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시 ()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여주, 이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여주, 이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동남단에 위치한 시.
이칭
이칭
여흥
정의
경기도 동남단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양평군, 강원도 원주시, 충청북도 충주시, 서쪽은 이천시, 남쪽은 이천시, 충청북도 음성군, 북쪽은 양평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24′∼127°45′, 북위 37°07′∼37°25′에 위치한다. 면적은 608.38㎢이고, 인구는 11만 103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8개 면, 3개 행정동(23개 법정동), 225개 행정리(123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여주시 홍문동에 있다.

자연환경

북부에는 산지가 동서로 뻗어 있는데 동쪽에 장산(414m)·관모봉(352m)이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에는 앵자봉(667m)·천덕봉(天德峰, 635m)·원덕봉(564m)이 광주시·이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오갑산(梧甲山, 609m)이 음성군과, 북쪽에는 파사산(婆娑山, 231m)·우두산(牛頭山, 480m)·고래산(643m)·옥녀봉(玉女峰, 419m)이 양평군과 경계를 이룬다.

이 지역의 중앙을 흐르는 한강은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섬강, 남서부의 평지를 흐르는 청미천(淸渼川)·양화천(楊花川)·복하천(福河川), 북쪽에서 흐르는 금당천(金塘川)과 각각 합류하여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이 지역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고 있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는 충적토가 산간이나 소하천을 따라 대상(帶狀)으로 분포하고 있다.

내륙에 분포하고 하천이 많아 기화열로 인하여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연평균 기온 11℃, 1월 평균기온 -6℃, 8월 평균기온은 26℃이며, 연 강수량은 1,173㎜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으나 그것은 지금까지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강변을 따라 많은 구석기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추론할 때, 이곳에도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멱곡동 멱곡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주거유적인 흔암리 유적과 연양리·멱곡리·교리 유적에서 민무늬토기편·석기·검파두식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1977년 서울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로 확인된 점동면 흔암리의 집터와 반월형석도·갈돌[碾石]·무문토기·홍도(紅陶)를 비롯하여 탄화된 보리·조·수수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는 이 지방에서 농경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농경문화의 흔적은 우리나라 미작사(米作史)와 벼농사의 전개경로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적으로는 매룡동 매룡리 고분군의 시기를 달리하는 축조양식과 출토된 고배·도자(刀子)·석침(石枕) 등 7세기경의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여주에는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큰 세력을 이룬 토착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온조가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할 때 전략적으로 요충지인 여주군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22년(온조왕 40)부터 214년(구수왕 1)까지는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금사면 이포리·외평리 성지)에 말갈병의 침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제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 때에는 잠시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다시 백제에 속하기도 했으나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점령할 때인 475년(장수왕 63)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골내근현(骨乃斤縣)이 되었다.

그 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으로 통일의 기반을 구축할 때인 550년(진흥왕 11)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까지도 점유한 562년(진흥왕 23)까지는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다. 660년(무열왕 7) 천녕군(川寧郡)에 술천성을 축조하여 고구려 방비의 제2선으로 삼았다. 경덕왕 때에는 황효(黃驍)라 불렸고 기천(沂川)의 영현으로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940년(태조 23) 황려현(黃驪縣)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강원도 원주(原州) 임내(任內)에 이속되었다가 1031년에 다시 경기도로 귀속되어 감무가 두어졌다.

고종 때에 영의(永義)로, 1305년(충렬왕 31)에는 여흥(驪興)으로 개명되었다. 원종비(元宗妃)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내향이라 하여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知郡事)가 두어졌다. 1388년(우왕 14)에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黃驪)라 불리다가 1389년(공양왕 1)에 우왕이 폐위되어 이곳으로 보내지면서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1)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내향이라고 해서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음죽현의 어서이촌(於西伊村: 지금의 장호원 어석리 북부)이 여흥군에 병합되었다. 1413년 안성·양지·음죽이 충청도로부터 경기좌·우도에 합치될 때 경기도에 예속되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69년(예종 1) 세종의 영릉(英陵)이 천장(遷葬)되면서 천령현이 폐지되어 여흥에 병합되면서 목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판관이 두어져 여주(驪州)로 개명되었다. 천령현은 지금의 흥천면·금사면 전역과 부발면 북부가 합해졌던 지역으로 고구려 때는 술천(述川)·성지매(省知買), 신라 경덕왕 때는 기천으로 불렸고 황효(여주) 땅이 영현으로 되었던 곳이다.

천령현은 1018년 광주에 예속되어 감무가 두어졌다가 1413년 현으로 되었고, 1469년 고을이 없어지면서 여주에 병합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 고장 출신 강원도조방장 원호(元豪)가 향병(鄕兵)을 초집(招集)하여 5월에 여강벽사(驪江壁寺, 신륵사)에서 이천부사 변응정(邊應井)과 협력, 한강을 내왕하는 왜적을 섬멸, 충주·원주에 주둔한 왜적이 지평·양근·양주·광주의 길을 취하여 한성과 통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6월 10일에는 구미포(九尾浦: 지금의 개군면 구미리)에 주둔한 왜병을 기습하여 50여 급을 참수하는 전과를 얻었다.

