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기대회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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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의 단결과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창설된 아시아지역의 종합스포츠 경기대회를 지칭하는 용어. 종합스포츠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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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아시아인의 단결과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창설된 아시아지역의 종합스포츠 경기대회를 지칭하는 용어. 종합스포츠제전.
내용

경기는 4년에 한 번씩 올림픽 중간해에 회원국 중 희망국에서 개최하며, 표어는 ‘영원한 전진(over onward)’으로 세계평화와 인류의 공동번영을 이상으로 하는 올림픽과 근본적으로 이념을 같이한다.

[창설경위]

아시아경기대회의 창설 움직임이 싹튼 것은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아시아 각 민족이 열강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고, 민족의 독립과 자결의 움직임이 스포츠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부터이다.

1947년 당시 인도의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 위원이었던 손디가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국제회의에서 아시아경기연맹 설립을 제의하였다.

이듬해 8월 제14회 런던올림픽 기간중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 필리핀 · 버마(지금의 미얀마) · 인도 ·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 6개국 대표가 모여 아시아경기대회 개최를 위한 최초의 협의회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를 1950년 중에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연맹헌장 작성 등 준비업무를 위한 소위원회를 한국의 신기준(申基俊) 등 4인의 위원으로 구성하였다.

1949년 2월에 뉴델리에서 9개국 12명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아시아경기연맹(Asian Games Federation, A.G.F.) 조직을 위한 협의회가 개최되고, 이 때 제정한 헌장이 IOC에 의해 승인됨으로써 정식 출범하였다.

대회의 전신은 일본, 중국, 필리핀에서 13년 전부터 1934년까지 10회를 개최하고 중단되었던 극동선수권대회와, 1934년 인도 · 아프가니스탄 · 실론 · 팔레스티나가 참가하여 열렸던 서아시아경기대회로서, 이 두 대회가 합병하여 부활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52년 7월에 아시아경기연맹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81년 11월 26까지 호칭되던 아시아경기연맹은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연맹총회에서 연맹명칭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lympic Council of Asia, O.C.A.)로 개정할 것을 발의하여 승인하였다.

1981년 11월 26일과 1982년 11월 16일의 아시아경기연맹총회에 참가한 나라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창립회원국이 되었다. 1982년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총회에서 우리나라는 제10회 대회를 서울로 유치하였다.

[제1회 뉴델리대회]

1951년 3월 4일부터 8일간 인도의 뉴델리에서 아시아경기연맹가입국 중 11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 대회에 한국은 6·25전쟁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헬싱키올림픽경기대회 기간중인 1952년 7월 24일 아시아경기연맹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제2회 마닐라대회]

1954년 5월 1일부터 9일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18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 최초로 임원 21명, 선수 57명의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육상 1,500m 종목에 출전한 최윤칠(崔崙七)과 1만m에 출전한 최충식(崔忠植)이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역도경기에 출전한 유인호(劉仁鎬), 조봉직(趙奉稷), 김창희(金昌熙), 김성집(金晟集), 고종구(高宗具), 박금현(朴金鉉)도 금메달을 획득하여 일본, 필리핀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하였다.

[제3회 도쿄대회]

1958년 5월 24일부터 6월 1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20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 13개 종목에 걸쳐 120명의 선수를 파견하여 종합성적 3위를 차지하였다.

이창훈(李昌勳)의 마라톤우승과 자전거도로경기에서의 전승(全勝)은 재일 동포에게 뜨거운 민족애를 일깨워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제4회 자카르타대회]

1962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개최국인 인도네시아가 정치적 · 종교적 이유로 자유중국과 이스라엘에 참가신청서를 발송하지 않아 아시아의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는 근본적인 아시아경기 이념을 훼손시켰다.

또한, 주최국이 대회운영을 독단적으로 행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 대회에 우리나라는 201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4개, 은메달 9개, 동메달 23개를 획득하였다.

[제5회 방콕대회]

1966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 18개국 2,500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13개 종목에 선수 182명과 경기임원, 조사단, 예술단 및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서울유치업무단 등 모두 93명을 파견하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탁구 · 복싱 · 역도 · 사격 · 사이클 종목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하였고, 육상 · 탁구 · 사이클 · 복싱 · 역도 · 사격 · 남자배구 · 여자배구 · 수영 · 레슬링 · 배드민턴 종목에서 은메달 18개, 그 밖에 동메달 21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2위를 차지하였다.

[제6회 방콕대회]

이 대회는 원래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1968년에 개최권을 반납하였으므로 방콕으로 변경되어 개최되었다.

