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편집되지 않고 1464년(세조 10) 문치창(文致昌)이 편한 「사실본기(事實本記)」, 박사휘(朴思徽)가 편한 「행적기(行蹟記)」, 문영광(文泳光)이 편한 「공행록(功行錄)」 등을 1819년(순조 19) 문익점의 후손 문계항(文桂恒) 등이 편집·간행한 것을 1900년 단성신안사재(丹城新安思齋)에서 중간하였다. 권 책수와 판본·편자·서·발문은 이본이 많아서 일정하지 않다. 박사휘·김의순(金義淳) 등의 구서(舊序)와 1899년 기우만(奇宇萬)이 쓴 서문이 있으며, 발문은 문계항·문기량(文基良) 등이 썼다.
6권 3책. 목활자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으며, 많은 이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권1에 시 6수와 시 제목만 3수가 있고, 소(疏) 3편이 실려 있다. 다른 본은 권2에 실려 있어 권차가 같지 않다. 권2∼6은 모두 부록이며 목화씨에 관한 실기는 권2의 「목면화기(木綿花記)」에 들어 있다.
시 가운데 「제영남루(題嶺南樓)」는 청도(淸道)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며, 「적남황서별(謫南荒敍別)」 3수는 남쪽 배소로 떠날 때 지은 증별시로 『해규율수집(海奎律髓集)』에 전해진다. 나머지 2수는 「차증이아윤송서헌후운(次贈李亞尹送西獻候韻)」과 「위상촌김공(慰桑村金公)」인데, 뒤의 것은 김자수(金子粹)의 『상촌집(桑村集)』에 들어 있다. 그밖에 「봉화달학사(奉和達學士)」와 「장부청도봉화목은이공증별(將赴淸道奉和牧隱李公贈別)」·「근차정퇴천익유거(謹次鄭退天翼幽居)」는 시는 없어지고 제목만 남아 있다.
소 가운데 「경오봉사(庚午封事)」는 정책적 건의를 담은 것이다. 주요 내용은 중앙에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 향교를 세울 것, 상제의(喪祭儀)에 불교적인 백일탈상제를 혁파하고 주자(朱子)의 『가례』대로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봉안해 제사할 것, 원나라의 제도인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화복제(中華服制)를 택할 것 등이다. 「청물영원사소(請勿迎元使疏)」는 도중에서 명나라 사신을 죽인 김의(金義)와 원나라 사신 오계남(吳季南)·장자온(張自溫) 등을 포박해 명나라로 압송할 것을 청한 소다.
「목면화기」는 남효온(南孝溫)이 썼으며, 만시는 성현(成俔)·김시습(金時習)·정여창(鄭汝昌)·조식(曺植)·이이(李珥) 등이 썼다. 부록에는 세종 이하 정조까지 역대 왕들의 사제문(賜祭文)과 각처의 사당 건립, 청액(請額) 및 문익점의 세계(世系)·행장·연보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은 문익점 연구에 필요한 자료인 동시에, 고려 말의 원나라·명나라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