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서흥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서흥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한 군.
이칭
이칭
서성, 옥곡
정의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수안군 · 신계군, 서쪽은 황주군 · 봉산군, 남쪽은 평산군, 북쪽은 평안남도 중화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58∼126°24′, 북위 38°20′∼38°42′에 위치하며, 면적 914.5㎢, 인구 7만7689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10개 면 102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신막읍 신막리이다.

서흥군의 자연환경

남쪽의 멸악산맥과 북쪽의 언진산맥 사이에 위치해 전체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형 분지를 이룬다. 그리고 이들 산맥의 영향으로 군의 중부에 동서방향으로 500∼600m의 산들이 잇달아 솟아 있어 군의 지세를 남북으로 양분한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금초산(金草山, 530m) · 나장산(羅將山, 691m) · 부인당산(夫人堂山, 685m) · 주전산(鑄錢山, 652m) · 무장산(武張山, 524m) · 고덕산(高德山, 356m) · 금대산(金對山, 345m) 등이 있다. 이 밖에 대현산(大峴山) · 선인봉(仙人峰)이 있다.

군의 남부에는 재령강의 상류인 서흥강(瑞興江)이, 북부에는 황주천(黃州川)이 각각 서쪽으로 흐르며, 웅파산(熊波山) 기슭에는 가마소가 있다. 하천유역에는 연안평야가 발달하였다.

군의 남부는 고생대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의 지층을 이루는 석회암 지형이며, 북쪽의 일부지역에는 용암대지가 발달해 수안군 · 곡산군 · 신계군에 연속되는 화산지형을 이룬다.

황해도 내륙에 위치하므로 내륙성 기후이며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연평균기온 9∼10℃, 1월 평균기온 -8.5℃, 8월 평균기온 24.4℃이며, 연강수량은 951.6㎜이다.

서흥군의 역사

고대의 서흥군

신석기시대 이전의 유물 · 유적은 발굴된 적이 없으나 인접한 평산 · 봉산 등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과 신석기시대 유물 ·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 군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신막읍 천곡리에서 동검이 출토되었고, 오덕리에서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어 선사시대의 생활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우리말로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 부르다가 5세기 초엽 성을 쌓은 뒤 오곡성(五谷城)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고성리에 남아 있는 대현산성은 이를 뒤에 여러 차례 수축한 것이다. 529년(안장왕 11)에는 이 곳에서 백제와 전투가 벌어져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었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영토가 되어 748년(경덕왕 7)에 오관군(五關郡)이 설치되었고, 762년에는 오곡성을 수축하였다. 성현에 남아 있는 옛 성터는 826년(흥덕왕 1)에 쌓은 300리에 달한다는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일부라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서흥군

왕건(王建) 세력이 궁예(弓裔)에게 협조함으로써 태봉의 판도 안에 편입되어 905년 무렵 동주(洞州)로 고쳐졌다. 당시 이 곳에는 태조 왕건의 서경 행차시에 두 딸을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으로 삼게 한 대호족 김행파(金行波)가 웅거하고 있었으며, 군의 최북단인 세평면 고읍리에 동주의 관아가 있었다.

995년(성종 14) 방어사가 부임했으나 1012년(현종 3)에 폐지되고 평주의 속현으로 편입되었다. 1270년(원종 11) 왕의 태를 이 곳에 안장한 까닭에 서흥현으로 승격되어 현령이 부임했으며, 이 때 정해진 지명이 현재에 이른다. 관아가 대현산성 아래로 이전된 것도 이 시기로 추측된다.

천험의 요새로 일컬어지는 절령을 중심으로 군사적 요충지를 형성해 외적이 크게 침입할 때마다 싸움터가 되었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에도 도지휘사 이방실(李芳實) 등이 절령에 목책을 쌓고 막았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적군을 공격하다 복병에게 역습당해 목책이 무너짐으로써 대패한 일이 있다. 1391년(공양왕 3) 과전법 실시로 경기지역이 확대됨으로써 경기우도로 이속되었다.

조선시대의 서흥군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경기지역이 재조정되어 서해도로 환속되었고, 1415년(태종 15) 군으로 승격되었다.