이 때문에 개최비의 원조를 각 가맹국이 분담하는 등 변칙운영이 되었다. 1970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이 대회는 19개국 2,500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우리나라는 11개 종목에 192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18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23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2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두드러진 성과는 수영 부문에서 신인 조오련(趙五連)이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아시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하고, 육상여자투포환에서 백옥자(白玉子)가 아시아경기대회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제7회 테헤란대회]

1974년 9월 1일부터 16일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2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 15개 종목에 228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이 대회의 특징은 공산권국가인 중공(현재의 중국)과 북한이 처음으로 참가하기 시작하여 스포츠를 통한 남북의 만남과 중국의 대륙풍이 불기 시작한 점, 중동분쟁의 영향으로 이스라엘과의 경기를 거부하는 나라가 속출한 점이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16개, 은메달 26개, 동메달 15개를 획득, 종합성적 4위를 차지하였다. 육상의 여자투포환 종목에서는 백옥자가 제6회 대회에 이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수영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조오련은 제6회 대회에 이어 2관왕이 되었으며, 자유형 200m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하였다. 북한은 금메달 15개, 은메달 14개, 동메달 17개로 종합성적 5위를 차지하였다.

[제8회 방콕대회]

1978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이 대회에는 26개국이 참가하였고, 우리 나라는 이 대회에 17개 종목에 275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18개, 은메달 20개, 동메달 31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3위를 차지하였다.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김진호(金珍浩)가 1,230점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단체전에서 3,607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한 것은 궁도한국의 잠재력을 입증한 것이었으며, 복싱에서의 5체급 석권도 복싱강국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사격의 박종길(朴鍾吉), 레슬링의 양정모(梁正模), 그리고 여자농구, 남자배구, 축구의 우승도 우리나라 스포츠의 우수성을 아시아 여러 나라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제9회 뉴델리대회]

1982년 11월 19일부터 12월 4일까지 개최된 이 대회에는 33개국 4,5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우리 나라는 20개 종목에 280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축구 및 요트를 제외한 18개 종목에서 금메달 28개,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3위를 차지하였다.

육상 200m종목에서 장재근(張在根)이 금메달을 획득하고, 멀리뛰기종목에서 김종일(金鍾鎰), 마라톤에서 김양곤(金梁坤)이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수영 200m배영 종목에서는 최윤희(崔允喜)가 금메달, 최윤정(崔允庭)이 은메달을 획득하고 200m개인 혼영에서 최윤희는 금메달을 획득하여 3관왕이 되었다. 궁도경기에서는 남자단체 종합우승 및 여자단체 종합우승을 하여 ‘궁도한국’의 우수성을 다시 입증하였다.

그리고 신예 여자하키팀의 은메달 획득, 사이클 도로단체의 금메달, 185㎞도로개인에서 박세룡(朴世龍)의 우승, 복싱7체급에서 금메달 획득, 테니스 혼합복식에서 김춘호(金春浩), 신순호(申順浩)의 우승, 여자단체, 남자복식, 여자복식 테니스의 우승, 배드민턴 여자복식의 우승을 쟁취하였다.

또한, 사격 개인스탠다드 권총에서 박종길의 금메달 획득과 스탠다드3자세 개인, 단체에서 윤덕하(尹德夏)의 금메달 획득 등은 스포츠과학연구소 창설 이후 국제교류를 통한 선진기술 체득과 과학적 훈련의 결과로 우리 나라 스포츠의 우수성과 잠재력을 보여준 대회였다. 이 대회는 지금까지 아시아경기대회 8연패를 이룩한 일본이 중공의 대륙풍에 밀려난 대회였다.

[제10회 서울대회]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대회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 36개국 회원국 중 27개국 4,797명의 임원 및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30억 아시아인의 평화와 우정 및 단결이라는 올림픽의 정신과 이상을 실현시킨 대회였으며,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 여러 나라에 과시한 대회였다.

우리나라는 25개 전 종목에 선수단 600명이 참가하여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를 획득하여 종합성적 2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이 등장하기 이전에 방콕에서 개최된 제5, 6회 대회에서 일본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라보기는 했으나 중국의 등장 이후 줄곧 3위권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기력 향상과 국내 개최의 이점에 고무된 우리나라는 일본을 크게 앞지르고 선두 중국과 치열한 경쟁 끝에 금메달 한 개 차이로 종합 2위를 하였다.

이 대회에서 특기할 점은 세계무대에서 무적의 아성(牙城)을 지켜 온 중국 남녀탁구팀을 물리치고 우리나라가 중국과 나란히 세계의 강자로 부상하였으며, 남자하키, 여자하키팀도 세계의 강호 인도와 파키스탄을 물리치고 우승한 것이다.

유도에서도 우리나라는 종주국 일본을 완파해 아시아유도를 강화시켰고, 체조 역시 금메달 3개를 획득하여 중국, 일본의 수준에 버금가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우리 나라는 복싱 12체급을 모두 석권하여 복싱강국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였으며, 여자 육상의 임춘애(林春愛)는 800m, 1,500m, 3,00m종목에서 우승, 3관왕이 되었다.

