꾸로 인간의 의지나 주체의 노력에 의해 구조가 동시에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소홀히 해 왔다는 점을 반성하고, 구조와 행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조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구조의 개념이 갖고 있는 결정론적 요소와 더불어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는 자원론적(自願論的) 측면이 상호작용하여 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중성 개념에 바탕을 두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강조한 데서 나온 과잉 사회화한 인간관과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만을 강조하는 과소 사회화한 인간관 사이에서 구조와 행위를 연계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나오고 있다.

사회구조라는 말의 개념적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서구에서 이 말이 대중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전통에서 ‘구조’라는 말에 직접 해당하는 적절한 개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굳이 들자면 아마도 제(制) 또는 법(法)의 개념이 이것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실체적 측면에서의 사회구조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통시대에도 당연히 존재하였다. 예컨대 국가나 신분, 계급, 가족, 사회조직, 종교 등이 그것으로, 이들 각 구성요소들의 총체에 해당하는 것이 사회구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시대별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는 이들 각 요소를 해부학적으로 살펴볼 때 가능하다. 나아가서 이러한 사회구조는 시대마다 구조를 달리하면서 발전해 가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

사회구조의 변화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의미 있는 양상을 보였던 역사적 시기로는 흔히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 두 시기의 특성으로 전통과 근대, 군사형 사회와 산업형 사회,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 성(聖)과 속(俗),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농촌과 도시 같은 이념형적 분류를 제시해 왔다.

그러나 전통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의 사회구조가 이들이 제안했던 것처럼 단선적인 변화의 연속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정치·경제·사회·종교 등의 각 구성요소가 다양한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만들어냈던 사회구조의 역동성을 각 역사적 시대에 따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회구조

전통사회의 구조는 원시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근대와 인접한 조선시대의 사회구조를 통해 예시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전통 사회구조의 변화와 발전양상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비판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사회구조를 이전 단계의 사회구조와 대비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먼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 한국 전통사회의 구조는 중앙집권적인 단일한 정치체제로 특징지워진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양반관료제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이것과는 다른 정치·경제의 독자적인 기반을 가진 봉건적 분권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권력은 서울의 조정(궁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치체제는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였지만 실제 운영면에서 보면 시대에 따른 왕권과 신권의 대립 및 갈등양상에서 보듯이 시대와 왕권의 영향에 따라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 왔다. 지배 관료는 일정한 관직을 얻음으로써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관직은 이들에게 권력과 위세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명분상 절대 권력의 소유자인 국왕은 여러 형태를 가진 양반 관료층의 견제와 간섭을 받았다. 관료체제를 구성했던 관인층은 이들에게 이념적 교리를 제공해 주었던 사림, 즉 양반층의 존재를 배경으로 실질적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였다. 관료층은 원칙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식인층으로 독자적인 신분 특권층이었던 사족집단에서 주로 충원되었다.

지방의 군현에는 왕권의 대리자로서 지방관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방 통치구조는 중앙과 마찬가지로 양반관료의 권익을 일차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장치였으며, 지방행정체제도 양반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적 보조기구로 기능하였다. 중앙 권력과 비슷하게 지방의 통치방식은 왕권의 강약과 집권세력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에도 불구하고 전통시대에는 왕권이 지방의 하부 단위에까지 미치는 데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국가가 부과한 조세의 할당이나 부역의 징발, 또는 군대 동원과 같은 주요 사항들에 대한 구체적인 집행은 각각의 마을 단위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러한 기본 사안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상생활 영역에는 국가권력이 거의 침투하지 못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향촌에 거주하는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지식인들이 이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서 유교적 이념에 근거를 둔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를 구축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통사회는 토지를 주된 생산수단으로 하는 농업사회였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전국의 토지는 왕토라는 사상에 따라 국유화한 토지(과전)를 모든 관리에게 재분배하고, 이 재분배된 토지에서는 이른바 병작반수(竝作半收:지주와 소작인이 생산된 곡식을 똑같이 나누어 갖는 것)라는 소작료율 50%의 지주제도 시행을 엄금하였다.