이 곳 출신 환관으로서 명나라에 뽑혀 들어간 윤봉(尹鳳)이 명에 대한 세공(歲貢)을 감축하고 공녀(貢女)를 되돌려보내는 등 많은 외교적 공로를 세움으로써 이를 기려 1424년(세종 6) 서흥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의 호구는 1,464호에 4,337명으로, 실제로 도호부가 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615년(광해군 7) 현재의 서흥읍으로 관아가 옮겨졌으며, 1671년(현종 12)에는 향리가 총포를 쏘아 도호부사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왕의 특명으로 100년간 현으로 강등되어 1762년(영조 38)에야 도호부로 복구되는 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입암리에는 17세기의 백자도요지가 남아 있으며, 18세기 말엽에는 5개의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능리장은 수안 · 황주 및 평안남도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해 도내에서는 금천의 시변리장터 다음으로 성시를 이루었다. 1759년(영조 35)의 호구는 6,033호에 2만1577명이었다.

근대의 서흥군

1919년 3·1운동 때 3월 10일 능리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수개월 동안 시위가 계속되었다. 1943년 11월에는 능리의 청년들 30여 명이 율계면의 일본인 순사부장을 집단구타했다가 전원 검거되기도 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졸업하고 광복군에서 항일무장항쟁을 벌인 박영섭(朴永燮), 만주 관전현(寬甸縣) 청년연합회와 연락해 국내 청년단조직을 위해 활약하다가 붙잡혀 옥사한 박병익(朴炳益) 등이 있다.

1935년에는 1읍 10면으로 편성되었고, 1940년 신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군청 등 행정기관이 신막으로 이전되었다. 호구는 1942년에 1만5681호에 7만6776명이었다.

서흥군의 유물 · 유적

삼국통일 후 신라가 당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쌓은 황주에서 곡산에 이르는 300리의 패강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율리면과 도면 사이에 있는 성현고성(城峴古城)은 황주에서 곡산까지 연결하는데, 이 장성의 일부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당과 연합해 고구려 · 백제를 패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남쪽은 신라, 북쪽은 당의 점령지구로 정하였다.

신라는 북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782년(선덕왕 3)에 황주의 극성진(棘城鎭)터에 패강진(浿江鎭)을 구축하고, 826년(흥덕왕 1)에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으로 하여금 패강장성을 쌓게 했는데, 성현고성도 이 장성의 일부이다.

성현을 중심으로 한 고성은 그 뒤 여러 번 개축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현 남쪽 기슭의 상률리 선적동에 있던 선적진첨사(善積鎭僉使)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였다.

한편 서흥면 고성리에는 서흥산성이 있는데, 이 곳에서 고려 때는 거란군과 홍건적을, 조선조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병자호란 때는 청군을 물리친 일이 있어 이 지역이 전략의 요충지였음을 대변해 준다.

사찰로는 528년(법흥왕 15)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속명사(續命寺)가 서흥면 오운리 오운산 중턱에 있다. 이 절은 조선개국에 얽힌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도 해, 1884년(고종 21) 왕실의 시사(施賜)로 개축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밖에 숭덕산의 귀진사, 운마산의 석문사(石門寺), 오봉산의 고정사, 정족산의 석련사 및 월량사, 자비령의 안국사 및 자비사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귀진사 · 속명사와 매양면 녹안리황룡산 서쪽 기슭에 용담사(龍潭寺)가 있을 뿐이다.

서흥군의 관아건물이었던 서흥아사(瑞興衙舍) 부근에는 제금당 · 쾌만헌 · 유연루(悠然樓) · 농산정 · 읍양정(挹讓亭) 등의 아담한 건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유연루에는 많은 묵인 · 문객들이 와서 유연루를 찬미하는 시를 읊었고 또 묵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 옆에는 읍양정이 있는데, 이 곳은 활을 쏘는 사정(射亭)이다. “활 쏘는 것으로 덕을 알아볼 수 있다.”라는 옛말을 되새겨 처음에는 이관정(以觀亭)이라고 하였다.

그 뒤 정자가 퇴락한 것을 부사 신상현(申常顯)이 중건하고 읍양정으로 이름을 고쳤다. 또 조선시대 선비들의 강학도장인 화곡서원(花谷書院)이 있는데, 1584년(선조 17)에 창건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00여 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에 중건한 것이다.

