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여수 부분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여수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전라남도 남동쪽 여수반도와 도서로 이루어진 시.
이칭
이칭
해읍
정의
전라남도 남동쪽 여수반도와 도서로 이루어진 시.
개관

동쪽은 여수수도(麗水水道)를 끼고 경상남도 남해군, 서쪽은 순천만을 끼고 고흥반도의 동남쪽과 바다로 경계를 이루며, 남쪽은 남해, 북쪽은 순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13′∼127°54′, 북위 34°00′∼34°53′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508.84㎢이고, 인구는 29만 16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6개 면, 20개 행정동(51개 법정동), 208개 행정리(63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라남도 여수시 학동에 있다.

자연환경

여수반도와 연륙교로 이어지는 돌산도의 지형은 마치 H자형을 이루고 있다. 여수반도와 돌산도를 비롯한 도서지역의 지층은 백악기층(白堊紀層)에 속한다. 이 지층은 다시 경상누층군(慶尙累層群)과 기타의 백악기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금오도·개도·백야도·낭도·안도·소리도·장도 등은 중성화산암류층(中性火山岩類層)을 이루며 쥬라기의 대동누층군층(大同累層群層)에 관입하여 형성되었다.

소백산맥에서 이어져 온 높고 낮은 산들이 여수반도 북쪽의 앵무산을 비롯하여 국사봉·수암산·황새봉으로 이어져 오다가 동북쪽으로 가마봉·전봉산(戰鳳山, 379m)·영취산(靈鷲山, 510m)·제석산(帝釋山, 336m)으로 연이어 있다.

동남쪽으로 호랑산(虎狼山, 470m)·천성산·봉화산(烽火山, 422m)이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비봉산(240m)·안심산(安心山, 347m)·안양산(324m)·이영산(336m)·고봉산(364m)·봉화산(烽火山, 371m)이 연이어 뻗어 있다.

여수만(가막만)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 돌산도의 대미산(359m)·천왕산(385m)·봉황산(鳳凰山, 441m), 남쪽에 개도의 봉화산(338m)·화태도의 삼각산(118m)이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기복이 심한 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고 경사가 심하여 평야가 적다. 반도 북쪽에 소라평야가 넓게 퍼져 있으며 남쪽은 가막만으로 함몰한다. 소라평야는 대포천(大浦川)에 의해 형성된 충적평야이다.

대포천은 소라면의 북부 중앙을 동류하는 하천으로 길이(13.5㎞)가 여수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수량은 비교적 많은 강으로서 여러 가닥의 지류를 합하고 대포리 저수지로 흘러들어 간다. 다시 하류에 발달한 소라 간척지를 관류하여 북동류하는 덕양천에 합류하여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경사가 심한 지형의 특성으로 긴 강은 없다. 대부분의 하천은 호랑산·전봉산·구봉산을 수원(水源)으로 하여 광양만으로 흘러들며, 석유화학공단의 공업용수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하구에는 소규모의 삼각주가 있었으나 지금은 간척지로 개간되었다. 연화천(蓮花川)이 북부를 관류하여 순천만에 들어간다. 연등천(蓮燈川)은 호랑산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여수만으로 흘러든다. 해안선은 복잡한 출입을 이루고 곳곳에 간석지(干潟地)를 개간한 간척지가 있다. 광양만에 있는 묘도에는 넓은 간석지가 발달해 있다.

전봉산과 영취산의 서쪽·북쪽 산기슭에 비교적 넓은 여천평야가 전개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북쪽 평지의 대부분 지역은 여천 공업단지로 개발되어 있다. 여수반도와 돌산도 사이에는 여수수도가 있는데 흐름이 빠르다.

여수반도의 동남단 앞 바다에는 대경도(大鏡島)·소경도(小鏡島)·가장도(加長島)·야도(冶島)·오동도(梧桐島)·돌산도(突山島) 등의 도서가 천연의 방파제를 이루고 있어 여수항은 천혜의 양항이라 할 수 있다. 유인도 46개, 무인도 268개, 연륙도 3개 등 총 317개의 섬이 있다.

기후는 온화하여 눈이 내리지 않는 해도 있다. 연평균기온 15.0℃, 1월 평균기온 2.9℃, 8월 평균기온 25.6℃이며, 연강수량은 1,433㎜이다. 금오도·거문도 등에는 난대림이 무성하고, 아열대식물이 분포하는 곳도 있다.

역사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으나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지로 안도·돌산도·연도 등이 있는데, 특히 ‘안도 조개더미’에서 신석기시대의 다양한 토기·토기편, 돌칼, 돌도끼, 골각기, 어망추, 사람 머리뼈 등이 발굴된 바 있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인 석기와 토기가 돌산읍 둔전리·죽포리, 남면 소리도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돌산읍·율촌면·소라면·화양면, 둔덕동·오림동·봉제동·중흥동 등에 약 5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삼한시대 마한의 여러 소국 중 원지국(爰池國)이 여수반도에 있었다는 견해가 주장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으로서 지금의 여수지역에 원촌현(猿村縣)이, 지금의 돌산지역에 돌산현(突山縣)이 두어져 감평군(欿平郡) 또는 삽평군(歃平郡)에 예속되었다.

그런데 이 감평 또는 삽평이라는 칭호는 꽂을 삽(揷)이 오기되어 마실 삽(歃) 또는 감(欿)으로 변이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삽평군(揷平郡) 또는 고지들이라 해야 옳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감평군(昇平郡)으로 개칭되면서 그 예하의 원촌현은 해읍현(海邑縣)으로, 돌산현은 여산현(廬山縣: 『세종실록지리지』에는 盧山縣으로 기록되어 있다.)으로 개칭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 견훤이 기병하여 무진주에 근거를 두자 후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940년(태조 23)해읍현이 여수현(麗水縣)으로, 여산현이 다시 돌산현으로 개칭되었다. 이 두 현은 여전히 승평군의 속현이었다. 현지명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를 통해 이 지역에는 여수현·돌산현 외에 삼일포향(三日浦鄕)·정방향(正方鄕)·진례부곡(進禮部曲)·소라포부곡(召羅浦部曲) 등이 있었다.

1350년(충정왕 2) 처음 현령이 파견되어 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공민왕 때 유탁(柳濯)이 장생포(長生浦)에서,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장생포곡 長生浦曲〉이라는 전승가가 불리게 되었다. 이 후 남해안 방위의 요충지가 되어 많은 진포가 설치되는 군사지역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 폐현이 되었다가 다시 순천도호부에 편입되어 조선시대 동안 계속되었다. 같은 때 진례(進禮)에 진이 설치되었다가, 1423년(세종 5)진례만호진이 폐지되었고,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이 설치되었다.

1479년(성종 10) 진이 폐지되었고 대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됨으로써 전라도 동남부의 수군을 통할하게 되었다. 1485년부터 전라좌수영성이 5년 8개월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이 좌수영함대를 주축으로 하여 일본의 해군을 격파했다. 이 고장 출신 황득중(黃得中)도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어 전라·경상·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601년 통제영이 경상도 거제로 옮겨감으로써 좌수영만 남게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가 세워졌다. 1725년(영조 1)여수도호부가 설치되어 전라좌수사를 겸임하게 했다가 이듬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의 유적으로는 진남관(鎭南館)과 오림동·문수동·미평동 등에 성지가 있다.

