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금 ()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대장간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대장간
과학기술
개념
광석에서 금속을 추출 · 정련하여 사용목적에 적합한 필요한 형상으로 만드는 공정.
정의
광석에서 금속을 추출 · 정련하여 사용목적에 적합한 필요한 형상으로 만드는 공정.
개설

좁은 의미로는 금속을 광석에서 추출, 정련하는 기술을 뜻한다. 야금의 한자(漢字) 풀이를 하면, 야(冶)는 금속을 녹여서 주형(거푸집)에 부어 주물(쇠붙이를 녹여 주조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고, 금(金)은 일반 금속이라는 뜻이다. 야금기술은 고대 청동기시대에 이미 발전되었으나 중세기까지는 경험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 연금술(鍊金術)이라는 명목으로 전승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야금이 학문적인 체계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며 최근까지도 연금술적인 신비가 남아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분야의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진보되었는데 이것은 근년에 야금이 경험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고 과학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응용하기 시작한 결과이다.

이러한 야금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야금학 또는 금속공학이라 하고, 야금을 주체로 하는 공업을 금속공업이라고 한다. 금속공업은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 분야에 기초소재(基礎素材)를 공급하는 산업으로서 국민경제의 자립기반의 확립과 방위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자체의 발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부문으로 우리 나라의 중요한 산업 가운데 하나이다.

야금 기술의 분류

야금을 분류하면 광석으로부터 금속을 추출하여 정련하는 금속제련, 제련에 의하여 얻어진 금속으로부터 각종 목적에 적합한 성질을 구비한 금속과 합금을 만드는 금속재료, 나아가서는 그 금속을 가공, 성형하는 금속가공의 세 분야로 크게 나누어진다.

야금은 금속의 화학적 성질을 이용하여 광석으로부터 유용 금속을 화학반응에 의하여 추출, 제련하는 화학야금, 금속(합금)의 물리적 성질을 주로 다루는 물리야금으로 분류한다. 그 밖에 대상으로 하는 금속의 종류에 따라 철강을 대상으로 할 때는 철야금, 비철금속을 대상으로 할 때는 비철야금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화학야금 분야를 금속제련이라고도 한다. 제련은 연료의 연소나 전열(電熱)에 의하여 광석을 가열하고 환원반응에 의하여 금속을 채취하는 건식제련(건식야금)과 산 또는 알칼리 등의 수용액으로 광석 중의 금속성분을 추출하는 습식제련(습식야금)으로 크게 나눈다. 이들 가운데 전열과 전해(電解)를 이용하는 것을 특별히 전기야금이라고도 한다.

최근 전자공업의 진보로 고순도의 금속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서 제련에 의하여 얻어진 금속을 다시 정제하는 대상용융법(帶狀溶融法), 이차정련법 등의 신기술도 등장하고 있다. 금속재료는 금속에 다른 종류의 원소를 녹여 넣어 합금을 만들거나 각종 처리에 의하여 금속의 성질을 개선해서 사용목적에 적합하게 실용적인 금속재료를 만드는 분야를 말한다.

사용목적에 따라 구조용재료·공구강재료·내식내열재료·전자기재료·원자로용재료 등으로 분류된다. 용도에 따라 매우 많은 종류의 합금이 개발되었으며, 공업의 진보와 더불어 금속재료의 사용조건이 날로 엄격해져서 새로운 금속재료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금속가공은 금속을 필요한 형태로 가공, 성형하는 분야로 물리야금의 주요 부문이다.

금속가공에는 금속을 녹여 필요한 형태로 주입, 성형하는 주조, 금속을 압연(회전하는 압연기를 롤 속에 금속을 넣어 막대 또는 판자 모양으로 만드는 일)·단조(금속을 가열하여 두드려서 필요한 형체로 만듦)·압출·인발 등의 조업에 의하여 변형시키는 소성가공, 금속을 국부적으로 녹여서 접착시키는 용접, 금속표면에 다른 종류의 금속원소를 피복하거나 화학처리하여 금속표면의 성질을 개량하는 표면처리, 한 종류 또는 여러 종류의 금속분말을 가압, 성형하여 소결(燒結)하는 분말야금(粉末冶金) 등이 있다.

