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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연구(呂鷰九)

      정치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임수경석방투쟁위원회 위원장, 국가장의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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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임수경석방투쟁위원회 위원장, 국가장의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사회주의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함양(咸陽), 서울 출생. 여운형(呂運亨)의 둘째딸로 1947년 7월 이화여전 재학중 동생인 여원구(呂鴛九)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월북, 김일성의 자택에서 그들 가족과 함께 약 2개월간 생활하면서 유학을 준비, 모스크바대학에서 철도공학을 전공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평양외국어대학 교원 등으로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1979년 조국전선 서기국 부국장으로 대남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여연구의 공식적인 활동이 알려진 것은 198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후부터이다. 여연구는 처음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상설회의 부의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 뒤 제8기, 제9기에도 같은 직책을 가지게 되었고, 국제의원연맹(IPU) 제72회와 73회 총회에 의회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최고인민회의의 부의장과 함께 통일전선조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서기국장·의장직을 겸임, 의회뿐만 아니라 통일분야에서도 중요한 책임적 지위에서 활동하였다.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한에서 참가한 임수경(林秀卿)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자, 1990년 4월 임수경석방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91년 1월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매년 8월에 개최되는 범민족대회를 주도하였다.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의 여성 대표로 구성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가 1991년 제1회(동경), 제2회(서울), 1992년 4월 제3회(평양), 1993년 7월 제4회(동경)가 개최되었다. 그 때 여연구는 북한여성대표 단장으로 참가하여 남한의 여성 국회의원과 여성 대표 등과의 비공식회담 등을 진행하였다.
      1991년 11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2회 토론회는 46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어 가족으로는 처음으로 우이동에 위치한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는 1992년 7월 19일 ‘몽양여운형선생추모사업회’가 발족되어 매년 추모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金日成) 사망시에는 국가장의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96년 7월 조국전선 50주년기념토론회 참가를 끝으로 9월 29일에 사망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8년)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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