1895년 목에서 군으로 강등, 충주부의 속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로 환원되어 3등군으로 되었다. 제1차 의병활동기인 을미의병항쟁 때는 심상희(沈相禧)가 1896년 2월 여주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지휘, 일본군을 살해하였다.

을사조약 체결로 일어난 제2차 의병항쟁 때는 이인영(李麟榮)이 13도창의대장으로 양주에 연합의병부대를 집결시켜 서울 공격을 지휘하였다. 그 밖에 여주의병장인 이범주(李範疇)부대가 유명하였고, 민긍호(閔肯鎬)·김봉기(金鳳基)도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7년 8월 10일 여주의병은 한강을 항행하는 일본군 목선을 안창(安倉) 강변에서 기습하여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12일에는 여주읍을 점령하여 서울∼원주 간의 연락을 차단하여 원주의 일본군을 고립상태에 빠뜨렸으며 계속 음죽·장호원을 장악하는 등 수천 명의 의병이 여주에서 활약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주의 지내면(池內面)과 서면(西面)이 여주군에 편입되었고, 주내면이 여주면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내·강천·흥천·능서·금사·개군·가남·점동·대신 등 10개 면이 되었다.

3·1운동 때는 4월 1일 이포(梨浦)의 2,000명, 4월 5일 북내면의 800명, 곡수(曲水)의 3,000여 명의 시위가 있었고, 신륵사 승려 김용식(金用植)의 천송리 시위도 있었다. 1941년 10월 1일 여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 1일 개군면이 양평군으로 편입되었다. 1970년 12월 16일에 금사면 산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9년 4월 1일에 산북면으로 승격되었다. 1992년 3월 2일에는 북내면 오학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95년 3월 1일 강천면 대둔리가 강원도 원주시로 편입되었다. 2007년 북내면 오학출장소가 여주읍 오학출장소로 조직이 개편되었다. 2013년에는 여주군이 여주시로 승격되었으며, 여주읍이 여흥, 중앙, 오학동으로 개편되었고, 가남면이 가남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선사 유적 유물로는 북내면에 여주 석우리 선돌(경기도 기념물, 1992년 지정), 점동면에 여주 처리 선돌(경기도 기념물, 1992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점동면의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경기도 기념물, 1995년 지정)에서 탄화된 보리·조·수수 등의 곡물이 출토되어 우리나라 농경사의 연대를 서기전 7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게 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조질무문토기발(粗質無紋土器鉢)·역석제석부(礫石製石斧)·어망추(漁網錘)·방추차(紡錘車)·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역사시대 유적으로는 대신면 보통리 고분과 능서면 용은리 고분을 비롯하여 상동·매룡동의 상리 고분·매룡리 고분(경기도 기념물, 2002년 지정) 등지가 있다.

성지로는 대신면 천서리에 여주 파사성(사적, 1977년 지정)과 능서면에 신지리 성지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북내면 상교리의 여주 고달사지(사적, 1993년 지정)에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천송리의 신륵사(神勒寺) 경내에는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1963년 지정)·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1963년 지정)·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1963년 지정)·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1963년 지정)·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1963년 지정)·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1963년 지정)·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여주 신륵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2004년 지정)·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2004년 지정)·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2004년 지정) 등이 있다.

창동·하동에는 여주 창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과 여주 하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이 나란히 있으며, 금사면 외평리에 포초골 미륵좌불(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흥천면에 여주 계신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 금사면 도곡리에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등이 있다.

불경으로는 강천면 이호리 목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보물, 1992년 지정)·묘법연화경 권1(보물, 1992년 지정)·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24(보물, 1992년 지정) 등이 있다.

사지로는 금사면의 장흥사지(長興寺址)·주록리 사지, 산북면의 하품리 사지, 하거동의 하거리 사지와 연라동의 연라리 사지, 대신면의 보통리 사지·상구리 사지, 점동면의 삼합리 사지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여주시 하동의 강한사(경기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교리의 여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금사면 이포리의 기천서원지(경기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에 세운 모현사(慕賢祠), 능서면 번도리의 매산서원(梅山書院), 1871년(고종 8) 서원철폐 때 헐린 대신면 후포리의 고산서원지(孤山書院址) 등이 있다.

고건축물로는 여주시 능현동의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와 상리의 영월루(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대신면 보통리의 여주 보통리 고택(중요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 점동면 사곡리에 여주 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경기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 등이 있다.

