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

자산어보
자산어보
과학기술
개념
생물을 대상으로 생명현상을 탐구하고 생명의 기원과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
정의
생물을 대상으로 생명현상을 탐구하고 생명의 기원과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
개설

기초학문으로 생명현상의 탐구에 목적을 두고 있으나, 많은 생물학적 지식은 의학·농학·수산학 등 응용분야에 크게 이용되고 있다. 생물의 종류가 현재 알려진 것으로 약 150만종이지만, 학자들은 이보다 몇 배 또는 수십 배의 종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물학의 세부분야는 정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수많은 생물의 다양성을 밝히는 분류학을 비롯해서, 다양한 생물들의 특성을 밝히는 형태학·생리학·생태학·진화학과 과거의 생물을 연구하는 고생물학 등이 있고, 모든 생물에 공통적인 법칙을 밝히는 세포학·유전학·분자생물학·생화학 등이 있다. 생물학은 특정한 생물군에 대해서 나누어 연구할 때 동물학·식물학·미생물학, 이를 더 세분하면 종자식물학·곤충학·조류학·어류학·패류학·균류학 등으로 나뉜다.

서구의 생물학은 그리스시대에 자연에 대한 탐구의 일환으로 생물의 종류와 형태에 대한 정리 즉 분류학적 연구로부터 출발하였고, 중세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를 맞은 생물학은 상당히 발전하였으나 19세기 내지 20세기 초까지도 거의 분류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생물학의 서구화를 분류학이 주도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생물학은 관찰 및 분석방법의 발달에 힘입어 수많은 분야로 발전하였고, 최근 분자수준에서의 연구방법은 빠른 속도로 개발되어 바야흐로 많은 생명현상을 분자수준에서 규명하고, 원하는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생물학은 서구의 생물학 발전의 영향 하에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역동적인 분야가 되고 있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복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분야로 기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생물학 약사

여명기(조선 초∼중기)의 생물학

우리나라의 생물 연구는 당시 응용 동식물에 대한 기재와 재배 및 이용방법에 대해 기술한 것으로 시작하였다. 문헌으로 기록된 것은 1431년(세종 13)에 유효통(兪孝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이 160종의 약용식물의 재배법, 수확 및 조제법, 성질, 약효 등을 기록한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이 처음이다.

이어 1433년 노중례·박윤덕은 중국산 약재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미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을, 1610년(광해군 2) 허준(許逡)은 우리의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실은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발간하였다. 1766년(영조 42) 류중임(柳重臨)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山林經濟≫에 수록된 약재의 소개와 채약법 등을 증보 발행하였다. 이 외에도 1884년(고종 21) 황필수(黃泌秀)의 ≪방약합편 方藥合編≫, 강명길(康命吉)의 ≪제중신편 濟衆新編≫이 편찬되었다.

동물에 대한 보고로는 하연(河演)이 1422년에서 1425년에 출판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誌≫와 1469년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 토산부에 어류 21종을 소개하였고, 1434년 유효통·노중례·박윤덕 등의 ≪향약집성방≫에는 하연이 발표한 것 이외에 7종이 첨가되었으며, 이행(李荇)은 1530년(중종 25) 당대 학자 19명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與地勝覽≫ 토산부에 어류 46종을 기록하였다.

실학시대(조선 말)의 생물학

실학은 생물 연구에 대해서도 발전을 가져왔다. 1814년(순조 14년) 정약전(丁若銓)이 저술한 ≪자산어보 玆山魚譜≫는 인류(鱗類) 73종, 무인류(無鱗類) 43종, 잡충(雜虫) 4종, 해금(海禽) 5종, 해수(海獸) 1종, 해조(海藻) 35종에 관한 분류(명칭, 방언 및 한자명), 형태, 생태 및 이용 등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진 책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어류 단행 문헌으로서 귀중한 문헌이다. 박물학적이기는 하지만 해산동물을 인위 분류하였으며, 내용상 수산학서(水産學書)라기보다 생물학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서문에서 기초과학으로서의 박물학과 이를 기초로 하는 응용과학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자산어보≫는 응용과학의 기초학이란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이 순수생물학의 범주에 있음을 분명히 한 점에서 우리 나라 생물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분류도 아니며 학명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므로 서구 전통의 근대생물학의 면모는 찾을 수 없다.