조선 초기의 과전법은 병작반수를 금지함으로써 사적 지주제도의 발달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과전법하에서도 차경(借耕)은 허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작반수가 확산될 가능성은 있었다. 실제로 양반관료와 지주층의 토지소유는 확대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1424년에 조선왕조는 사적 토지매매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토지사유제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어, 왕실과 중앙관료는 물론이고 향촌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리 등도 개간과 매득(買得) 등을 통해 토지를 집적하고 농장을 개설해 나갔다. 이처럼 지주제는 토지의 사유화가 확산되면서 보편적 농업 경영방식으로 출현하였다.

사적 지주제도가 성립된 조선시대 초기에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 및 사회신분이 대체로 일치된 형태로 통합되어 있었다. 즉, 특권 관료는 지주이면서 동시에 양반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작농은 양인으로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소작농은 양반 주인의 외거노비로 자기 주인의 토지를 소작하는 예속된 노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주제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전개됨에 따라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일치관계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고, 19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각 부분의 사회학적 지위 불일치가 널리 일반화되었다.

이처럼 사회신분과 사회계급이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음에 따라 농촌사회에서는 양반·중인·양인·천인(노비)의 신분과 함께 지주·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의 계급이 중요한 분류 개념으로 실제 사회생활에서 통용되었다. 계급과 신분이 확연하게 분리됨에 따라 지주가 소작인을 신분적으로 규제하는 일은 대체로 어렵게 되었다.

세번째로 가족과 친족제도 및 여러 가지 사회조직의 형태도 사회구조의 주요한 요소였다. 전통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했지만, 특히 조선사회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가족 및 친족의 결합을 우선하였다.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친족조직이 형성되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 기간에 농업생산력이 꾸준히 발전하면서 그에 상응하여 종법제를 기반으로 한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가례와 그것을 통한 종법의 시행은 그때까지 행해져 온 오랜 관행과 풍속과의 대결을 통하여, 전자가 후자에 승리함으로써 자리잡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일정 기간을 그곳에 머무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풍속은 16세기 중엽에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바로(또는 3일 후) 신랑집으로 와서 신부가 시부모에게 예를 올리는 반친영(半親迎)으로 바뀌었다.

또 대를 잇는 방식에서 형제를 택하는 배항주의(輩行主義)나 손자가 없을 때 손녀에게 권리를 주는 외손봉사(外孫奉祀)의 관행은 동종의 적자 이외의 아들로 후계를 세우는 적계주의(嫡系主義)가 우세해짐으로써 점차 소멸되어 갔다.