1885년(고종 22년) 4월 23일 영국군이 삼산면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1887년 3월 1일까지 주둔한 거문도점령사건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군이 전라좌수영성을 공격하여 이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었고, 1896년 도서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었다.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되어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었는데,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였다. 뒤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종래의 4개 면이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년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 관내의 5개 면이 여수군으로 편입되어 10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31년여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정용수(丁龍洙) 등 유림 30여명이 백기통곡단을 조직하여 국권상실을 애통해하였다. 또한 유봉목(兪鳳穆)·이선우(李善雨) 등이 여수간이수산학교를 중심으로 거사계획을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여수수산학교 학생 200여 명이 함께 궐기하였다. 이 밖에 김백평(金百枰)·이상호(李祥昊) 등을 중심으로 한 맞돕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1948년 10월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일부 병력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10여 일 후에 진압되었으나 이곳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49년 6월여수항의 개항이 선포되고, 8월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73년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시에 편입되어, 경호동이 신설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돌산면과 삼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12월 1일에는 돌산대교가 착공되어 1984년에 준공되었다. 1986년 1월 1일에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다. 1987년경호동 일부가 여천시로 편입되었다. 다시 1998년 4월 1일에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여수시가 되었다.

유물·유적

미평동·둔덕동과 여수오림동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1994년 지정), 돌산읍 우두리·평사리·둔전리·죽포리와 율촌면 가장리·산수리, 화양면 화동리·창무리, 소라면 죽림리·덕양리, 남면 두모리 등지에 지석묘군이 분포되어 있다.

돌산읍 군내리의 송도패총, 남면 금오도의 패총 등이 있다. 남면 소리도, 돌산읍 죽포리·둔전리 등지에서는 마제석검·석부·석창·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성지로는 돌산읍 평사리의 월암산성지·평사성지(平沙城址), 신복리·금성리의 신기산성지(新基山城址), 죽포리의 죽포산성지, 화양면 용주리의 고돌산성지, 여천동에 석창성지(전라남도 기념물, 1987년 지정), 봉산동성지와 문수동에 임진왜란시 축조된 괘락산성(掛樂山城)이 있다.

진터로는 돌산읍 군내리의 방답진터, 삼산면 거문도의 거문집터, 화양면 용주리의 고돌산진터, 돌산읍 둔전리의 돌산도봉수지, 군내리의 돌산군관청(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87년 지정), 화정면 백야리의 백야곶봉수지(白也串烽燧址), 남면 안도리의 안도리봉수지(安島里烽燧址) 등이 있다.

사적으로는 시전동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여수 선소유적(사적, 1995년 지정), 진남관(국보, 2001년 지정)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돌산읍 군내리에 은적암(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과 율림리에 향일암(전라남도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소라면 죽림리 안심사지(安心寺址)에 석불연화대와 석불하대석이 있다. 봉산동의 한산사(寒山寺), 덕충동의 석천사(石泉寺)가 있다.

중흥동의 흥국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경내에는 흥국사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흥국사대웅전후불탱(보물, 1974년 지정)·흥국사홍교(보물, 1972년 지정)·흥국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2002년 지정)·흥국사원통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흥국사수월관음도(보물, 2002년 지정)·흥국사 십육나한도(보물,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군자동의 여수향교(麗水鄕校)·여수진남관(보물, 1963년 지정), 돌산읍 군내리의 돌산향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덕충동의 하마비(下馬碑)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유적으로는 특히 이순신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 많다. 고소동의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보물, 1973년 지정), 군자동의 여수석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덕충동의 여수충민사(사적, 1993년 지정), 남산동의 영당(影堂) 등이 있다. 또한 이순신이 전쟁물자로 쓰기 위해 돌을 캐낸 채석장인 성생원지(省生院址)가 왕골배기골에 남아 있다.

정자로는 군자동에 군자정, 종화동에 충무정이 있다.

삼산면 거문도일원의 거문도 뱃노래(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972년 지정), 미평동의 현천소동패놀이(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982년 지정)가 있다.

화정면의 여수 낭도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2003년 지정)이 있다.

중요민속자료로 여수연등동벅수(중요민속자료, 1990년 지정)가 있고, 명승지로는 돌산읍의 돌산 평사리 고니도래지(전라남도 기념물, 1979년 지정), 삼산면의 상백도·하백도일원(명승, 1979년 지정) 등이 있다.

교육·문화

고려시대에 각 군현마다 향교가 설립되면서 여수부(麗水府)의 동북쪽 2리 밖 대곡동에 문묘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고장의 가장 오래된 향교로는 1444년(세종 26년)에 창건되었다는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돌산향교가 있다.

웅천동에 있는 오충사는 이순신을 주벽으로 하고 정철(丁哲)·정춘(丁春)·정린(丁麟)·정대수(丁大水) 등을 배향한 사우로 1847년(헌종 13)에 지금의 선원동에 가곡사(佳谷祠)로 설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1921년에 오충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이곳에 복건되었다.

그 외로 송천정사(松川精舍)·일수재(日修齋) 등과 돌산읍 서덕리의 여산현서당(麗山縣書堂)을 비롯하여 돌산읍 평사리의 월산서당, 화양면 화동리의 축성재서당, 화련리의 봉양재, 창무리의 창무서당, 이목리의 황의재, 율촌면 가장리의 하평글방, 남면 연도리의 연양재, 삼산면 초도리의 초도서당 등 15여 개가 관내에 있었다.

현재의 여수향교는 행정구역 변경으로 1897년군자동에 재건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교육기능이 약화되면서 설립된 사우(祠宇)의 예로서 충민사를 들 수 있다. 1601년(선조 34)덕충동에 세워진 이순신의 사당인 충민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몇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8년에 설립된 사립 경명학교(鏡明學校)가 그 효시인데, 이 학교는 1910년에 개교한 여수보통학교의 전신이다. 한편 삼산면 서도리에는 사립 낙영학교(樂英學校)가 있다. 이 낙영학교는 김상순(金相淳)이 자신의 고향인 삼산면 서도리에 설립한 것으로 현재의 서도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또한 1910년 당시 돌산군수 오극선(吳克善)과 향청장(鄕廳長) 김재섭(金在燮)에 의해 돌산 사립 취성학교(就成學校)가 세워졌는데, 이것이 오늘날 돌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중등학교의 시초로서는 1952년에 설립된 여항중학교와 1951년에 설립된 여수고등학교가 있다. 이 지방 유일의 고등교육기관인 여수수산대학은 1917년 실업교육정책에 따라 여수보통학교 부설로 수업연한 1년의 간이학교로 출발하였다가 1979년수산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에는 여수수산대학으로, 1998년에는 여수대학교로 승격되었다가 2006년전남대학교와 통합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0개교, 중학교 24개교, 고등학교 15개교, 특수학교 1개교, 한영대학교,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64개, 유교교당 2개, 원불교교당 2개, 천주교성당 8개, 개신교교회 461개 등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여수시립도서관·시민회관·여수공설운동장·진남체육관, KBS여수방송국, MBC여수방송국 등이 있다. 문학활동도 활발한 편이어서 『여향』·『여수문학』 등의 문예지가 출간되었고, 역오문학회(逆午文學會 : 후일 詩作으로 개명)·한파문학회(寒派文學會)·여수아동문학회 등 문학동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 밖에도 사단법인 진남제전보존회라는 단체가 있어 여수시의 향토문화행사인 진남제(鎭南祭)를 주관하고 있으며, 영취산진달래축제도 이 무렵에 행해지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땟공치기·연날리기·강강술래 등을 들 수 있다. 연날리기에서는 일반적인 참연(방패연) 외에도 홍애연·문어연·가오리연·붕연·매연 등 어류나 조류의 모양을 한 연이 많이 전승되고 있어 특기할 만하다.