한편, 김로(金鑪)가 1821년 편찬한 ≪담정고 藫庭槀≫ 중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는 어류 51종에 대한 명칭, 형태, 습성 및 시문을 기록하였고, 서유구(徐有榘)는 1834년∼1845년에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를 집필하였다. 이 책의 전어지(佃魚志)에 어류 97종을 기록하면서 본인이 관찰한 것과 문헌(홍만선의 산림경제)을 인용한 것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개화기의 생물학(서구 생물학의 소개)

독립협회가 결성된 1896년과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 이후부터 서구의 생물학이 도입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서양의 생물학이 한문으로 번역, 소개된 책으로는 ≪박물신편 博物新編≫·≪중서견문록 中西見聞錄≫ 등이 있다.

한편, 근대 교육이 실시되면서 원산학사(元山學舍)에서는 격치학(格致學:理學 즉 의학·지리·천문·화훼·금수·농리·기기)을,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는 자연과학을, 이화학당에서는(1889, 1892) 생리학과 과학을, 배재학당에서는(1889) 생물학을 가르쳤다. 갑오경장(1894) 이후 광혜원(제중원)은 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를 설립(1899)함으로써 서양의학을 통하여 생물학적 지식을 보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각종 학교령이 제정되었고, 일제 식민시대 초인 1911년에 <조선교육령>이 제정되어 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고등교육기관 중 대표적인 곳은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과로 동물학 및 곤충학, 식물학 및 식물병리학, 유전학 및 육종학 등을, 숭실전문학교 농학과에서는 식물학·동물학·세균학·곤충학·유전학·생리화학을,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이과에서는 식물학과 동물학을 교육하였다.

생물학 연구의 도입과 정착(일제시대∼한국전쟁)

근대 생물학 연구가 도입되어 정착하는 시기는 정확한 구분을 지을 수는 없지만 다음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단계(서구학자들에 의한 연구):한반도의 생물에 대한 탐험단계로 1854년 슐라이펜바흐(Schlippenbach, B.A., 독일)가 50종의 식물을 채집한 것을 막시모위쯔(Maximowicz, 러시아)에 보내 우리 나라 식물이 전 세계에 소개되었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 포리에(Faurie, R.P.)와 타케(Taquet, E.C.) 신부는 1900∼1912년 사이에 국내 여러 지방의 식물을 채집하여 유럽으로 보냈고, 그것은 후커(Hooker)·막시모위쯔·올리버(Oliver) 등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코마로프(Komarov)는 북부 식물을 ≪Flora manchuriae≫(1897) 3권에 포함하였고, 팔리빈(Palibin)은 ≪Conspectus Florae Koreae≫ 3권에 한반도 식물 103과 393속 635종 20변종을 수록하였다.

서구인으로서 한국산 어류에 관한 연구를 가장 먼저한 사람은 Herzenstein으로 1872년과 1896년 우리 나라 중부 풍동(楓洞)지방에서 채집한 물고기를 각각 신속(Pungtungia herzi)과 신종(Coreoperca herze)으로 발표하였고, Steindachner은 1872년 서울 부근에서 채집한 어류 12종을 기재하면서 신종(Acheiloganthus coreanus)을 발표하였다.

조류에 대해서는 1885년 Tristram의 한국의 조류에 관한 논문이 영국의 조류학회지에 발표된 것이 처음이고, 포유류에 관한 연구는 1887년 Giglioli와 Salvadori가 1종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토마스(Thomas)는 16종, 알렌(Allen)과 앤드류(Andrews)는 19종을 발표하였고, 그 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좀더 윤곽이 잡혀갔다.