특히, 금속가공 분야에서 물리적 조작, 기계적 작업 등을 포함하는 분야를 제조야금이라고 할 때가 있다. 물론 이러한 공정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장치 및 시험법 등도 포함한다.

고대의 야금

야금술은 고대 청동기시대에 이미 발전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0세기경 청동기문화를 지닌 무늬없는토기인[無文土器人]이 나타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뒤 기원전 3, 4세기 무렵에 중국 전국시대에 나타난 철기문화와 스키타이계통의 청동기문화가 요동지방에서 합류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금속문화가 전해져 발전하였다.

기원전 108년에 한반도 서북지역에 한(漢)나라에 의해 낙랑군의 설치로 한대의 금속문화가 낙랑에 직접 이식되어 우수한 공예기술이 우리 나라 전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서는 주형에 의한 금속주조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기원전 3세기경까지는 사암제주형(砂巖製鑄型)을 써서 청동검(靑銅劍)과 동경(銅鏡) 등을 주조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현재까지 여러 개 발견된 사암제주형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경의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므로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기원전 1세기경까지에는 납형(蠟型)에 의한 주조기술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고, 1967년 7월 대전시 근교에서 출토된 몇 개의 칼자루형[劍把型] 청동기구에 새겨진 줄무늬[線文]는 이 사실을 잘 말하여 주는 예가 된다.

한편, 낙동강 하류지방에는 새로운 김해문화(金海文化)가 토착하였고 이 문화는 철의 생산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이 시기, 즉 기원전 1∼서기 3세기에는 철의 제련과 철기의 제조가 이미 우리 나라 전역에서 실시되고 있었으며 사철(砂鐵)을 원료로 하여 철이 만들어졌다.

3세기 말에 나온 ≪삼국지≫ 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에 의하면 한반도에서는 금·은을 귀히 여기고 철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진한에서는 철을 사용하여 주위의 여러 부족과 일본에도 공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채광·야금·주철의 기술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4세기경부터 금·은·구리·철의 채굴, 제련 및 세공기술이 점차 발전하였으며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이 시기의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금속장식품, 특히 금관을 비롯한 금제귀걸이 등의 금속공예품들의 훌륭하고 황홀한 제작솜씨에서 야금기술이 고도로 발전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면서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금·동 불상의 주조기술이 발전하여 나갔다. 최근에 와서 코발트60의 방사선을 이용하여 고대의 불상과 종 등을 연구한 결과로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사이의 금속공예기술을 밝히게 되었으며, 금속공예품의 내부구조와 주조기술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시대(6세기)에 주조된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19호)은 머리(頭部) 중앙과 동체(銅體)에 공간이 있으나 불순물이나 기포(氣泡) 같은 것은 없는 훌륭한 주조품임이 밝혀졌다.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소불상들은 대개 머리와 몸체 내부에 내형(內型)을 지지하기 위하여 구멍 몇 군데가 메워진 흔적이 있고 철로 만든 큰 쇠못[鐵釘]이 들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미륵보살반가상(彌勒菩薩半跏像, 국보 제78호)은 신라시대(7, 8세기)에 주조된 높이 80㎝의 중형 불상인데, 머리 부분과 몸체를 따로 주조한 다음 연결, 용접하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방법을 썼으며 내부는 철심(鐵心)과 못으로 내형을 지지하고 주조하였다.

6세기에 일본에 건너가서 불상 주조기술을 지도한 백제의 주사(鑄師)에 의하여 전해져 계승된 납형은 밀랍(蜜蠟)에 송진을 녹여 섞은 것으로 원형을 만들고 주입구(注入口)나 밀[蠟] 유출구를 붙인 다음 거기에 주형흙[鑄型土]을 고운가루[細粉末]로 하여 점토흙물[粘土汁]을 섞어 칠하고 볕에 말려서 구운 뒤 밀을 벗기면서 홍색으로 구워내어 그 주형의 공간에 용동(鎔銅)을 부어 주조하는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만든 청동제 불상에는 흔히 표면에 금을 도금하였다. 도금하는 방법은 금의 얇은 판 조각을 수은과 화합시켜 금 아말감을 만들고 이것을 매실로 만든 매초(梅醋) 등의 산(酸)으로 깨끗하게 닦은 동제품의 표면에 바르고 나서 350℃ 정도의 온도로 가열하여 수은을 증발시킨 뒤 헝겊 같은 것으로 잘 닦아서 빛을 내는 것이었다.

