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양평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양평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중부 동단에 위치한 군.
정의
경기도 중부 동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강원도 횡성군과 원주시, 서쪽은 북한강을 건너 남양주시, 남쪽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광주시, 북쪽은 가평군·강원도 홍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8′∼127°51′, 북위 37°21′∼37°40′에 위치한다. 면적은 877.80㎢이고, 인구는 10만 831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1개 면, 265개 행정리(11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에 있다.

자연환경

장락산맥의 지맥이 남쪽으로 지나 군의 중심부에는 1,000m 이상의 높은 산지가 군 전체를 지배하고 산지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북부는 산지가 많고 한강이 흐르는 서남부와 서부 지역은 낮은 평야 지대가 나타나 있다.

동쪽에는 성지봉(聖地峰, 791m), 북쪽에는 화야산(禾也山, 755m)·통방산(通方山, 652)·소리산(小理山, 479m)·갈기산(葛基山, 685m), 남쪽에는 양자산(楊子山, 710m)·파사산(婆娑山, 231m)·우두산(牛頭山, 460m)·당산(塘山, 541m) 등이 있다.

하천은 북한강이 서쪽에서 남서류하고 남한강은 남서 지역을 북서류하여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한강의 본류로 흐른다. 북한강은 지류로 수입천(水入川)·문호천(汶湖川)이 있고 남한강 지류는 흑천(黑川)이 있다.

흑천 유역에는 좁은 곡저 평야가 나타나고 한강 유역에는 평지가 대상(帶狀)으로 나타나고 양수리 부근에는 범람원이 발달하고 있다.

내륙에 위치하고 하천의 기화열로 한서의 차가 크다. 연평균 기온은 10.9°C, 1월 평균기온 -6.2°C, 8월 평균기온 26°C이며, 연 강수량은 1,239㎜이다.

역사

양평읍 회현리, 강상면 병산리, 양동면 단석리, 용문면 삼성리 등지에서 긁개찍개·사냥돌 등이 출토되어 한강변을 중심으로 하여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용문면 광탄리에서 빗살무늬토기와 석부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강상면 병산리·대석리, 강하면 전수리, 양서면 대심리, 서종면 수릉리, 개운면 앙덕리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개군면 상자포리, 강하면 전수리·양수리에서 민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의 이 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나 475년(장수왕 65)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양근현(楊根縣)이 되었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의 정예군단이 한강 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략하여 그 세력이 지금의 충주·양평·여주·포천의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에 미쳤을 때에는 신라의 지배권 내에 들어갔다.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는 빈양현(濱陽縣)으로 개명되어 기천군(沂川郡: 지금의 여주시)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궁예가 이 지방을 공략하여 그들의 활동무대로 삼기도 하였다. 지평군은 고구려시대에는 지현현(砥峴縣)으로 불리다가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 지평현(砥平縣)으로 개칭되어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

940년(태조 23) 옛 지명이 회복되어 양근현으로 되었다. 1018년(현종 9) 잠시 광주목(廣州牧) 영내에 소속되었다가 1175년(명종 5) 양근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7년(고종 44) 영화(永化)로 개칭되었으며 고종 연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몽골병 침입 때에는 지금의 철원·춘천·충주와 함께 몽골병에 유린되는 참화를 겪었다.

1269년(원종 10) 익화현(益和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권신 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부자의 반란사건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이므로 승격된 것이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양근군으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보우대사(普愚大師)와의 인연에 따른 은전이었다. 공민왕은 또 보우대사가 우거한 미원(迷原)고을을 현으로 승격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얼마 뒤 다시 익화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지평현은 1018년 양근과 함께 광주 임내에 속하였다. 우왕이 즉위한 뒤 그의 유모 장씨의 고향이라 하여 따로 감무가 두어졌다가 1388년(우왕 14) 혁파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채철장(採鐵場)이 설치되어 철장감(鐵場監)을 겸무하도록 하였다.

양근군은 조선시대에도 별 다른 개혁 없이 그대로 존치되었으나, 지평현은 1413년(태종 13) 전례에 의해 현감이 두어졌다가 숙종 연간에 잠시 양근군에 합쳐진 뒤 곧 분리되어 현감이 배치되었다. 1594년(선조 27) 지평현에 운계서원(雲谿書院)이 건립되어 1714년(숙종 40) 사액되었다.

1895년 양근군과 지평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이 병합되어 양평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종면을 광주군으로 이속하였다. 1938년 갈산면을 양평면으로 고쳤다. 1942년 군행정구역변경 때 설악면이 가평군으로 이속되었다.

1860년대 근세유림의 중망을 받던 이항로(李恒老)가 위정척사의 학문적 이론을 이룬 곳이 서종면 노문리 벽계이다. 이항로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사상은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문인(門人)에 의해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의병항쟁으로 승화되었다.

을미의병운동의 효시를 이룬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와 평민출신 의병장 김백선(金百先)이 모두 이 지방 지평면 출신이다. 임진강연합 의병전선의 용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기미독립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박동완(朴東完)도 이 고장 출신이다.

3·1운동 때는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200명, 청운면에서 150명, 3월 23일 양근면에서 1,000명, 3월 30일 양평읍 도곡리에서 130명, 용문면에서 2,000명, 4월 3일 양근리에서 4,000명, 4월 4일 양동면에서 3,000명 등 1만 30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6·25전쟁 때인 1951년 2월 지평면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2월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내었는데, 이 전투로 유엔군은 한국전 참전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하여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여주군 개군면이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서종면 삼회리와 노문리 일부가 가평군 외서면과 설악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4월 6일에는 양서면 국수출장소가 설치되었다. 2006년 12월 1일 지제면이 지평면으로 개칭되었다.