서흥군에는 ‘용(龍)’자가 붙은 유적과 지명이 세 곳이나 있다. 옛날 서흥 객관(客館)인 ‘용천관’과 차유령에 있던 ‘용천역’, 그리고 웅파산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솥모양으로 움푹 파인 가마소 옆에 있는 ‘용사(龍祠)’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용천역터 남쪽 4㎞ 지점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용천의 물은 흘러내리다가 가마소의 물과 합류해 하천을 이루어 서흥면으로 내려간다.

용천관은 본래 예전의 서흥읍 서쪽 8㎞ 지점에 있던 용천원우(龍泉院宇)의 명칭이었는데 1439년(세종 21)에 역로의 변경에 따라 서흥으로 옮겼으며, 1497년(연산군 3) 부사 정현(鄭0x9833)과 금교역 찰방 조흔(趙欣)이 개건, 확장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읍치를 서흥산성 밑에서 대니산(大尼山) 기슭으로 옮기면서부터 서흥부의 객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 부사 윤형갑(尹衡甲)이 동헌과 서헌을 개수했고, 1735년(영조 11) 현감 박사창(朴師昌)이 대청 · 동헌 · 서헌을 모두 크게 수리해, 한 군의 객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용천관 주위에는 운종헌(雲從軒) · 수의헌(繡衣軒) · 호상정(濠上亭) · 익손당(益損堂) 등이 있다. 그 중 운종헌은 1646년(인조 24)에 부사 장중인(張仲仁)이 용천관 동쪽에 창건한 것을 1735년에 관 앞으로 이전한 후 문루를 짓고 영파루(映波樓)라 하였다.

수의헌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행(使行)이 있을 때 사행을 접대하던 곳으로, 대청과 도청(都廳) 외에 다방(茶房)과 다담청(茶啖廳)의 색다른 건물도 있다.

서흥군의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584년(선조 17)에 창건한 화곡서원(花谷書院)이 서흥면 화곡리에 있었다. 이 서원은 김굉필(金宏弼) · 이이(李珥) · 김유(金楺)를 봉사하고 유림의 강학과 후진교육에 기여하였다. 그 밖에 세평면 지산리에 갈해서원(葛海書院), 양평리에 하사서원(下賜書院)이 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사립으로 내덕면 모당리에 이종겸 · 이규조가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설립했으며, 서흥면에 장대익이 명륜학교(明倫學校), 율리면에 유기현이 문창의숙(文彰義塾), 구포면에 강명봉 · 강천숙이 배영학교(培英學校)를 설립하였다. 공립으로는 1910년 서흥면 명의리에 서흥공립보통학교가 개교했으며, 이후 각 면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중등교육기관은 없어 학생들이 사리원 · 해주 · 평양 · 개성 등지로 유학했으므로, 1940년 군내 유지들이 농업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해 1941년 공립농업학교를 개교했고, 1943년 갑종학교로 승격되어 1944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43년에는 허원 · 이창익 · 안태희 등이 중심이 되어 서흥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45년 현재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2개교가 있다.

이 군은 유학이 발달해 한말에는 황해도 동부의 유학문화의 중심지였으므로 근대문명의 수용이 늦었다. 그러나 내덕면 청년들이 조직한 흥풍회(興風會)는 관혼상제의 상조와 노비제도의 타파 등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고덕산과 귀진사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고덕산의 산신령과 귀진사의 도승 묵(默)대사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묵대사는 경문을 출판하기에 앞서 완전한 해독의 필요성을 느껴 불교의 본산인 천축국(天竺國)에 다녀오기로 하고는 제자 보우(普雨)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내가 지금부터 천축국에 다녀올 테니 그 동안 내 방문을 밖으로 잠그고 있어라. 2∼3개월 뒤 흰말을 탄 고관이 와서 내가 죽었다며 시체를 화장하자고 할 것이니 절대로 응해서는 안 된다.”

묵대사는 자신의 육신을 방에 남겨 둔 채 영혼만 천축국으로 떠났다. 제자들이 보기에 스승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으므로 명령대로 방문을 밖으로 잠갔다.

