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

안양시청사
안양시청사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중부 서쪽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중부 서쪽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과천시·의왕시, 서쪽은 광명시·시흥시·안산시, 남쪽은 화성시·군포시, 북쪽은 서울특별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52′∼126°59′, 북위 37°21′∼37°26′에 위치한다. 면적은 58.46㎢이고, 인구는 59만 778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구, 31개 행정동(7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여 북쪽과 서남쪽에는 400m의 산지가 솟아 있고 안양천이 흐르는 중앙부에 낮은 하곡 평야지대가 발달해 있으나, 대체로 준평원의 잔구지역이다.

북쪽에 삼성산(三聖山, 456m)·관악산(冠岳山, 629m), 서남쪽에 수리산(修理山, 475m)·수암봉(秀巖峰, 395m)이 화성시와 안산시 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학의천(鶴儀川)·삼성천(三聖川)·삼막천(三莫川)이 시의 동쪽에서 서남류하여 안산천에 합류하고, 수암천(秀巖川)·청암천(靑巖川)이 시의 서쪽에서 동북류하여 안양천에 합류한다. 안양천은 동남∼서북류하면서 주변에 넓은 하천평야를 형성시키면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주변의 농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하천 유역은 사질양토로 비옥하다. 지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졌다.

연평균 기온은 11.4℃, 1월 평균기온 -5℃, 8월 평균기온 25.5℃이며, 연 강수량은 1400㎜ 내외이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역사

군자산성지(君子山城址) 일대에 토기조각들이 산재해 있고, 무문토기의 후기에 속하는 흑도질토기(黑陶質土器) 조각이 출토되었다. 인근 시흥시 정왕동에서도 즐문토기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안산시 성곡동 해봉산과 목내동의 토성지 등에서 유물·유적들이 발견되어 이곳에 이미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가까운 광명시 소하동에 고인돌이 있으며, 수리산과 백운산에서의 산신제 유습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삼한시대에 이 지역은 마한 땅이었다고 하나 그 중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삼국이 서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 할 때 이곳은 원래 백제에 속했으나, 고구려 장수왕이 남정(南征)하여 고구려에 속하게 되면서 율목군(栗木郡 또는 冬斯肸)이라 하였다.

삼국이 통일되고 난 뒤에는 율목군도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율진군(栗津郡 또는 果津·栗琳)으로 변경되면서 곡양(穀壤)·공암(孔巖)·소성(邵城) 등을 영현으로 두었다.

안양이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삼성산 안양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940년(태조 23)에 구역 명칭을 바꿀 때 율진군을 과주(果州)로 고쳤으며, 성종 때는 별호로서 부림(富林 또는 富安)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018년(현종 9) 행정 개혁에 따른 개편으로 양광도의 광주목(廣州牧)에 속했고 뒤에 감무가 임명되었다.

1102년(숙종 7)부터 과주의 용산처(龍山處: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일대)가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살피게 한 뒤, 1284년(충렬왕 10) 이곳만을 떼어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시켜 과주에서 분리시켰다. 그 뒤 과주는 1390년(공양왕 2) 경기좌도에 예속되었다.

1398년(태조 7)에 과천향교(지금의 시흥향교)가 동북리에 창건되었으나, 풍수지리설에서 부적합한 터라 하여 1690년(숙종 16)에 서이리(지금의 과천시 중앙동)로 이전하였다.

과주는 1402년(태종 2)에 경기좌우도에 예속되었으며, 1413년 8도제 실시에 따라 경기도에 속하게 되면서 과천현으로 변경되고 현감이 임명되었다. 1414년에는 금천현(衿川縣)과 과천현을 합쳐 일시 금과현(衿果縣)이라 했고, 1456년(세조 2)에는 금천현을 과천현에 합했다가 복구시켰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 때 23부 제도에 따라 과천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했으나 1896년 4등군으로서 경기도 과천군이 되었다. 1912년 이곳의 호구는 867호 3,484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천군·과천군·안산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다.

이때 과천군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下西面)을 합하면서 ‘서’자 둘이 합한 면이라 하여 서이면(西二面)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지금의 안양시 지역이다. 1941년에는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초대통감이던 이토[伊藤博文]가 안양역을 지나갈 때 돌을 던져 일본경찰에 잡혀 고문으로 불구가 된 원태우(元泰祐 또는 泰根·昌壽)가 있다. 또 3·1만세운동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한 이영래(李永來)와 한흥리(韓興履) 등이 있다.