8세기에는 범종(梵鐘)을 주조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현존하는 것은 봉덕사대종(奉德寺大鐘, 일명 성덕왕신종이라 함. 높이 333㎝, 지름 227㎝)은 771년(혜공왕 7)에 황동(黃銅) 12만 근 이상을 써서 주성한 것이며, 오대산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은 높이 167㎝, 지름 91㎝로 놋쇠[鍮] 3,300냥(兩)을 써서 725년(성덕왕 24)에 주조한 것이다.

이 두 대종은 신라 주종기술(鑄鐘技術)을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걸작으로 남아 있으며, 금속공예에 있어 야금기술이 신라 때에 고도로 발달되었다. 고대의 야금업의 제도를 살펴보면 지배계급의 생활필수품의 제조와 무기제조를 위하여 야금업은 중앙관서에서 맡는 관부수공업(官府手工業)으로 발달되었고, 전쟁의 포로들이 노예신분으로 전락하여 노동생산력으로 충당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관부수공업 제도의 전모를 알아볼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 중에서도 가장 정복성이 강한 나라로서 그 무기를 제조하는 야금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중국 ≪수서 隋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 무기가 중국의 것과 거의 같다고 하였다. 특히, 그 고분에서 발견되는 동검(銅劍)·창·마구(馬具) 등은 고구려 야금공업의 발달을 잘 반영하여주고 있다.

백제의 경우 중앙관서에 무기제조장을 관리하는 도부(刀部)와 금속공예품의 제조장을 관리하는 사공부(司空部) 등이 설치되었다. 신라에서는 각종 무기 및 금속기구의 제조를 관리하는 철유전(鐵鍮典)이 설치되었다. 신라의 관부수공업조직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발전하였고 그것은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문화를 발달시킨 기초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금속공예 부문이 크게 발전하여 무기제조 분야도 눈부신 발전을 보았다. 삼국시대의 관부수공업에 종사하는 기술공들은 대부분이 노예의 신분으로서 관부수공업장에 예속된 기술공 등이며 전쟁포로 및 피정복민 등이었다.

고려의 야금

고려의 금속공예에 있어 야금기술은 신라의 기술을 계승하고 중국의 송나라와 원나라의 기술적 영향을 받아 뚜렷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대동종(大銅鐘)·동경(銅鏡) 및 향로(香爐) 등은 우수한 금속공예품들이었다.

신라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1010년(현종 1)의 천흥사 동종(天興寺銅鐘, 높이 1.7m)은 고려 범종의 대표작이며, 신라의 양식과 중국의 양식을 절충한 특이한 형식의 균형미 있는 조계사 동종(曹溪寺銅鐘, 높이 154㎝, 지름 89㎝)은 고려 초기 주조기술의 발전과정을 말하는 대표적 유물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078년(문종 32)에는 흥왕사 금탑(興王寺金塔)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은 427근과 금 144근을 써서 주성되었고, 1223년(고종 10)에는 금 200근으로 십삼층탑(十三層塔)과 화병 등을 만들어 흥복사(興福寺)에 두었다고 한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는 훌륭한 동제향로(銅製香爐)를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1177년(명종 7)에 주성한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表忠寺)의 청동은입사향로(靑銅銀入絲香爐, 높이 27.5㎝, 지름 26.1㎝, 국보 제75호)와 1178년에 제작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사(法隆寺)에 수장된 우리 나라 금산사 향로 등은 그 간결하고 균형 있는 모양과 은사입(銀絲入)의 우아한 모양으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1214년(고종 1)에 만들어진 건봉사(乾鳳寺)에 있던 동제은상감향로(銅製銀象嵌香爐, 높이와 지름 각 30㎝)와 고려 말기인 1344년에 만든 봉은사(奉恩寺) 소장 청동루은향로(靑銅縷銀香爐, 높이 33.9㎝, 지름 31.8㎝), 1346년에 만든 동제은입사향완(銅製銀入絲香琓, 이병직 소장, 높이 28.8㎝) 등은 금속향로의 대표작들로서 그 주조기술은 매우 훌륭하였다.

