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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의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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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의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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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체이며 광의로는 의제상인(擬制商人)까지도 포함되나 주로 유통업 종사자로 한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시장은 삼한시대 무렵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라 가로시(街路市), 읍성시(邑城市) 등의 형태로 나타났으나 판매자와 구매자가 직접 교환행위를 하는 본격적인 상인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각국에 무역상이 나타나고 시전(市廛)상인과 보부상(褓負商)이 출현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객주(客主)가 등장하였다.

고려에서는 좌상(座商)인 시전(市廛)상인이 경내(京內)에서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정착하였고 송(宋)·일본·거란(契丹) 등과의 거래가 활발하여짐에 따라 무역상이 번성하였다.

행상(行商)의 활동도 신장되어 향시(鄕市)나 각호(各戶)를 배경으로 일상용품인 어류·도기·목기·소금과 농가의 잉여생산물을 판매하였다. 또한 각 지방의 특산물을 원격지에 판매하는 행상도 있었다.

고려시대의 상인들은 거래상황을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 四介置簿法)이라는 독특한 장부기록법에 따라 정리하였다. 사개치부법은 복식부기의 일종으로 서양의 경우보다 200여 년 앞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전상인과 행상 가운데에서는 일부 거상(巨商)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관아(官衙)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어용상인으로서 당시 상업자본의 형성에 공헌한 측면도 있으나 권력층과 결탁하여 공정거래 질서를 해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상인계층이 형성되는 시기였으나 상인의 신분서열은 사회적으로 최하위에 놓여 있었다. 당시의 상인은 천민층에 속하여 관리등용은 물론, 교육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공부(貢賦) 및 군역(軍役) 의무도 부여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 봉건질서 확립기에 있어서 상인은 지배층을 위한 어용적 존재에 불과하였으므로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재화의 수급 정도에 따라 상행위의 범위가 규제되었다.

후기에 이르러 구질서의 동요가 부분적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상업은 본질적으로 관부(官府)와 연계되거나 각종 사회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상인층을 형성치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 관상(官商)적 존재의 핵심은 경중(京中)의 시전상인이었다.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시전상인은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소소전(小小廛)에 이르기까지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세폐(歲幣)·방물(方物) 등의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신 자금의 대여, 외부압력으로부터의 보호, 금난전(禁亂廛) 등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궁핍한 정부재정을 보전하는 반대급부로 부를 축적한 일부 상인세력이 등장하면서 상인의 지위는 상승하였으나 궁방(宮房)과 아문에 의한 사무(私貿)가 시전의 활동영역을 침범한 데다가 각종 부담으로 인하여 시전상인의 특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는 못하였다.

거상적인 시전상인 외에 주요한 상인으로는 보부상, 객주 또는 여각(旅閣), 무역상과 광해군(光海君) 때 등장한 공인(貢人) 등이 있었으나 이들도 정부와 연계된 상태에서 제약을 받는 상인들이었다.

먼저, 보부상은 등장 이래 상업을 경영하는 이외에 정치적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조선 건국 때에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정치세력기반을 확보하였고 병자호란·동학난·강화도사건 등에서는 군사활동, 치안유지 등에 투입된 대가로 국가의 비호하에 육성되어 상업적 특권이 부여되었다.

상행위과정에서의 보호, 관리배의 횡포로부터의 보호 이외에 아류(亞流)에 의한 상업신용의 실추를 막기 위해 경찰권이 부여되었고, 병자호란 뒤로는 어(魚)·염(鹽)·목(木)·토기·수철(水鐵) 등의 전매권과 시장세 징수권까지 획득하였다.

조선시대는 이들에게 상민단체 조직을 장려하여 도안장(都按長)으로부터 유사(有司)에 이르는 기구를 두었으며, 흥선 대원군 때는 보부청(褓負廳)을 설치한 뒤 상무사(商務社)로 개칭되기도 하였는데 전성기에는 보부상 단원이 100만 명에 이르러 정치세력화하였다.

