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조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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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851년(철종 2) 진종(眞宗 : 孝章世子, 영조의 장자)의 신주를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기는 문제를 두고 김흥근(金興根) · 홍직필(洪直弼) 일파와 권돈인(權敦仁) · 김정희(金正喜) 일파 사이에 일어났던 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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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51년(철종 2) 진종(眞宗 : 孝章世子, 영조의 장자)의 신주를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기는 문제를 두고 김흥근(金興根) · 홍직필(洪直弼) 일파와 권돈인(權敦仁) · 김정희(金正喜) 일파 사이에 일어났던 예송.
내용

신해조천예론(辛亥祧遷禮論)이라고도 한다. 발단은 1849년 6월 헌종이 죽은 뒤 왕실의 직계 후사가 끊어지고, 그의 9촌 숙부에 해당하는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영입되어 즉위하면서 비롯되었다. 철종은 헌종의 대통(大統) 계승자로 표방되었지만, 왕실의 계보상으로는 순조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철종은 조카뻘인 헌종의 왕위와 종통(宗統)을 계승했으나, 그의 친속 계보는 재당숙인 순조를 잇는 형태가 되었다.

또 진종은 혈통상으로는 철종의 증조에 해당하지만, 왕위 계승의 종통상으로는 5대조(진종-정조-순조-익종-헌종-철종)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그의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은 친속간의 칭호 문제라든가, 계보의 정리, 제사의 대수 등 여러 가지 전례상의 문제들을 야기했고, 그것이 진종의 조천예송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예론의 발단은 1849년 6월 철종의 즉위 직후의 친속 호칭 문제로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대신·중신·유신들의 의견을 모아 호칭을 결정했는데, 주로 좨주 홍직필의 헌의에 근거해 순조에 대해서는 황고(皇考)-효자(孝子)의 칭호를, 익종에 대해서는 황형(皇兄)-효사(孝嗣)의 칭호로, 헌종에 대해서는 황질(皇姪)-사왕신(嗣王臣)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헌종에 대한 ‘조카’의 호칭은 화서(華西)이항로(李恒老) 등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851년 6월 진종을 종묘에서 조천하게 되자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때 영의정 권돈인과 추사 김정희 등은 진종이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종묘에서 조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좌의정 김흥근과 좨주 홍직필 등은 제왕가에서는 왕위의 승통을 중시하므로 헌종과 철종 사이에는 부자의 도리가 있고, 진종은 4대의 제사 대수를 넘었으므로 마땅히 조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정에서는 2차례에 걸쳐 120명이 넘는 대신·중신·유신들에게 의겸 수렴을 실시했고, 조천론과 불천론의 대표자였던 김흥근과 권돈인은 4차례의 서신을 통해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예론은 익종과 헌종의 정통성 문제가 결부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논쟁이었다. 또 안동 김씨 측의 설득에 의해 대다수의 관료·학자들이 조천론을 찬성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다수 의견을 따라 조천을 결정하였다.

이 예송은 학문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정치집단간의 권력투쟁과 같은 성격이 강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세도권(勢道權)의 장악을 놓고 대립한 안동김씨가와 풍양조씨가 사이의 알력과 암투가 작용했던 것이다.

조천론이 승리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삼사에서 홍직필을 두둔하고 영의정 권돈인을 ‘망군오국(忘君誤國)’의 죄로 탄핵하였다. 결국 권돈인과 김정희 등은 불충 대죄를 얻어 변방에 유배되었다. 이와 함께 그들의 배후였던 풍양 조씨(豊壤趙氏) 외척 세력도 완전히 실권하였다. 반대로 승리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철종대의 정치를 천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해예송의 귀결은 왕실의 종통 체계에 난맥상을 노출하였다. 즉 철종은 친속으로는 순조의 아들로 입적되고, 종묘에서는 헌종의 대통을 이은 것으로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통상의 파행은 조선 말기의 왕실에 바람직하지 않은 하나의 전례를 만들었다.

즉 186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신정왕후(神貞王后, 趙大妃 : 翼宗妃)는 철종의 11촌 조카뻘에 해당하는 고종(高宗)을 대통의 계승자로 지명했는데, 그를 철종의 후사가 아닌 익종의 후사로 정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매산집(梅山集)』
『화서집(華西集)』
『신해조례고(辛亥祧禮攷)』
「철종초(哲宗初)의 신해조천예송(辛亥祧遷禮訟)」(이영춘, 『조선시대사학보』 1, 1997)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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