고려는 주전(鑄錢:돈)을 주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으며, 996년(성종 15)에 철전(鐵錢)을 주조한 주화(鑄貨)가 사용되었다. 1097년(숙종 2)에 주전관을 설치하여 돈을 만들었으며, 1101년에는 중량 1근의 은으로 우리 나라의 지형(반도)을 상징하는 병을 주조하여 은병(銀甁)이라는 주화를 통용하였다.

또, 다음해인 1102년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고 1104년까지 3년 동안 해동통보 외에 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의 유문전(有文錢)의 주전을 주조했다. 더욱이 고려는 나무활자[木活字]나 자기활자[陶活字]로 만들어 쓰던 활자를 세계 최초로 금속으로 주조해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야금기술이 발전되었다.

1234년(고종 21)에 ≪고금상정예문 古今詳定禮文≫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하지 않고,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우왕 3)에 청주 흥덕사(興德寺)주자소(鑄字所)에서 찍은 ≪직지심경 直指心經≫(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인데 유럽의 활자 발명의 해로 보는 1450년보다 216년을 앞서고 있다.

그 뒤 활자인쇄는 더욱 발전하여 1392년(공양왕 4)에는 금속활자와 인쇄를 맡아보는 서적원이라는 관아까지 생겼다. 활자의 재료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으나 연대상으로 가장 가까운 근세 태종 때 예를 보아 청동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화포(火砲)도 주조하였는데 1377년에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신무기와 화약을 만들었으며, 1380년(우왕 6)에 최무선(崔戊宣)이 화포를 발명하여 이 화포의 위력으로 진포(津浦:금강 입구)에 들어온 왜선 500척을 전파하였다.

고려시대의 동합금의 성분을 보면 고려 동경의 분석 결과, 구리·주석 및 납의 평균비가 75:15:10 이었던 것으로 이것은 청동검의 경우와 비슷하며, 중국 동경을 분석한 70:20:10에 비하면 중국의 그것보다 주석의 함량이 적다. 동합금의 성분으로 아연이나 납은 독성 때문에 식기류를 만드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식기와 제기(祭器)에는 구리와 주석만으로 된 동합금(75:25 또는 80:20)을 만들어 썼다.

고려시대에는 중앙관서에 선공시(繕工寺:토목·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곳)를 설치하여 목공·석공·금석공 등을 소속시키고, 무기의 제조를 관리하기 위한 군기시(軍器寺)를 설치하고, 금은 세공품의 제조를 관리하는 장야서(掌冶署)에는 은장(銀匠)·백동장(白銅匠)·금박장(金箔匠)·생철장(生鐵匠) 등의 전문적인 금속기술자가 소속되었다.

고려시대 때 중앙관서의 야금공업에 종사하는 기술공의 신분은 삼국시대의 노예 조건에서 다소 벗어나 일정한 노동급여를 받고 있었으며 특수한 기술을 가진 기술공은 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의 거듭되는 전란과 금속광의 채굴, 야금의 행정적 정책의 빈곤 등이 금속기술의 부진 요인이 되어 서서히 야금기술이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야금

조선은 초기부터 금·은 등 귀금속의 채굴에 힘을 기울였다. 1398년(태조 7)에 군인 80명을 동원하여 단천에서 금을 채굴하였고, 태종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힘을 기울여 경상도 안동 북면에 광부 300명을 동원하여 수개월 동안 은을 채굴하였고, 황해도에서도 채은해 보았다.

1401년(태종 1)에는 경상도에서, 1406년에는 김해·청도 등지에서 군인을 동원하여 채은하였으나, 단천에서는 불과 금 4전(錢)을, 안동에서는 불과 3전을 1401년 경상도에서는 1전을, 김해·청도에서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정도였다.

태종은 1407년에 은을 채굴하는 것을 중지시켰는데, 그 이유를 ≪태종실록≫에는 채은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태종은 명나라에 금·은의 면공을 간청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채광에 힘을 쓰도록 하였다.