객주는 보부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존재로서 보부상의 주인격이며 계급상으로 상임(上任:도안장)이었다. 객주는 보부상을 보호하고 이문획득을 방조하였으나 직접 간접으로 구전(口錢)을 전제로 상품의 위탁판매를 하였으며, 대금업을 통하여 이자를 획득하였다.

그 밖에 어음의 발행 및 인수 등을 바탕으로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 편의를 제공하였지만 엽관(獵官)자금을 지원한 대가로 특정 상품의 독점 취급권을 얻어 자본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객주란 객상주인(客上主人)이라는 뜻이며, 주인이란 거래를 주선하는 자를 의미한다. 객주에는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가 있었다. 보행객주는 주막(酒幕)보다는 고급인 여관으로 중류 이상의 앙반계급이 숙박하던 곳이며, 물상객주는 상업, 금융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물상객주의 주요 업무는 상품매매였으나 창고업·위판매업·운송업을 동시에 취급하였으며, 또 이들 업무에 부수하여 구식 은행업무를 다루었을 뿐 아니라 하주(荷主)의 편의를 위해 여숙업(旅宿業)도 겸하였다.

상품생산자 및 상인들이 기송한 화물을 수취하고 지방상인들을 유숙하게 하였으며 위탁에 대응하여 매매를 주선한 대가로 화물가격의 100분의 1에서 100분의 5에 해당하는 구전(口錢)을 수취하였다.

화물의 보관에 장기간이 소요되거나 보관장소를 옮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창고세를 받지 않았다. 객주는 화주 및 상품구입자에게 대금이나 자금을 융통해 주고 화물을 담보하였으며, 특수한 경우 토지·가옥 등 부동산으로 이를 충당하였으나 대체로 신용대부를 하였다.

화물의 거래·대금입체·자금제공 등의 경우에는 어음(於音, 音票, 魚驗)을 발행하거나 인수하였으며 원거리간의 금전, 재화의 결제를 대행할 경우에는 환표(換票, 換簡)를 발행, 인수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객주는 하주뿐 아니라 왕실·대관(大官)·양반 등의 자금을 예치하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자(利子)는 하주나 상인의 경우 1∼2푼(分)을 받았으며 왕실이나 양반들에게는 수취하지 않았던 것이 상례였으나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로는 월 2푼을 받았다.

이 밖에도 객주는 지방에서 중앙의 각 관청에 상납하는 물품, 금전 등도 취급하였으므로 정부의 두터운 비호를 받았다. 엽관(獵官)운동 자금을 지원하여 특정 화물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특권을 확보한 경우도 있었다.

공인이란 종전에 민간이 납부하던 특산물[土貢]을 광해군 이후 대동미로 대신함에 따라 조정(朝廷)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관부를 배경으로 등장한 공물 대납업자였다.

이들은 특권층에 기생하여 용달청부를 맡는 이외에도 조정의 잉여물자 매입과 조공품의 불하를 관장하였다. 공인은 상품유통에 있어서 독점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관세·시장세 등의 징수권과 때로는 채광권 등을 획득하여 대량의 자본축적을 하였으며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도 하였다.

무역상인은 명나라·청나라를 대상으로 회녕(會寧)·경원(慶源)·중강(中江:뒤에는 義州의 中江後市, 柵門後市)에서 개시(開市)하였고 일본과는 왜관(倭館)에서 시장을 열었다. 개시에 관해서는 상인의 수효, 개시기간, 유임일수 및 매매규모 등이 미리 정해져 있었으며 사상(私商)을 금하였으나 사무역이 크게 성하기도 하였다.