② 제2단계(일본학자들에 의한 연구):한일 합방이후 일제시대의 생물학 연구는 서구인들의 부분적인 연구에서 일본인들의 독무대로 변해갔다. 나카이(中井猛之進)는 한국식물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일본인이다. 1909년 한반도 식물의 종합적인 논의로 ≪Flora Koreana≫ I권을 출간한 후, 1911년에 그가 직접 채집 조사한 것을 포함하여 II권을 출판하여 한반도 식물상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일제시대에 한반도 식물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로는 나카이 이외에 이시도야(石戶谷勉)·우예끼(植木秀幹)·모리(森爲三) 등이 있는데, 그 중 모리는 1922년 ≪조선식물명휘 朝鮮植物名彙≫에 160과 888속 2904종 506변종을 수록하였다. 광복 후 1952년 나카이는 최종 논문인 <조선식물지경개 朝鮮植物誌梗槪>에 한반도 식물을 223과 968속 3176종 841변종, 174품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발표하였고, 이중 특산식물이 11속, 642종, 402변종, 74품종으로 보고하였다.

동물의 연구는 어류에 대해서 가장 활발하였다. 모리(森爲三)는 1923년 한국산 민물고기 102종의 목록을 보고한 후 1927년에 4 신종(Hucho ishikawae, Thymallus arcticus jaluensis, Acheilognathus yamatsutae, Pseudogobio yaluensis)을 포함하여 압록강산 어류 49종을 기재하였고, 1928년에는 한국산 어류 386종을 발표하였다. 그 후 1936년까지 여러 차례 한국산 어류의 신종과 특산종을 첨가하면서 522종을 발표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산 민물고기의 지리적 분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한국 연해산 어류 분포상>(1935)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북온대성 어류와 아북극성 어류뿐 아니라 적도산 어류도 포함되어 동해와 독립적으로 황해가 아북극성 한류성 어족의 서식 중앙을 이루고 있다고 밝힌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39년 야베(失部博)는 한국 어류지에 보고된 바 없는 42종을 포함한 162종을 기재한 외에도 1930년부터 1941년까지 한국산 어류의 생태에 관한 연구를 통해 우수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밖에 쓰치이(土居寬暢)의 연구가 몇 편 있으며, 기시다(岸田久吉)의 발표도 눈에 띈다.

곤충에 관한 연구로는 1920년부터 광복 후까지 주로 일본인 학자(Sonan, Sato, Watanabe 등)들이 일본산 벌의 연구에 곁들어 취급하였고, 포유동물에 대해서는 모리가 1923년 63종을 발표한 외에도 많은 외국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들에 의한 연구도 점점 활발해졌다.

③ 제3단계(한국 학자들에 의한 연구):일제시대에 일본 학자들로부터 배운 한국인에 의해 생물학 연구가 활발해져가는 단계이다. 한국인으로서 식물학의 연구는 정태현(鄭台鉉)을 시작으로 도봉섭(都逢涉)·이덕봉(李德鳳)·장형두(張亨斗)·박만규(朴萬奎) 등이 향토식물 연구에 공헌하였다.

이때 1923년 발족한 조선박물학회에서는 1937년 정태현 등이 ≪조선식물향명집 朝鮮植物鄕名集≫을 발간하여 모든 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정태현은 1943년 목본식물을 정리하여 일문(日文)으로 ≪조선산림식물도설 朝鮮山林植物圖說≫을 발간하였고, 도봉섭과 심학진(沈鶴鎭)은 ≪중부지방식물지 中部地方植物誌≫를, 장형두(張亨斗)는 난지식물(暖地植物)의 북한(北限)을 조사하였으며, 서부소산의 식물구계 설정을 시도하였다.