유물·유적

선사 유적으로는 서종면 문호리, 양서면 양수리, 용문면 조현리, 개군면 앙덕리·상자포리 등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산성으로는 옥천면 용천리에는 함씨(咸氏)의 시조인 함씨대왕이 탄생했다는 바위굴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되었다고 전하는 양평군 함왕성지(경기도 기념물, 1990년 지정)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용문면 신점리의 용문사(龍門寺) 경내에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보물, 1971년 지정)와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 옥천면 용천리의 사나사(舍那寺) 경내에는 사나사 원증국사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가 있다.

그 밖에 양평 용천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사나사 묘법연화경, 용문면 연수리 상원사의 철조여래좌상(경기도 문화재자료, 2003년 지정) 및 돌사자와 팔각석탑, 그리고 옥천면 옥천리 약수암·옥천리 오층석탑, 개군면 상자포리에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 지평면 지평리에 양평 지평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옥천면 옥천리에 양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지평면 지평리에 지평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를 비롯하여 서종면 노문리에 노산사지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 용문면 덕촌리에 운계서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지평면 수곡리에 수곡서원 등이 있다.

청운면 갈운리에 이춘명 효자정려문, 지평면 송현리에 최흥악 효자정려문·최병배 정려문, 용문면 삼성리에 창녕조씨 열녀정려문 등이 있다.

고건축물로는 서종면 노문리에 이항로선생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 용문면 오촌리에 김병호 고가(경기도 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 양평읍에 양평 창대리 고가(경기도 민속문화재,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단월면 보룡리에 보산정(寶山亭), 용문면 광탄리에 봉황정(鳳凰亭)·택승정(澤升亭), 덕촌리에 세심정(洗心亭) 등 유서깊은 정자가 있다.

능묘 및 신도비로는 용문면 화전리에는 효종의 셋째 딸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묘가, 청운면 비룡리에는 조선 중종 때 어느 왕자와 약혼했던 정씨소녀의 묘인 애기능 등이 있다. 이밖에 강하면 동오리에 유관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1년 지정), 양서면 목왕리에 한음 이덕형선생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가 있다.

또한 부용리에 이준경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와 정창손 묘역 석물(경기도 문화재자료, 1994년 지정), 개군면 공세리에 이순몽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86년 지정), 옥천면에 양평 신복리 강맹경 묘역(경기도 기념물, 1994년 지정), 양서면 목왕리에 익원공 김사형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등이 있다.

용문면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었다는 설도 있고,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살아서 자랐다는 설도 있는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인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가 있다.

또한 양서면 양수리의 두물머리 느티나무와 징동리의 느티나무, 서종면 정배리의 은행나무, 용문면 화전리의 은행나무, 양평읍 창대리의 은행나무, 강상면 신화리의 은행나무 등의 노거수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양평 상여·회다지소리(무형문화재, 1998년 지정)가 있다.

양평은 6·25전쟁의 격전지로서 제6사단이 1개 사단 병력으로 중공군 3개 사단을 2주간 격전 끝에 분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9년에 세운 용문산지구 전적비가 있다.

또한 미군·프랑스군 각 1개 대대와 미 제23연대 전투단이 아군의 5배가 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1951년 2월 14∼15일)을 격퇴한 지평면 지평리전투 전적비, 지평전투에서 산화한 미제23연대 전투단 장병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지평리 참전비, 양평읍 양근리 갈산공원의 충혼탑·반공지사충혼비, 청운면 용두리의 충혼각 등 기념물이 있다.

교육·문화

최초로 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이 언제인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중종 때 지금의 옥천면 옥천리에 양근향교가 건립되었고, 1773년(영조 49) 지금의 지평면 지평리에 지평향교가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 용문면 덕촌리에는 명종 때의 학자인 조욱을 추모하기 위해 그 제자들이 후대에 건립한 운계서원(雲鷄書院)이, 지평면 수곡리에는 수곡서원이 조선 후기에 건립되어 많은 유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조선 말기의 대성리학자이며 민족교육가인 이항로는 서종면 벽계마을 생가에서 충의민족정신(忠義民族精神)과 위정척사정신(衛正斥邪精神)을 문인들에게 가르쳐 항일의병투사를 배출해내기도 하였다.

신교육기관으로는 용문초등학교의 전신인 광탄보통학교가 1906년 설립된 데에 이어 1911년 양평보통학교가 개교되면서 군 일대에 고루 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양평종합고등학교의 전신인 농업실습학교가 1940년 양근리에서 개교하였고, 1953년 갈산공원 옆으로 이전하였으며, 1967년 그 자리에 다시 양평여자종합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대학으로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이 1983년 옥천면 아신리에 설립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8개교, 특수학교 1개교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가 있다.

이 밖에 한국산업진흥연수원이 1974년 대심리에 설립되어 교육문화 발전과 수련·교양기능을 고양시키고 있다. 또 1983년 한국방송공사에서 설립한 남한강종합수련원이 언론·문화·예술계통 종사자의 연수교육 및 수련을 실시하고 있다.

1983년에 개원한 양평문화원에서는 백운문화제를 비롯하여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향토문화와 사적 등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여 전통문화 계승과 지역사회교육에 공헌하고 있다.