땟공치기란 초동들이 풀이나 나무를 걸고서 막대기를 치고 맞히며 노는 놀이이다. 자치기와 유사하나 자치기보다 자가 길고 크기 때문에 훨씬 남성적이고 야성적이다.

그러나 여천 특유의 민속놀이라면 역시 소라면 현천리의 소동패놀이가 될 것이다. 이는 ‘두레’에서 비롯된 놀이인데, 이 마을의 두레패는 20세 이상의 일꾼조직인 대동패와 20세 이하의 일꾼조직인 소동패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레패들은 논매기가 끝나면 서로 ‘영기(令旗)달기’·‘힘겨루기’를 하고서 노래와 법고놀이를 한바탕 흥겹게 벌인다.

이 놀이는 대동패와 소동패가 같이 일하고 어울려 놀아 일체감과 공동체의식을 고양시킨다. 또 이웃마을과도 힘겨루기를 하나 승부가 결정되면 상호 친목을 돈독히 하는 풍류도 깃들여 있다. 용줄다리기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월대보름에 2·3일에 걸쳐 진행된다. 숫줄과 암줄의 모양이 용과 같다 하여 용줄다리기라고 한다.

여수 지방의 동제는 전라남도 일원의 공통적인 당산제 형식이 지배적이다. 간혹 해안마을에서는 용왕제 형식이 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돌산읍 군내리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정초에 제관이 정해지면 일년간은 거동을 삼가고 몸을 정결히 하여 제를 모셨다. 요즈음은 이것이 부담스러워 모두 제주가 되기를 기피하므로 마을 이장이 맡아 행하고 근신기간도 짧아졌다. 제일 10여 일 전부터 근신하기 시작하는데, 제장과 제주집 근처에는 황토를 깔고 왼새끼로 금줄을 친다.

제일인 섣달 그믐밤 11시경이 되면 마을 촌장을 중심으로 4, 5명의 제관들이 서쪽 산등성이의 당산나무에 제를 지내고, 모든 제물을 땅에 묻은 뒤 내려온다. 이렇게 하여 당제는 자정이 지나기 전에 끝나게 된다.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 오전 10시경에 올리는 도제(渡祭)가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주된 관심을 모은다.

이 도제는 마을 앞에 있는 섬인 송도(松島)로 나룻배를 타고 오고 갈 때 사고가 없기를 비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있다. 인근 4개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를 모시기 때문에 꽤 성대한 의식이 된다. 각 마을에서는 제물을 한 상씩 준비해 가지고 온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집에서 마련해온 제물도 함께 진설한다. 제가 끝난 뒤 제물을 짚뭉치에 조금씩 넣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 가라앉히고, 마을사람들이 음식을 고루 나누어 먹으며 매귀굿을 하며 논다.

설화·민요

이순신의 전적지(戰跡地)였으므로 그와 관련된 무용담들이 전설화해서 전래되는 것이 많다. 또한 산과 내 그리고 섬 등 자연지형과 지물에 서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들이 주변의 다른 고을보다 훨씬 풍부하다.

삼산면 동도리 죽촌마을의 바닷가에 오척단구(五尺短軀)의 늙은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마을의 한 선주가 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리고 와서 몸을 주무르고, 미음을 먹이는 등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는 오돌래(吳突來)라는 사람으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고향을 묻자 아무것도 묻지 말라며, 일자리나 하나 마련해주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선주가 마침 울릉도로 일을 나가려던 참이라 배젓꾼이 필요해 그를 쓰기로 하였다.

동도를 떠나 한 달 만에 울릉도에 무사히 도착하여 마른 미역과 재물을 가득 싣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오영감은 배를 타고나서부터 계속 먹고 자기만 할 뿐 통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선원들이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배가 바다 한중간에 이르렀을 때, 해적선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선원들은 오영감을 발로 차 깨우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였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오영감은 어이없게도 해적 배가 우리 배보다 훨씬 좋으니 그 배로 갈아타고 고향에 돌아가자며, 돈궤를 짊어지고 다른 선원들을 재촉하며 앞장서서 해적선으로 올랐다.

해적들이 빼앗은 재물과 선원들을 싣고 뱃머리를 일본으로 돌리려 하자, 오영감은 선수를 빼앗아 동도 쪽으로 돌리고, 돛대를 쑥 뽑아 던져버렸다. 오영감의 엄청난 용력에 혼비백산한 해적들은 그를 두목으로 받들겠다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오영감은 해적들의 재물 절반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절반을 돌려주며 다시는 해적질을 하지 말라고 타일러 보냈다. 그 뒤부터 이쪽 뱃사람들은 해적선을 본 일이 없게 되었고, 힘세고 의리 있는 사람을 일컬어 오돌래 같은 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도 종고산은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던 날 종소리도 같고 북소리도 같은 소리가 연 3일간이나 났다 하여, 이순신이 이 산의 이름을 ‘종고산(鐘鼓山)’ 이라 붙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오동도에 동백꽃이 피게 된 내력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에 오동도에 귀양온 한 쌍의 부부가 땅을 개간하고 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도둑이 들어 아내의 몸까지 요구하였다. 아내는 달아나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던 남편이 물 위에 떠오른 아내의 시신을 거두어 섬 정상에 묻었다. 그 뒤 아내의 무덤에서는 눈보라 속에서도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동백꽃이고, 이 꽃이 온 섬으로 번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옛날 자산〔尺山〕에 살던 토끼가 오동도 구경을 하고 싶어 거북이에게 데려다주면 좋은 보물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거북이 등에 올라 오동도를 구경했다. 구경을 다한 토끼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거북이는 토끼의 껍질을 벗기고 가버렸다.

이곳을 지나던 토신이 토끼를 가련히 여겨 억새풀밭에 가서 뒹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토끼는 전보다 더 좋은 옷을 입게 되었으나 벙어리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그 밖에 태몽을 발설하지 말라는 삼신(三神)의 말을 어겨 벙어리장수를 낳았다는 「영구이야기」, 화정면 화상마을의 「마녀목전설」, 「백도 매바위전설」, 소라면 현천리의 「쌀굴과 메뚜기바위전설」, 삼산면 서도리의 「용연(龍淵)의 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는 다양한 어업노동요와 「시집살이노래」·「화투타령」·「가래질노래」·「목화 따는 처녀」 등을 비롯하여 줄다리기할 때 부르는 「덜이덜롱」 등 많은 민요가 구전되고 있다.

다른 지방의 「강강수월래」나 「쾌지나칭칭나네」에 상대되는 「덜이덜롱」이라는 민요는 전라좌수영 일대인 여수·순천지역에서도 많이 불리었다. 남해바다와 면해 있어 어로행위(漁撈行爲)와 관계되는 어업노동요가 전승되고 있다.