과연 3개월 되던 날 흰말을 탄 고관이 나타나 시체의 인도를 강경히 요구하자, 제자들은 스승의 당부를 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체를 밖으로 내어 화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화장이 끝날 무렵 하늘에서, “내가 지금 막 돌아왔는데 육신을 다비(茶毘)에 붙였으니 영혼은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라는 스승의 구슬픈 소리가 들렸다. 그 뒤 묵대사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며, 흰말을 탄 고관은 산신령의 변신이었다.

서흥군의 산업 · 교통

군은 수안 · 신계의 산악지방과 봉산 · 황주 · 평산 등의 평야지방과의 점이지대로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다. 따라서 황주천과 서흥강 연안이 주요한 벼농사지역으로 꼽히지만 군내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한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 · 밀 · 조 · 콩 · 녹두 · 수수 · 감자 등이다. 서흥군에서 산출되는 조는 ‘황정미(黃精米)’라고 해 유명하며, 밥을 지으면 윤기가 나고 쫄깃쫄깃하며 차져서 흩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황정미는 전국에서도 특미로 꼽혔으며 1945년 당시 116.7㎢에 파종해 약 5,121t을 수확하였다.

특용작물로 마 · 담배 · 대마 등이 생산되며, 특히 인삼의 재배가 활발하다. 서흥지방에서 생산되는 밤은 ‘평양밤’이라고 해 특산물로 알려지고, 서흥명주와 서흥송이도 생산된다. 또한 소의 사육도 활발하다.

광공업으로는 석면 · 형석 · 천연슬레이트 · 석회 등의 산출이 많고, 서흥면 예운리에 유기공장이 있으며 구포면 · 세평면에 옹기공장이 있다. 그 밖에 가내수공업으로 직조 · 면사 · 화문석 · 명주 등을 생산한다.

상업활동은 5일장으로 서흥(瑞興) · 신막(新幕) · 흥수(興水) · 능리(陵里) · 송월(松月) 등에 정기적으로 장이 열린다. 그 중 서흥장이 예로부터 이 일대 상업의 중심지였으나, 신막이 교통의 요지로 성장함에 따라 신막장이 농산물 · 광산물 · 과일 · 명주 · 소 등의 집산지로 되어 거래가 활발하게 되었다.

경의선 철도가 군의 중남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신막역이 검차 · 급수 · 급탄지이다. 국도는 경의선 철도와 병행해 달리며, 서흥∼수안, 서흥∼평산, 신막∼신계를 잇는 3등도로와 등외도로망이 국도와 연결되어 군내 간선도로 구실을 한다. 조선 세조 때까지 서흥에서 북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로 이용된 고개 절령이 있다.

서흥면 고성리에 있는 대현산(大峴山)은 서흥산성을 중심으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의 연봉이 뛰어난 경관을 보이며, 성 안의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은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흘러내려 산기슭에 전개되는 논과 밭의 젖줄이 되며, 또한 절경을 이룬다.

성 안에는 월영대(月迎臺)가 있고, 성남문 밖에는 송정폭포(松亭瀑布)가 있어 남문루인 담소루(談笑樓)에 앉아서 보는 폭포는 천하의 기승이다.

도면 신전리에 있는 선인봉(仙人峰)에 오르면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이 내려다보이고, 서북쪽으로는 대동강의 물줄기가 아득히 시야에 들어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옛날에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고 해 ‘선인봉’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아니라, 정상에는 신선들이 밥을 지어먹었다는 가마모양의 바위와 신선이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물이 깊어, 우물에 절굿공이를 넣으면 6개월 만에 대동강으로 흘러 나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흥군의 읍 · 면

신막읍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113.14㎢, 인구 1만8266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신막리이다. 본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서흥군 관내의 화회(禾回) · 동부(東部)의 2개 면으로 나누어졌으나, 1940년에 다시 합쳐져 신막읍(新幕邑)으로 개편되었다.

무장산이 읍의 북부에 솟아 있고, 그 여맥이 전역으로 뻗어 내리면서 곳곳에 구릉을 기복시키므로 대체로 산지가 많다. 읍의 중앙을 서흥강이 동서로 흘러 읍을 남부와 북부로 나눈다. 북부지방은 옛 동부면 지역이고, 남부지방은 옛 화회면 지역이다.