민속

절기에 따라 여러 가지 세시풍속이 행해지는데, 특기할 만한 놀이는 호미씻이·별신놀이·투계·투우놀이가 있다.

호미씻이는 가을에 농부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환담가무를 즐기고 농악을 연주하기도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전년 호미씻이 이후로 이사를 왔거나 결혼식·장례식 등을 치른 사람은 특히 많은 음식을 내놓는다.

마을 공동기금이 없을 때는 공동으로 갹출하여 마련하며, 인근 농악단을 초청하여 어린아이[舞童]를 어깨 위에 두세 명씩 올려놓고 춤추는 삼층무·사층무를 추면 흥은 극에 달한다.

별신놀이는 시장의 장꾼들이 시장의 번영을 위해 무당과 배우를 불러 사람을 불러모아 춤과 노래를 즐기는 것이다. 또 투우는 정월에, 투계는 봄에 개최되는데 각자가 소유한 소와 닭을 서로 싸우게 하여 이기는 쪽이 상을 받는 놀이이다.

동제로는 강하면 성덕리의 산제사와 개군면 내리의 산신제가 있다. 양자산 골짜기에 있는 성덕리에는 악기(惡氣)를 막고 귀신을 쫓는다는 400여 년 된 가시나무가 있고 그 옆에 국수당이 있다. 국수당은 인근 세 마을의 중심격인 당으로 안에는 4∼5㎝ 크기의 쇠로 만든 말이 수십 개 진열되어 있다.

이는 옛날 이곳에 있던 솥점에서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쇠말을 만들어 산에 치성을 드렸던 때문이다. 산제사는 성덕리에 속한 4개 마을이 2년에 한 번씩 공동으로 지내는데, 음력 2월 초에서 15일 안에 거행되고 택일은 2월 초하룻날 4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한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효자·효부설화, 아기장수설화, 역사적 인물 전설, 자연물관련 전설 등이 전한다.

옥천면 옥천리에는 며느리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난한 허씨댁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애쓴 사연이 전한다. 항상 끼니거리를 걱정할 만큼 가난한 집에서 며느리가 방아를 찧어주고 쌀을 얻어 아침밥을 해드리려고 일을 나가다가 개의 변으로 나온 보리쌀을 보고 우선 가져다가 씻어 밥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벼락을 치고 비가 쏟아지므로 며느리가 죄책감으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는데 오히려 벼락 서슬에 그 언저리가 모두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부자가 된 허씨네는 그 일대를 모두 사들여 들판을 허문앞이라 부르게 되었고, 사람들이 돈을 거두어 며느리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한다.

강하면 동오리에는 장사복이라는 한 무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 무관은 서울에서 말단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천기를 볼 줄 알아 어느 날 본가에 도둑이 드는 것을 알았다. 축지법을 써서 본가에 도착한 장사복은 소외양간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도둑을 향해 화살을 날려 죽여버렸다.

분이 안 풀린 그는 돌아가는 길에 도둑의 시신을 끌고 가 한강물에 던져버렸다. 그 도둑은 장씨집안의 충직한 머슴으로 해산한 아내에게 끓여줄 미역과 식량이 떨어져 주인 몰래 얼마간의 쌀을 가져다 아내에게 해산 뒷바라지를 하려던 참이었다. 너무나 가혹한 장사복의 처사에 하늘이 노했음인지 차츰 가세가 기울어 후손마저 사방으로 흩어져 망했다고 한다.

원퉁이의 지명유래담은 시주온 중에게 야박하게 굴다가 집안이 망한 내력이다. 김씨네집에 중이 동냥을 오자 주인이 일을 하지 않고 얻어먹는다며 바가지를 깨뜨려버렸다. 중은 절로 돌아가 풍수에 대한 공부를 하여 김씨네가 원퉁이 골짜기에 산소를 잘 써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다시 김씨에게 온 중은 산소를 이장하여야 더욱 번성한다고 일러주었더니, 곧 바위를 깨고 이장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깨어진 바위에서는 피가 솟았고 파헤쳐진 산소에서는 학이 날았다. 그 뒤로 집안은 점차 기울었고 당시의 일이 원통하다 하여 골짜기를 원퉁이라 하였다.

그 밖에 이괄(李适)에 대한 전설로, 아버지의 시신을 거꾸로 놓지 않고 바로 놓았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와, 죽은 이괄의 묘를 열두 군데나 만들어 나라에서 시신을 못 찾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옥천면은 형세가 불을 자주 일으킬 지형이어서 연못을 파서 지세를 가라앉혔는데 그 못이 영화담으로 남아 있다는 전설과 옥천읍의 채씨댁에서 아기장수가 났는데 다듬잇돌을 얹어 죽였다는 「아기장수전설」 등이 전한다.

이 군의 민요 중에 기능요로는 상제의식(喪祭儀式)의 절차에 따르는 「상여소리」·「달구질소리」가 있고, 「모내기소리」·「논매기소리」와 밭을 갈 때의 「소몰이소리」 등 농업노동요와 뗏목꾼들이 불렀다는 「뱃노래」 등이 있다.

「소몰이소리」 같은 밭갈이소리가 다른 지방에 비해 많은 것은 산간지방의 특색이 잘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다는 화전민들의 「숫자풀이노래」도 있는데 이 역시 산간지방 특색의 반영이다.

