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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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때 학살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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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이칭
이칭
여수·순천사건, 여수·순천10·19사건, 여순10·19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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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개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 ·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첫째,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 배경과 둘째, 여기에 호응했던 여수 · 순천 지역의 동향이다.

우선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던 제14연대의 반란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金知會), 홍순석(洪淳錫)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후 제4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新月里)에서 제14연대가 창설되었고, 창설 요원 가운데에는 김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池昌洙)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창설 과정에서 좌익 계열 모병관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하였으며, 그 결과 연대 내에는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되었다.

또한 제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제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 · 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제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여수 · 순천 지역의 정치적 동향을 살펴보면,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속에 좌 · 우익간의 공존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들어와 급변하는데, 이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양측 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 · 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는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

경과

제14연대의 반란은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 하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 15~16일 경 육군본부는 제주4·3사건 진압을 목적으로 제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하였으며, 이는 연대 내 남로당 조직에도 전파되었다. 이때는 반이승만 계열로 간주되던 전임 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이 상부에 의해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숙군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도 파병에 대한 반발감이 겹치면서 연대 내의 남로당 조직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제14연대에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이 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는 연단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반대파는 즉각 사살되었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로 진격하였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의 수효에 대해서는 1,000~2,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진격시켰다. 순천 경찰은 이에 응전하였으나 패퇴하였고, 20일 오후 순천도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제4연대 소속 진압군이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하였으며,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여수 · 순천 지역에서는 반란군의 점령에 호응하여 지역의 좌익 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일부 학생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좌익 지하조직은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남로당은 급격하게 진전되는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의 우익 인사 · 경찰관 및 그 가족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 · 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제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상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 지휘는 육군총참모장 송호성이 맡았고,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10월 22일 정부에 의해 여수 ·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고, 같은 날 반란군과 진압군 간의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鶴口里)에서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기를 잡은 진압군은 그대로 순천으로 진격하였으며, 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23일에는 순천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하였다.

10월 24일,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宋虎聲) 준장이 이끄는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美坪洞) 일대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하였다. 여수 공략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월 25일부터 재차 탈환 작전에 나섰다.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반란군의 주력이 빠져나간 여수에는 극소수의 반란군과 무장한 일부 민간인만이 여기에 대항할 뿐이었다. 이틀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여수는 10월 27일 완전히 진압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로써 여순사건은 종결되었다.

진압군의 반란군 진압 과정에서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초기 진압작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군은 강경한 작전을 구사하였으며, 민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반란군 협력자를 모두 색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또한 반란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계속되었다.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사살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결과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 · 재산 피해를 남겼다.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여순사건은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비난하며, 반란 주동에 직 · 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던 좌파 계열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이에 더하여 김구를 비롯한 반이승만 계열의 우파도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공격받았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사건 직후 ‘극우의 정객’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기도하였다고 주장하며 김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국회에서도 위기감을 느껴 「국가보안법」을 1948년 12월 1일에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5% 가량의 장병들이 군을 떠났다.

참고문헌

『다시 쓰는 여순사건 보고서』(여수지역사회연구소, 한국학술정보, 2012)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3 -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2010)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김득중, 선인, 2009)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성대경 편, 역사비평사, 2000)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활동과 그 영향」(이선아, 『역사연구』 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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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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