밭농사를 주로 하며, 콩 · 조 · 밀 · 감자 등이 주요 농산물이다. 특용작물로는 인삼 · 과수재배가 활발하며 누에치기도 이루어진다. 북부지방의 일부가 오운광구(五雲鑛區) 또는 은석광구에 속해 금 · 은 · 아연 등이 산출되지만, 가동률이 높지 못한 편이다.

경의본선이 읍의 중앙부를 동서로 달리며, 1908년 신막역이 설치되어 중간급수 · 급탄 · 검차정비의 구실을 한다. 도로는 읍 소재지를 중심으로 해 1등도로인 경의가도가 경의본선과 병행하며, 3등도로가 신계방면으로 통하고, 각 주요 이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신막(新幕) · 이괴(梨槐) · 주교(周橋) · 증락(甑洛) · 석락(石洛) · 가창(加倉) · 은현(隱峴) · 남한(南漢) · 거문(巨門) · 시담(矢潭) · 천곡(泉谷) · 와야(瓦野) 등 12개 이가 있다.

구포면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76.44㎢, 인구 4,014명(1944년 현재). 구포면(九圃面) 소재지는 신당리이다. 면의 서남단에 부인당산, 중앙부에 금초산 등의 화강암 산지가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 내려 각처에 구릉을 기복시킨다. 구릉 사이를 황주천의 최상류가 북쪽으로 흘러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농업은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조 · 콩 · 팥 · 보리 · 메밀 등이다. 산간지방에서는 축우 · 누에치기 · 고공품제조 등이 이루어진다. 신당리에 옹기공장이 있다.

도로는 신막∼수안간의 3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이 외에 등외도로가 각 주요 마을과 연결되어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신당(新塘) · 자작(自作) · 오암(五巖) · 구정(九井) · 정문(旌門) · 운천(雲川) 등 6개 이가 있다.

내덕면

군의 최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68.33㎢, 인구 7,513명(1944년 현재). 내덕면(內德面) 소재지는 신촌리이다. 면의 중앙에 정족산이 솟아 있어 그 영향이 전역에 미쳐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흥수천(興水川)이 면의 서부를 북쪽으로 흐르며, 유역에 작은 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콩 · 조 · 밀 · 쌀 등이다. 특히 조는 ‘황정미’라고 해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산간지대에서는 각종 한약재가 채취되며 송이버섯도 많이 산출된다. 각처에서 천연슬레이트가 생산된다.

면의 남부를 서흥∼청석두리간의 3등도로가 통과하고 이목동(梨木洞)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교통은 일반적으로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신촌(新村) · 유판(柳板) · 석련(石蓮) · 냉정(冷井) · 장포(長浦) · 다전(多田) · 상금(上金) · 하석(下石) · 상석(上石) · 감당(甘棠) · 대화(大和) · 덕성(德城) 등 12개 이가 있다.

도면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108.77㎢, 인구 6,556명(1944년 현재). 도면(道面) 소재지는 능리이다. 면의 남단에 마식령산맥에 속하는 전주산, 북단에 밀봉산(密峰山, 436m)이 솟아 있어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 내려 각처에 구릉이 기복되어 대체로 산지가 많다. 황주천이 면의 남부를, 능리천의 지류가 동쪽으로 흘러 유역에 작은 규모이지만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 · 콩 · 팥 · 조 · 쌀 · 면화 등이며, 특히 양학리벌은 쌀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농가의 부업으로 주직(紬織) · 누에치기 · 인삼재배 등이 이루어지며, 국대리의 계창골에서 석면이 산출된다.

정기시장인 능리장은 우시장을 포함해 국내 3대 시장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다. 정방산맥이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하므로 주민들의 경제활동은 인근의 수안 · 황주 · 평양 등과 더욱 긴밀하다. 황주∼수안간의 도로가 면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으나 교통은 불편하다.

명승지로는 신전리의 사인봉, 송화리의 천자봉이 유명하며, 송화리에는 20여 개의 고인돌군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능(陵) · 도통(道筒) · 금교(金橋) · 두무(杜茂) · 수곡(水曲) · 성매(城梅) · 신전(薪田) · 화음(華陰) · 양학(陽鶴) · 송화(松花) · 국대(菊垈) 등 11개 이가 있다.

