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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고구려(小高句麗)

    고대사지명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자립해 세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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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고대사
    유형
    지명
    성격
    국가, 고대국가
    시대
    고대-남북국-발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자립해 세운 나라.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역사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나, 원래의 고구려나 궁예(弓裔)의 후고구려 및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소고구려라 칭한다.
    소고구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818년에 당나라에 조공한 기사를 포함해 몇몇 극히 단편적인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성립 배경과 과정 및 국가의 구조나 성격 등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의 정치적 상황의 추이와 이 지역 유민의 동향 및 요동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동 등을 통해 소고구려국의 성립과 소멸 과정을 개괄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요동지역은 고구려인들이 수백 년간 토착해 온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수나라·당나라 간 전쟁의 중심무대로서, 오랜 전란으로 고구려 멸망 무렵에는 극히 피폐한 상태였다.
    게다가 669년 당에 의해 이 지역 주민이 대거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고, 안시성 등지에서 반당운동이 맹렬하여 전란이 계속되었으므로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은 676년 신라에 쫓겨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에 옮긴 후, 중국 내지로 옮겼던 고구려 유민 집단을 요동에 귀환시키고,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봉하는 등의 조처를 취해 이 지역을 충실화하고 유민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 때 당에 끌려 갔던 백제 유민들도 요동에 보내어 건안성에 웅진도독부를 교치(僑置)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보장왕이 속말말갈족과 은밀히 내통하여 반란을 기도하자, 당은 그를 유배보내고 요동지역 유민들을 재차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켜 중국 내지의 각 지역으로 옮겼다. 그 뒤 요동의 유민사회는 크게 위축되어 빈약한 호구만 남게 되었다.
    당의 요동 지배는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의해 북중국에서 요동으로 통하는 육로가 차단되고 동북방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동요됨에 따라 난관에 봉착했다. 이 때 일시 요동포기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은 요동의 안동도호부를 도독부로 격하시키고,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에 봉하여 동요하는 유민사회를 안돈시키며, 한편으로는 발해만을 건너 해로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당의 세력이 다시 회복되어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당의 요동지역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주변 정세의 진전에 따라 이 지역 유민들이 사방으로 이산하여 호구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즉, 680년대 후반 재흥한 돌궐이 흥안령 이동에까지 세력을 뻗쳐 오고, 8세기 들어 발해가 급속히 발전해 나감에 따라 이 지역 고구려 유민들은 몽고 방면과 중동부 만주지역으로 이산해 갔다. 따라서 인구는 극히 희박해졌다.
    752년의 기록인 《구당서 舊唐書》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요동의 고구려 유민은 4도독부 10주의 기미주(覊縻州)로 편제되어 있었고, 인구는 5,718호 1만 8,156명에 불과하였다. 이 호구 수는 당시 요서지방의 호구 수와 비교할 때 너무나 적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요동지역의 호수가 감소하여 빈약한 무리만 남게 되었다.”는 기록과 연결되어 당시 요동지역의 일반적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그 뒤 발해의 팽창에 따라 그에 쫓긴 일부 말갈족들이 요동으로 이주해 당의 기미주가 되었다. 당의 요동지배는 755년 평로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고비로 전면적으로 붕괴되었다.
    반란군이 화북으로 진출해 나가 당의 중심부가 전란의 와중에 빠졌고, 그것이 장기화되자 요동지역은 당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틈을 타 발해가 진출해 와 목저성(木低城)과 현토성 일대를 병합하여 요동평야를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 뒤 당의 세력이 요서지역에 재차 뻗쳐 왔지만, 요동은 당과 발해세력 사이의 완충지대로 되었다.
    이와 같은 주위정세 하에서 요동지역 유민들은 점차 정치적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독자적인 국가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818년에는 고려국으로서 당에 사신을 보내고 악공(樂工)을 바치기도 하였다.
    소고구려국의 주민 구성은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고 건안성에 교치되어 있던 일부 백제계 유민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말갈족 기미주의 주민들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고구려국은 전체 인구가 적었을 뿐더러 사방이 트인 평원인 요동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방어에 크게 난점이 있었다. 일시적으로 당과 발해의 세력균형 하에서 독자적인 소국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곧이어 제10대 선왕 대인수(大仁秀)의 치세 때(818∼830) 발해가 크게 팽창하여 소고구려를 병합하게 되었다. 본국이 발해에 병합되자, 당시 당에 가 있던 소고구려국 승려 구덕(丘德)은 요동으로 가지 않고 827년 불경을 가지고 신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그 뒤 요동의 고구려 유민은 발해의 현으로 편제되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세기 초 거란이 동진해 오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발해와 쟁투가 벌어졌으나, 926년 발해의 멸망으로 요동지역은 완전히 거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 거란이 동부 만주지역에서 발해인을 대거 요동지역에 이주시킴에 따라, 요동의 고구려 유민은 동족인 발해인에 흡수되어 발해 유민으로서 이 지역에 존속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고구려유민사연구」 ( 노태돈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1981)

    • 「小高句麗國の建國」 ( 日野開三郞 ,『史淵』 72,1957)

    • 「小高句麗國の領域と民族構成」 ( 日野開三郞 ,『史淵』 104,1971)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노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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