밭갈 때의 「소몰이소리」는 다음과 같다. “와냐 와냐(왼쪽으로 가라)/ 마라 마라(오른쪽으로 가라) 호호/ 이려(앞으로 계속 가라) 마라 마/ 와냐 와냐 마라/ 도보 신어라 호호(걸어가는 소리)/ 이려 마라 마냐(들어서거라)/ 이려 마라 마…….”

이 소리는 민요의 신호로서의 기능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곡의 길이는 무제한 길어질 수 있고, 상황에 따라 갈아넘기는 흙모양과 소의 진로방향, 소의 걸음걸이 정도를 맞추기 위해 즉흥적인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또한 「논매기소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어럴리 상사디야// 농부소리를 지어보세/ 어럴리 상사디야// 상사디소리 두세마디/ 어럴리 상사디야……저기가는 저할머니/ 어럴리 상사디야// 딸이나있거든 사위나삼아요/ 어럴리 상사디야// 딸은하나 있것마는/ 어럴리 상사디야// 나이어려서 못삼겠네/ 어럴리 상사디야// 여보할머니 그말씀말아요/ 어럴리 상사디야/ /고추가작아도 맵기만해요/ 어럴리 상사디야// 참새가작아도 알만나요/ 어럴리 상사디야…….”

이 밖에 부요(婦謠)인 「시집살이노래」가 많이 불리고 있고, 「매화타령」·「범벅타령」·「장타령」·「도라지타령」·「담바구타령」 등 타령도 많이 불리고 있다.

산업·교통

임야가 전체 토지의 73.0%를 차지하고 경지는 14.5%에 불과하다. 하천은 4.0%, 도로는 2.0%이다. 경지 중 논은 6,995㏊, 밭은 5,783㏊이며, 이들 농경지에는 대평저수지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저수지가 관개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농작물은 쌀 이외에 콩·감자 등이 생산되고 채소류로 고추·배추·무·상추·오이·호박,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땅콩, 과실류로는 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임야가 많아서 밤·잣·도토리·대추·은행, 그리고 표고버섯 등이 생산되며, 축산업도 소·돼지를 비롯하여 활발하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27.7%이고 제조업 인구는 0.6%이다. 주요 광산물은 규석이 생산되고 있다. 주요 제조업은 비금속공업·조립금속공업·식료품공업·종이인쇄공업이 있다.

상업시설로 양평장이 3·8일, 용두장이 2·7일, 지제장이 1·6일, 용문장이 5·10일 등 5일장이 있다. 서울·양평·홍천간의 4차선 도로의 확장, 양평대교의 건설 등으로 서울 인구의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북한강과 남한강변은 전원주택단지가 늘어나고 있다. 이 밖에 여관·음식점·콘도·골프장 등이 늘어나고 있어 상업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구도 증가하고 있으나 양평읍 이외에는 상설시장이 개설되지 못하고 있다.

도로는 양평읍에서 K자형으로 발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도로는 국도 6호선이 남한강을 따라 동진하다가 양평읍에서 다시 동북진하다가 정운면에서 동진한다. 국도 37호선은 여주시에서 남한강을 따라 양평읍에 이르고 양평읍에서 북진하고 있다. 국도 44호선이 정운면에서 동북진하고 있다. 철도는 중앙선이 양수리에서 국도 6호선과 나란히 남한강을 따라 동남진하고 있다.

관광

대부분은 산악지대로 이루어졌으며 중앙 북부에는 용문산이 솟아 있고 강 남부에는 양백산이 솟아 평지가 적은 고장으로 산악관광지가 발달되어 있다. 군의 시내 중앙을 중앙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어 이곳 관광지 이용에 편리하며 강원도 홍천군·횡성군 방면과 서울로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관광명승지로서는 산악경관과 계곡의 수려함이 대표적이며, 곳곳에 청소년야영장이 있어 대학생들의 M·T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특히 용수골·옥천 동막계곡·용문산·용문사은행나무 등은 유명한 관광명승지이다.

용문산은 경기도 내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며, 산세가 가파른 바위산이므로 더욱 웅장해 보이고 계곡의 경관이 빼어나 피서관광지로 유명하다. 용문산 입구에서 용문사로 오르는 오솔길에 들어서면 큼직큼직한 바위돌로 이어지는 계곡은 짙은 관목 숲으로 우거져 4계절 햇빛이 가려져 있고 바위 사이로 내리는 물은 한 여름이 아니고는 발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산 중턱에는 용문사가 있는데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지은 고찰로 알려졌으나 옛날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절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그 내력을 대변해주는 듯싶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특히 동양에서는 제일 큰 나무로 알려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옥천 동막계곡은 양평군 옥천면에서 유명산으로 연결되는 계곡을 말하는데 이곳에 양평프라자리조텔이 들어서면서 관광지로서의 그 진가가 더욱 높아진 곳이다. 특히 동막계곡 주변에는 천여 개의 방대한 숙박시설과 주차장, 수영장과 놀이시설 등이 갖추어져 가족 나들이나 그룹 드라이브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특히 하얀 물안개로 덮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신비로움을 안겨주는 팔당호수와 남한강 줄기를 따라 강변으로 달리는 드라이브 코스는 사계절을 두고 그 경관이 빼어난 지역으로 1박2일 관광코스로 가장 좋은 곳이다. 이 외에도 노산(蘆山) 8경·정배(鼎排) 8경 등의 아름다운 곳이 있다.

읍·면
  1. 양평읍(楊平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42.22㎢, 인구 3만 19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양근리이다.