매양면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93.38㎢, 인구 5,337명(1944년 현재). 매양면(梅陽面) 소재지는 녹안리이다. 면의 동북단에 춘광산(春光山, 522m), 남부에 황룡산(黃龍山, 485m) 등이 연이어 있고, 이들 산악이 면 전체에 영향을 미쳐 일반적으로 산지가 많다. 다만 면의 중앙부를 흐르는 서흥강과 그 지류의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주요 경작지가 된다.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으므로 밭농사가 주종을 이루며 주요 농산물은 콩 · 팥 · 조 · 쌀 · 메밀 등이다. 면내에는 철도가 없지만, 녹안리에서 5㎞ 지점에 경의선신막역이 있어 주민들은 이 역을 이용한다.

도로는 신막 · 신계 방면으로 3등도로가 있으며, 그 외에 주요 마을에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있지만 교통은 대체로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녹안(綠鞍) · 서봉(書峰) · 덕암(德巖) · 월농(月農) · 백화(百花) · 매정(梅亭) · 청포(靑浦) · 대평(大平) · 양사(陽射) 등 9개 이가 있다.

목감면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8.23㎢, 인구 6,540명(1944년 현재). 목감면(木甘面) 소재지는 흥수리이다. 면의 서북단에 자비령, 중앙부 동단에 나장산, 서남단에 성문산 등이 솟아 있어, 그 여맥이 면의 전역에 뻗어 내려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다. 다만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흐르는 흥수천과 남부를 동서로 흐르는 서흥강 유역에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조 · 콩 · 쌀 · 메밀 · 밀 · 팥 등이며, 산간지방에서는 축우 · 양돈 · 누에치기 · 약초재배 등이 활발하다. 도로는 흥수리를 기점으로 해 각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할 뿐 교통은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흥수(興水) · 복대(卜大) · 백암(白巖) · 향교(鄕校) · 창촌(倉村) · 당현(唐峴) · 수곡(水曲) · 입암(立巖) · 소기(所己) · 장양(長陽) 등 10개 이가 있다.

서흥면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55.42㎢, 인구 9,212명(1944년 현재). 서흥면(瑞興面) 소재지는 명의리이다. 면의 동북단에 부인당산이 솟아 있어 그 여맥이 사방으로 뻗어 내려 동북부는 일반적으로 산악지대를 이루며, 서남부도 산지이지만 산세가 남부로 경사를 이루고 100m 내외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을 뿐이다.

면의 동남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서흥강이 거의 군의 중앙을 흐르며, 동북쪽에서부터 흐르는 장촌천(張村川)이 서흥강에 합류한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발달되어 면의 주요 생산지 및 거주지역이 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밀 · 조 · 콩 등이며, 특용작물로 인삼 · 과수재배와 누에치기 등을 전문적으로 한다. 광산자원으로는 신막읍과의 경계에 은 · 아연 광산이 있으며, 화곡리에서 형석이 채굴된다.

면의 남부를 경의선이 동서로 달리며, 서흥면 소재지에서 3㎞ 지점에 서흥역이 있다. 도로는 명의리를 중심으로 금천∼사리원간을 잇는 1등도로를 비롯해 각 마을에 이르는 3등도로와 1등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명승고적으로는 고성리에 신라시대의 서흥산성이 있으며, 화곡리에 화곡서원이 있고 오운리에는 신라시대의 속명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명의(明義) · 고성(古城) · 오운(五雲) · 작문(作門) · 주산(舟山) · 덕어(德魚) · 예운(曳雲) · 와류(臥柳) · 잠두(蠶頭) · 영파(暎波) · 화곡(花谷) · 구암(鳩巖) 등 12개 이가 있다.