특히 「거문도뱃노래」와 「거문도술비야」가 많이 불리는 어업노동요이다. 「거문도뱃노래」는 ‘놋소리’·‘월래소리’·‘가래소리’·‘썰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만선의 꿈을 안고 출어하는 데에서부터 어로작업을 통해 고기를 잡아서 가족을 생각하며 귀항하는 과정까지의 내용을 각 노동의 속도에 맞추어 부르는 이 노래는 이 고장 특유의 어로노동요이다.

“어야듸야/어야듸야/어서들가세/어야듸야/가가가가 어서가세/어야듸야/어장터로 가세…….”하는 ‘놋소리’는 8박(拍)으로 배 위에서 그물을 정리하면서 속도에 맞추어 힘차게 부른다. “월래보자/월래보자/그물을 당겨보세/월래보자/이그물을 안헝크러지게 어서당그소/…….”하는 ‘월래소리’는 그물을 당기는 속도에 맞추어 4박, 8박, 12박으로 점점 빨라진다.

‘가래소리’는 고기를 풀 때 부르는 소리로 “어랑성 가래야 어랑성 가래야/여기도 퍼실코 저기도 퍼실코/어랑성 가래야 어랑성 가래야/이가래가 뉘가래꼬…….”와 같다. ‘썰소리’는 고기를 많이 잡아 돌아오면서 부르는 소리로, “어허 어기어/어허―어허기어/우리쥔네 마누라 궁둥이를 친다/어허―어허기어/에―이멸치잡어 보리폴고/어허―어허기어/쌀팔아 자식들먹고……만선이다 만선이다/이영차/이웃집 마누라도/이영차/궁둥이 춤이오/이영차/…….”처럼 육지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또 “에이야라 술비야/에이야라 술비야/너는주고 나는받고/에이야라 술비야/까지까지 돌려보세/에이야라 술비야/이번막고 금쳐놓세/에이야라 술비야/살살비벼라 꼬시락든다/…….”하는 「술비소리」가 있는데 칡넝쿨과 새끼 등을 엮어 큰 밧줄을 만들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 밖에 「흥글노래」, 「베틀가」, 「방아타령」, 「물레노래」 등이 있다.

산업·교통

경지면적은 101.4㎢ 가운데 논이 45㎢, 밭은 56.3㎢이며, 경지율은 20%이다. 소라평야를 비롯한 여러 곳의 평지에서 벼농사가 성하고, 특히 광양만 안의 덕양·화치마을은 광복전에 일군 간척지가 넓고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서 벼의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농가인구는 4만 1,669명(2008년 현재)이다.

그 밖에 주요 농산물은 보리·밀·콩·팥 등이다. 완만하게 경사진 밭에서는 잡곡과 고구마의 생산량이 많다. 수박·오이·고추·참깨·마늘 등의 생산도 많다. 또 참깨·들깨·땅콩 등이 특용작물로 생산된다. 유자·배·복숭아·포도·감·밤·대추·은행·표고버섯 등의 임산물이 재배 생산된다.

농업은 밭작물 위주에서 벗어나 도시근교농업인 화훼와 축산업, 한약재인 택사 등 약용 식물의 재배로 전환되면서 농가 소득의 증대가 꾀해지고 있다. 특히 돌산도에서 대규모로 재배되는 갓은, 김치로 담가져서 소위 ‘돌산 갓김치’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축산업으로 1998년 현재 한우 9,437마리, 돼지 3만 362마리, 산양 538마리, 사슴 252마리, 개 6,923마리, 칠면조 15마리, 닭 66만 5,087마리, 오리 899마리 등이 사육되고 있으며, 양봉 1만 91마리도 행해지고 있다.

근해는 어족이 풍부하여 멸치·조기·쥐치·갈치·가자미·장어·전어 등의 어획량이 많고, 특히 돌산읍 멸치어장은 유명하다. 우리나라 멸치어업의 중심 수역은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경상남도 통영군에 이르는 지역으로 돌산도는 그 중앙에 있어서 예로부터 멸치어장으로 유명했다.

멸치는 연안 회유성의 어류이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행어(行魚)라 적혀 있다. 이 지역의 연안수역은 1월의 수온이 7∼8℃, 8월의 수온이 23∼4℃로 교차가 15∼6℃ 내외여서 멸치어장으로 적합하다. 또 멸치의 먹이가 되는 플랑크톤의 번식에 알맞으며, 해안선의 출입이 복잡하면서도 해저의 경사가 완만하여 멸치어로에 편리하다.

한편 연안은 멸치의 서식에 적당한 수심 100m 이내의 얕은 바다여서 이 지역 사람들의 오랜 멸치 어로기술의 발달과 함께 돌산읍은 남면·화정면과 더불어 멸치어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돌산읍의 북쪽 해안인 여수수도는 항구시설로 수질이 오염되어 멸치어장은 폐지되었고, 서쪽 해안인 가막바다의 돌산읍의 평사리와 금봉리의 해안에서도 많은 어획량을 올리지 못한다. 따라서 돌산읍 멸치어로의 중심수역은 동쪽해안과 남쪽해안이 된다.

어획된 멸치는 가까운 어항으로 운반되어 대부분이 건멸치로 제조되고, 일부는 멸치젓의 원료가 된다. 예로부터 멸치젓은 제주도의 추자도 멸치젓, 건멸치는 돌산읍에서 생산된 것을 중심으로 한 여수멸치가 전국에서 최고급품으로 매매되고 있다.

또 돌산읍·화정면·남면 등에서는 김·고막·굴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또 문어·낙지·멸치·고막 등의 어획량도 많았다. 율촌면에 이르는 간석지는 보성군 여자만과 함께 전국 제1의 고막 산지였다.

그러나 여천화학공업단지가 조성되고 광양제철공장이 가동됨에 따라 바닷물의 오염이 심해지면서 광양만의 어업이 쇠퇴하였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광양만의 고막·전어·장어·백합(白蛤)·김 등은 해수오염으로 그 산출이 격감되었다.

안도·거문도 등은 어업기지로 발달하였다. 남쪽의 가막만의 일부를 이루는 쌍봉만은 육지로 깊숙이 만입하고 쌍봉만을 감싸고 있는 장도(長島)·가덕도(加德島)·두력도(斗力島) 근해는 전어·새조개·쥐치의 명산지로 알려진 어장의 중심지이다.

특히 새조개는 전국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아서 광복 전에는 거의 대부분을 일본으로 수출했을 정도로 많았다. 근년에는 신월동에 세워진 공장의 폐수로 인하여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특산물인 홍합의 대규모 양식장이 활성화되었으며 경도 앞바다인 가막만에서 굴의 수하식 양식이 활발하고 또 생산량이 많아 주요 수출품목으로 그 비중이 높아졌다.

쌍봉만은 최근 우리나라 조정·요트 훈련의 적지로 꼽히는 바다이다. 광복 전에는 전어의 내장으로 만든 ‘전어밤젓’이 장도의 특산물로 유명하였다. 또 장도에는 어기(漁期)에 임시로 어민이 이주하여 어로작업을 하기 위한 어막(漁幕)이 있다. 장도는 비교적 곰솔이 무성하여 예전에 인근 주민의 연료림으로 이용되었다.

