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현서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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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조선후기 정광필 등 8인을 제향한 숭향서원의 서원터. 시도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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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조선후기 정광필 등 8인을 제향한 숭향서원의 서원터. 시도기념물.
내용

1992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창건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1585년(선조 18)에 있었던 향현사(鄕賢祠) 성격의 삼현사(三賢祠)가 숭현서원의 전신이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미루어 16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광필(鄭光弼)·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김장생(金長生)·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 등 8인을 제향(祭享)하였다.

숭현서원은 처음 회덕(懷德) 용두록(龍頭麓)(현 대전광역시 중구 용문동)에 창건되었으나 임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되었다. 그리고 1609년(광해군 1) 유생 송남수(宋柟壽)가 향유(鄕儒)를 이끌고 회덕현의 서쪽, 지금의 원촌동에 옮겨지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정광필·김정·송인수 3인만 제향하여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불렀고 그 해에 이시직(李時稷) 등 유생들이 사액을 건의하여 ‘숭현(崇賢)’의 액호(額號)가 내려졌다. 1646년에 김장생을 추향(追享)하였고 1681년에 송준길, 1695년에는 송시열을 추향하였다.

송준길을 추향하기 전인 1658년에는 별묘(別廟)를 세워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이시직과 송시영을 제향하였다. 8인을 제향하므로 팔현묘(八賢廟)로 호칭되기도 하였으며 1667년에는 별묘에 제향되었던 이시직·송시영을 서원 본당에 올려 동서(東西)로 배향(配享)하였다.

제향 위차(位次)는 동벽 1위에 정광필, 서벽 1위 김정, 동벽 2위 송인수, 서벽 2위 김장생, 동벽 3위 송준길, 동벽 4위 송시열, 동벽 5위 이시직, 동벽 6위 송시영 순으로 배치되었다. 숭현서원은 창건에서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회덕의 유력 사족인 은진송씨가 깊이 관련되었으며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서원지(書院址)는 묘정비(廟庭碑)가 서있는 현 유성구 원촌동의 뒷산 기슭으로 추정되며 1991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서원 터는 뒷산 줄기에서 갑천(甲川)을 향해 완만하게 흘러내린 산등성이를 다듬어서 만들었으며 터의 상부에는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기단(基壇)이 있고 하부에는 기대석이 남아있다.

숭현서원은 묘정비만 남은 채 오랫동안 복원되지 못하다가 1998년 대전광역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원촌동에 복원되었는데 사우와 강당, 동무(東廡), 서무(西廡),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외삼문, 별사, 문간채 등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대전시사(大田市史)』
「조선후기 회덕현의 재지사족과 서원 : 은진송씨를 중심으로」(윤홍열,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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