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숙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호남의군부에서 도총독으로 활동한 의병장.
이칭
윤숙(允淑)
춘계(春溪)
이칭
양인영(楊寅泳), 양춘영(楊春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고종 12)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출생지
전라북도 순창
정의
대한제국기 때, 호남의군부에서 도총독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별명은 양인영(楊寅泳)·양춘영(楊春泳). 자는 윤숙(允淑). 호는 춘계(春溪). 양석민(楊錫民)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이 전국에 구국 의거(救國義擧)를 호소하며 호남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이끌고 정읍, 내장을 거쳐 순창에 이르자, 채영찬(蔡永贊)·김갑술(金甲述) 등과 함께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임병찬의 의병진이 순창에서 무너지고 의병장들이 대마도에 억류되자,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회문산(回文山)을 근거지로 하여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장(通狀)과 격문을 발송, 동지 120명을 규합하고 호남의군부(湖南義軍府)의 도총독이 되었다.

좌선봉 최화(崔華), 우선봉 임순호(林洵豪), 중군 최산흥(崔山興), 후군 이국찬(李國贊),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으로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8월 의병들을 총칼로 무장시켜 서기협으로 하여금 의병 22명을 이끌고 순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 120명과 교전하게 하였다. 또한 최산흥으로 하여금 의병 40명을 이끌고 남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 뒤 이국찬에게 12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순창군 서면에서 일본군을 교란시키게 하였으며, 한자선에게는 3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순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 해 11월에는 최산흥에게 50∼60명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임실군의 일본군 막사를 불태워 버렸다.

1909년 1월 일본 헌병대·일본군 수비기마대·일경 주재소 등을 한밤중에 습격, 방화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12월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그 해 4월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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