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교육 ()

목차
관련 정보
선린상고(1930년대)
선린상고(1930년대)
개념
산업계에서 생산자로서 또한 기업이 제공하는 재화와 용역의 소비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 · 기능 · 태도를 기르는 전체 교육프로그램.
목차
정의
산업계에서 생산자로서 또한 기업이 제공하는 재화와 용역의 소비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 · 기능 · 태도를 기르는 전체 교육프로그램.
내용

상업교육의 목표는 교양교육적 측면과 직업교육적 측면으로 구분된다. 교양교육적 목표는 개인의 합리적인 소비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사회구성원으로서 국민경제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여, 경제발전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직업교육의 측면으로는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의 분화된 직업군에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적합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그 목표이다.

이러한 상업교육의 본질에 비추어 우리 나라 상업교육의 발달과정을 살핀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시대는 농본주의를 국시(國是)로 하여 상업의 자유로운 신장을 방해하는 억상정책(抑商政策)으로 상업의 발달은 물론 상업교육의 발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경제환경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억상정책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상인이 발생하고 상거래가 형성되어 왔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오늘날의 상업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과정을 시대별로 살펴보고 상업교육에 관하여 광복을 전후한 근대상업에서부터 언급하기로 한다.

(1) 상고시대

중국의 ≪관자 管子≫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에 고조선은 이미 제(齊)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자모전(子母錢)을 교환수단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의 법률인 <범금팔조 犯禁八條>에는 50만 전이라는 돈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시대도 가내공산품의 교환이 돈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환경제가 상당히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환이 우리 나라 상업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2) 삼국시대

고구려의 국세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에 전성을 이루어 인접한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멀리 왜국(倭國) 및 중국의 진(晉)·연(燕)·송(宋) 등과도 조공무역이 성하였고, 사가(私家)에서는 행상교역도 번성하였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섭하여 해상무역이 번성하였다.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품으로는 면포·해물·과하마(果下馬) 등이고, 수입품은 불전(佛典)·금포(錦袍)·채조(彩弔) 등이었다.

일본으로는 주로 박사(博士)·불사(佛師)·직공(織工)·봉녀(縫女) 등의 인적 자원과 불전을 전수하였고, 양마(良馬)·궁(弓)·맥종(麥種)·금사(錦糸)·포(布) 등을 수입하였다.

신라는 조로방(朝露房)·철유전(鐵鍮典)·와기전(瓦器典) 등의 많은 관영수공업을 경영하여 왕실 및 귀족의 수요에 충당하고 중국과 일본 등에도 수출하였다. 이러한 것이 점차 일반 시민에게로 보급되어 국내의 시장에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신라의 상업조직으로는 수도 경주에 설치된 경시(京市)와 지방의 향시(鄕市)가 있었다. 시전은 좌상(坐商)들의 상설점포로서 대개가 전업적(專業的) 상인인 데 비하여, 향시는 일정한 날을 택하여 교통의 요지에서 수요자와 공급자의 물품교역이 이루어지는 시장이었다.

(3) 고려시대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은 중앙행정 중심지로서 면모를 갖추는 동시에 시전이 설립되어 상인들은 어용적(御用的) 상업에 종사하였고, 경시서(京市署)가 있어 상행위의 감독과 세수(稅收)에 관한 일을 보았다.

고려 상업은 이제까지의 국가간·계급간의 의례적인 조공무역의 범위를 벗어나 호시적(互市的) 객관무역(客館貿易)이 성하였고, 특히 1097년(숙종 2) 주전관(鑄錢官)을 설치,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주조하여 원활한 상거래를 꾀하였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를 지배해 온 유교사상은 지나친 명분주의와 신분차별로 상공업 종사자를 천시하여 이들은 봉건적 지배층의 어용적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육의전(六矣廛)이 생기고 개성·평양·수원 등 지방도시에도 상점이 형성되어 관(官)의 물품 용달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등 관허(官許) 상업인의 특권적 독점상업이 점차 변질되었고, 한양에는 경시서(京市署)를 두어 상인을 감독하는 행정업무를 보았다.