대일무역은 인조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수가 제한됨에 따라 밀무역이 성하였다. 대외무역에는 대상인이 참여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으며 이들은 고리대업에 종사하여 전기적 상인자본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상인들은 특권화된 상인 또는 관부, 관리와 연계 결탁된 존재로서 대체적으로 유통이윤의 실현을 통하여 경제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밖에 대구·평양·진주·공주·전주·황주 등 지방군읍 좌상(座商)들의 경우는 매상이 근소하여 육재시(六齎市)에 의존함으로써만 번영 및 현상유지가 가능하였다.

또 말단의 행상이나 대부분의 지방상인은 빈곤을 면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가난한 보부상의 경우 “지고 이고 허리가 휘어 내왕함으로써 오로지 먹고 입는 것만을 도모”하였으며 좌상의 경우는 시장세 부담뿐 아니라 상품의 징탈(徵奪), 수익금의 피탈로 인하여 호곡(號哭), 구타(毆打)가 빈발하는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상인의 신분적 지위는 조선시대에도 개선된 바 없었다. 육의전 중의 수전(首廛)인 의전부상(矣廛富商)이 비록 과분한 호사를 하고 공인의 경우 상당수가 사회적 지위상승을 이룩하였다 하더라도 상인비하 풍조는 고려시대와 거의 마찬가지로 남아 있었다. 중앙의 육의전과 일반 좌상은 서리(胥吏)와 비등한 존재였는데 서리란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된 이속(吏屬) 또는 아전이었다.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인의 신분적 지위가 개선되지 않았던 것은 중국제도의 영향이 컸던 외에도 농본(農本) 중심 사회에 있어서 상업을 천시하고 억제하며 이득추구를 죄악시한 풍조에서 연유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19세기 초반부터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저렴한 상품유입으로 조선의 상업은 일대 타격을 받았다. 갑오경장 이래 자유로운 상업경영의 길이 트이게 되었으나, 이를 기화로 일본자본의 침투기반이 적극 마련되어 광복에 이르기까지 상업은 일인(日人)들에 의해 유린당하였다.

개항과 더불어 대거 진출한 일본인들은 특히 상업이윤 획득에 집착, 1908년 재한 일본인 총수 12만 6168인 가운데 상인이 4만 7398인으로 37.5%를 차지하였다. 1921년의 경우 일본인 기업회사 728개 가운데 상업관계 회사는 463개를 차지하여 전체의 63.6%에 달하였으며 1930년에 있어서도 상황은 비슷하였다.

1937년, 근대 공업자본의 경우 불입자본의 87.6%는 일본인 자본이었고 민족자본은 겨우 12.4%에 불과한 상황에서 민족경제는 압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한국인의 민간 상업자본이 확충되거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소지를 확보할 수 없었으며 일부 축적된 상업자본도 싹이 잘리고 말았다. 한국인에 의한 무역에 있어서도 상황은 극히 저조하여 직물·면제품 등 외국상품을 대상으로 한 소수의 무역업체가 개성(開城)에 존재하는 정도였다.

이 기간의 상업으로 그나마 특징적이라 할 수 있던 것은 화신(和信)에 의한 백화점 및 연쇄점 운영이었으며, 기타 상업은 일반적으로 재래시장이 위주가 되어 이루어졌다. 재래식 정기시장에서는 시장적 교환과 일부 좌상에 의한 도시적 교환(都市的 交換)이 혼재되어 있었다. 1931년의 시장 수는 모두 1607개였으며, 여기서는 시장을 순력하는 보부상이 필수적 존재였다.

1940년까지 1만 내지 1만 5000명의 보부상이 있었고 그 밖에 주로 농산물을 대상으로 하는 매집상(買集商)·매상상(買上商)과 거간(居間)이 있었다. 거래상품도 농산물 위주였으며, 조악하게 가공된 식품·농기구 등이 일부 거래됨에 불과하였다.

시장상인은 영세자본에 의존하고 있어서 특별한 금융이 필요한 경우 거간이 이를 중개하기도 하였으나 상업이윤이 근소한 상태에서 상인의 존재는 극히 부동적이었다.