세평면

군의 최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42.73㎢, 인구 3,793명(1944년 현재). 세평면(細平面) 소재지는 지산리이다. 면의 북단에 주라산(珠羅山, 329m), 서북부에 유덕산(有德山, 254m) 등이 있어, 그 여맥이 면의 전역에 뻗어 내려 각처에 구릉을 기복시키지만 대체로 지세가 낮고, 황주천이 면의 남단을 동서로 흘러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이 평야는 토지가 비옥해 경작지로 개발되었으며 특히 간평천(艮坪川)의 상류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관개시설이 정비된 이후, 일약 ‘간두리벌’이라는 쌀 명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조 · 감자 등이며, 특용작물로 인삼을 재배한다. 부업으로 주직(紬織) · 고공품제조를 한다. 어룡리의 황산점동(黃山店洞)과 이산리의 소니점동(小尼店洞)은 옛날부터 옹기공장이 있던 곳으로 오늘날까지 그 제품이 인근 각지에 판매된다.

도로는 지산리를 중심으로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연결되지만, 경의선황주역이 25㎞나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지산(芝山) · 이산(尼山) · 직현(稷峴) · 간평(艮坪) · 어룡(魚龍) · 고읍(古邑) 등 6개 이가 있다.

소사면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65.55㎢, 인구 3,491명(1944년 현재). 소사면(所沙面) 소재지는 방곡리이다. 면의 중앙부 서쪽에 금대산(金對山, 345m) · 선적산(善積山, 535m) 등이 솟아 있어 그 여맥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 전역이 산지를 이룬다.

그러나 면의 동쪽에 황주천의 지류가 흐르고, 북단을 황주천이 흘러 유역에 작은 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전체적으로 임야면적이 넓고 경작지가 적으며, 경작지의 대부분이 밭이다.

주요 농산물은 콩 · 팥 · 조 · 밀 · 메밀 등의 잡곡이다. 도로는 수안∼황주간의 3등도로가 면의 북부를 횡단하고, 각 주요 마을에 연락되는 등외도로도 있지만 교통은 대체로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방곡(防谷) · 농운(弄雲) · 장암(長巖) · 평촌(坪村) · 남죽(南竹) · 송전(松田) 등 6개 이가 있다.

용평면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2.91㎢, 인구 8,462명(1944년 현재). 용평면(龍坪面) 소재지는 금천리이다. 면의 중앙에 고덕산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화강암 산지가 침식을 받은 노년기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다. 평야가 적어 계곡 또는 산악의 경사지까지 개간해 경작지로 이용하지만, 관개가 불편해 논보다는 밭이 훨씬 많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 · 콩 · 조 등이며 일부에서는 축우 · 누에치기 ·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금천리에서 품질과 생산량이 도내 1위인 석회가 산출된다.

철도는 경의본선이 면의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며, 면내에 서흥역과 문무리역이 있다. 도로는 금천리를 기점으로 해 3등도로가 서흥 · 해주 방면으로 통하고, 그 외에 마을을 잇는 등외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월은리에 파주염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금천(金川) · 월은(月隱) · 문무(文武) · 상평(上坪) · 삼천(三川) · 범안(泛雁) · 월탄(月灘) · 용연(龍淵) · 봉하(鳳下) · 금릉(金陵) · 서곡(瑞谷) 등 11개 이가 있다.

율리면

군의 중앙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89.45㎢, 인구 4,306명(1944년 현재). 율리면(栗里面) 소재지는 송월리이다. 전역이 멸악산맥의 북부에 해당되어 일반적으로 산지가 많다.

즉 동부에는 부인당산, 서부에는 나장산과 전주산 등이 솟아 있어 그 영향이 면 전체에 미친다. 다만 장촌천이 이들 산지 사이를 Y자형으로 남류하는데, 그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농업은 주로 밭농사이며, 따라서 주요 농산물은 콩 · 팥 · 밀 · 조 · 메밀 등의 잡곡이다. 부업으로 축우와 고공품제조를 하며, 특용작물로 인삼 · 약초를 재배한다. 서흥면과 접한 일대에서는 천연슬레이트가 산출된다.

도로는 수안∼서흥간의 2등도로가 장촌천을 따라 통과하며 마을간의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나 교통은 대체로 불편하다. 명승고적으로는 송월리에 귀진사가 있고, 도면과의 경계에 성현고성(城峴古城)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송월(松月) · 서달(徐達) · 오동(梧桐) · 신방(新芳) · 봉암(蓬巖) · 상률(上栗) · 칠송(七松) 등 7개 이가 있다.