또, 박만규(朴萬奎)는 1949년 우리 나라 ≪식물명감 植物名鑑≫을 출판한데 이어 사초과 식물, 식충식물, 고산식물 등에 관해 연구하였다. 이덕봉의 <조선산 식물의 호구조사>(1936),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1937) 등의 논문이 있고, 이밖에도 이원목(李元睦)의 고등균류, 정문기(鄭文基)의 해조 연구도 있다. 이 기간중 우장춘(禹長春)의 유전학적 연구는 특기할만 하다. 그는 씨 없는 수박, 여러 품종의 페튜니아, 양배추(Brassica oleracea)와 재래의 유채(B. campestris)의 타가 4배채인 조선종 유채(B. napus)를 만들어내어 국제학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동물학 연구는 조복성(趙福成)이 1929년부터 일생 동안 주로 나비류와 갑충류를 연구하였으며, 석주명(石宙明)도 1933년부터 나비 연구에 몰두하여 흰배추나비의 변이곡선을 포함하여 100여 편의 나비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어류학자 정문기는 1934년 ≪조선의 수산지 朝鮮之水産誌≫와 ≪조선어명보 朝鮮魚名譜≫에 어류 159종을 보고하였고, 1954년 ≪한국어보 韓國魚譜≫에 833종의 분류, 형태, 생태 및 방언을 기록하여 출판하였다. 1961년에는 ≪한국어보≫를 토대로 ≪한국동물도감≫ 어류편(별명 韓國魚圖譜)에 미기록 어종 22종을 추가하여 854종을 정리하였다.

조류와 박쥐의 연구는 원홍구(元洪九)가 활발하였고, 파충류와 양서류의 연구는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생리학은 김호직(金浩稙)이 지렁이 체온에 관해서 연구하였으며, 세포학은 강영선(姜永善)이 시궁쥐 난세포의 세포학적 연구를 발표한 것이 있으며, 식물생리학분야에서는 이민재(李敏載)가 식물의 내한성 문제를 연구하였다. 한편, 유전학분야에서 김순봉(金順鳳)이 가와쿠치(川口榮作)와 같이 유전자와 형질발현의 유전생화학적 연구를 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학회 상황을 보면, 1900년 6월 1일 영국왕실아주학회조선지회(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가 서울에 설립된 것이 생물학 관련 학회로는 처음이나 한국인 회원수는 알 길이 없다. 그 후 1923년 조선박물학회(1945년 조선생물학회로, 1951년 대한생물학회로 개칭)가 발족했으나 회원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1926년 당시 회원 174명 중 한국인은 21명). 1933년 윤병섭·정태현·도봉섭 등 한국학자들만이 모임인 조선박물연구회가 발족되었으며, 1934년 2월 장형두와 박만규를 중심으로 경성식물회(1935년 조선식물연구회로 개칭), 1935년 경성박물연구회(1940년 조선박물교원회로 개칭)가 발족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의 생물학(근대 생물학의 발전)

광복 이후 6·25전쟁까지는 일본인 학자들이 물러감으로써 몇 안 되는 한국인 학자들의 독무대가 된 것 이외에는 생물학의 발전에 있어서 일제시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일본 학자들의 몫을 이어 받을 만한 인재가 양적, 질적인 면에서 부족했기 때문에 퇴보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및 정치적 혼란, 경제적 빈곤, 이로부터 야기된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나라 생물학의 발전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① 생물학과의 증설:6·25동란중 불어온 교육의 바람은 대학의 설립을 부채질했고, 따라서 여러 대학에 생물학과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1945년 8·15광복 직후 대학의 생물학과는 일제시대의 명맥을 이어받아 설립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사범대학, 1948년에 대구사범대학뿐이었으나, 6·25동란중 경북대학교·부산대학교·전남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성균관대학교 등에 생물학과가 생겨 10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하의 혼란과 빈곤은 그 이상의 발전을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발전하는 경제와 함께 수많은 대학과 생물학과가 설립되어 1979년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비운으로 정권을 마감한 즈음엔 42개의 생물학과와 6개의 관련학과(식물학과·동물학과·미생물학과·응용생물학과·생화학과)로 양적인 팽창을 이루었다.