조선시대의 향시에는 주로 보부상(褓負商)들이 중심이 되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교환경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갑오경장의 법적 조치로 신분적 차별이 없는 근대적 자유상업 터전이 이룩되었다.

(1) 근 대

상업교육의 맹아기로 볼 수 있는 1899년에서 1945년 광복 전까지의 상업교육의 변천과정은 다음과 같다. 1899년 6월 <상공학교관제>가 공포됨에 따라 우리 나라 최초의 실업학교인 상공학교(商工學校)가 설립됨으로써 공식적인 상업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상공학교는 수업연한이 4년으로 예과 1년 본과 3년이었다. 학비는 전액 관비로 하였으며, 학생수는 1개 학과에 10∼20명 정도였다.

1904년 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06년 농과·공과·상과가 각각 분리되어 상과는 선린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밖의 상업학교로는 1906년 부산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상업교과목으로는 주로 상업지리·상업부기·상업문·상업산술·경제·상품·상사요항(商事要項)·상업영어 등이 있었다. 1910년 보성학교(普成學校: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전문교육 수준의 교과목을 가르치는 수업연한 3년의 상과가 설치되었다.

국권상실 후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 이른바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이라 하여 고등교육의 기회를 억제하고 저급한 실업교육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르면 농업학교·상업학교·공업학교 및 간이실업학교 등의 실업학교를 설치하도록 규정하였는데, 수업연한 2∼3년에 보통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입학대상으로 하였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어 상과가 설치됨으로써 비로소 정규 전문교육으로서 고등상업교육이 실시되었다. 1918년 당시 상업학교의 학생수는 521명이었으며, 비정규 간이상업학교는 학생수가 약 500명이었다.

1922년 2월에 공포된 개정 <조선교육령>에 따라 실업학교의 수업연한을 5년으로 연장하였으며, 기존의 경성고등상업학교가 일본인학교에서 한일공학이 되고, 보성법률상업학교가 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상과가 설치되었다.

또한 1926년 최초의 여자상업학교인 경성여자상업학교가 설립되었다. 1941년 당시 상업학교의 우리 나라 학생수는 8,481명(여자 704명 포함)이었으며, 일본인 학생수는 4,454명이었다.

(2) 광복 후

1949년 2월에 제정된 <교육법>에 의하면, 실업학교는 전문과목을 30% 이상 편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당시 상업중학교 교과목으로는 상업경제·경영경제·부기회계·주산·상업수학·통계학·무역론·상품학·법규과 등이었다. 1955년 부기회계과목이 상업부기·공업부기·은행부기·회계학 등 4개 과목으로의 분화를 골자로 하는 1차 교육과정의 개편이 있었다.

그 뒤 1963년 2차 교육과정 개편 때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별도로 제정되어 상업계는 전문 교과목을 50% 이상 가르치도록 규정하였으며, 1971년 3차 교육과정 개편에서는 정보처리 교과목의 도입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때 도입된 컴퓨터 교과목으로는 전자계산일반·프로그래밍·전자계산실무·포트란프로그래밍 등이었다.

특히 1981년 우리 나라 상업학교에서도 대만·일본 등과 같이 분과제도(分科制度)를 도입한 것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상업과·회계과·무역과·정보처리과 등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5차 교육과정 개정 때 분과제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좀더 시행한 뒤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여자상업고등학교에 비서과를 신설하는 문제가 제안되었으나 아직 시기상조라는 점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2년 10월 30일 확정 고시한 6차 교육과정에서는 시대적 요구에 맞는 과목의 다양화, 전공실습 기능교육의 강화, 정보처리 분야의 확대, 국제화에 부응하는 경제내용 보강 등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6차 교육과정 개정안은 종전의 4개 과에서 산업디자인과·관광경영과·비서과를 신설하여 7개 과로 늘려 학교 실정에 따라 개설할 수 있도록 했고, 교과목도 종전의 22과목에서 30개 과목으로 그 폭을 넓혔다.