본래 양근군(楊根郡) 지역으로 양근읍내가 되므로 읍내면이라 하여 오빈·상평·하평 등 1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에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종면(東終面) 전체와 고읍면(古邑面) 사탄리(沙灘里) 등 일부가 통합되어 12개 리로 재편되면서 갈산면(葛山面)이라 하였다. 1938년에 양평면으로 개칭되었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에 백운봉(白雲峯, 940m), 북동쪽에 삿갓봉(474m)이 면 전체를 굽어본다. 면 남쪽의 흑천(黑川)을 필두로 도곡천·양근천·덕평천이 면 전체를 차례로 관류하는 등 지리상의 요처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군청이 소재한 군의 중심지역인 까닭에 가구수는 물론 거주 인구수도 군 전체에서 제1위를 점한다. 농업현황으로 논농사 비율이 밭농사보다 약간 높은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 등이며, 채소의 재배와 한우·돼지·닭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석회제조·피혁 등의 업종을 중심으로 한 업체가 많으나, 대부분 영세한 중소기업체들이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면 남단의 남한강변을 따라 양평·원덕역을 지난다. 읍의 중심지인 양근리는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인데, 6번 국도가 서울과 강릉을 연결하면서 면의 남단을 횡단하고, 37번 국도가 읍을 종단하면서 여주와 가평을 잇는다. 그밖에 6번 군도가 면 남부지방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맡는다. 문화유적은 창대리에 고가, 양근리에 선사유적이 있다.

양근(楊根)·오빈(梧濱)·신애(新愛)·덕평(德坪)·공흥(公興)·백안(白安)·도곡(道谷)·대흥(大興)·봉성(鳳城)·원덕(元德)·회현(會賢)·창대(倉垈) 등 12개 리가 있다.

  1. 강상면(江上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7.92㎢, 인구 8,13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교평리이다.

본래 양근군 지역으로 양평읍내의 남쪽 첫머리가 되므로 남시면이라 하여 황곡·작개 등 1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여주군 금사면(金沙面) 전북리(箭北里)·용담리(龍潭里) 일부가 통합되면서, 7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북서쪽에 백병산(百屛山, 424m), 남서쪽에 양자산(楊子山, 710m)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 있으며, 남한강이 동북쪽의 면계를 이룬다. 면내에는 세월천(洗月川)·용담천(龍潭川) 등이 남한강으로 흘러들며, 이들 하천 유역과 남한강 유역에 평지가 형성되어 경지와 취락으로 이용된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약간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 이외에 임산물로 밤·약재 재배도 활발하다. 특히, 약재의 생산량이 군 전체에서 제일 많다. 축산업으로 한우와 젖소의 사육이 행해진다. 제조업 발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통은 교평리에 위치한 양평대교를 통해 양평읍과 연결되며, 329번 지방도가 남한강변을 따라 면의 동부지역을 종단하고, 308번 지방도가 면의 북부를 횡단하면서 강하면으로 이어진다. 남한강변 주변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갖춘 휴양시설이 즐비하다. 양자산 구사곡의 암벽 사이에서 솟아나는 구사곡 약수는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교평(交坪)·대석(大石)·병산(屛山)·송학(松鶴)·세월(洗月)·신화(新花)·화양(花陽) 등 7개 리가 있다.

  1. 강하면(江下面)

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41.41㎢, 인구 4,39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심리이다.

본래 양근군 지역으로 양근읍내의 남쪽 중앙이 되므로 남중면(南中面)이라 하여 전의·수대 등 1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주군(廣州郡) 퇴촌면(退村面) 영동리(嶺東里)가 합쳐져 6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남동쪽 강상면과 경계지점에 솟아 있는 양자산의 여맥이 면 중앙쪽으로 뻗어 있고, 산지 사이를 흐르는 영동천·성덕천·항금천 등이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유역과 북쪽 면계를 따라 흐르는 남한강유역에 경작지와 취락이 발달해 있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약간 우세하고,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잡곡 등이다. 특히, 버섯 재배가 활발하여 생산량이 군에서 제1위이다.

교통은 308번 지방도가 남한강을 경계로 면의 북부지역을 횡단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동오리에 유관선생 묘가 있다.

운심(雲沁)·왕창(旺倉)·동오(東梧)·항금(恒今)·성덕(聖德)·전수(全壽) 등 6개 리가 있다.

  1. 개군면(介軍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43㎢, 인구 4,87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하자포리이다.

본래 여주군(驪州郡) 지역으로 개군산의 이름을 따서 개군산이라 하여 상자포·하자포·구미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개군산면(介軍山面)의 17개 리가 13개 리로 재편성되었고 개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면의 북동쪽에 주읍산(注邑山, 583m), 남쪽에 파사산(婆娑山, 231m) 등의 산세가 면내로 뻗어 점차 서남부로 낮아지면서 남한강변에 이른다. 남한강이 서부 면계를 따라 흐르고, 북부 면계를 관류하는 흑천을 비롯하여 신내천·향리천 등 작은 하천들이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군 전체에서 제일 협소한 면적을 갖고 있다. 경지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며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 등이며, 특용작물로 잎담배와 인삼 등이 재배된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닭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가 산재하고, 특히 한우 사육두수가 군 전체에서 제일 많다. 또한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의 생산량이 두드러져 농가의 주 소득원으로 자리 잡았다.