1949년 8월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많은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애국청년들은 대한청년단을 조직, 당시 지방 공산당에 대항하여 마을을 지켰다. 1963년 동면 신안양리와 서면 박달리가 안양읍에 편입되었고, 1973년에는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87년 1월 광명시 소하동 일부를 석수2동으로 편입했으며, 1989년 5월에는 만안·동안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92년 10월 1일 각각 구로 승격되었다. 1994년 12월 만안구 안양동 일부와 동안구 호계동 일부가 군포시로, 동안구 평촌동 일부가 의왕시로 편입되고, 군포시 산본동 일부가 만안구 안양동으로 각각 편입되는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시는 예로부터 복잡한 행정구역의 개편을 겪어왔지만, 서울과 이어져 있는 지역적인 특성으로 모든 면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로는 만안구 석수동의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안양 중초사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98년 지정)가 있고, 또한 삼막사(三幕寺) 내에는 삼막사 대웅전·삼막사 마애삼존불(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삼막사 동종·삼막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삼막사 사적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삼막사 명부전(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안양 석수동 마애종(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과 망월암(望月庵) 경내의 석수동 석탑(石水洞 石塔)이 있고, 신축된 안양사 경내에 안양사 귀부(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안양사 부도재(安養寺 浮屠材)가 있다. 또 안양동의 안양역 내에는 석탑, 용화사(龍華寺) 내에는 용화사 석불입상이 있다.

분묘로는 만안구 석수동에 안양 석수동 석실분(경기도 기념물, 1991년 지정)이 있다. 요지로는 안양 비산동 도요지(경기도 기념물, 1991년 지정) 등이 있다.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는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민속자료로는 주술적 민간신앙의 대상인, 자연석으로 된 삼막사 남녀근석(경기도 민속문화재, 1983년 지정)이 있다.

동안구 비산동에는 1419년(세종 1) 대마도(對馬島) 정벌 때 삼군도통사로 활약한 유정현(柳廷顯)의 묘가 있으며, 개인 소장의 류영수양관연명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건륭59년5월3일 군호재가문서(경기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가 있다. 이외에도 신촌동에 이황 필적-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보물, 1971년 지정)이 있다. 관아 건축물로는 구 서이면사무소(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옻칠공예 생칠장(경기도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 북메우기(경기도 무형문화재, 1999년 지정)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에는 교육기관으로 과천시에 있는 과천향교를 이용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47년 지방 유지들이 기부한 25만 환을 재원으로 6년제 중학교인 사립 안양중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1949년 공립으로 변경 인가되었고, 1951년 안양중학교와 안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한편 안양시는 공업도시로, 안양 지역의 공업 발전과 생산업체와의 자매결연을 통한 산학협동체제 운영으로 과학기술교육의 표본이 되고 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1977년 안양동에 설립된 안양공업전문대학이 안양과학대학으로, 1978년 비산동에 설립된 대림공업전문대학(大林工業專門大學)이 대림과학대학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대학으로는 1948년 안양5동에 설립된 대한신학교가 대신대학교로, 다시 안양대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62년에 안양8동에 설립된 성결교신학교가 성결대학교로 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1개교, 중학교 24개교, 고등학교 21개교, 특수학교 1개교와 성결대학교·안양대학교·한국방송통신대학교 등이 있다.

1970년에 창립된 안양문화원을 중심으로 만안문화제를 비롯한 각종 문화행사가 개최되는데, 관악백일장·관악사생대회·단오제·관악음악제·향음주례행사(鄕飮酒禮行事)가 있고, 단군전봉찬회(檀君殿奉贊會)에서 주관하는 단군제가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일명 삭전(索戰)이라고 불리는 줄다리기가 유명하다. 이 놀이는 원래 보(洑)를 쌓기 위해 바(줄)를 들이대고 서로 잡아당기기 내기를 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줄에는 암줄과 수줄이 있어 이들을 서로 맞추어 비녀장(큰못)을 지른 다음 일정한 위치를 정해놓고 잡아당겨, 그 경계선을 넘으면 승부가 결정된다. 이 놀이는 농기를 앞세우고 농악으로 응원하는 가운데 진행되며, 양편의 대표가 만나 비녀봉을 질러놓고 합의 하에 북을 세 번 침으로써 시작된다.