1995년에는 68개 대학에 생물학과, 5개의 관련학과(미생물학과·분자생물학과·해양생물학과·유전공학과·생화학과)로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생물학과의 팽창은 연구인력 및 연구논문의 팽창과 맥을 같이함은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1995년 현재 우리 나라의 생물학과 학부 학생 수를 보면 12,836명, 관련학과 학생 수는 6,490명, 생물학과 관련된 이학 석사 2,136명, 생물학을 포함한 이학 박사 735명이다. 그리고 생물학과 관련된 학과의 교수의 수는 407명인 반면, 생물학과의 교수 수는 432명으로 학생 수에 비해 교수의 수가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② 학회의 발족과 활동:1923년 발족된 조선박물학회는 1945년 조선생물학회로, 1951년 대한생물학회로 개칭되었고, 대한생물학회는 한국전쟁 후 1957년 한국동물학회와 한국식물학회로 1959년 미생물학회가 나뉘어졌다. 이후 1960년 과학사학회, 1967년 생화학회, 전자현미경학회·한국종균학회, 1968년 식물분류학회, 1970년 곤충학회·생물교육학회, 1972년 균학회, 1973년 식물조직배양학회·산업미생물학회, 1976년 생태학회·과학교육학회, 1978년 유전학회, 1981년 환경생물학회, 1984년 패류학회·동물분류학회·고생물학회, 1985년 한국생물공학회, 1986년 조류학회, 1989년 분자생물학회·어류학회, 1992년 환경과학회 등이 발족되었고, 이들 학회에서 매해 학회지가 발간되고, 학술논문이 발표되는 등 학술활동을 하고 있으니 실로 엄청난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이 같은 학회 수의 증가는 생물학의 관심 분야가 주로 분류학에 그쳤던 과거의 현실에서 탈피하여, 보다 다양한 분야에의 연구인력의 증가, 연구논문의 증가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1996년 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를 보면 ‘세포분화’, ‘분자적 계통 및 진화’, ‘환경변화에 대한 미생물의 적응’, ‘생물공학’, ‘호르몬 연구’, ‘산성 강하물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로 개최하여, 생물학 각 분야의 다양한 발전상과 현대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국내 심포지움은 1971년 ‘공해와 생물학적 환경’이란 주제로 시작한 후 1978∼1980년, 1988년을 제외한 매 회에 개최하고 학문의 발달과 더불어 심포지엄의 주제도 깊이 있는 내용과 최신 동향을 반영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으나 거의 모든 학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③ 연구소의 설립:일제시대부터 6·25동란 이전까지의 생물학분야 연구소는 국립식물원(구 광릉수목원) 이외 괄목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태동된 교육의 바람은 연구소의 설립에도 박차를 가해, 생물학의 발전에 공헌해왔다. 생물학과 관련된 연구소를 살펴보면 국립환경연구원·국립보건원·국립임업연구원·국립원예연구소·국립해양연구소·생명공학연구소 등이 있어 기초 및 응용 생물학적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④ 생물상의 출판:동란 후의 생물학계에서 가장 두러진 발전의 하나는 생물상의 정리한 도감을 비롯하여, 생물학 교과서 및 사전 등의 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태현은 1956년 ≪한국식물도감≫ 초본편을, 1957년에는 목본편을, 조복성·김창환은 1956년 ≪한국산 나방도감≫을 출간하여 한국인에 의한 한반도 동식물도감이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1963년 안학수·이춘녕은 ≪한국식물명감≫을 출판하였다.

1959년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우리 나라 생물자원의 실태를 정리하고, 천연자원에 대한 보호 육성 및 개발에 기초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한국동식물도감≫ 편찬사업을 벌였다. 그밖에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1980), 원병오의 ≪조류생태도감≫(1981), 이영노의 ≪원색한국식물도감≫(1996), 육창수의 ≪원색한국약용식물도감≫(1989), 강병화·심상인의 ≪한국자원식물명총람≫(1997), 안학수·이춘녕·박수현의 ≪한국농식물자원명감≫(1981), 박수현의 ≪귀화식물도감≫(1995) 등이 출간되었다.

⑤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발달:위와 같이 활발한 생물상 연구와 업적의 편찬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1980년대부터 눈부시게 발달한 선진국의 생화학·분자생물학·유전공학의 방법이 우리 나라에 거의 시차 없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많은 인력, 연구비, 연구소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국가적으로도 국가발전을 위한 G7전략에 생명공학의 발전을 포함시킨 때문이다.