상설점포가 비교적 발달한 곳으로는 서울·부산·인천·평양·신의주·청진·흥남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지방에서는 재래시장의 기능이 축소되기도 하였으나 상인의 경제역량은 여전히 빈약하였다.

예를 들면 1920년 서울의 15개 상설점포는 협착한 노변에 위치하여 환경이 불결한 상태였고 내부규모도 가장 큰 것이 겨우 5칸(1間:9.09㎡)에 불과하였으며 고급품으로 시계·안경·도자기 등이 판매됨에 지나지 않았다.

1938년의 경우 도시상업자 총수 16만 4990인 중 상설점포 상인 총수가 7만 4493인이었다 하더라도 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들 대부분의 경영규모가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설점포가 발달하지 못한 근본 이유로는 사회경제의 정체를 들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경영기술의 미숙성, 지방의 대상점에 의한 시장독점, 농회(農會)·금융조합(金融組合)에 의한 농산물 수거, 영세농민들의 저위한 구매력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일제에 의한 전면적 산업지배 및 독점하에서는 상업기구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민족항일기 말기인 전쟁기간을 통하여 등장한 전시경제체제는 각종 배급제도와 물자통제정책을 바탕으로 상업을 더욱 침체시켰던 것인데 일제 지배의 전기간에 걸쳐 우리 나라 상인은 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소수의 친일분자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및 경제적 지위를 개선할 수 없었다. 이 시기는 기타 부문 산업종사자와 마찬가지로 상인에게 있어서도 일대 암흑기였다.

광복 후의 상업은 정치·경제의 혼란과 함께 밀수의 극성, 외국원조 소비재의 대량유입으로 정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시장은 대량화된 실업자의 도피처로서 유통기관의 과다 난립, 영세성 및 저생산성이 고착화된 시기였다. 지방에서는 종전의 빈약한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결합된 상황에서 구멍가게·노점상·행상이 제한된 상품을 소량거래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진입하면서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어 경제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공급면의 물량확대와 소비구조의 질적 개선으로 상업의 신장여건이 조성되었으며 백화점·슈퍼체인·연쇄점 등의 근대적 유통기구가 태동, 1970년대 중반 이후 그 양적 팽창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대기업의 유통부문 진출이 현저히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선진국형 업태인 할인점(discount store, 일명 MART)·대중양판점(GMS)·편의점(CVS) 등이 도입되어 유통업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 1980년대에는 <시장법>개정과 <소비자보호법>·<공정거래법>의 시행으로 유통기본법규의 골격이 마련되었으며, <유통근대화 촉진법>에 의거한 유통근대화 기본계획이 수립, 시행되어 유통산업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체제가 구축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근대적 유통산업의 여건조성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근대적인 상인의 지위나 면모가 크게 부각되었다.

현실적으로는 무수한 각종 유통기구가 도시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농촌에까지 확산되고 있는데 종전부터 계승되어 온 도매기구는 생산지 또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공산품·농축산물·수산물로 분화되어 대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지방의 소도시에 있어서는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결합된 상황에서 전근대 및 근대상업이 주로 소매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종래의 시장에서 볼 수 있던 객주와 거간제도는 소멸되었거나 농수산물 유통부문에 잔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비 측면에서 본 유통기구로는 근대적인 백화점·슈퍼마켓·슈퍼체인·중소상인 연쇄점·할인점·대중양판점·편의점 등이 있으며 구멍가게·노점상·행상 등은 재래적 존재이다.

백화점은 일본의 ‘미쓰꼬시(三越)’를 계승한 서울의 동화백화점(東和百貨店)이 1969년 신세계백화점(新世界百貨店)으로 개칭된 이래 1970년대에는 그 수가 서울에서 늘어났다가 1980년대에는 부산을 위시한 지방 대도시로 확산되어 1994년 현재 54개 업체, 94개 점포에 3만 8765명이 종사하고 있다.

