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화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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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동물 · 식물 · 미생물 등 생물체의 생명현상을 화학적 수단으로 해명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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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동물 · 식물 · 미생물 등 생물체의 생명현상을 화학적 수단으로 해명하는 학문.
내용

의학·농학 분야에서는 의화학(醫化學)·농화학(農化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화학은 생물체가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물질들이 어떻게 해서 합성되며 분해되는지, 또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한다.

18세기 초반부터 생물재료에서 단편적으로 유기화합물(有機化合物)인 요소(尿素)·글리세롤(glycerol)·능금산·젖산[乳酸] 등이 분리되었다.

이런 유기화합물들은 생물체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는데, 1828년에 뵐러(Wohler, F.)가 요소를 합성하고, 뷔히너(Buchner, E.)가 효모에 의한 알코올의 발효를 발견함으로써, 이런 유기물들이 생체 내에서만 만들어진다는 과거의 개념이 깨졌다.

동식물과 미생물에게는 공통된 원칙이 있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성성분들이 유사하며, 그 물질들의 운명(또는 代謝)도 비슷함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의학·농학·생물학·화학 분야에서 생물체에 관한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1800년 후반기에는 독일의 10여 도시 대학에 이미 생화학 강좌가 설치되었으며, 독일어권 나라들도 가입하여 1879년 독일에서 생화학 학술잡지가 창간되었다.

19세기 초에 노벨상이 제정되자, 수상할 만한 학자가 여러 명 있을 정도였다. 1902년의 수상자 피셔(Fischer, E.) E.)의 당질(糖質)·퓨린(purine)·단백질의 구조에 관한 연구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퇴색하지 않고 생화학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다.

1908년 에를리히(Ehrlich, P.)는 면역학을, 1910년 코셀(Kossel, A.)이 히스톤(histone)을 발견했으며, 최근에 학자들이 그 기능을 연구하고 있다.

1900년에 들어와서 연구의 방향이 세포의 기능에 대해서 집중되었다. 1907년 효모에 의한 알코올 발효 발견의 뒤를 이어, 이 대사의 경로에 대한 연구는 영국의 생화학자 하든(Harden, A.)과 양(Yang, W.J.)을 거쳐 다시 독일의 엠덴(Embden, G.)과 마이어호프(Meyerhof), 미국의 코리(Cori, G.T.) 부부에게로 이어졌다. 바르부르크(Warburg, O.)는 해당(解糖)의 중간산물인 황생효소를 비롯한 몇몇 효소를 정제하였다.

1914년에 독일에서는 대학과는 별도로 베를린(Berlin) 서남쪽 달렘(Dahlem) 지구에 거대한 종합 자연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물리·화학·공학 연구소들과 그 일환으로 카이저 빌헬름(Kaiser Wilhelm) 생물학연구소를 만들어 바르부르크와 마이어호프를 초청했으며, 우수한 연구생들이 운집하였다. 그 중 크레브스(Krebs)·옥호아(Ochoa)·나흐만존(Nachmansohn)·로만(Lohmann) 등이 1935년경에 독일 생화학계를 개화시킨다.

그러다가 히틀러(Hitler, A.)가 집권하고 유태인 배척이 시작되자 대거 미국으로 가서 미국 생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탓도 있지만 일류 학자들의 외국 망명으로 1960년대까지 침체를 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생화학의 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발전해 왔다. 전통적인 당대사(糖代謝)의 연구로 힐(Hill, A.V., 1922년)과 하든(1929년), 비타민C의 발견으로 홉킨스(Hopkins, F.G, 1929년), 합성으로 하스(Haworth, W.N., 1937)가 노벨상을 받았다.

또 데일(Dale, H.)이 신경세포의 화학적 전달의 연구, 플레밍(Fleming, A.)이 페니실린 발견(1945)으로 생화학 각 분야에서 전통을 유지하면서 독일과 함께 기여하였다.

미국의 생화학의 발전은 1940년 말까지는 초라했으며,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대학에 시설과 연구비가 흡족해서 유럽에서 온 많은 우수한 유태인 생화학자를 모두 수용하였다.

고전생화학에서는 생체 내에서 유기물질들의 생화학적 반응은 모두 효소의 촉매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바, 그 정체를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섬너(Sumner, J.B.)가 1926년 콩의 아세톤(acetone) 추출액에서 결정을 얻은 물질이 순수한 효소 우레아제(urease)이며 단백질임을 밝혔다.

같은 해 멀러(Muller, H.J.)의 X선에 의한 인공돌연변이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생물체의 변이는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없으므로 연구하기가 어려웠으나, X선 조사로 언제나 변이를 일으켰으며, 그의 초파리 실험은 유명하다.

미국은 1945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54년 간에 생화학 관계의 논문으로 50개의 노벨상을 받았는데, 노벨상은 그 나라에서 그 분야의 연구가 월등하게 우세함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큰 의미를 가진다.

1953년 왓슨(Watson)과 크릭(Crick)은 지극히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염기체(鹽基體) 내의 DNA는 이중나선(二重螺旋, double helix)을 가진 유전자임을 밝히고, 분자 내 염기서열의 변화가, 합성된 단백질의 구조와의 관련된 변이를 명백히 설명하였다.

그 후 유전자, 단백질에 관한 분자생물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약 10년 전에 미국이 인간유전체계획(Human Genom Project)를 수행할 만한 기초연구가 이루어질 만큼 유전생화학과 단백질 구조 연구가 진행되었다.