이 분야의 발전은 생물상의 결과처럼 집대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신물질이나 신기술이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상세하게 예를 들며 기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각 대학에 생화학과·유전공학과·미생물학과 등이 엄청나게 늘어난 점, 이 분야 연구소의 설립과 과학재단으로 지원되어 운영된 수많은 연구센터, 그리고 위에 기술한 생명공학연구소에서 나온 주요업적 등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⑥ 생물 다양성의 인식:생물상에 관한 연구와 출판이 활발하고,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연구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면, 전 세계적으로 생물다양성의 보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1963년 내무부에 '한국자연 및 자연자원보존 학술조사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는 1967년 한국자연보존연구회로 개칭한 후, 1974년 사단법인 한국자연보존협회(현재는 환경부 산하)로 발전하였고, 1977년에 자연보호중앙협의회가 발족하였다.

이들 단체에서는 각각 ≪자연보존≫·≪자연보호≫라는 월간지를 출간하여 자연보존에 대한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우리 나라 주요 지역의 생물상을 밝히는 사업을 병행하여 왔다. 1978년에는 온 국민의 환경의식을 고취하고 행동강령을 명시한 <자연보호헌장>이 채택되었다. 한국자연보존연구회는 미국 스미소니언 기관(Smithsonian Institution)과 공동으로 1966년 6월에서 1968년 9월까지 2년간 비무장 지역의 학술조사를 실시하였고, 국제적 움직임에도 동참하여 1992년 생물다양성협약(Biodiversity Convention)에 서명하였다.

한편 1992년 한국생물과학협회에서는 생물다양성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 모여 생물다양성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으며, 1994년 2월에 생물다양성 현황조사 및 위기에 처한 생물종과 서식지를 규명하고, 생물다양성 연구와 보존에 기여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조사하며,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한 국가적 전략 수립을 촉구할 목적으로 정부와 사회에 보내는 선언문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를 위한 생물다양성 보전’을 채택하였다.

또한 1997년 6월에는 아시아 12개국 학자를 모아 자연보존에 대한 아시아지역의 공동관심사를 논의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동아시아분류학·생물다양성보존네트워크(East Asian Network for Taxonomy and Biodiveristy Conservation)를 결성(회장: 이병훈)함으로써 이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문제점과 전망

서구 생물학은 르네상스 이후 줄곧 발전했으며 지난 한 세기(1900년대) 동안의 발전은 인류의 전역사 기간의 그것보다 더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고, 지난 2, 30년간 분자수준에서의 발전은 더욱 괄목할 만하다.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발전은 원하는 유전자를 필요한 생물에 도입시키는 수준에 와 있으며 이런 기술로 만들어진 농산물들이 시장에 등장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21세기는 생명공학의 시대라고도 이야기하고, 생명공학은 세계 경제적 발전의 요체라고 믿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광복 이후 6·25전쟁과 많은 정치적 혼란기를 제외하면 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우리 나라의 생물학의 발전속도는 경제적 성장만큼이나 가공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고, 이런 발전은 정부와 학자들 아니 전 국민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며, 이런 잠재력은 앞으로의 발전도 낙관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각급 학교의 과학교육이 내실화 되어 있지 못하고, 연구소도 지속적인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며, 그나마 그 수가 많지 못하고, 이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체제에 공평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점, 국가적 연구의 장기적인 계획의 결여 등은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또한 앞으로 분자 수준의 연구도 중요하겠지만, 모든 생물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우리 나라 생물상의 완전한 파악, 자연교육의 내실화,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수많은 생물의 소실, 다양한 자생 및 고유식물의 소실과 해외유출, 우리 나라 생물로부터의 신물질 개발, 자연보존 관련 국제협약에 대한 대처 등을 전담 연구하는 국립자연사박물관 또는 자연관련 연구소의 설립과 함께 개체수준의 연구에 대한 지원이 촉구된다.

참고문헌

『한국과학재단 기초연구지원통계연보』(한국과학재단, 1999)
『한국생물학협회50년사』(한국생물과학협회, 한림원, 1996)
『한국의 생물다양성 2000』(이인규 등, 민음사, 1994)
『한국식물분류학개설』(정영호, 아카데미서적, 1986)
『생물학사』(이병훈 역, 전파과학사, 1982)
『한국동식물도감』(교육부, 1959∼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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