1411년에는 2차로 그 사업에 착수하여 수안·단천·안변 등지에서 은을 채광하게 하고, 1412년에는 백은(白銀)·납·금·은 등을 채광, 제련하게 하였다. 1417년에는 각 도 관찰사에게 은광과 철광 산지를 샅샅이 방문하여 금광·은광의 채굴과 제련을 독려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어 1421년(세종 3)에는 현상을 걸고 금광의 발견을 장려하기까지 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구리의 수요량이 더욱 격증하였는데 그것은 1422년에 동활자를 개주(改鑄:고치어 다시 주조함.)하고 세종 초부터 화포의 대량주조와 주전(鑄錢)사업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정철(正鐵)·석철(石鐵)·사철(砂鐵)·수철(水鐵)·동광(銅鑛)·연광(鉛鑛)의 산지는 강원도와 황해도를 비롯하여 전국 내 54개 소가 있었고, 세공(歲貢)을 상납하는 철장(鐵場)은 울산의 세공 1만2500근을 비롯하여 안동·합천·용궁(龍宮)·산음(山陰)·무주·영덕·무안·고산(高山) 등 17개 소라 하였다.

이들 철장, 즉 제련소에서는 농한기에 광석을 제련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큰 곤란의 대상이 되었던 중국에 대한 금·은의 사대세공은 1430년에 드디어 면제를 받게 되었다. 이런 결과는 광업개발의 소극화정책을 낳게 하고 조선의 금속공업은 단지 귀금속의 제련가공기술뿐만 아니라 다른 금속의 야금기술마저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동전화폐의 기본 재료로서, 또한 무기의 소재로서 구리의 수요량이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구리의 자급자족을 이룰 수 없었다. 예를 들면 1424년에 당시 1개월의 구리 소모량이 4,050근이고 1년 동안에는 4만 8600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보유한 구리의 양은 1개월 구리의 소모량보다도 적은 불과 4,011근 뿐이었다.

성종대까지의 약 반세기 동안 조공대상물인 금·은의 채굴은 거의 정지되고 구리만의 채굴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한 부진성은 제철 부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금·은의 사대세공의 과중함을 피할 목적으로 소극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농업 노동력의 유휴기간을 틈타 농민들을 부역으로 동원해 광물을 채굴, 제련하려고 하였고, 항구적 계획을 수립한 광업의 정책적인 육성을 고려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즉흥적으로 개발하였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광산물을 개발하는 것을 금지시켜 결국 광업은 전기까지 많은 발전적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퇴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1503년(연산군 9)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 함께 연철(鉛鐵)에서 은을 분리하는 새로운 야금법을 발명함으로써 광업은 침체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광업개발의 소극화정책이 완화되어 은광개발은 마침내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단천연광(端川鉛鑛)과 영흥연광(永興鉛鑛)이 제련을 시작하였고, 그 결과 연광 2근에서 단천연 10분은(分銀) 4전(錢)을, 영흥연에서는 10분은 2전을 채취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민간인이 단천은광을 채굴, 제련하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관에 납세로서 바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발전적 기운이 중종대에 이르러 정책적인 변화와 무계획으로 진퇴를 반복하여 부진을 면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일본보다 뒤떨어져 1542년(중종 37)에는 일본으로부터 1만5000냥을 수입하는 위치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은의 수출국으로부터 수입국으로 퇴보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선조대에 왜란으로 인하여 소모된 국비를 충당하기 위해 은과 구리를 제련하게 하면서 다시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의주 사람이 배운 중국의 제련법을 도입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일관성 없는 광업정책은 선조 말부터 다시 반전을 거듭하면서 또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후 은광산의 민영을 다시 하게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는 주화정책을 다시 시작하여 주화재료로서의 동의 수요가 증가되어 호조로 하여금 파주·교하(交河)·춘천·공주 등에 은산 채굴장인 은점(銀店)을 허가하여 채광을 허용하게 하고 처음으로 은점에서 세금을 걷었다.