광복 후의 서흥군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남쪽 구포면(九圃面) · 목감면(木甘面) 일부와 신막읍(新幕邑) · 율리면(栗里面) · 서흥면(瑞興面) · 매양면(梅陽面) · 용평면(龍坪面), 평산군 안성면(安城面)의 일부로 서흥군이 개편되었다.

현재 황해북도 중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신계군, 서쪽은 봉산군, 남쪽은 인산군 · 평산군, 북쪽은 연탄군 · 수안군에 접해 있다. 동경 126°02'∼126°24', 북위 38°20'∼38°39'에 있으며, 면적 594㎢, 인구 10만여 명이다.

행정구역은 서흥읍과 거문(巨門) · 가창(加倉) · 낙촌(洛村) · 화곡(禾谷) · 청포(靑浦) · 양사(陽射) · 대평(大平) · 화봉(花峰) · 남한(南漢) · 자작(自作) · 신당(新塘) · 운천(雲川) · 송월(松月) · 고성(古城) · 백암(白岩) · 수곡(水曲) · 삼천(三川) · 문무(文武) · 금릉(金陵) · 봉하(鳳下) · 범안(泛雁) · 양암(陽巖) · 온정(溫井) 등 1개 읍 23개 이로 되어 있고, 군 소재지는 서흥읍이다.

군의 남동쪽으로 멸악산맥이 뻗어 내리고 황룡산(黃龍山) 유역에 속하나, 군의 대부분 지역은 서흥강(瑞興江) 상류의 여러 지류가 흐르는 몽리지역(蒙利地域)이다. 이 사이에 부인당산(夫人堂山, 685m) · 무장산(武張山, 524m) 등의 잔구가 남아 있고, 대체로 200∼300m 가량의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서흥강은 심한 감입곡류로 흐르다가 퇴적토를 쌓아 얕은 하곡을 만들어 농경지역을 이룬다. 남부 대부분 지역은 석회암의 용식지형(溶蝕地形)이어서 지령굴(地靈窟)이라는 거대한 폴리예(Polije)가 있는 카르스트지형의 표본을 이룬다. 기반암은 주로 혈암 · 석영 · 석회암 · 점판암 · 화강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평균기온은 9.2℃, 1월 평균기온은 -7.8℃, 8월 평균기온은 24℃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064㎜이다. 토양은 산림갈색토가 주를 이루며 강골짜기에는 충적토가 퇴적되어 있다.

산림면적은 전체 면적의 73%이고 경지는 20%도 안 되는데, 이 중 논이 11.8%, 밭은 76.8%, 과수원은 8.1%, 뽕밭은 3.1%이다. 벼 · 옥수수 경작과 함께 조는 ‘황정미’라고 해 북한에서 최고품으로 우대된다.

과일 중에서는 사과가 61%, 대추가 7%를 차지하고, 서흥에서 나는 밤은 평양으로 보내져 ‘약밤’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된다.

봉하리에는 석회광산, 서흥읍과 송월리 일대에는 천연슬레이트광산, 화곡리 부근에는 형석광산이 있다. 서흥군의 특산물로 화문석과 명주가 있으며, 공업은 미미한 편이다. 평부선 철도가 지나고, 평양∼개성간 고속도로와 인산 · 신계 · 수안 등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고성리에는 서흥산성이 있고 서흥호에는 서흥휴양소가 있다. 봉하리의 답동산(踏洞山)은 답동산식물보호구(북한 천연기념물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현리(唐峴里)에 있는 서흥향교는 1754년(영조 30)에 창건하였다.

서흥읍에는 1584년(선조 17)에 건립한 화곡서원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객사(客舍)인 용천관(龍泉館)도 불타 없어졌다. 군내에는 귀진사(歸眞寺) · 속명사(續命寺) · 용담사(龍潭寺)가 있었으나, 이 역시 파괴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
「瑞興郡邑誌」
「黃海道誌」(黃海道誌編纂委員會, 1981)
「以北5道30年史」(以北5道委員會, 1981)
「北韓文化財實態와 現況」(文化財管理局, 1985)
「人物의 고향」-北韓篇(中央日報社,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이한순·민현구·최근영·노도양·이영택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