가족의 규모는 대개 3∼5명 사이가 많았다. 이를 근거로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전통시대의 가족제도가 핵가족 형태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평균 수명이나 분가방식 등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핵가족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혼인 연령은 대체로 15세 내외였는데,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여 1912년의 평균 혼인 연령은 거의 20세에 도달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가계 계승과 가부장권 행사를 가장 중시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제를 유지했으며, 이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효의 관념을 비롯한 가족주의 가치와 실행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가족과 친족 이외의 사회조직 형태로는 마을 공동체를 들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마을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의 차원을 벗어나 일상적인 사회생활의 단위이자 사회관계의 장으로서의 사회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마을이 동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자작농이 우세한 부촌과 소작빈농(小作貧農) 위주의 빈촌, 양반이 거주하는 반촌과 상민과 노비가 거주하는 민촌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마을 사이에는 일정한 분화와 위계가 존재했지만 마을의 일상생활은 공통적으로 생산 농민인 상민과 노비들의 장이었다. 조선 후기에 발달한 지방의 정기시를 제외하면 일반 민중들의 일상적 삶은 거의 전적으로 마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정한 지역 안의 토지를 경작하는 생활조건에서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의 성원들과 일상적인 접촉을 하며 협력하는 생활을 하였다. 마을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계조직이나 두레와 품앗이를 비롯한 공동 노동조직들은 이러한 협동적 생활양식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지 못하거나 또는 거기에서 유리된 특수집단의 조직을 제외하고는, 또는 가뭄이나 흉년, 질병 등의 경우 대량으로 발생한 유랑민을 제외하고는 민중들의 사회조직은 대체로 마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면에 양반들이 주도한 향약이나 향회는 넓게는 군현 단위에 걸쳐 조직되었다. 사회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보면 하층 신분이나 계급이 마을이라는 가장 한정된 범위 내에서 생활했다면, 양반과 같은 상층의 사회 공간은 이보다 조금 넓은 범위에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가족이나 친족, 마을, 계나 두레, 향약 등은 모두 전국적인 차원의 조직적인 결합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네번째로 전통사회의 주요한 구조적 특성으로 이 시기의 사회성원들이 신분원리에 의해 상이한 범주로 차별화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신분 구성을 단일한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각기 노비제·관료제·서얼 차대 등의 다양한 배경 아래 생성·분화된 개별 신분들의 복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통시대의 신분구조는 양반, 상민, 노비의 3대 주요 신분과 중인·서얼·향리와 백정 등 주변 신분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각각의 결정요인에 따라 판별할 수 있는 역사적 실체였다. 예컨대, 노비 신분을 결정하는 요인은 혈통이며, 양반은 보유 관직과 가계의 위신에 의해, 그리고 상민 신분은 일종의 잔여 범주로 이해되었다.

조선시대의 주요 신분을 양반·상민·노비, 즉 반·상·천을 중심으로 설정한다면, 신분구조의 기본틀은 양천(良賤)과 반상(班常)의 이원 대립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전자의 양·천은 노비 신분을, 후자의 반·상은 양반을 논의의 중심에 놓고 본 것인데, 자유민 대 예속민, 지배자 대 피지배자의 이러한 이원 대립구조는 시대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신분구조의 초점이 양인과 천인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하려 했다는 점에서 양·천의 대립구조가 의미를 가졌던 시기였다.

조선 중기(16·17세기)에는 사림파의 형성과 집권을 배경으로 이들이 중앙의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지방의 향촌사회에서 양반으로 일정한 위신을 누림에 따라 양반 신분이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반·상·천의 전형적인 신분구조가 정립되었으며, 이와 아울러 중인 신분도 이 시기에 성립되었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18∼19세기에는 노비제가 점차 해체되고, 상민의 상향 이동이 활발해지는 등 신분제가 전반적으로 흔들리던 시기였다.

노비의 감소와 양반의 증가에 따라 신분적으로 양·천을 구분하는 것은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고, 이것을 대신하여 반·상의 범주만이 차별의 형태로 남았다. 그럼에도 이 시기 신분제의 동요는 초기부터 형성되어 왔던 신분제의 기본 골격을 와해시킬 만큼 심각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는 유교적 이념과 세계관이 인간의 행위와 사회제도의 정당성 차원을 지배하는 유교사회였다. 유교는 자신의 세계관 이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정통주의를 강조함으로써 현세적 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이념체계가 되었다.

원래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의 체계로서 종교적 성격이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리학의 보편화와 함께 교설(敎說)상의 종교화가 진행되었다.

중국의 경우는 이러한 종교화가 사회구조에 어느 정도 반영되기도 했지만, 기존 사회구조는 이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존속해 갔다. 반면, 조선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인 정통성을 누리는 종교로서 사회구조를 거기에 예속시키면서 철저하게 변화시켰다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가족과 지역은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단절에 가까운 변화를 겪었으며, 정치의 경우는 고려시대에 계승한 것을 강화하면서 혁신이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만을 생산하고,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인격 수양에 해가 되기 때문에 규제되어야 한다는 청빈의 이념과, 영리를 추구하는 것은 의로움[義]과 반대되는 것으로 도덕적 서열에서 가장 아래 위치한다고 하는 사농공상 같은 직업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근대의 사회구조

전통사회가 이와 같이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복합적 총체로 파악되는 구조적 특성을 보인다고 해서 변화의 양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회는 그 자체의 내재적인 발전논리에 따라서, 그리고 외부의 압력과 영향을 통해 급격하면서도 지속적인 일련의 변화들을 경험해 왔다.