그러나 숙종대에 다시 동의 부족현상에 봉착하여 1674년에 주화가 금지되고, 광업은 다시 금지 내지 소극화 과정에 빠지게 되어 구리 등의 금속을 제대로 제련하지 못하고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 충당하다가 1751년(영조 27)에 비로소 수안과 영월에서 완전한 채굴·제련을 시작하였고, 그 뒤 보은·안변에서도 생산하였으나 기술부족으로 중지하고 다시 일본에서 구리를 수입하였다.

조선시대의 금의 제련법은 사금을 도가니 속에 넣고 구리를 녹이듯 사금을 녹이는데, 뚜껑을 꼭 닫아서 재[灰]가 들어가지 않게 밀폐한다. 금이 완전히 용융된 후 방망이로 도가니를 가볍게 두드리면 금은 얇은 조각으로 굳어지게 된다. 황토에 소금을 섞어 금조각을 싸서 다시 불에 구우면 불순물이 제거된 순도 높은 정련된 겸자금(鎌子金)이 된다.

이것을 불려서 잎사귀 모양으로 된 엽자금으로 만드는 법은 모래를 깔고 금조각을 놓고, 모래를 한 겹 깔고 금 한 조각을 놓고, 이렇게 몇 겹을 철사로 잘 묶어 불에 달구면 금이 차차로 엷어지면서 빛이 붉어진다. 이와 같은 금의 제련법은 사금을 제련하는 방법이므로 기술적으로 별로 어려움이 없고 아마도 이 방법은 오래 전 삼국시대부터 전승된 전통적인 제련법이라 생각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금의 진품(眞品)이 3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최상품은 십품금(十品金)이고, 중품이 엽자금이며, 최하품을 괴금(塊金)이라고 하였다. 엽자금이란 나뭇잎처럼 조각으로 된 금이며, 십품금이란 적색이 나는 순금을 말한다.

은의 제련법은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에 사는 김감불과 김검동이 납광석을 사용하여 제련, 분리하는 방법을 발명하였는데 이러한 은의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 정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생은(生銀)을 채굴하여 노를 파고 그 밑에 작은 도랑을 파서 뜨거운 재를 쌓고 먼저 납조각[鉛片]을 놓고 그 위에 생은을 펴놓은 다음에 사방을 돌아가면서 소나무를 덮고 불을 붙인다. 그러면 납이 먼저 녹고 생은이 차차 녹아, 녹은 용융물이 끓어오르고 표면 중간에 은이 모인다.

재 속으로 들어간 연재(鉛滓)를 노에서 다시 녹이면 재는 없어지고 납만 남는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조선 특유의 방법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제련법과 다른 점이 많으나 역시 일종의 회취법(灰吹法)이다.

조선시대의 구리제련 방법은 다음과 같다. 4변으로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그 안에 작은 담을 쌓고 담 위에 온돌 같은 구들돌을 깔고 그 위에 재를 펴고 그 위를 진흙으로 바른다.

이 구들은 중간이 조금 깊고 4변을 높게 하며 그 높은 한쪽에 구멍을 하나 뚫어놓는다. 그리고 목탄을 구들 위에 쌓고 풍구를 밟아서 5∼6시간 송풍을 계속하여 화열이 고조될 무렵에 동광석을 탄 위에 부으면 용련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다 녹아 구들 위로 흘러내리면 용동 위에 뜬 광재는 구들 한쪽에 뚫린 구멍으로 흘러 구들 밑으로 내려간다. 그 다음에 물을 뿌려 식힌 뒤에 구리를 꺼낸다. 납의 제련법도 이와 같다. 이 방법은 건식제동법인데 동광석은 제련이 쉽게 되는 자연동이나 산화동광석을 써서 제동하는 방법으로 생각된다.

조선 말기 순조 때에 갑산동광(甲山銅鑛)에 있어 동제련 기술은 다음과 같다. 동광석을 원형의 배소(광석을 녹는 점 이하에서 열을 가하여 그 화학적 조성을 변화시키는 야금상의 준비조작) 가마(솥)에서 배소를 하고 이 배소된 광석을 목탄과 같이 지상(地床) 노에 장입하고 용련하여 동피(銅鈹)를 만든다. 이것을 다른 지상 노에 옮겨서 나무와 목탄을 태워 다시 용해하여 제동공정을 거쳐 동을 만든다.