여수반도 연근해수역은 청정해역으로 천연의 좋은 어장을 이루고 있어서 여수항은 이 수역의 어업전진기지를 이루고 있다. 여수는 연근해 어로는 물론 원양어로에서 잡힌 어류를 수산물 공판장에 위탁 판매하는 수산항이다. 제빙·냉동·수산물가공·어망제조업 등 수산업과 관련된 산업이 발달하였다. 2008년 현재 어업종사자수는 1만 6,911명이다.

1966년여천공업단지 조성계획이 발표된 이후 제1·제2·제3 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되면서 우리나라 유수의 화학공업단지로 발달하였다.

호남정유·대성메타놀·남해화학·금호화학·럭키화학·삼성석유화학·동서석유 등 대규모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이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여수화력(50만㎾)·호남화력(56만㎾) 등의 화력발전소가 있다.

이러한 대규모 공업단지의 조성은 지역사회의 경제력 향상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근 주민 및 농작물·과수·산림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공해를 끼침으로써 여수를 죽음의 도시로 몰아가고 있다. 공해대책은 주민의 이주로 결정되었고 이주보상비가 너무 엄청난 금액이어서 계획만 세워졌을 뿐 실행에 옮겨지지 못해 주민의 원성을 사고 있다.

1983년에 준공된 오천공업단지에서는 쥐치포·건포류·어육·연육·어묵·사료·미역·젓갈 등 수산업가공식품이 주로 생산된다. 그 이외에 조선·고무·기계공업 등이 활발하다.

시장으로는 조선 말기에 석보장(石堡場)·나지포장(羅支浦場)·성생원장(成生院場)·돌산성내장(突山城內場)·소라장(召羅場)·세동우시장(細洞牛市長)이 정기적으로 개장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여수시가 크게 발전함에 따라 여수시 근교지역과 여수시와 교통이 편리한 지역의 정기시장은 소멸되었다. 현재는 소라면 덕양장이 유일한 5일장으로 3·8일에 열리고 있다. 돌산읍에는 여천수산협동조합이 있어 어패류를 위판하고 있다.

여수는 예전에 조그만 어항 또는 연안항로의 기항지이었으나 1931년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의 연락선이 개설되면서 남해안의 국제항구로 발전하였다. 광복 이전에 신항이 건설되었고 1960년대 이후 2만t급 선박이 접안 할 수 있는 부두 시설이 갖추어졌고 국제여객선 터미널이 완공되어 한일 정기여객선 카페리가 운항되고 있다.

교동의 구항은 주로 연안항로의 여객선의 터미널로 이용되고 있다. 여수를 중심으로 돌산도·안도·연도·백야도·완도·목포·부산 등과의 사이에 정기항로가 있고, 부산·거문도와의 사이에 쾌속선이 운항되고 있다.

국동의 어항단지는 어선의 전용항구로 수산물공판장·제빙·냉동 등 어민 편의 시설을 완비한 어업전진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여천공단 내에 6개의 전용부두(낙포부두, 중흥부두, GS칼텍스부두, 메탄올부두, 정우에너지 부두 등)가 설치되어 원자재와 완제품·수출품 등의 물동량을 전담하여 처리한다.

선박의 해상왕래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소리도등대·거문도등대가 있다. 거문도의 서쪽 서도의 남쪽 끝 수월산(水越山, 128m)의 남쪽 사면에 설치된 거문도등대(높이 64.9m)는 무적신호(霧笛信號)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등대는 부산과 목포의 중간해역에 해당되고 또 여수와 제주도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근해를 지나는 선박이 많기 때문에 중요시되고 있다. 1904년에 건설된 거문도등대는 광달거리(光達距離)가 21㎞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수의 큰 등대이다.

1936년에는 이리∼여수간의 전라선이 개통되었고, 1969년 덕양∼적량간의 여천선이 개통되어 화물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순천∼여수간의 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어 여수반도를 관통하고 있다. 여수중심지와 돌산도를 연결하는 연륙교(돌산대교)가 가설되어 있다. 또 여수∼화양간의 국도를 비롯한 지방도가 여수의 중심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도로교통은 편리하다. 여수와 서울 및 제주를 연결하는 정기항공편이 운행되고 있다.

관광

여수반도의 내륙에 산재된 유물 유적은 물론이고 남해안의 맑고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중심으로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여수는 충무공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다. 시전동에 있는 망마산이 서쪽 산기슭의 선소(사적, 1995년 지정)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에는 둘레가 300m, 수심이 3∼4m 가량되는 굴강(屈江), 선소를 관리하던 관청인 세검정지, 선소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장승(석장생), 거북선을 계루하던 석주(石柱) 등이 남아 있다.

영취산 중턱에는 고려 명종 25년 보조국사(普照國師)에 의해 창건된 흥국사(興國寺)가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원통전(圓通殿)이 있다. 흥국사의 가람배치는 법화경에 의한 구도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며, 대웅전에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큰 특징이다.

대웅전의 후불탱화(보물, 1974년 지정)와 괘불(掛佛)이 불화로 유명하다. 또 사찰 입구에 있는 홍교의 수려한 자태가 일품이다. 흥국사는 임진왜란시 승병의 훈련소로 유명하며 승군이 이순신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한편 4월 초순부터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영취산 진달래 군락도 장관을 이룬다. 또 영취산 계곡의 맑은 물은 여수시민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한다. 광양만에 있는 묘도는 해수의 침식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수려한 해안경관을 자랑한다.

호랑산의 산성, 고락산성(鼓樂山城), 여수석보(麗水石堡), 봉계성(鳳溪城), 석창성(石倉城) 등 많은 성과 산성이 연계되어 여수의 방위망을 이루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두력도와 장도·가덕도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조·수리·계루하였던 선소를 방어하는 섬으로 쓰였다.

1598년(선조 31)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이시언(李時言)이 건립한 객사(客舍)인 진남관은 목조건물로서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좌수영(左水營)의 본영으로서, 삼도수군(三道水軍)의 총사령부로서 사용되었다.

자산공원(紫山公園)은 종화동에 있는 시립공원으로 여수항과 오동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공원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일출시에는 산봉우리가 자색으로 물들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여수항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주위 600m)인 장군도(將軍島)에는 1497년 수군절도사 이량(李良) 장군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수중석성(水中石城)과 방왜축제비(防倭築提碑)와 승전비(勝戰碑)가 있다. 여수8경 중의 하나이며 충무공의 작전지휘소였던 고소대(姑蘇臺)에는 1620년에 건립된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충무공의 부하들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만들어 세운 타루비가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대표적 명소는 오동도(梧桐島)이다. 오동도는 수중 꽃섬이라 할 정도로 190여 종의 희귀수목이 그 자태를 뽐내며 온 섬에 동백과 시누대로 뒤덮여 있다. 해안으로 기암절벽의 다양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검은 모래로 유명한 만성리해수욕장이 시 중심지에서 동북 3㎞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여 여름철에 전국 각지에서 피서객들로 붐빈다.

특히 검은 모래가 신경통에 좋다고 하여 모래찜질을 하려는 해수욕객이 많이 찾았다. 최근 이 지역의 공업화로 인해 그 명성이 점차 쇠퇴하면서 찾는 관광객 수도 감소하고 있다.