교통은 37번 국도가 면의 남쪽에서 중앙을 지나 북서쪽으로 종단하면서 여주시와 가평군을 연결한다. 이외에 4번 군도가 면 남쪽을 횡단하면서 37번 국도와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앙덕리와 상자포리에 고인돌, 공세리에 이순몽장군묘가 있다.

하자포(下紫浦)·구미(九尾)·앙덕(仰德)·석장(石墻)·공세(貢稅)·불곡(佛谷)·부(釜)·자연(自煙)·내(內)·향(香)·주읍(注邑)·계전(癸田)·상자포(上紫浦) 등 13개 리가 있다.

  1. 단월면(丹月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8.04㎢, 인구 3,62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보룡리이다. 본래 지평군(砥平郡) 지역으로 지평읍내의 북쪽 아래가 되므로 북하면이라 하여 상가·하가 등 3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성재·여물이 청운면에 이속되었고 단월면이라 하여 영평군에 편입되어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북쪽에는 소리산(小理山, 479m), 북서쪽에는 봉미산(鳳尾山, 856m), 서쪽 중앙에 싸리재(812m) 등의 연봉들이 면 전체를 둘러싼 산지 지형에 가깝다.

남부에 흑천이 흘러 그 유역에 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덕수천·대왕천·부안천·산음천 등 크고 작은 하천들이 면 전체를 휘돌아 흐른다. 면의 면적이 양동면 다음으로 넓으나, 산지가 많은 까닭에 인구밀도는 가장 낮다. 전체 면적 중 임야율이 9할에 가까운 반면 경지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두류·잡곡 등이며, 산간지대에서는 약초와 산나물의 채취도 활발하다. 특히, 산나물 재배는 군 전체 생산량의 거의 대부분을 점유할 정도로 활발하다. 또한, 가축은 한우·젖소·사슴 등의 사육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사슴 사육량은 군에서 제일 많다.

교통은 328번 지방도가 남단의 6번 국도와 합쳐져 중앙을 지나면서 면의 북서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 밖에 4번 군도가 향소리에서 328번 지방도와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보룡리에 보산정, 향소리에 양헌수(梁憲洙)의 묘비가 있다.

보룡(寶龍)·삼가(三加)·봉상(鳳上)·향소(杏蘇)·덕수(德水)·부안(富安)·명성(明星)·석산(石山)·산음(山陰) 등 9개 리가 있다.

  1. 서종면(西宗面)

군의 서북면에 위치한 면. 면적 92.70㎢, 인구 8,36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문호리이다.

본래 양근군 지역으로 양근읍내의 서쪽 끝이 되므로 서종면이라 하여 서차남·후곡 등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서면 석장리(石墻里)의 일부, 설악면(雪嶽面) 음방리(陰方里) 일부, 고읍면(古邑面) 양현리(兩峴里)의 일부가 합쳐져 9개 리로 개편되었으며, 1973년 삼회리가 가평군 외서면에, 그리고 노문리 일부인 영천·이치마을이 가평군 설악면에 각각 이속되었다.

면의 북쪽에 화야산(禾也山, 755m), 동쪽에 중미산(仲美山, 834m)·통방산(通方山, 650m), 남쪽에 청계산(淸溪山, 658m) 등이 솟아 있고, 그 연맥이 면내로 뻗어 중앙의 매곡산(梅谷山, 501m)·기봉(462m)·가마봉(487m) 등으로 연결되어 면 전체가 산지에 가깝다.

서쪽은 북한강이 면계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의 문호천(汶湖川)을 비롯하여 서후천(西厚川)·사기막천(沙器暮川) 등이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북한강과 문호천 유역에 형성된 평지가 경작지와 취락으로 이용된다. 전체 면적 중 임야의 비율이 4/5가 넘고 논농사와 밭농사의 비율은 비슷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잡곡 등이며, 그밖에 잣·밤·대추·도토리·버섯 등의 생산량이 특히 많다. 또한, 산양·사슴의 사육과 양봉도 활발한 편이다.

교통은 청평과 양수리를 연결하는 363번 지방도가 북한강변을 따라 쭉 이어진다. 면 소재지인 문호리에서 옥천면으로 이어지는 2번 군도가 중앙을 횡단하면서 1·10번 군도와 연결되어 남북의 교통편의를 도모한다.

문화유적은 문호리에 고인돌, 노문리에 이항로(李恒老)선생 생가·노산사지(盧山祠址)가 있다. 또한, 수입리에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묘가 있다. 그 밖의 명승지로는 노문리에 벽계구곡·노산 8경 등이 있으며, 정배리에는 정배 8경이 펼쳐져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문호(汶湖)·도장(道壯)·수릉(水陵)·서후(西厚)·정배(鼎排)·명달(明達)·노문(蘆門)·수입(水入) 등 8개 리가 있다.

  1. 양동면(楊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0.29㎢, 인구 4,57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쌍학리이다.

본래 지평군(砥平郡) 지역으로 지평읍내의 동쪽 위가 되므로 상동면이라 하여 장대·거단·송석 등 3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북면(上北面) 하고송리(下高松里),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地正面) 판대리(判垈里)의 일부가 합쳐져 8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0년 면 소재지가 석곡리에서 쌍학리로 이전하였다.