커다란 사건들만 들더라도 1876년의 개항과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 병합, 30여 년 동안의 식민지 경험, 1945년의 해방과 남북 분단, 1950년의 6·25 전쟁, 그리고 1960년 이래 본격적인 근대화 전개 등을 거치면서 근대적 사회구조의 한국적인 형태가 형성되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전통시대의 왕정에서 식민지시대를 거쳐 공화정으로 이행해 왔지만,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세습된 왕 대신에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실제로 국가의 권력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입법부, 행정부 및 사법부로 분리·균점된 각각의 영역에서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성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국가의 권력은 행정부를 중심으로 한 정부기구를 통해 행사되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국가는 흔히 정부와 혼용되었다. 해방 이후 1960년 이전까지의 국가조직은 체제의 안정과 질서 유지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배와 명령체계로 이어진 집권적이고 계선 중심의 조직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

전통시대와는 달리 이제 국가의 주인은 국민으로서 주권을 행사한다고 했지만, 실제 일반 국민들은 정책 결정이나 집행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경찰이나 내부 행정관료를 통해 국가의 힘을 일상생활에서 수동적·직접적으로 경험하였다.

1961년의 5·16군사정변과 뒤를 이은 위로부터의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국가조직은 더욱 강화되었다. 제2공화국에 이어 등장한 군사정부는 국가조직을 대통령제와 단원제로 바꾸면서 계선 중심의 조직형태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기획원이나 중앙정보부를 신설한 데서 보듯이 새로운 기능들을 보강하였다.

이로써 국가는 체제안정 및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국가 중심적인 정치질서 및 경제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경제에 관한 계획·관리에서 예산, 세금, 가격통제, 통화관리까지, 그리고 민간부문의 생산과 투자, 나아가서 가계부문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법, 행정명령, 재량적인 개입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국민생활에 관여하였다.

국가의 이와 같은 막강한 힘은 전통사회와는 달리 국가권력이 동·리를 단위로 하는 행정구역의 최하위 단위에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앙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도 공개채용 원칙을 통해 충원된 관료를 파견하고 임명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국가의 막강한 힘은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자율적 성장을 해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지방자치는 부정되었으며, 국민의 기본권조차 상당 부분 유보되었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은 정부 및 국가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봉쇄했으며, 198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군사정권 또한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관료제는 기능적이고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결국 해방 이후 국가기구는 공공서비스나 복지기능은 대단히 미약한 채 지배 기구로서의 특징만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전통시대의 그것에 비견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동시에 그것의 과잉 성장은 지방 사회와 자발적 결사체, 그리고 각종 시민조직의 발전을 억압하거나 주변화시키는 것을 대가로 이루어짐으로써 외형적으로는 근대 관료제의 형태를 띠게 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효율성의 위기와 더불어 정당성의 위기를 안게 되었다.

지방자치의 진전과 의회기능의 활성화, 작은 정부의 세계적 추세, 자율적인 시민단체들의 성장과 이른바 비정부조직(NGO)의 연대 등을 배경으로 강력한 국가는 점차 거센 반발과 도전에 직면하겠지만, 남북 분단과 대치 국면이 지속되는 한 가까운 시일 내에 성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그 동안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수천 년 동안 농업국가였던 한국은 19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불과 30여 년 만에 본격적인 산업국가로 탈바꿈하였다. 전체 인구 구성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15% 내외로 줄어든 반면, 노동자를 비롯한 비농업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근대화는 지주-농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불평등구조를 자본가-노동자를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불평등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특히 해방 이후 농지개혁으로 인한 지주계급의 몰락과 산업화 과정에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져 자본가 집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더불어 고용을 통해 생계를 영위하는 인구 수가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형성과 관련하여 한국의 경제구조에서 특징적인 현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재벌이다. 한국에서 재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며,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에 걸쳐 확립되었다.