화정면 사도(沙島)는 조그만 섬으로 다양한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철새의 서식처, 천연 해수욕장, 낚시터로 유명하다. 여수반도와 인접한 돌산도에는 여수와 돌산을 잇는 국내 최초의 사장교인 돌산대교(길이 450m, 폭 17m), 울창한 송림과 아담한 백사장이 조화를 이룬 방죽포해수욕장,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유인해 큰 공을 세운 무슬목, 금오산 기슭에 있는 향일암이 대표적 명소이다.

방죽포해수욕장(防竹浦海水浴場)은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돌산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11㎞ 지점에 위치한다. 그 규모(길이 300m, 폭 79m)는 작으나 모래가 곱고, 일부는 모암의 영향을 받아서 거무스레한 모래를 형성하고 있다. 원래 내륙 깊숙이 만입한 바다였으나 조선시대 말에 현재의 제방이 축조되었고, 그 배후습지는 논으로 일구어졌다.

제방을 쌓으면서 곰솔을 많이 심었으므로 수령이 100여 년 가량 되는 아름다운 숲으로 성장했으나 여러 차례의 해일에 말라죽어 지금은 150여 그루에 불과하다. 그 동안 파도에 밀린 모래가 쌓여서 아름다운 백사장을 이룬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었다.

향일암은 돌산의 동남단에 있는 금오산(金鼇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암자로 664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일출 광경은 절경이어서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남면의 소라도 등대섬에서 남쪽으로 70해리를 가면 바다 위에 산재해 있는 39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군이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의 흰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이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백도이다. 여수 상백도·하백도 일원은 1979년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서방바위·각시바위·보석바위·매바위·등대바위 등 기이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으며 남해의 푸른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해상경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거문도는 쇠뜨기·땅채송화 등 아열대 식물군과 천연비둘기인 흑비둘기, 바닷속의 어류와 해양식물 등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남해의 해금강으로 불리어진다. 거문도 주변은 황금어장으로 알려져 성어기(盛漁期)에는 많은 고기잡이배들이 몰려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거문도와 백도는 198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에 해마다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백도는 무인도여서 관광편의시설이 전혀 없으나 거문도에는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여수다도해 일원에는 좋은 낚시터가 많아 돔·볼락·농어 등이 잡힌다.

1968년한려수도(閑麗水道)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여수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관문이며 해상공원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과 교통망이 잘 갖춰져 있다.

매년 5월 3일부터 8일까지는 여수지방의 각종 민속놀이와 예술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지는 진남제 여수거북선축제가 향토문화축제로 개최된다. 기타 축제로는 오동도동백꽃축제, 향일암일출제, 영취산진달래축제, 거문도백도은빛바다축제가 있다.

읍·면
  1. 돌산읍(突山邑)

시의 남부해역에 위치한 읍. 면적 71.91㎢, 인구 1만 4347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군내리이다. 백제시대에는 돌산현이라 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승평군 여산현이라 불렸다. 1485년(성종 16년) 방답진(防踏鎭)이 설치되고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두어졌다가 1895년(고종 32년) 폐지되었다.

1896년돌산군이 설치되면서 흥양·낙안·순천·광양 등 4개 군의 도서지역 8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돌산군이 폐지되고, 여수군에 병합되어 두남면(斗南面)으로 개편되었다가 1917년두남면이 돌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되면서 여수군이 여천군으로 개칭되어 여천군 돌산면이 되었다. 1973년돌산면 경호리가 여수시에 편입되었다.

1980년돌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여수시와 여천군이 통합되면서 여수시 돌산읍으로 되었다. 돌산읍의 대부분을 차지한 돌산도는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이며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읍은 2개의 유인도와 20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조·수수·메밀·콩·팥·녹두 등이 생산된다. 고구마·감자·수박·토마토·마늘·참깨·고추·고들빼기·유자·포도 등도 많이 재배되고 있다. 특히, 돌산도에서는 갓이 대규모로 재배, 생산되고 있으며, 그 이름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갓김치 가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고 있다.

연근해에서는 삼치·멸치·갈치 등을 어획하는 외에 김·굴의 양식도 활발하다. 이 읍은 여수와 인접하여 사회·경제·문화 등 여러 면에서 여수시의 영향권에 속한다. 특히 돌산도의 북부는 여수와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 마주 대하고 있어서 여수시의 생활권으로 되면서 그 외곽지역이 발전하고 있다. 돌산대교 주변에는 해안을 따라 횟집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도로는 여수시와 돌산도간에 돌산대교가 연결되어 있고, 국도가 군내리를 통과하며, 군내리와 금봉리간에 군도가 연결되어 있다.

줄포리의 방죽포해수욕장은 부드럽고 깨끗한 백사장과 200여 년생의 울창한 송림으로 우거져 있어 유명하다. 또 파도가 세지 않고 교통이 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 인근에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율림리의 임포에 있는 향일암은 동백나무숲을 비롯한 아열대식물의 울창한 수림이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있는 금오산(金鼇山)의 정상 부근에 있다. 향일암은 문자 그대로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일출시 수평선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이다. 돌산 지역 곳곳에는 바위가 흘러내린 너덜(애추)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군내리의 돌산향교·돌산객사, 평사리의 월암산성지·평사성지·죽포산성, 금성리의 신기산성 등이 있다. 군내리중봉산에는 은적암(隱寂庵)이, 금오산에는 책육암(策六庵)이 있다. 평사리 굴전마을은 고니의 도래지로 유명하다. 또 이곳에는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유인해 격파하고 큰 공을 세운 무술목전적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분교 3개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군내(郡內)·신복(新福)·금성(錦城)·율림(栗林)·죽포(竹圃)·서덕(瑞德)·금봉(金鳳)·둔전(屯田)·평사(平沙)·우두(右斗) 등 10개 리가 있다.

  1. 남면(南面)

시의 남부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42.55㎢, 인구 3,30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학리이다. 본래 순천부에 속해 있다가 1896년돌산군이 설치되면서 금오면(金鰲面)이라 불렸다. 14개 리와 소리(所里)·안도(安島)·횡간(橫干)·두라(斗羅)·화태(禾太) 등 5개 섬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군에 편입되어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금오면이 남면으로 개칭되었고, 1949년여수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여천군 남면으로 되었다. 1964년연도에 연도출장소가 설치되어 연도리를 관할하였고, 1967년안도와 화태도에 각각 출장소를 설치하여 안도출장소는 안도리, 화태출장소는 화태·두라·횡간의 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98년여수시와 통합되면서 여수시 남면으로 되었다.

이 면은 유인도 11개, 무인도 24개로 구성되었다. 금오도는 면의 중심을 이루는 섬으로 대대산(大代山, 382m)을 주봉으로 하는데, 해안에는 평지가 적다. 우학리에는 만(灣)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안도와 연도는 섬모양이 기러기와 솔개 같다고 하여 안도(雁島)·소리도(所里島)라고도 불린다. 금오도 북쪽에는 화태도(禾太島)·두라도(斗羅島)·월호도(月湖島) 등이 있고, 섬내에는 동백나무가 산재한다.

경지면적 가운데 논은 86%, 밭은 14%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특히 맥주보리가 생산되며, 취나물이 재배된다. 삐깐이섬(橫看島)에는 고구마·팥·녹두 등이 많이 생산되며, 그 밖의 섬에서는 멸치·조기·갈치·문어·삼치들을 어획하며 김도 양식된다.