면의 북쪽 청운면과의 경계에 비룡산(飛龍山, 527m), 북동쪽 중앙에 금왕산(金旺山, 488m), 북서쪽에 수리봉(402m), 남쪽에 일당산(壹堂山, 453m) 등 곳곳에 연봉이 둘러싸고 있다. 산지 사이 사이에는 주석천·계정천·매월천·석곡천 등이 동서남북을 관류하면서, 그 연안에 좁고 길게 펼쳐진 평지가 주민들의 생활터전이다. 전체면적 대비 논의 면적이 밭의 면적보다 약간 넓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잡곡 등이며, 도토리의 생산량도 많다. 가축으로는 한우·젖소·돼지·닭·토끼 등의 사육이 활발한데, 특히 돼지·토끼 사육두수는 군 전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매곡·양동역을 지나며, 396번 지방도가 원주시와 청운면을 연결하면서 면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가운데 남쪽 중앙에서 328번 지방도와 합류한다. 이 외에 지방도와 연결되는 6·11·15번 군도가 면의 교통편의를 돕는다. 문화유적은 쌍학리에 이식(李植) 묘와 택풍당(澤風堂)·효열각이 있다.

쌍학(雙鶴)·석곡(石谷)·매월(梅月)·고송(高松)·계정(桂亭)·삼산(三山)·단석(丹石)·금왕(金旺) 등 8개 리가 있다.

  1. 양서면(楊西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9.59㎢, 인구 1만 192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담리이다.

본래 양근군 지역으로 양근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서시면(西始面)이라 하여 동편·고현·식곡 등 1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서시면(西始面)·서중면(西中面) 전체와 고읍면(古邑面) 기곡리(基谷里)의 일부가 합쳐져 11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북쪽 경계에 청계산(淸溪山, 658m), 중서부에 부용산(芙蓉山, 366m)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내로 향한다. 지리적으로 한강의 양 줄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데 북한강이 서쪽 면계를, 남한강이 남쪽 면계를 따라 흐른다.

면의 전체면적 중 임야가 많으나 남한강과 그 지류 일대에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와 취락으로 이용된다. 경지면적 중에 밭농사보다 논농사의 비율이 약간 높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두류 등이며, 가축은 젖소·사슴의 사육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발달하지 못하나,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수점인 양수리를 중심으로 관광산업이 성황중이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남한강변을 따라 양수·신원·국수역을 지나고, 이와 병행하여 서울~강릉을 연결하는 6번 국도가 남쪽 끝을 횡단한다. 363번 지방도가 면 서쪽 경계에 북한강 줄기를 따라 이어져 양수리에서 6번 국도와 만난다. 이 밖에 1번 군도가 북쪽 중앙을 횡단하고, 서쪽으로는 10번 군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양수리에 고인돌, 부용리에 이준경선생 묘·정창손 묘역 석물 일괄(鄭昌孫 墓域 石物 一括), 목왕리에는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선생 묘 및 신도비가 있다. 그 밖에 대심리에 여말선초(麗末鮮初) 문신이자 태조 이성계의 조카인 이양우(李良祐)의 묘와 신도비, 신원리 부용산에는 부용성지도 있다. 관광지로는 양수리 유원지가 유명하다.

용담(龍潭)·양수(兩水)·목왕(木旺)·부용(芙蓉)·신원(新院)·도곡(陶谷)·대심(大心)·국수(菊秀)·복포(福浦)·청계(淸溪)·증동(澄東) 등 11개 리가 있다.

  1. 옥천면(玉泉面)

군의 중앙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68㎢, 인구 7,36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옥천리이다.

본래 양근군 고읍면(古邑面) 지역으로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읍면 중 기곡·양현·사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4개 리로 편성되어 고읍면이 되었다가 그 뒤 1937년에 옥천면으로 개칭되었다.

북쪽의 가평군과의 경계에 중미산(仲美山, 834m), 북서쪽에 소구니산(660m), 동쪽 용문면과의 경계에 용문산이 있고, 중앙 북부에 대부산(743m)과 중앙 남부에 편전산(片前山, 378m) 등 면 전체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신복천·사탄천 유역에 평지가 전개되어 경작지와 취락으로 이용된다. 전체면적 중 약 80%가 넘는 지역이 임야이며, 논농사가 밭농사에 비해 큰 비중을 점하는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두류·잡곡 이외에 약재·버섯과 함께 양계업도 활발하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남한강변을 따라 아신역을 지나며, 이와 병행하여 서울과 강릉을 연결하는 6번 국도가 면 남단 끝을 지난다. 양평읍과 가평군을 연결하는 37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종단하면서, 면의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관통하는 13번 군도와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용천리의 사나사 경내에 사나사 원증국사탑·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삼층석탑·함왕성지, 신복리에 이호민 영정 외 일괄 유물·강맹경 묘역, 옥천리에 양근향교 등이 있다. 이외에 신복리에 문신인 이호민(李好閔)의 묘와 신도비, 아신리에 문신인 심충겸(沈忠謙)의 묘와 신도비, 그리고 옥천리에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있다.

옥천(玉泉)·용천(龍川)·신복(新福)·아신(我新) 등 4개 리가 있다.

  1. 용문면(龍門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02.23㎢, 인구 1만 452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다문리이다.