군호는 ‘여의차’ 곧 ‘의방비’로 싸우되 의(義)로써 싸우고 한 번 당기는 것이 위대한 의가 된다는 뜻이라 한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 쪽에서는 대축승회(大祝勝會)를 열고 즐기지만, 진 쪽에서는 줄도 빼앗기고 그 해의 흉년을 떠맡게 된다. 줄다리기에 사용되었던 줄은 뒤에 보를 막는 데 사용된다.

이 놀이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서 휴식을 알리는 북이 울리면 쉬어야 한다. 때문에 만약 휴식 때 당기면 비열한 행동으로 간주되어 위법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2, 3일씩이나 승부가 안 나는 경우도 있다.

온 마을의 질병을 물리치고 풍년을 기약하기 위해 도당제를 지냈다. 젯날에는 신기·방축·내촌 3개 마을 주민이 모여 술과 떡을 장만하고, 제주인 도당(都堂)할아버지·도당할머니가 짚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징과 북을 치며, 산과 마을을 돌았다.

제를 지내던 곳은 연못가의 100여 년 된 홰나무에서였는데, 지금은 자취도 없고 매년 지내던 제도 경술국치 후 2년에 한 번씩으로 줄었다가 언제부터인지 끊기고 말았다. 비산동에는 지금도 당집이 있어 매년 10월 12일 낮 12시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이 제는 산신령에 대한 제로 주민 가운데 정결하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당주로 선정하여 음식을 장만하게 하고, 제는 지관이 지낸다. 이때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비는 축원이 올려진다.

설화·민요

이 지역의 설화에는 산이나 우물·절 등에 얽힌 전설이 많다. 온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관악산만 잠기지 않았다는 홍수전설,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에 처해 자기 표현을 하는 자연물에 얽힌 전설, 산의 혈을 끊은 전설, 그리고 어려움이 있어서 하늘에 빌었더니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수리산에 있는 수태골[受胎谷]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얽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혈육이 없는 것이 한이 되어 이 골짜기에서 백일치성을 드렸다. 과연 백일 째 되는 날부터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분만하게 되었다 한다. 그 뒤로 자식이 없어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빌게 되었고, 이 마을 이름도 수태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늘에 치성을 드려 소원을 이룬 이야기가 「찬우물전설」에도 얽혀 있다. 옛날에 매우 가난한 부부가 수리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몇 해에 걸친 심한 가뭄을 당해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이들 부부가 마지막 남은 몇 알의 곡식을 마련하여 하늘에 빌었더니 산신령이 나타나 땅을 가리키며 파보라고 하였다. 그곳을 파보았더니 물이 솟아나오고 우물이 되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여름에는 우물 주변에 얼음이 얼 정도로 물이 차다고 하여 ‘찬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구룡고개전설」은 산의 혈을 끊은 설화이다. 옛날 방축마을 뒷산이 명당으로 소문 나서 타지방 사람들까지 묘를 쓰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산의 혈을 끊어버렸는데, 그때 핏물이 솟아올랐다. 이 핏물은 용의 허리가 끊어지면서 나온 것이라 하며, 그 고개를 ‘구룡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 원효(元曉)·의상(義湘)과 윤필(尹弼)이 수도했다는 「삼막사전설」, 국가에 변란이 생길 때는 황토빛으로 변한다는 「부림박우물전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성이 서려 있는 「만안교전설」 등이 전승되고 있다.

이 고장에서 불려온 통속민요는 경기도의 다른 지역과 차이가 없다. 안양의 토속민요는 거의가 노동요인데 그 중에서도 농업노동요가 주류를 이룬다. 그 밖에 집터다질 때 「지경소리」를 불렀다. 그리고 의식요로서 장례를 치르면서 「상여소리」와 「달구질소리」를 불렀다.