이 방법은 황화동광에서 동을 제련하는 진취법(眞吹法)과 유사한 방법이다. 다음에 동합금의 제조기술을 알아보면, 놋쇠는 구리에 주석을 넣어 합금으로 만드는데 놋쇠 1근을 만들려면 주석 4냥에 구리 1근을 넣어 합금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 방법이 우리 나라의 유기제조업자들이 최근까지 쓰던 것으로 구리와 주석을 4:1의 비율로 섞는 것은 전통적으로 지켜왔다.

이규경(李圭景)의 기록에 의하면 동합금의 제조법은 적동(赤銅) 6근마다 아연 4근을 서로 잘 섞어서 오지 항아리에 넣고 녹인 뒤에 완전히 냉각하여 굳어졌을 때 꺼내면 가장 좋은 황동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때 아연광[爐甘石]을 쓰는 경우에는 동 1근과 아연광 1근을 같은 방법으로 제련하면 황동 1.5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아연광으로 만든 황동은 그것이 적열(赤熱)되어 있는 동안에 망치질을 하고 아연을 섞을 경우에는 노에서 꺼내 식은 뒤에 망치질을 한다고 하였다. 망치질을 하고 나면 황동의 색깔이 희게 되고 맑은 금속성 소리도 나지 않으나 이것을 줄로 갈고 닦아서 광을 내면 황동색이 되고 소리도 맑아진다는 것이다. 또한 청동, 즉 구리와 주석을 섞어 녹인 것을 찬물로 식히면 질이 아주 견고해진다고 설명하였다.

1438년에 세종이 경상감사에게 백동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더니 경상도에서는 창원에서 나는 구리와 울산에서 나는 백철(白鐵), 즉 니켈을 섞어 백동덩어리를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이규경에 의하면 백동의 성질이 강해서 망치를 두들겨 가공하기 곤란하면 백석(白錫), 즉 아연을 넣으면 물러진다고 하였다. 백동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원형의 담을 한 길 이상 쌓고 그 안에 노를 설치한다. 노에 비석(砒石)을 놓고 그 위에 구리를 놓는다. 그런 후 담 밖에 설치한 풀무를 밟아서 송풍해 가열하면 그것들은 녹아 백동이 되고 항아리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후 냉각되기를 기다려 백동을 꺼낸다.

원형으로 담을 쌓는 까닭은 비소의 독한 증기가 사람에게 쐬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해서 만든 백동을 재차 정련해서 품질을 향상시켰다. 이 때에는 백동을 완전히 녹도록 하지 않고 약간 응고하기 시작할 정도로 녹았을 때 꺼내며, 정련할 때마다 비상가루를 넣어주면 빛이 더욱 희어진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전국의 기술노동력에 대한 동원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의 모든 기술공은 서울에 있는 경공장(京工匠)과 외지에 있는 외공장(外工匠)으로 나누어 등록시키고 중앙과 지방에 관부수 공업체제를 유지하였다.

중앙관서 가운데 공조·선공감(繕工監)·군기시 등의 30개 관서에서 경공장 2,800여 명, 외공장 8도에서 3,700여 명이 등록하였다. 경공장의 경우 군기감의 공장이 전체의 23%이고, 외공장의 경우 제련에 종사하는 야장(冶匠)이 전 외공장의 32%를 차지하며 많은 수가 주로 군기와 농구를 제작하는 데 동원되었다.

조선시대의 공장들은 대부분 관노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차차 양인 신분의 공장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관노 신분인 기술공이나 양인 신분의 기술공을 막론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 작업에 동원되었고 이 기간 동안 정해진 급여를 받았으며 동원되지 않을 때에는 모두 자기 경영에 종사하였다.

근대의 야금

근대화된 제련업의 시초는 1917년에 준공을 본 진남포의 건식제련소이다. 종래 아말감법이나 청화법으로 처리하기 곤란했던 합금황화광과 납, 구리 광석을 처리하게 되면서 우리 나라 최초로 대규모의 조동과 조연(粗鉛)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대까지 건식제련소는 원산·흥남·신의주·해주·장항 등지에도 속속 증설하여 전국에 6개 소를 헤아리게 되었으며 건식제련소에 의한 금 생산량이 7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제련소의 대부분은 비철금속광산의 분포가 북한에 편재하게 되었고 남한에는 오직 장항제련소만이 있었다. 한편 금·은의 습식제련법인 아말감법과 청화법으로 금·은을 제련한 저명한 광산으로는 홍천광산·황보광산·삼성광산·구성광산·구봉광산 등이 있었다.