본래 지평군 지역으로 지평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하서면이라 하여 용담·마천·금곡 등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서면(上西面)의 전곡·신촌 등 13개 리와 하북면(下北面) 하광리(下廣里)와 상광리(上廣里)의 일부, 여주군 개군면(介軍面) 공세리(貢稅里)의 일부가 병합되었고 용문산 밑이 되므로 용문면이 되어 13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 북쪽 경계에 싸리재(812m), 중앙 북부에 중원산(中元山), 북서쪽 경계에 용문산(龍門山, 1,157m), 서쪽 경계에 백운봉(白雲峰, 940m), 남서쪽 경계에 삿갓봉(474m), 남단에 주읍산(主邑山, 583m) 등의 고봉들이 진을 치고 있는 형세다. 면내로 흘러드는 용문천·연수천·중원천 주변 지역에 경작지와 취락이 발달하였다.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약간 우세한 지역으로 주요 농산물은 쌀·두류·잡곡 등인데, 특히 쌀의 생산량이 제일 많다. 또한 산나물의 생산량도 많은 편이며 특히 양봉이 활발하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용문역을 지나며, 서울과 강릉을 연결하는 6번 국도가 면의 남단을 횡단한다. 331번 지방도가 지평면에서 출발하여 면의 중앙을 종단하면서 용문산관광지로 향한다. 그 밖에 4·5·7번 군도가 산지 사이 사이를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조현리에 고인돌, 신점리의 용문사 경내에는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와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있으며, 오촌리에 김병호 고가, 덕촌리에 운계서원·세심정, 광탄리에 택승정과 봉황정, 화전리에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묘 등이 있다. 이 밖에 연수리에 상원사(上院寺)가 있다.

다문(多文)·마룡(馬龍)·화전(花田)·삼성(三星)·연수(延壽)·금곡(金谷)·신점(新店)·광탄(廣灘)·망릉(望陵)·중원(中元)·조현(曹峴)·덕촌(德村)·오촌(梧村) 등 13개 리가 있다.

  1. 지평면(砥平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77.68㎢, 인구 6,59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지평리이다.

본래 지평군 지역으로 지평읍내가 되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석불·신대 등 2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남면(南面)의 어은·칠성 등 20개 리와 여주군 대신면(大神面) 전후곡리(前後谷里)의 일부와 대송면(大松面) 곡수동(曲水洞)·산촌(酸村)의 일부가 병합되었고 지평군의 옛이름을 따서 지제면(현 지평면)이라 하여 10개 리로 개편되었다. 2006년 12월 1일에 지평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면의 북서쪽 경계에 수리봉(401m), 남쪽 하단에 고래산(543m)·우두산(牛頭山, 460m) 등이 있으며,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이다. 북쪽을 관류하는 지평천·월산천 유역에 평지가 형성되어 비교적 넓은 경작지와 취락이 발달하였다. 전체면적 중 경작지가 1/5을 넘고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맥류·두류 등이다. 산간지역에서는 산수유와 약재의 생산이 활발하고, 가축은 산양·사슴·오리·닭의 사육도 활발하다. 특히, 닭·오리의 사육두수는 군 전체에서 가장 많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나면서 지평·일신역을 경유한다. 교통은 331번 지방도가 면의 남동쪽에서 북서쪽을 종단하면서 여주군과 용문면을 연결하고, 383번 지방도가 서쪽을 종단하면서 곡수리와 용문면을 잇는다. 이들 지방도는 면 사무소가 있는 지평리에서 만나 십자형으로 뻗어 있고, 이외에 4·6번 군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지평리에 지평향교, 수곡리에 수곡서원, 송현리에 대성사(大成寺)·효자정문과 이적(李勣)의 묘가 있다.

지평(砥平)·송현(松峴)·월산(月山)·망미(望美)·무왕(茂旺)·일신(日新)·대평(大坪)·곡수(曲水)·수곡(水谷)·옥현(玉峴) 등 10개 리가 있다.

  1. 청운면(靑雲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96.61㎢, 인구 3,75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두리이다.

본래 지평군 지역으로 지평읍내의 북쪽이 되므로 상북면이라 하여 노음·교동·도청 등 1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하북면(下北面) 성재리(聖才里)와 여물리(余勿里)가 합쳐져 청운면이 되어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북쪽 강원도와의 경계에 갈기산(葛基山, 685m), 남쪽 양동면과의 경계에 비룡산(飛龍山, 527m) 등 남과 북에 각각 준봉이 솟아 있다. 남한강의 지류로 길게 이어진 흑천이 면 곳곳을 휘돌아 흐르고, 북쪽으로는 여물천이 남쪽으로 용두천·갈운천 등의 물줄기가 이어진다. 전체면적 중 임야가 약 4/5가 넘고, 군 전체에서 드물게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감자 등이며, 밤·도토리·산나물 등의 임산물도 많이 생산되고, 가축은 한우·닭·오리의 사육도 활발하다. 한때는 금·은을 채굴하던 광산이 10여 개 있었으나 현재는 규석·금을 생산하는 2개의 광산만이 명맥을 이어간다.

교통은 6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횡단하여 강원도 횡성군으로 이어지고, 양평~양양 간의 44번 국도가 면 중앙에서 6번 국도와 만난다. 이 밖에 396번 지방도가 남쪽에서 중앙을 연결하며, 8·9번 군도가 44번 국도와 접하면서 남북의 도로망으로 활용된다.

문화유적은 갈운리에 이춘명 효자정려문과 정재화(鄭在和)의 묘가 있다. 도원리의 길가에 남향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새겨진 ‘무릉도(武陵桃)’라는 글귀에서 선인들의 체취가 배어난다. 한편 신론리에는 운룡담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곳에서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천신제를 지낸다.

용두(龍頭)·여물(余勿)·비룡(飛龍)·가현(加峴)·갈운(葛雲)·도원(桃源)·신론(新論)·삼성(三星)·다대(多大) 등 9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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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집』(경기도,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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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www.yp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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