이 고장을 비롯한 경기 지역에서 주로 불러온 통속민요들은 「노랫가락」·「창부타령」·「양산도」·「한강수타령」·「경복궁타령」 등이다. 「양산도」의 가사를 예로 들어보면 “……무심한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사를 산란케 한다/에라 놓아라/아니 못 놓겠네/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에헤이에……아서라 말아라 네가 그리 마라/사람의 괄시를 네 그리 마라/……세월아 봄철아 오고가지 마라/장안의 호걸이 다 늙어간다/……일락은 서산에 해떨어지고 월출동령에 달 솟아온다/……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이수중분에 능라도로다/……”와 같이 한다.

이 고장의 모심기소리로는 「에헤요」가 있으며, 논에서 김매는 소리로는 「상사소리」·「방아소리」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농업노동요들은 경기 중부지방에서 불러온 것으로서, 강화도 등의 서북부지방과 여주·양평 등과 다르다.

본래 안양의 주된 산업은 논농사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경기도의 다른 지역처럼 농업노동요를 비롯한 토속민요가 생활 속에서 흔히 불렸다. 그러나 공업시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농업공동체가 파괴되고, 토속민요의 전승은 거의 단절되어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몇몇 통속민요만 노인들 사이에서 간간이 불릴 뿐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50.5%가 임야이고 농경지가 2.9%이다. 경지 중 논 58㏊, 밭 116㏊로 밭의 비중이 높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0.3%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6.1%이다. 주요 광산물로 광석이 생산되고, 주요 제조업은 조립금속업·섬유공업·식료품공업·인쇄업·화학공업 등이다.

서울의 제3공단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1970년대부터 많은 수의 공장이 안양시로 이전되면서 이 지역은 공업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80년의 경우, 경지 면적이 21.8%이던 것이 1995년에는 경지 면적이 6.9%, 다시 2.9%로 감소한 것을 보면 농업의 쇠퇴를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하고 소비지인 서울에 인접해 있어 산지에는 많은 수의 목장이 입지하고 있어 닭·사슴·젖소 이외에 조류가 사육되고 있었다. 하지만 급속한 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대부분의 공장과 목장시설이 없어지고 모두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였다. 상업 시설은 백화점·쇼핑센터·할인점 등과 일반시장이 있어 주거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통은 국도 1호선이 시의 중심부를 서남·동북 방향으로 지나고, 국도 47호선이 시의 동남단을 동북∼서남단으로 지난다. 국도 47호선은 안산시가 공업도시로 개발되면서 서울∼안산을 잇는 4차선 고속화도로로 개방되었다. 철도는 경부선이 국도 1호선과 나란히 시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는데, 국철과 지하철로 이루어져 있다.

평촌동·박달동·비산동·석수동 등에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건설되었는데, 이들 지역의 주민을 위한 교통 시설을 위해 과천∼안양 간의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서울·과천·평촌을 거쳐 경부전철에 합류한다.

관광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안양은 시의 동북부에 관악산·삼성산 등의 관광명소와 서남부의 수리산·수암봉 등의 산지가 구릉성 사지를 이루면서 도시 발달에 좋은 입지 조건이 되었다.

수리산을 위주로 한 자연 관광자원과 문화적 관광자원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관악산·안양유원지·안양사·염불암·수리산·삼막사·얀양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등은 잘 알려진 관광명소이다.

고려 태조가 삼성산 기슭에 이 고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고을이란 글자 ‘안양(安養)’에서 지명이 안양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의 팽창으로 오염되고 과거에 유명했던 포도밭은 없어졌지만, 이 고장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관광명소는 자랑할 만하다.

석수동에 있는 중초사지의 당간지주는 드물게 명문이 새겨져 있고, 그 뒷산 바위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애종이 아름다운 자태를 선명히 드러내보이고 있다.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삼성산의 삼막사가 있으며 그 주변에 보기 드문 남근석·여근석이 있어 이곳이 민간신앙의 한 터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수리산삼림욕장은 수도권 관광객들의 휴식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안양동 병목 안 입구에서부터 안양8동 상록마을까지 약 8㎞의 산책로를 따라가면 넓은 삼림욕장이 나오는데, 이곳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만남의 광장, 한마음놀이터 등 4개의 광장과 7개소의 약수터, 명상의 숲, 덩굴터널 숲, 개나리 숲, 아카시아 숲, 쉬어가는 숲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휴식객들에게 인기 좋은 곳이다.