형식적으로 재벌은 기업을 설립하거나 기존의 기업을 덧붙이는 기업결합을 통해 창출되지만, 재벌의 출현과 성장은 국가의 산업정책 및 경제개발정책 추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선 국민경제에 대한 영향에서 생산 측면을 보면 10대 재벌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3년에는 5.1%였으나 1980년 이후 2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소비생활 측면에서도 1981년 이래 정부가 지정한 시장 지배품목의 대략 70% 정도가 30대 재벌에 의해 생산된 것들이다.

공공사업 부문을 제외하면 우리의 생활은 재벌이 생산하는 상품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결국 우리의 일상생활이 재벌의 영향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재벌의 사회적 영향력은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재벌은 경제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정치·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그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당시의 재벌은 형성 과정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개발정책을 주도하는 국가관료제의 종속적 동반자로서 국가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이 시기의 재벌은 자본 축적의 고도화와 확장된 경제 지배력, 그리고 집단응집력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에 대항할 만한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였다.

또한 재벌은 경제·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증대시켜 왔다. 언론매체의 소유와 경영, 대학 및 대학연구소의 소유와 경영, 영화 및 비디오 산업으로의 진출, 학술·문화 활동에 대한 자금 지원, 광고 및 촌지 지원을 통한 언론 통제 등의 활동과 더불어 재벌의 사회적 영향력도 확장되었다. 이처럼 재벌은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또 공정한 자유경쟁이라는 자본주의사회의 윤리를 왜곡시켰으며, 나아가 국가의 중재자로서의 역할까지 무력화시킴으로써 한국사회가 발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터져 나온 노동운동과 뒤이어 활성화된 시민운동을 통하여 시민사회의 거센 도전과 1997년 말의 금융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의 편입을 배경으로 재벌은 구조개혁과 체질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세번째로 가족을 포함한 여러 사회조직의 형태를 보면, 먼저 가족과 친족을 포함한 전통적인 결합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따라 가족구조는 부부와 직계 자녀에 의해 구성되는 전형적인 핵가족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는 단순히 핵가족 비율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핵가족적 생활규범과 생활양식이 정착되고 확산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의 이행, 신분이나 가문이 아닌 사랑에 기초한 부부관계, 가족 내의 정서적 유대관계, 가족을 단위로 한 여가 문화의 발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족의 기능은 다른 사회제도들로 이양되어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됨으로써, 가족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이와 아울러 남녀·부부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이 크게 바뀌고, 자유분방한 성관념과 증대되는 이혼율, 청소년의 빈번한 가출과 비행, 그리고 노령 인구에 대한 무관심 등은 가족의 해체를 말할 정도로 심각한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전통사회의 가족구조와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통과 산업자본주의의 대립과 결합은 전통성과 근대성이 혼재하는 독특한 한국적 가족구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자녀 수는 줄어들면서도 남아 선호가 강하게 남아 있다든지, 자유 연애혼이 늘어나면서도 혼인을 여전히 당사자보다는 가족의 행사로 받아들인다든지, 가족생활에서 자녀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든지, 또는 가족의 중요 재산을 남편의 명의로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점 등이 좋은 예이다.

