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치화(穉華). 본관은 청송(靑松).
1850년(철종 1)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1862년 예방승지(禮房承旨), 1874년(고종 1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81년에는 개항 이후 개화자강정책(開化自强政策)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신설, 개편하였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 곧 율례사(律例司)의 당상경리사가 되어 사무를 관장하였고, 다시 기계군물함선당상(機械軍物艦船堂上)이 되어 신무기 제조 및 군사훈련을 청나라에 의뢰하는 한편 일본 군사시설의 시찰을 장려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 도봉소당상(都捧所堂上)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884년 우의정, 그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수구당내각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분쟁 사이에서 정치적 고충을 겪었고, 오토리[大鳥圭介]공사의 강압적인 내정개혁요구에 직면해서는 사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이 의정(議政)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공홍식(孔洪植) 옥중살해사건이 계기가 되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고, 체직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