남자멀리뛰기에서 김종일(金種鎰)은 7.94m로 우승하여 제9회 대회에 이어 2연패를 이룩하였다. 여자사격 공기소총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박정아(朴貞娥)는 2관왕이 되었으며, 남자소구경 자유소총복사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차영철(車榮哲)은 금메달을 획득, 2관왕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남자탁구의 유남규(劉南圭)는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어 폐막식에서 영예의 이상백배(李相伯盃)를 수상하였다.

[제11회 베이징대회]

1990년 9월 22일부터 10월 7일까지 중국의 베이징에서 열린 이 대회는 ‘단결 · 우의 · 진보’의 슬로건을 내걸고 37개국 6,122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28개 종목에 선수 552명, 경기임원진 142명 등 모두 694명을 파견하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육상 · 양궁 · 농구 · 배드민턴 · 복싱 · 카누 · 펜싱 · 골프 · 체조 · 핸드볼 · 하키 · 유도 · 사격 · 수영 · 탁구 · 역도 · 레슬링 · 요트 · 사이클 종목에서 금메달 54개를 획득하였고, 위 종목 및 조정 · 테니스 · 배구 종목에서 은메달 54개, 축구를 비롯한 기타 종목에서 73개의 동메달을 획득하여 종합성적 2위를 기록하였다.

육상 800m종목에서 김봉유(金奉猷)가 마라톤에서 김원탁(金元卓)이 금메달을 획득하고, 핸드볼은 남자단체 및 여자단체전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하키는 여자대표팀이 1986년 10회 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하였고, 레슬링에서는 48kg급에 김종신(金鍾信), 52kg급에 안한봉(安漢奉)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모두 11체급을 석권하였다.

여자농구는 장신 중국을 77대 70으로 격파, 2년만에 설욕하였고, 배드민턴에서 혼합복식을 2연패한 박주봉(朴柱奉), 정명희(鄭明熙) 콤비는 대회전부터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혀온 세계정상의 커플이었다.

양궁은 여자단체 및 개인전, 남자단체 및 개인전 전 종목을 모두 우승하여 이장미(李薔美)가 2관왕, 양창훈(楊昌勳)이 2관왕을 차지하는 등 다시 한 번 양궁 종목의 강국임을 입증하는 대회였다.

[제12회 히로시마대회]

1994년 10월 2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된 이 대회는 42개국 7,0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나라는 34개 종목 가운데 32개 종목에 출전하여 일본을 금메달 4개 차로 누르고 금메달 63개, 은메달 56개, 동메달 64개를 획득하여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이후로 3회 연속하여 종합 3위 자리를 지켰다.

배구는 여자경기에서 극적인 접전 끝에 역전승으로 아시아경기사상 첫 우승의 쾌거를 이룩하였고, 여자농구 또한 일본을 77 대 76으로 역전승을 거두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당시 기대 종목이었던 역도 경기는 금메달 2개로 그쳤고, 금메달 5개를 목표했던 레슬링에서는 무려 9개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유도경기에서도 금메달 7개를 획득하였다.

핸드볼경기는 여자가 결승에서 일본을 34 대 20으로 꺾고 우승한데 이어 남자도 결승에서 일본을 26 대 21로 꺾고 동반 우승을 차지하였다.

대회 마지막날인 16일 주경기장에서 열린 남자육상 1,600m 계주에서 이언학(李彦學) · 손주일(孫周日) · 이진일(李鎭一) · 김순형(金順亨)이 마지막 400m에서 역전극을 연출하며 2위 태국을 0.14초 차로 제치고 3분10초19로 골인해 금메달을 땄다.

이진일은 800m 우승과 함께 한국선수로는 유일한 육상 2관왕이 되었으며,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黃永祚)가 최우수선수(M.V.P.)로 뽑혀 이상백배를 받았다.

현황

제13회 대회는 태국 방콕에서 열렸다. 41개국 6,554명이 참가하였고 36개 종목에서 376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2위에 올랐다.

제14회 대회는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렸다. 44개국 9,767명이 참가하였고 38개 종목에서 419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2위에 올랐다.

제15회 대회는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다. 45개국 9,520명이 참가하였고 39개 종목에서 424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2위에 올랐다.

제16회 대회는 중국 광저우에서 열렸다. 45개국 9,704명이 참가하였고 42개 종목에서 746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2위에 올랐다.

제17회 대회는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렸다. 45개국 13,000여 명이 참가하였고 40개 종목, 462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2위에 올랐다.

제18회 대회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팔렘방에서 열렸다. 25개국 11,300명이 참가하였고 40개 종목, 462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3위에 올랐다.

제19회 대회는 중국 항저우에서 열렸다. 45개국 12,000여 명이 참가하였고 40개 종목 481개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종합3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동아일보』(동아일보사, 1990.10.7., 1994.10.17.)
『아시아경기대회참가보고서』 제11∼12회(대한올림픽위원회, 1994)
『아시아경기대회참가보고서』 제2∼9회(대한올림픽위원회, 1983)
『한국체육백년사편찬회』(한국체육백년사편찬회, 1981)
집필자
곽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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