두모리와 우학리간에는 군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여수와 연도간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섬과 섬 사이에 배가 왕래하여 교통이 편하다. 연도리봉화산(烽火山) 남쪽 기슭에 1910년에 세워진 소리도등대는 남해안을 지나는 선박의 길잡이이다.

그 주위에는 희귀목이 둘러싸고 곳곳에 바다낚시터가 있어 관광지와 낚시터로 유명하다. 안도의 이이금, 항금이 등에는 좋은 해수욕장이 있다.

문화유적은 금오도의 지석묘군, 안도리에 봉수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분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3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우학(牛鶴)·심장(心張)·두모(斗模)·유송(柳松)·안도(安島)·연도(鳶島)·화태(火太)·횡간(橫干)·두라(斗羅) 등 9개 리가 있다.

  1. 삼산면(三山面)

시의 남단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27.55㎢, 인구 2,39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거문리이다. 본래 전라좌수영 관할의 섬으로서 고도(古島)·동도(東島)·서도(西島)의 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삼도(三島) 또는 삼산도라 불리워졌고 흥양현(興陽縣 : 지금의 고흥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1885년(고종 22) 영국의 동양함대는 러시아 견제를 명분삼아 거문도를 강점하고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조선정부의 항의와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점령의사가 없다는 약속으로 영국 해군이 철수하자, 1887년동도리 유촌에 거문진이 설치되었다.

1895년 진이 폐지되었고, 초도(草島)·손죽도(巽竹島)가 상도(上島), 거문도가 하도(下島)라 칭해져 집강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1896년돌산군이 설치되면서 편입되었다.

1908년상도·하도가 합해져 삼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군에 편입되어 동도 등 6개 리로 개편, 1949년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여천군 삼산면이 되었고, 1965년 4월손죽도·초도에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8년여수시 관할로 되었다.

유인도 8개, 무인도 104개가 있다. 주요 섬으로는 거문도·초도·손죽도·평도·광도 등이 있다. 거문도 근해에는 소백산맥의 일맥이 남하, 침강하고 오랫동안 해식(海蝕)을 받아 80m의 해식애도 형성되어 있다. 곳곳에 만입(灣入)이 된 섬이 있으며 섬과 섬 사이에는 잔잔한 수도가 이루어져 있다.

연중기후가 온화하고 수많은 절해고도의 명승지가 있다. 경지면적 가운데 논이 94%를 차지하나 현재 벼농사는 휴경중이어서 쌀의 생산량은 없다.

주요 농산물로는 보리(쌀보리는 생산되지 않고 맥주보리만 생산)·팥·고구마 등이 생산된다. 또 유자와 감자·마늘 등이 재배되고 쑥의 생산이 많다. 근해 어장에서는 멸치·도미·삼치 등이 어획되고, 김이 양식되며 톳·미역 등이 채취된다.

여수와 거문도·백도간에 정기여객선이 운행되고 있다. 동도·서도·거문도간을 잇는 동력선이 운행되어 해상교통이 편리하다. 서도리에는 거문도해수욕장이 있다. 거문리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시 희생된 9명의 영국인 묘가 있는데 6인의 묘는 영국으로 이장되었고, 3기의 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거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가운데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섬인데, 특히 3호(湖) 8경(景)으로 이름난 명소이다. 거문도는 1966년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어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수산가공시설·제빙공장 등이 잘 갖추어졌다.

거문도는 병풍처럼 펼쳐진 섬들 사이로 항만이 마치 호수처럼 형성된 미항이어서 관광객과 바다낚시꾼이 줄지어 몰려들고 있다.

거문도에서 동으로 25.6㎞ 떨어져 위치한 무인군도(無人群島)인 백도는 1979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백도는 상백도와 하백도로 불리우는 39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풍란을 비롯한 아열대식물 350여 종과 흑비둘기·가마우지 등 조류 30여 종이 서식함으로써 섬의 아름다움 못지 않게 그 가치도 높다.

문화유적은 거문도 뱃노래와 서도 수월산 밑에 1905년에 세워진 거문도등대, 동도리 유촌의 거문진(巨文鎭)터, 동도리 고분군, 손죽리 이대원(李大源)사당, 조개무덤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5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가 있다.

거문(巨文)·덕촌(德村)·서도(西島)·동도(東島)·초도(草島)·손죽(巽竹) 등 6개 리가 있다.

  1. 소라면(召羅面)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0.56㎢, 인구 1만 820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양리이다. 본래 순천부(順天府)지역으로 고려시대에 소라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소라포면이라 개칭되었다.

순조 때 상도(上道)·하도(下道)로 분리되었다. 1897년여수군이 신설되면서 편입되어 상도는 덕안면(德安面)으로 개칭되어 33개 리를 관할하였고, 하도는 구산면(龜山面)으로 개칭되어 3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안면의 항호·소제·장성의 3개 리는 쌍봉면에, 구산면의 우산·산곡 등 17개 리는 율촌면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44개 리가 병합되어 소라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 분리되어 여천군 소라면이 되었다. 1983년화정면 여자리의 달천도(達川島)가 소라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여수시 관할로 변경되었다.

무인도 6개가 부속도서로 되어 있다. 북쪽에 황새봉이 솟아 여수반도의 근간을 형성하며 비봉산(飛鳳山, 240m)을 거쳐 화양면으로 남하한다. 면의 중앙을 대포천이 관류하고 덕양천(德陽川)과 함께 광양만으로 흘러들면서 복합삼각주를 이루는데 대규모의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서쪽 해안선의 출입이 복잡하며 만입(灣入)이 있다.

이 군에서 경작지가 가장 넓은 면에서는 논이 41%, 밭이 59%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의 생산이 많고, 유자·포도·복숭아·배 등이 재배 생산된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고등원예의 발달로 오이·토마토·딸기 등이 생산된다. 해안 가까이의 간석지에서는 고막·낙지 등이 잡히고 순천만에서는 전어·조기·문어 등이 어획된다.

국도가 4차선으로 동쪽 지역을 지나가고 지방도와 군도가 서로 연결되어 도로교통은 편리하다. 철도는 전라선이 통과하고 덕양역이 있다. 봉두리수암산 계곡의 김대동(金帶洞) 석굴은 내륙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죽림리의 안심사지·지석묘, 덕양리의 지석묘군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현천리에 소동패놀이가 전하고 있다. 현천리 중촌마을은 장수마을과 쌍동이 마을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4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덕양(德陽)·죽림(竹林)·관기(館基)·현천(玄川)·복산(福山)·사곡(沙谷)·봉두(鳳頭)·대포(大浦) 등 8개 리가 있다.

  1. 율촌면(栗村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49㎢, 인구 7,06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주화리이다. 본래 순천부지역으로 고려시대에 율촌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율촌면이라 하여 평촌(平村)·가장(佳長)·난화(蘭花)·연화(蓮花)·삼산(三山)·반월(半月)·내리(內里)·봉전(鳳田) 등 40개 리를 관할하였다. 1897년여수군이 신설되면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산면의 17개 리가 병합되었고, 1949년여수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여천군 율촌면으로 되었다. 1973년광양군 골약면의 송장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10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98년여수시와 통합으로 여수시 율촌면이 되었다.

유인도 3개, 무인도 7개가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40.1㎞이다. 중앙에 수암산(水巖山, 370m), 남쪽에 황새봉(396m), 북쪽에 앵무산(343m)이 솟아 있다. 광양만에는 좁은 평야가 있으며, 율촌리에 간척지가 조성되어 있다.