또한 안양유원지는 안양역에서 북동쪽으로 2㎞, 관악전철역에서 동남쪽으로 1.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미 30년 전부터 관악산과 삼성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이용해서 만든 풀장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리고 안양유원지에 이르는 길 양측에 봄이면 딸기밭, 가을에는 포도원들이 휴게실을 가설해놓고 관광객을 맞이하는 풍경은 이 지역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구(區)
  1. 동안구(東安區)

시의 동쪽에 위치한 구. 면적 21.92㎢, 인구 35만 519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달안동이다.

본래 조선 후기까지 과천군(果川郡) 상서면(上西面)·하서면(下西面)에 해당하였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흥군·안산군·과천군이 통합된 시흥군 서이면(西二面)에 속하게 되었다.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安養面)으로 개칭되었고, 다시 194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인구 급증에 따라 1973년 시로 승격된 안양시로 편입되었다. 이때 행정구역명이 동명칭으로 바뀌었는데 비산리는 비산동으로, 일동리는 관양동으로, 이동리는 평촌동으로, 호계리는 호계동이라 명명하였다.

1989년 안양7동·비산1∼2동·관양동·평촌동·호계1∼3동 등 8개 동을 관할구역으로 둔 동안(東安)출장소가 개설되었다. 1992년 비산2동을 비산2동·부흥동으로, 호계2동을 호계2동·범계동으로 각각 분동하였다. 1992년 동안출장소가 동안구로 승격되었는데, 이때 안양7동이 만안구로 편입되었다. 구의 명칭은 ‘동쪽에 위치한 안양’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뒤에도 계속 구역조정이 단행되어 1993년 관양2동을 관양2동·부림동으로, 평촌동을 평촌동·평안동으로, 범계동을 범계동·신촌동으로, 이어 1993년 부흥동을 부흥동·달안동으로, 호계1동을 호계1동·갈산동으로, 1994년 평안동을 평안동·귀인동으로 분리하여 행정동이 총 17개 동으로 구성되었다. 1994년과 1995년에는 시간(市間)·동간(洞間) 구역조정이 이루어졌다.

북단에 관악산(冠岳山, 629m) 있고, 이외의 지역은 평지에 가까워 넓은 도심지를 형성하였다. 안양천(安養川)이 구 서쪽 경계를 이루며 굽이굽이 흐르고, 중앙의 학의천(鶴儀川)이 구를 남북으로 갈라놓고 있다. 지리적으로 북단은 서울시 관악구, 동쪽은 과천시·의왕시, 남단은 군포시와 인접해 있다.

산업 현황으로 음식료품·섬유·모피·목재·펄프·고무·금속·기계장비·영상 등과 관련된 수백개의 업체가 들어서 있다. 이 지역은 평촌 신도시개발로 대단위 아파트가 분포하고 각종 편리한 도로망을 구비, 인구의 급격한 유입은 물론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어 안양의 신중심 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다.

교통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남부지역을 횡단하고, 지하철 4호선이 중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범계·벌말·인덕원 등 3개 역을 지난다. 1번 국도가 남단에서 서부를 지나 북서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47번 국도가 군포시계에서 남단을 지나 동단을 종단하면서 과천시로 연결된다. 중앙에는 342번 지방도가 동서로 지나며, 기타 도심 사이사이를 여러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특히 국도와 지방도가 만나는 동부의 인덕원사거리는 인접한 과천시·성남시·군포시 등 사방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교통량이 매우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던 관계로 서울·과천·수원을 거쳐 삼남 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 교통로였다. 문화유적은 비산동에 도요지(陶窯址)가 있다.

비산(飛山)·관양(冠陽)·평촌(坪村)·호계(虎溪) 등 4개 동이 있다.

  1. 만안구(萬安區)

시의 서쪽에 위치한 구. 면적 36.54㎢, 인구 24만 7270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안양동이다.