생화학의 궁극적 목적은 생물체의 생명현상을 밝히는 데 있다.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 인간의 유전자 수는 10만개, 그것을 구성하는 염기의 쌍이 30억개이며, 유전자 하나 하나의 염기서열이 머지않아 밝혀지게 된다. 미국의 과감한 연구비 투자로 21세기는 생명의 물질적 근거를 완전히 해명할 수 있는 세기가 될 것이다. 그 주역을 담당한 미국에서의 주요 연구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7년 Co-A를 리프먼(Lipmann, F.)이 발견하였는데, 이 물질은 동물이 섭취한 영양소를 어떤 경로를 밟아 화학에너지로 변화시키는지, 생명현상을 구명하는 중요한 해명이다.

옥호아는 1955년에, 콘버그(Konberg)는 1959년에 각각 RNA 및 DNA의 생합성, 1961년 프랑스의 모노(monod)와 자코브(Jacob)는 오페론설(Operon說)을 발표, 단백질 합성의 조절기구에 관한 학설이며, 조절단백질의 일반적 성질로서 앨러스테리(allostery)의 개념을 도입하여 분자생물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1년 미국의 셔덜랜드(Sutherland, E.W.)가 eAMP를 발견하였으며, 이 물질은 대사조절에 관한 제2메신저로 알려졌다. 같은 해 베르크(Berg)가 재조합유전자기술(recombinant DNA technique)을 발견하였다. 즉, 서로 다른 DNA 분자 서열이 재배열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자의 조합은 생물의 다양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당뇨병 치료약 인슐린(insulin)은 과거에는 돼지 췌장에서 추출하여 수량도 적고 이종(異種) 단백질이어서 부작용이 있었는데, 재조합유전자기술을 이용하여 대장균으로 하여금 생산하도록 하여 편리해졌다.

1997년 영국의 한 연구소가 양의 6년 된 세포의 핵을 분리해서 그것을 무정란에서 핵을 떼어 낸 자리에 넣어 ‘Dolly’라는 이름의 복제양을 만들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 본래 있던 4학제 관립 경성의학교를, 1911년 격하시켜 의학강습소로 만들고, 2년의 후기에 생화학 및 의화학이란 과목을 개설하였다. 그보다 먼저 1906년에 사립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으니, 의당 생화학강좌가 있었을 것이므로 1906년을 효시라 하겠다.

1916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 1933년에 평양의학전문학교와 대구의학전문학교, 1938년에 사립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수원고등농림전문학교와 경성약학전문학교에도 생화학 강좌가 있었다.

그러나 광복 전에는 한국인 교수는 단 한 명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석신(李錫申) 뿐이었다. 그는 1921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1922년 베를린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생화학을 전공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베를린국립병원 Kaiser Augus Victoria Haus에서 수련을 한 후, 귀국하여 1928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생화학강좌 강사에 임명되었다가 1931년 정교수가 되었다. 일본 식민지시대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였다.

광복이 되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 강좌에는,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생화학교실에서 연구생활을 한 이기령(李基寧)이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는 김호직(金浩稙)·이춘녕(李春寧), 문리대학에는 김태봉(金泰鳳), 세브란스의학대학에는 이석신 교수가 1944년에 작고했기 때문에 김상문(金相玟)이 뒤를 이었다. 신생 경성약학대학에는 한귀동(韓龜東)이 있었다.

의학은 식민지시대부터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으므로 1948년에 대한의학협회 산하에 대한생화학회가 설립되었다. 이 학회는 정회원을 의과출신에만 제한하였기 때문에 1960년을 전후하여 외국(대다수가 미국)에서 공부한 생화학자들이 가입할 수가 없었으므로, 학회를 해산하고 국내의 모든 생화학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생화학회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부 의사들이 다시 대한생화학회를 만들고, 1989년에는 한국분자생물학회가 따로 결성되어 같은 성격의 학회가 세 개가 공존하여 우리 나라의 생화학회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6·25사변이 일어나 생화학도 1950년 말까지 휴면상태에 있었다. 반면 외국은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어느 과학부문에서나 좌절하고 있었던 과학도들은 신학문을 배우려고 해외로 빠져나갔다.

생화학 부문만 해도 제1세대인 이기령은 프랑스 파리의 파스퇴르(Pasteur)연구소에, 이근배(李根培)는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대학에, 김태봉은 독일 뮌헨의 막스플랑크(Max Planck)연구소, 이춘녕은 미국 캔자스(Kansas)대학에, 김영은(金泳垠)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수학하여 연구활동을 하였다.

1959년 정부에서는 최신 연구시설을 갖춘 원자력연구소를 개설하여 자연과학 각 부분의 기초연구에, 특히 생화학자들의 공동연구에 많이 기여하였다.

1967년에는 우리 나라의 최대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원(KIST)이 창설, 외국에서 공부한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하여, 학생 교육과 기초 및 응용 과학분야 연구로 현재까지 우리 나라 자연과학 연구의 중심이 되어 있다.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에, 그리고 강원대학교에 생화학과가 설치되어 생화학자를 양산하고 있으며, 해외유학도 꾸준히 증가하여 우수한 학자가 배출되었지만 국내의 수용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란다.

현재 3개 학회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빈약한 세 학회가 충실해져서 선진외국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될 것이다.

2000년 4월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인간유전체 계획이 진행중이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명과학연구소 서정선(徐廷善) 교수팀이 최근 3개월 사이 인간 총 유전체의 20%를 검색하였다. 즉, 1만9800개의 한국인 유전자 중 9,800개를 미국 NIH의 성격과 비교, 확인하였으며, 나머지 1,000개도 진행중이다. 이때 발견된 유전자에는 성장인자에 관한 것과 분화에 관계된 것 등이 있으며, 계속하여 한국인의 유전자 총 10만개의 분석을 끝낼 예정이다.

참고문헌

『생화학』(이근배 외, 신영사, 1967)
『원자력청10년사』(원자력청, 1969)
『한국생화학회25년사』(박인원, 한국생화학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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