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권28 제주목 풍속조에 그 기록이 나타난다.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김녕(金寧) 등지에서는 목간(木竿) 12개를 세워서 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내고 애월(涯月)에 사는 이들은 떼[槎]모양을 말머리[馬頭]처럼 만들어서 비단으로 곱게 꾸미고 약마희를 하여서 신을 즐겁게 하였다. 보름날에 끝을 맺는데 이를 연등(燃燈)이라 한다. 이 달에는 승선(乘船)을 금하였다.” 는 기록으로 보아 약마희는 연등행사놀이의 한가지임을 알 수 있고, 연등은 오늘날의 영등굿임이 확실하므로 약마희는 옛날 영등굿에서 행하여졌던 놀이임이 분명하여진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등굿에는 약마희라 생각될 수 있는 놀이가 사라져버려서 그 놀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놀이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여 ‘말뛰기 놀음’ 또는 ‘말뛰기 놀이’라 하고, 사람이 말로 분장하여 뛰어 노는 모습의 놀이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사연구의 결과 이 놀이는 그러한 놀이가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약마희라는 표기는 한문식 표기가 아니라 이두식 표기로서 현대 표준어 ‘떼몰이놀이’와 비슷한 말의 표기로 풀이된다.
‘약(躍)’이나 ‘마(馬)’나 모두 훈(訓)을 취한 표기로서 ‘약’의 중세어 훈은 ‘ᄠᅱ’, 현행 제주방언 모두 ‘튀’, 표준어는 ‘뛰’이며, ‘마’의 훈은 중세어·제주방언 모두 ‘ᄆᆞᆯ’이다. ‘약’의 ‘ᄠᅱ, 튀’는 ‘사(槎)’의 훈인 중세어 ‘ᄠᅦ’, 현대 제주방언 ‘테’와 비슷하고, ‘마’의 ‘ᄆᆞᆯ’은 ‘몰다[驅]’의 제주방언 ‘ᄆᆞᆯ다’의 어간 표기로 보인다.
이러한 데서 약마희는 ‘떼몰이놀이’와 비슷한 당시 언어의 이두표기로서 떼를 노저어 몰아가는 경주로 추정하게 된다. 영등굿에서 떼를 노를 저어 몰아가는 경주는 약 40∼50년 전까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 행해졌는데, 그 모습은 다음과 같다.
영등굿이 끝나서 영등신을 치송하는 ‘배방송’을 할 때, 지금은 나무나 짚으로 자그마한 배를 하나 만들고 거기에 제상의 제물을 조금씩 실은 뒤, 어선에 실어서 바다 멀리 나아가 동쪽으로 떠가도록 띄워 보낸다.
그런데 예전에는 어선이 뗏목밖에 없어서 뗏목을 가지고 있는 집에서는 짚으로 작은 배, 즉 모조선을 만들고 굿이 끝난 뒤 가호별로 그 배를 띄워보냄으로써 신을 치송하였다. 뗏목을 가지고 있는 각 가호의 청장년들은 굿이 끝날 무렵이 되면 자기집에서 제단에 올렸던 제물을 조금씩 이 모조선에 실어놓는다.
그래서 이 모조선을 들고 선창으로 가서 뗏목 위에 실어 모신다. 마을의 뗏목들은 선창에 일렬로 서고 주민들은 노를 잡아 출발할 준비를 갖추고 대기한다. 이때 수심방[首巫]이 선창의 방파제에 나와 송신하는 사설을 노래하고, “강남 천ᄌᆞ국으로 배 놓아 가자!”는 소리를 외치면 주인들은 일제히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간다. 모두가 먼저 선창을 빠져나가 앞을 달리려고 온힘을 내므로 뗏목들이 서로 부딪치며 법석을 떨게 된다.
맨 먼저 노를 저어 나간 뗏목이 모조선을 띄워 동쪽으로 떠갈 만큼의 위치에 이르면 수심방은 징을 세 번 쳐 울리고 기를 치켜든다. 그러면 뗏목들은 일제히 정지하고 모조선을 띄워보내는데, 이 때 1등을 차지한 배는 성의를 다하여 영등신을 치송한 셈이 되므로 풍어를 얻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배의 주인은 ‘장원하였다.’고 하여 돌아와 고기와 술을 내어 잔치를 베풀고 마을사람과 즐겼다. 이 뗏목경주는 약마희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것이 변화된 최근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약마희 기록에는 “뗏목을 말머리와 같이 만들어 비단으로 꾸민다.”고 되어 있는데 이 요소가 사라졌다.
중국 남부지방, 동남아시아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파룡선(爬龍船) 행사로 미루어보아 본래 용마(龍馬)의 모습으로 뗏목을 꾸며서 경주하던 것이 변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약마희는 영등굿에서 행한, 풍어와 연점(年占)의 성격이 있는 우리나라의 경조민속(競漕民俗), 곧 ‘떼몰이놀이’였음이 거의 확실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