슈퍼마켓은 1967년 개점한 ‘뉴서울마켓’이 효시로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전국의 중소도시로까지 확산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업태의 진출로 인하여 고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역별 슈퍼마켓조합을 결성하여 상품의 공동구매, 공동물류기지 구축, 자체상표(PB) 상품개발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슈퍼체인은 정부의 유통근대화 정책의 대표적 존재로서 1971년 8개 점포를 가지고 임의체인 형태로 설립된 ‘새마을 슈퍼체인’이 효시이며, 1984년 50개 슈퍼체인 6,357개 회원점으로 불어났다.

중소상인 연쇄점은 업계의 요청으로 정부가 중소상인 연쇄화를 추진, 1975년 ‘근대화연쇄점’을 시작으로 1984년 97개 연쇄본부에 4만 6582개의 회원점포가 있었으나 새로운 유통기구 출현에 대응하여 업태변경을 도모한 결과 1992년 말에는 168개 업체가 존속하고 있을 뿐이다.

할인점(discount store)으로는 1993년 11월 신세계백화점이 서울 창동에 ‘E-MART’를 개점한 이래 파격적인 가격과 넓은 주차공간, 그리고 소비생활의 합리화, 쇼핑시간이 부족한 맞벌이부부의 증가 등으로 중소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의류 및 생활용품을 다품종 대량판매하는 대형소매점인 양판점(GMS:General Merchandise Store)은 1988년 잠실 롯데월드에 ‘새나라 슈퍼 백화점’이 개점된 이래 여러 업체가 진출하였으나 고객의 인식부족, 업체의 계속적인 상품선전 및 광고(Merchandising) 능력부족 등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롯데슈퍼백화점과 해태마트가 1991년 업태를 백화점으로 변경하였다.

편의점은 조기·심야 영업(또는 24시간 영업), 연중무휴, 주거지 인접 위치, 식료품이나 일용잡화 취급을 영업특징으로 하여 1989년 5월에 Seven-eleven이 국내에 도입된 이래 매년 양적인 팽창을 거듭해 왔지만 가격파괴 공세에 밀린 데다가 여전히 성행한 무자료거래 등으로 저성장상태에 머물렀다.

1995년 말의 전국 편의점 수는 1,700여 개, 매출은 8,000여억 원으로 전년의 1,346개, 6,600여억 원보다 각각 26.3%와 21.2% 성장하였다. 그러나 최근 급증추세인 독립편의점들을 합치면 전체 편의점 수는 2,500여 개, 매출은 1조원 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살펴본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슈퍼체인·중소상인·연쇄점·할인점·양판점·편의점 등은 이른바 근대화된 유통기구이지만, 그 밖에도 지금까지 시장을 주도해 온 재래시장 상인의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재래시장 상인은 아직도 유통부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정책당국의 무관심과 방치, 유통현대화 정책과 재벌의 무분별한 시장개입으로 유통시장 초대형화 및 연중세일에 편승한 가격파괴, 소비의식을 교란시키는 과잉선전 등 각종 불공정 질서가 재래시장 상인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재래시장은 종전과 달리 경쟁력이 향상되어 물품의 다양화·고급화, 가격의 저렴화, 향상된 서비스, 개선된 환경을 바탕으로 조건이 크게 향상되었으나 대형화 및 현대화 추세에 밀려 그 존재가 유린되고 있다.

각 단위 사업체의 집합으로 구성된 재래시장은 중산층의 형성을 위한 근간이 될 수 있으므로 그 바탕이 파괴되면 대중경제 주체들의 생활위기를 가속시키며 경제안정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책당국의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전근대적 상황을 탈피치 못한 채 대량으로 산재해 있는 구멍가게·노점상·행상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다. 근대적 신흥상인의 그늘에서 노점상인이나 행상은 가로나 시장을 내왕하는 행인을 상대하는 영세상인이므로 그 경제적 지위는 극히 저위하다.