본래 조선 후기까지 과천군(果川郡)과 시흥군(始興郡)으로 나뉘어 있던 곳이다. 안양동 전체는 과천군 하서면(下西面)에 해당하고, 현 박달동·석수동은 시흥군 현내면(縣內面)·동면(東面)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안산군·과천군이 시흥군으로 흡수·통합되고, 서이면(西二面)·서면(西面)·동면(東面)으로 각각 분할, 소속되었다. 이후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安養面)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읍으로 승격, 1963년 현 만안구 전역이 안양읍에 편입되었고, 1973년 시로 승격된 안양시에 소속되었다. 이때 현지명인 안양동·석수동·박달동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그 뒤 시 인구가 격증함에 따라 여러 차례의 분동 과정과 시 경계간의 조정 등 행정구역 개편이 잇따랐다. 1989년 안양1∼6동·안양8동·석수1∼2동·박달동을 관할구역으로 둔 만안(萬安)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90년 석수2동을 석수2·3동으로 분동하는 구역조정에 이어 1992년 10월 만안출장소가 만안구로 승격되었다.

구명의 유래는 정조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이야기가 깃든 만안교(萬安橋)에서 따왔다고 한다. 구로 승격될 때 동안출장소의 안양7동이 편입되었으며, 1994년 안양3동을 3·9동으로, 박달동을 1·2동으로 각각 분동하였다. 이후에도 시간(市間)·동간(洞間)의 경계 변경이 있었고, 현재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북동쪽 경계에 관악산 자락과 북동부에 삼성산(三聖山, 455m), 남쪽 경계에 수리산(修理山, 475m), 남서쪽 경계에 수암봉(秀巖峰, 395m) 등 주로 북쪽과 남쪽에 준봉이 솟아 있는 형세이다. 하천으로 안양천(安養川)이 중앙부를 동서로 길게 관류하고, 그 북부로 삼막천(三幕川)·삼성천(三聖川)이, 남부에 수암천이 흐른다.

100가구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며, 거의 전지역이 도시화되어 있다. 농산물로는 안양포도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 소재하나 옛 명성에 불과하다.

또 한 가지 옛날 이곳 경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실로, 1905년에 경부선 부설로 안양역이 설치된 데 이어 1932년 안양3동 대농단지에 조선직물이 건립되었다.

이어서 조선견직·금성방직 등 굴지의 대공장들이 속속 들어서 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는 데에 디딤돌로 작용하였다. 현재는 석수1동에 장석(長石)을 캐는 광산이 유일하게 가동 중이다.

제조업체로 제약·음식료품·모피·화학·고무·금속·기계장비·영상 및 음향·자동차 업종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의 업체와 공장이 가동 중에 있다. 교통은 경부선 도가 북쪽에서 중앙을 거쳐 남동부로 종단하며 석수·관악·안양·명학 등 4개 역을 차례로 지난다.

그리고 북서부에 시흥∼안산 간의 고속도로가 달리며 남부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동서를 가로지른다. 1번 국도가 북단에서 동쪽으로 이어지고 397번 지방도가 중앙을 횡단하며, 이 밖에 여러 도로망이 촘촘히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석수동에 안양사·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만안교(萬安橋)·마애종(磨崖鐘)·안양사 귀부(安養寺 龜趺)·석실분(石室墳)이 있다. 특히 삼막사 내에는 마애삼존불·삼층석탑·사적비(事蹟碑)·남녀근석(男女根石)·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관광자원으로 북부의 삼막사 주변은 다양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곳이며, 다양한 등산 코스도 있다. 특히 비산공원(飛山公園)은 안양시의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골짜기에 접어들면 울창한 숲과 시원한 물줄기가 땀을 가시게 한다. 관광객을 위한 수영장과 각종 오락시설도 갖추었다. 이와 함께 남부의 수리산유원지도 인근 시민들의 빼놓을 수 없는 휴식처이다.

안양(安養)·석수(石水)·박달(博達) 등 3개 동이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지(京畿誌)』
『경기읍지(京畿邑誌)』
『안양시통계연보』(안양시,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경기도 역사와 문화』(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7)
『경기연감』(경인일보사, 1997)
『문화재 안내문안집』Ⅰ·Ⅱ(경기도, 1997)
『전통사찰현황』(문화체육부, 1997)
『제24회 안양통계연보』(안양시, 1997)
『안양시 지명유래집』(이승언, 새안양회, 1996)
『지명유래집』(경기도, 1987)
『한국행정제도사』(정시채, 법문사, 1986)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6·1957)
안양시(http://www.anyang.go.kr)
관련 미디어 (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