전통적 가족주의는 학교나 국가조직, 또는 근대적 기업경영에 도입되어 복종과 화합, 절제 같은 전통적인 원리들을 강화시키고 있다. 식민지 시기(1921년)에 도입된 호주제는 일본에서 폐지된 후에도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취업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전통적 역할상이 사회적 규범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지역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사회조직들은 지역의 범위를 벗어나서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조직과 산업조직으로 요약되는 근대적 사회조직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예컨대, 1963년에 31.5%였던 피고용율은 1994년에 이르러 62.0%로 증대하여, 1960년대에는 10명의 취업자 중 3명만이 근대적 조직에 고용되었는데, 1990년대에는 그것의 배에 해당하는 6명이 임금을 받아 생활하였다. 또한 경제활동 연령에 못 미치는 14세 이하의 경우에도 의무교육제도를 통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소비나 여가를 포함한 일상생활 측면에서 개인의 의지와 이해에 따른 자발적인 결사체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조직인 경우에도 한국의 전통 요소는 작용하고 있다. 서구에서와 같이 전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이해와 관심이 작용한다기보다는 전통적인 가족주의, 학벌주의, 지역주의 같은 연고주의가 사회관계를 비롯한 일상생활을 여전히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네 번째로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진전은 전통적인 신분구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으며, 계층과 계급에 의한 불평등구조의 출현을 야기하였다. 전통사회의 신분제도 아래에서는 신분간의 이동에 일정한 장벽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계층제도는 사회계층 사이의 자유로운 이동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근대사회라 할지라도 계층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사회문화적 폐쇄기제는 사회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국의 계급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배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상층은 자본가와 자본가적 금리 생활자, 그리고 정부의 최고위 관리자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을 정점으로 하여 대체로 높은 교육수준과 학위증 또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의사와 변호사, 대학교수 등의 고위 전문직 종사자와 정부 또는 기업의 고위 관리직 종사자 등이 지배계급의 하부에 위치한다. 이들은 정치적 권력, 이데올로기, 교육, 소득, 사회적 교류 등에서 다른 계급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생활 기회와 생활양식을 누리고 있다.

중간 계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반 사무행정직, 전문직, 관리직 등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가 중심이 된 이른바 신중간 계급이다.

이 계급은 해방 이후 산업화에 따른 조직 부문의 확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자본 기능의 위임 등으로 특히 노동계급과 더불어 가장 두드러진 증가 추세를 보였다. 비록 노동계급과의 소득 격차가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소득 등 생활 기회를 규정하는 요인에서 차별적인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이 계급은 앞의 상층 계급의 하부와 더불어 개인주의, 사회이동에 대한 열망, 교육에 의한 실력주의, 합리주의, 개혁주의 등에 대한 사회적 지향을 보이고 있다.

자영 전문직을 포함한 자영 상인, 자영 서비스직, 자영 생산자로 구성된 구 중간 계급은 1980년대 이후 정체 추세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증가해 온 계급이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을 계기로 지주 계급은 일단 소멸했지만,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한 데 따른 농민층의 분해로 농민층은 주로 소유 경지면적에 의해 부농-중농-빈농-농업 노동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부농, 중농을 포함한 대부분의 농민도 중간 계급에 포함된다.

계급구조의 하층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범주는 노동계급이다. 한국사회에서 이 계급은 모든 계급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노동계급은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 급속히 증가했으며, 초기에는 주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농민층에서 충원되었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는 도시에서 자율적인 성장 기반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

이 층은 핵심을 이루는 생산직 노동자와 단순 사무직, 서비스직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와 더불어 하층을 이루는 계급으로는 흔히 도시 빈민으로 일컬어지는 노점이나 행상 등의 자영 영세 상인이나 영세 서비스업 종사자들, 그리고 실업자·걸인 등과 더불어 이들과 비슷한 생활 기회와 생활양식을 갖는 영세업체의 단순 노동자, 임시 고용자, 또는 일일 고용자 등을 포함한다.

이 층은 해방 이후 도시 주변에 광대한 무허가촌을 형성하면서 지게꾼·행상·실업자 등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1960년대부터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화를 배경으로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증가되었다.

계급구조와 불평등현상은 자본주의의 산업화에 따라 모든 사회에서 유사한 성격을 보이면서도 각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제도적 장치의 차이를 반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문화의 전통 아래 학력을 중시하는 경향과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경향, 그리고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 등이 작용하면서 독특한 한국적 계급구조를 만들어냈다.

