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는 변경 지역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다른 기지에 신속히 알리려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서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熢]로, 낮에는 연기[燧]로 신호하였다.
이 봉수대는 해안선으로부터 약 1㎞ 정도 떨어진 어달산(해발 약 200m) 정상에 있는데, 이 일대는 동해안의 해안선이 돌출되어 있는 곳으로 후망(候望)하기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축조시기는 신라시대부터 있던 자리에 고려 때 다시 축조하였다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축조되었다고도 전하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해안 지역에는 조선시대 문헌들에 나타나지 않은 봉수대 터가 여러 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조선 전기까지 활발히 사용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봉수의 명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어을달산(於乙達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그 이후의 문헌에는 어달산(於達山)으로 나타나며, 북쪽으로는 12.5㎞ 떨어진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의 오근산(吾斤山)과, 남쪽으로는 14.5㎞ 떨어진 삼척시 교동의 광진산(廣津山)과 연결된다.
이 봉수대들을 포함하는 동해안 노선은 부산 동래(東萊)의 간비도(干飛島)에서 시작되는 간봉노선(間烽路線)과 연결되며, 북으로는 통천(通川) 금란성(金幱成)을 거쳐 회양(淮陽) 소산(所山)에서 함경도 지역으로부터 내려오는 직봉노선(直烽路線)과 연결된다.
또한, 남쪽으로는 영해(寧海) 대소산(大所山)을 거쳐 안동 봉지산(烽枝山)에서 부산 동래의 응봉(應峰) 다대포진(多大浦鎭)으로부터 올라오는 직봉노선과도 연결된다.
이 봉수의 폐지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동해안 지역의 봉수가 대부분 폐지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조선 후기에는 그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초기까지 왜구가 동해안에 출몰하는 경우가 있어 이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에서 유지되었던 것이나 임진왜란 · 정묘호란 ·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수도와 남북의 변경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동해안에서는 왜구의 출몰 등과 같은 기타의 사변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현재 봉수대는 크기 50㎝ 정도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직경 2m, 높이 1∼1.5m 정도로 둥글게 쌓았는데, 위에 쌓은 돌이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다.
원래의 형태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토루(土壘)와 봉화대지(烽火臺址)만 겨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중앙에 봉수대를 두고 봉수대 밖으로 석축기단을 둔 뒤에 방화벽으로 사용된 토루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은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의 술산(戌山)봉수 등 동해안 지역에 남아있는 봉수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