구멍가게는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근처의 고객을 대상으로 거의 모든 생필품을 취급, 계속적 반복적으로 거래활동을 진행함으로써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수준이 매우 높으나, 경제적인 지위향상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노점상이나 행상은 가족노동에 의존하므로 인건비 부담이 적고 점포임대료와 보증금이 적어 고정비용 부담도 많지 않으나 경쟁 유발가능성이 높고 고객이 한정되어 있어서 위험부담 역시 크다.

더구나 대규모 상인 또는 신흥상인이 경영지도·정보제공·행정부에 대한 건의·점포관리·상부상조 등 각종 협의체를 통한 편의를 확보할 수 있는 데 비해 비조직적이며 고립적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소규모 국내 유통기구 외에도 특기할 것으로는 무역업이 있다. 우리 나라의 무역은 1957년 <무역법> 제정 이후 수차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급성장, 1962∼1983년에 있어서 수출은 446배, 수입은 62배 증가하였으며 그 뒤에도 계속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무역업체 수는 1970년에 1,103개이던 것이 1983년에는 4,881개, 1997년에는 2만 4450개로 크게 증가하였다. 규모에 있어서도 1억 달러 이상의 수출업체가 1973년에는 1개이던 것이 1981년에는 49개, 1997년에는 73개로 늘어났다. 구조적 측면에서도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1차산품의 비중이 저하되었으며 2차산품의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198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비중이 경공업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졌으며, 특히 전자기계 부문에서 급성장이 이루어졌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추세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반도체가 제1위 수출품이 되어 그 비중이 20%에 육박하였으며 자동차와 석유화학제품이 2위, 3위로 부상하였다.

무역업체는 1967년에 제정된 <무역거래법>에 의하여 일반수출입업·국내수출입업·물품매도확약서 발행업·수출물품구매업으로 구분되어 그에 관한 자격요건을 규정하고 허가하고 있다.

특히 일반 수출업자에 있어서 수출입업의 전문화·대규모화를 위해 종합무역상사를 지정, 육성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그 동안 국제수지적자를 전제로 하였던 것이어서 관리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광범위한 여론수렴과정을 거쳐 1986년 11월 대외무역법안을 정부안으로 확정하고, 1987년 7월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이 법안에서는 그 동안 별도로 시행되어 온 <무역거래법>·<산업설비 수출촉진법>·<수출조합법>이 통합되었다.

광복 후의 상업에서는 전반적으로 근대적 요인이 팽배되는 과정에서 전기적 요소가 배제되어 왔으며, 경제규모의 확대에 따라 재래상인의 존재는 퇴조하였다. 구멍가게 등 영세상업은 비위생적이며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보상·사후서비스 등에 대한 책임소재가 없어 근대적 상인에 비해 열악성이 크게 부각된다.

이에 따라 각종 상품의 질적·양적 측면에서 근대적 상업에 대한 소비자의 지향이 크게 이루어지고 외국상품에 대한 수요가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상업규모의 확대 및 범위의 확산은 경제성장과 비례하여 이루어졌다.

더구나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직수입으로 종래의 소비억제·절약풍조가 크게 쇠퇴하고 대량의 소비수요가 가속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상인은 유통이윤 취득의 호기에 대응, 종래의 속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신분상의 전제 없이 물신적(物神的) 존재가 되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상업자본의 성장이 비록 미진하다 하더라도 상인의 비약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울러 1980년대 이후 바람직한 유통질서 확립과 촉진, 소비자보호 차원에서 다양한 법률들이 시행되고 있어 건전한 상도덕의 고양이 기대되고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국경제사』(조기준, 일신사, 1965)
『한국문화사대계 II』(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韓國史」-近世前·後期篇(李相栢, 乙酉文化社, 1971)
「聯合年鑑」(각 연도)
『한국의 유통산업』(대한상공회의소, 1985)
『연합연감』(각 연도)
『유통관리론』(이성근·배수현, 데이터 리서치, 1994)
집필자
윤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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