교육에 대한 과열현상, 사법·행정 고시 등 관직 진출에 대한 집중현상, 법대·의대에 대한 뚜렷한 선호 경향 등은 이러한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각 계급들 사이의 임금 및 학력 격차 해소와 소비의 대중화 등을 배경으로 불평등구조는 완화되거나 지체되고 있는 듯이 보지만, 족벌 경영과 국가의 유착, 이에 따른 심각한 부의 편중은 상대적 박탈감 증대와 아울러 계급적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종교 영역을 보면, 먼저 종교에서 전통적인 유교의 영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도시적 생활양식이 확산되고 대중문화가 보급되는 데도 불구하고 종교가 갖는 영향력은 다른 형태로 정착하였다.

종교인구의 급증은 특히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60년대 이후부터 일어났는데, 그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의 긴장과 불안, 그리고 소외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똑같은 영향력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종교적 다원주의 추세 안에서 전통적인 유교 및 무속신앙은 약화되는 반면 기독교(개신교)·천주교 등의 서양 종교가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다.

1960∼1970년대에 일어난 기성 종교의 급속한 성장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신종교는 1970년대 이후 현저하게 늘어났다. 지리적 분포를 보면, 도시에서는 기독교(개신교)가 강하고 농촌에서는 불교가 강하며, 전통주의적인 사고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영남지역에서는 불교가 강하고, 그렇지 않은 서울과 수도권 지역은 기독교(개신교) 인구가 우세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통사회를 떠받쳤던 이념과 종교로서의 유교는 거의 소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 가치관 같은 문화의 형태로 일상생활에 남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개신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가장 빠른 성장을 하였다. 개신교회는 거주지 가까이 위치하면서 다른 종교에 비해 신도의 활동과 참여가 활발하다는 특성 때문에 종교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닐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산업화 과정에서 상실되어 버린 공동체에 대한 대안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가톨릭은 1980년대 이후 가톨릭 교단이 보여준 높은 사회참여와 도덕성을 기반으로, 특히 1980년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불교는 한국적 전통과의 선택적 친화력을 배경으로 상당한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종교인구의 증가율은 현저하게 둔화되고 있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변화 과정을 거쳐 이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된 단계로 접어들어 갔던 것을 배경으로 새로운 산업사회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적응력이 증대 되었으며, 고도의 소비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여가와 오락 등이 종교적 대체물의 역할을 하는 한편, 기성 종교집단의 경직된 구조와 정신적 지도력의 결여로 종교가 갖는 호소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속화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재 한국인의 종교적 감수성이나 욕구가 약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속이나 점, 풍수, 작명, 운명론, 미확인 비행물체(UFO) 등 공식적인 교리와 제도의 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비공식 종교에 대한 믿음이나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사회구조는 근대로 옮겨오면서 특히 외세의 개입을 비롯한 외부의 영향에 의해 규정되는 바가 다른 어느 사회보다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자발적인 내생적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기보다는 외압에 의해 구조화되는 측면이 오히려 강하였다.

미국화된 사고방식과 태도, 가치관의 확산과 서구적 생활양식의 지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과제로 안고 있는 남북 분단 극복과 통일 달성도 이러한 외세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1960년대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한국사회는 짧은 시기에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서구의 경우 수백 년에 걸쳐 달성한 변화들이 한국사회에서는 불과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는 가치관의 혼란과 무질서, 대안적 가치체제의 부재 등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당면해 있다.

이러한 외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의 사회구조는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율성과 개방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며, 또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마을 단위의 협소한 지역 안에 갇혀 있던 개인의 영역은 세계화와 지구화의 추세 안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개인이 역사적 사유의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되고, 또 다양화되었다.

지역주의와 연고주의, 학력주의가 여전히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보급됨에 따라 그것은 점차 극복되어 가고 있다. 위로부터의 통제와 지배에 맞서 개개인의 자율과 의지는 끊임없이 증대되어 왔으며, 집단적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 질서를 모색하고 구축하려는 사회운동은 끊임없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결국 구조와 행위, 외재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상호작용은 갈수록 활발해질 것이며, 미래의 한국 사회구조 또한 이러한 긴밀한 상호관계 안에서 주체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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