광양만에 면한 율촌면과 순천시 해룡면 일원에 1,000만 평의 대규모 율촌공단이 조성되어 이 지역의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기대하고 있다. 율촌공단에 자동차, 조립금속, 기계장비 선박 등의 업체가 유치되고 특히 50여 만 대의 자동차가 생산되는 등 연간 20조 원 이상의 매출, 8만 명 이상의 고용효과, 30만 명 이상의 인구유발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경작면적 가운데 논은 39%이며 밭은 61%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가 생산되며, 과수원의 조성이 성하여 배·포도·유자·복숭아·단감의 생산이 많다. 광양만에서 고막이 특산물로 나온다. 순천만에서 전어·장어·문어 등이 어획되며, 김이 양식된다.

철도는 동부지역에 전라선이 지나며 율촌역이 있고, 철도와 나란히 국도가 통과한다. 지방도와 군도가 면의 동부지역과 서남지역, 서부의 남북을 잇고 있다. 남부에는 여수비행장이 있어서 서울·제주∼여수간을 정기운행하여 여러 방면에서 교통이 편리하다. 현재 율촌역은 순천-여수 구간 선로 이설로 역사가 이전하였으며, 신풍역은 전라선 복선전철화사업으로 선로가 이설되어 폐역되었다.

문화유적은 신풍리에 구암별묘(龜巖別廟)·지석묘군, 가장리에 지석묘군·죽암산성지, 산수리·취적리에 지석묘군, 신풍리에 나환자들의 요양원인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이 있다. 신풍리의 페칸나무는 희귀수종 제69호로 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조화(稠禾)·월산(月山)·산수(山水)·가장(佳長)·상봉(上鳳)·봉전(鳳田)·반월(半月)·취적(吹笛)·신풍(新豊)·여동(麗東) 등 10개 리가 있다.

  1. 화양면(華陽面)

시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70.12㎢, 인구 7,00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나진리이다. 고려시대에 여수현에 속했으며, 1415년(태종 15년)순천부지역으로 소상도(召上道)에 속해 있다가 1597년(선조 30년)곡화(曲華)라 개칭되어 목관(牧官)이 설치되었다가 1895년 폐지되었다.

1897년여수군에 편입되어 화양면으로 개칭되었고 3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안면(지금의 소라면)성본리 일부가 병합되어 현재의 10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49년여수읍이 시로 승격되어 여천군 화양면이 되었다. 1998년 시군 통합으로 여수시 화양면이 되었다.

북쪽에 비봉산(311m), 중앙에 안양산(324m), 남단에 고봉산(364m)·봉화산(371m) 등이 우뚝 솟아 있어서 동서로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면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출입이 복잡하고 만입(灣入)이 깊숙하다. 해안선 길이는 89.7㎞이며 유인도가 1개, 무인도가 17개 있다.

창무·화동리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다. 경작면적가운데 논은 63%이며 밭은 37%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벼·보리·고구마·유자·양다래·단감이 생산된다. 나진리 부근에는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채소·딸기·양파 등의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993년화양농공단지가 조성되었으며 1999년에는 국립남해수산연구소가 들어섰다.

주요 국도는 통과하지 않으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지방도와 군도가 개설되고 포장되어 도로의 여건은 좋은 편이다. 여수·백야도·계두를 잇는 정기항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남단인 장수리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문화유적은 용주리에 용문사·지석묘군·고돌산성지(古突山城址), 또 화동리에 지석묘군과 곡화목관이 목마(牧馬)를 다스렸던 곡화목장지(曲華牧場址)가 있다. 창무리에는 지석묘군이 있다. 장수리의 해변에는 200년 이상 된 천연림과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 이것들은 마을 주민들이 평안을 빌고 질병을 막기 위해 1937년 제당을 지어 매년 정월에 제를 지내는 대상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분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나진(羅陳)·용주(龍珠)·창무(昌武)·이천(利川)·옥적(玉笛)·화동(華東)·서촌(西村)·이목(梨木)·장수(長水)·안포(安浦) 등 10개 리가 있다.

  1. 화정면(華井面)

시의 서남단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26.35㎢, 인구 2,42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백야리이다. 본래 순천부의 지역으로 낭도(狼島)·사도(沙島)·백야도(白也島)·여자도(汝自島)·적금도(積金島)·둔병도(屯兵島)·조발도(早發島) 등 7개 섬을 관할하다가 1896년돌산군에 편입되어 화개면(華蓋面)과 옥정면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군에 편입되었고 화개면의 개도(蓋島)·상화도(上花島)·하화도(下華島)·월호도(月湖島)·자봉도(自峰島)·제도(諸島) 등 6개 섬이 병합되어 화개면과 옥정면의 이름을 따서 화정면이라 불렸다. 1949년여수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여천군 화정면이 되었다. 1998년 시군 통합으로 여수시 화정면이 되었다.

유인도 15개와 무인도 56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의 여자도에서 동남단의 월호도까지 수로로 약 30㎞가 된다. 화양면의 닭머리곶(鷄頭串)·백야도(白虎島)·제도(猪島)·개도(犬島)·금오도(鰲島)·안도(雁島)·소리도(鳶島) 등이 열도(列島)를 이룬다.

일곱 동물이 서로 견제하여 안정을 이룬다는 풍수지명의 예이다. 이들은 여수반도에 연속되는 침강지형으로 외양(外洋) 쪽에는 해식애를 나타내고 곳곳에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사도해수욕장은 조개껍질 은모래로 유명하다. 인근에 거북바위·장사바위·용꼬리화석 등의 기암과 바다 낚시터가 많다. 사도는 물이 빠지면 추도·중도·시루섬·장사도·나끝·연목 등의 섬과 함께 ‘다’자로 이어진다.

사도의 인근 바다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과 3월 영등, 4월 중순 등에 바닷물이 빠지면서 폭 10여m, 길이 3㎞에 이르는 바닷길이 마치 모세의 기적과 같이 열리면 섬 주민들의 축제가 벌어진다. 기후가 온난하고 동백꽃이 무성하여 관광명소가 많다.

경작면적 가운데 논이 88%이고 밭은 12%에 불과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맥주보리·팥·녹두·고구마 등이 생산되며, 유자가 재배 생산된다. 연해에서는 멸치·갈치·장어·문어·전어 등이 어획되며 김과 고막을 양식한다. 섬 주변 일대에 산호초가 자라고 있다.

여수와 백야도·낭도·여자도·개도에 정기여객선이 운행되고 있다. 또 섬과 섬 사이에 나루가 있어 상호 왕래가 빈번하다. 백야리의 백야등대는 1929년 이후 무간수 등대였으나 1959년 유인등대로 바뀌었다. 이 등대의 광달(光達)거리는 17마일이나 되어 여수항을 중심으로 완도·목포·통영·부산 방면으로 오가는 배의 항로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백야리에 백야산성지와 백야곶봉수지·백야곶목장지, 개도리에 개도봉수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4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가 있다.

백야(白也)·제도(諸島)·하화(下花)·상화(上花)·적금(積金)·조발(早發)·낭도(狼島)·개도(蓋島)·월호(月湖)·여자(汝自) 등 10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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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www.yeosu.go.kr)
여수교육청(www.yeosued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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