현대의 야금

광복 이후 남한의 비철금속공업은 1960년대 초까지는 1936년 장항제련소에서 금·은·동 제련 시설을 갖춘 것 이외에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1962년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수행과 더불어 급속하게 성장을 이룩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중 장항제련소에는 용광로 2기로 월간 450t의 동 생산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1964년에는 장항제련소에는 납제련 공장이, 1966년에는 동신화학주식회사의 아연공장이 각각 준공되었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중에는 1969년 대한알루미늄주식회사의 제련시설과 1970년 영풍상사주식회사의 아연제련공장이 준공되었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는 중화학공업 부문의 중점적 육성계획의 수행으로 1978년 고려아연주식회사가 연산 5만t의 아연제련공장과 1979년 자용로에 의한 연산 8만t의 온산동제련소(溫山銅製鍊所)가 준공됨으로써 4대 비철금속 중 동 및 아연의 국내 수요를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신규 가공공장들도 온산비철금속단지 내에 유치하여 제련에서 가공에 이르는 일관 생산체제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우리 나라는 중석(重石)자원 보유국으로서 1974년까지는 정광(精鑛:선광작업으로 잡성분이 제거되고 유용 성분의 함유율이 높아진 광물)의 형태로 중석을 수출하여왔으나 1974년에는 대한중석주식회사에서 금속텅스텐 분말의 연간 500t 생산공장이 준공되었으며 또한 생산능력이 연간 360t이나 되는 탄화텅스텐 분말의 생산시설도 갖추었다.

그 후 1980년대 후반기부터 국내의 비철금속의 수요 증가와 국제적 경쟁력 확보를 위하여 설비확충과 조업효율 향상 등을 도모하여 온산동제련소에서는 1986년 10만t, 1988년 15만t의 동을 생산하였으며, 더욱이 1997년 10월 비쓰비시 연속제련로를 건립하여 1998년 전기동 37만t, 금 70t, 은 144t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2개의 아연제련소가 가동중에 있다. 영풍의 석포제련소는 1970년 연간 1만t으로 가동을 시작하다 현재 연간 10만t의 생산능력을 갖추었다. 고려아연은 1974년 5만t으로 가동을 시작하여 1998년 아연 35만t을 생산하였으며, 1992년 납연속직접제련공법을 도입하여 현재 16만t의 납을 생산하고 1985년부터 주석 연산 1,200t을 생산하였다. 1994년에는 아연정광을 배소하지 않고 황산에 직접 침출하는 새로운 공법을 개발, 채택하였다. 고려아연에서는 아연, 납 이외에 금 30t, 은 380t, 가드뮴 1,000t, 비스머스 110t을 생산하고 있다.

알루미늄 제련은 1969년 한국알루미늄에서 연산 1만7500t 생산설비를 갖추고 생산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의 알루미늄 제련 생산단가의 반 이상이 전기료로서 국제경쟁력을 상실하여 1990년 생산을 중단하였고, 알루미늄 인고트를 수입하여 가공제품의 제조로 전향하여 1993년 현재 무게 28.5t의 주조설비와 연산 15만t의 열간 및 냉간 압연설비를 도입하였다.

니켈의 제련은 1989년 6월 코리아니켈이 연산 1만 6500t 규모의 유틸리티니켈공장을 가동하게 되었으며, 1999년 3만2000t의 유틸리티니켈 생산설비를 별도의 제2공장으로 세웠다. 한편, 우리 나라의 철강공업은 1918년 겸이포제철소를 신설하여 최초로 선철과 강철을 생산하였으나 근대적인 철강공업발전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참고문헌

『한국광업지』(윤성순, 대한중석광업사, 1952)
『근세한국산업사연구』(고승제, 대동문화사, 1959)
『한국문화사신론』(중앙문화연구院 편, 1975)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9)
『대한금속학회회보』 11-3(대한금속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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