이러한 6차 교육과정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교육내용의 획일성, 경직성, 폐쇄성을 해소하고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확대하였다.

둘째, 학과 수를 대폭 확대하여 산업사회의 구조변화와 인적자원의 수급상황 및 지역사회의 실정에 맞게 자율적으로 학과를 개설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상업교육은 기능교육에 기초하는 직업교육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많은 경험과 실습의 기회를 줄 수 있는 현장실습교육을 강화한 점을 들 수 있다.

1987년 교육단계별 상업교육의 내용을 살펴보면, 초등학교 사회생활과에서 상업의 기능과 상업계산(주산) 일부가 다루어지고 있으며, 중학교에서는 1960년대까지는 실업 선택 과목으로 상업교과가 많이 다루어졌으나, 1970년대 후반 공업입국의 국가정책과 평준화정책에 따른 인문계 선호 때문에 상업 선택 과목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고등학교의 경우 인문계고등학교의 실업교과목에서 상업을 선택하는 학교는 극히 소수이다.

1960년대 후반 실업교육정책의 강화로 상업고등학교의 수가 늘어났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고교평준화와 인문계 편중 등의 현상으로 상업고등학교의 선호도가 비교적 낮아지게 되었다.

특히 1980년도의 경기침체로 인한 적자 경제성장으로 기업의 고용능력이 상실되어 상업고등학교 졸업생의 취업이 줄어들자, 상업고등학교가 인문계나 종합고등학교로 전환되어 1987년은 1985년보다 상업고등학교의 수가 줄어들었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서의 상업교육은 초기의 상학과가 경영학과로 발전되면서 경상계열의 학문이 더욱 세분화되었다. 즉 경영학과·회계학과·무역학과·정보처리학과 등으로 세분화되어 산업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게 되자, 고교생은 물론 학부모들까지도 경상계열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전국의 각 대학에 경상계열의 학과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고등학교에서의 상업교육은 날로 쇠퇴하고 있다.

상업고등학교의 수는 1991년 219개 교에서 1995년 248개 교로 늘어났으나, 학생수는 오히려 감소하였으며 학생들의 수학능력도 날로 뒤떨어지고 있다. 특히 경제환경의 변화로 인해 상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유일한 기능인 ‘주산’과 ‘부기기장’ 능력이 컴퓨터의 발달로 크게 쓸모가 없게 되자, 기업체에서는 상고 출신자보다는 능력이 있는 인문고 졸업생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상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진로가 불투명하게 되고 지원자 수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상업고등학교의 존립의 문제가 대두되자 1997년부터 상업고등학교의 명칭과 교육내용을 지역실정에 맞게 변경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98년도를 기준으로 전국의 거의 모든 상업고등학교가 ‘정보고등학교’,‘상업정보고등학교’, ‘경영정보고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상업고등학교가 정보 및 전산 고등학교로 바뀌게 됨으로써 전국 11개 대학에 설치되어 있던 상업교육과도 경영학부로 통합되거나 아니면 ‘전산교육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상업교육을 이끌어 오던 ‘상업교육학회’도 ‘경영교육학회’로 명칭을 변경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 것이 오늘날 우리 나라 상업교육의 현주소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한국개항기의 상업연구』(한우근, 일조각, 1970)
『실업·기술교육론』(이무근, 배영사, 1983)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강만길, 한길사, 1984)
『한국근대경제사연구』(류원동, 일지사, 1984)
『상업교육개요』(이승희, 학사원, 1987)
「외국의 상업교육제도에 관한 비교연구」(신황호, 『상교논총,』 한국상업교육학회, 1988)
관련 미디어 (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