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양건식(楊建植). 그의 전기적 사실은 분명치 않으나 현존하는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그는 『조선문단』을 통해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광복 전 ‘단층(斷層)’ 동인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단층』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발행된 종합문예지로 동인 11명 중 8명이 소설가인 점을 볼 때 소설 중심의 문예지였다고 할 수 있다. 6·25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37년 동인지 『단층』에 김조규(金朝奎)·김환민(金煥民)과 함께 시인으로 참여했던 그는 「계절판도(季節版圖)」(1937.4·9)와 「황혼의 심상(心像)」(1938.3.)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을 포함한 그의 초기시에는 당시 단층파가 지향했던 지식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표방하는 심리주의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작품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밖에 월북 전의 주요 작품으로 「대동강(大洞江)」(조선문단, 1935.4.)·「창」(조선문단, 1935.5.)·「구두」(조선문단, 1935.7.)·「강변」(조선문학, 1937.6.)·「백하(白河)」(조광, 1940.2.)·「피리」(시건설, 1940.6.)·「마음의 고향」(개벽, 1948.1.)·「가난을 깔고먹고」(신천지, 1949.10.) 등이 있다.
특히 1949년 『조선문학전집(시집)』(林學洙)에 발표된 「나라간 나의 딸」·「교향(交響)」·「체온」 등의 시에는 각박하고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평론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시예술(詩藝術)의 한계성(限界性): 이에 대한 편론수제(片論數題)」(조선중앙일보, 1935.11.22.∼27.)·「시(詩)와 사상(思想)」(조선중앙일보, 1936.2.11.∼16.)·「시(詩)와 비평문제(批評問題)」(시학, 1939.5.)·「소설가에게 주는 글」(대조, 1947.11.)·「시인(詩人)의 위치(位置)-참회(懺悔)를 전제(前提)치 말라」(구국, 1948.1.)·「시단월평 詩壇月評」(개벽, 1948.3.5.)·「우주(宇宙)를 대한 시인(詩人)의 판세」(신천지, 1950.4.) 등이 그것이다.
월북 후의 작품으로는 「그날이여 어서 오라」(1957)·「불덩이」(1959)·「백마강반에서」(1960)·「공산주의 붉은 노을」(1961)·「만물상」(1962)·「불씨」(1965)·「혁명의 대오」(1967) 등의 시가 있다, 또한 「시인의 위치와 개성화」(1965)·「평가가 좀더 정확했으면」(1965) 등 몇 편의 평론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