분묘로는 능서면 왕대리의 여주 영릉과 영릉(사적, 1970년 지정)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에 참여했던 이완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가 여주시 상거동에, 고려의 명장으로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가 산북면 후리에, 구암 한백겸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1998년 지정)가 강천면 부평리에, 민진장 묘역(경기도 기념물, 2006년 지정)이 점동면 부구리에, 원호·원두표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4년 지정)이 북내면 장암리에, 죽서 원몽린 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4년 지정)이 대신면 상구리에 있다.

고려시대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상방하원석실묘가 북내면 상교리에 있으며, 정대년 신도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가 점동면 원부리에 있다.

1456년(세조 2) 6월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잠시 머물러 쉬면서 이 샘물로 갈증을 달랬다고 하는, 대신면 상구리의 단종 어수정이 있다. 생활 유물로 보통리의 여주 보통리 해시계(경기도 민속문화재, 1980년 지정)가 있다. 금사면 이포리에는 이포리 옹기가마(경기도 민속문화재, 2002년 지정)가 있다.

금석 및 문헌으로는 여주시 능현동의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와 하동의 대로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산북면 백자리의 이충원 호성공신교서(보물, 1986년 지정)과 송암 이충원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998년 지정), 가남면 심석리에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및 송언신 초상(보물, 1987년 지정)과 여산송씨 족보(경기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대신면 계림리에 홍진 호성공신교서(보물, 2001년 지정)과 인재 홍진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 흥천면 복대리에 임은 이민곤 영정(경기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강천면 부평리에 여주군 경수연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북내면에 여주 신접리의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천연기념물, 1968년 지정)가 있으며, 노거수(老巨樹)로는 능서면 왕대리의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천연기념물, 2005년 지정), 여주시 우만동의 향나무, 흥천면 계신리와 강천면 간매리의 은행나무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강천면 이호리 목아박물관의 목조각장(국가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 금사면 이포리의 옹기장(경기도 무형문화재, 2013년 지정), 북내면 오금리의 사기장(백자)(경기도 무형문화재, 2005년 지정)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서 1392년(태조 1)에 창건된 여주향교와 1580년(선조 13)에 설립된 기천서원(沂川書院), 1686년(숙종 12)에 설립된 고산서원(孤山書院), 1785년(정조 9)에 설립된 대로사 등과 그 밖의 서당·서재 등 사설 교육기관들이 상당수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개설된 개진학교(開進學校), 1908년 공립학교의 인가를 받은 여주보통학교, 1909년 설립된 북내공립보통학교 등이 시초이다. 1912년 여주보통학교에 여주공립간이농업학교가 부설되어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으며, 1919년 이포공립보통학교 설립을 계기로 각 면 단위로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에 여주농업중학교가 설립되었고, 1952년 여주여자중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아 1955년 여주여자고등학교로 병설 운영되다가 여주여자종합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74년 인문계고교로 여흥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9개교, 여주대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여주군립도서관과 여주군민회관이 있다. 여주문화원이 주관하는 세종문화큰잔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한글백일장, 도자기축제 등 도자기에 관한 행사가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흔암리 쌍룡거줄다리기·여주 답교놀이·해촌낙화놀이 등이 있다.

점동면 흔암리 쌍룡거줄다리기는 농경사회 이래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민속놀이로서, 구 여주읍에서 남한강 상류로 약 10㎞를 거슬러 올라간 강변마을인 흔암리에서 연희된다.

이 마을에는 수백 년 된 홰나무가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줄기를 바라보며 무성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데, 바로 이 나무 아래에서 흔암리, 여주시 삼교동·멱곡동, 강천면 굴암리 등 12개 마을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에 모여 쌍룡거줄다리기를 하며 그 해의 풍년과 태평성세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 놀이는 이 마을이 수로교통의 요충지였던 시절 도처에서 몰려온 뱃사람들이 얼어붙은 강물이 풀리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 머무를 때 행하던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였다.

정월대보름날 가남면 해촌과 소곡동 마을에서는 낙화놀이를 즐긴다. 메밀짚을 태운 물에 창호지를 담갔다가 말려서 봉지를 만들고, 그 안에 참나무숯가루와 소나무껍질 빻은 것을 소금과 혼합해서 담는다. 이것을 강변에 매단 줄에 달고 봉지에 불을 붙여 숯가루가 타면서 물에 낙화하는 모양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농기싸움·장치기·갈퀴치기·낫치기 등의 민속놀이가 전하여진다.

동제로는 흥천면 내사리와 점동면 처리 등지에 산산제가 있었다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흥천면 효지리의 경우는 지금도 매년 10월 상달에 날을 가려 서낭당에서 동제를 지내며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감사하고 있다.

북내면 천송리 소지개(송포동) 마을에서도 2년마다 정월 14일을 기해 마을 앞 나무숲에서 동제를 지낸다. 제수(祭需)는 돼지머리와 떡을 쓰는데, 특이한 것은 동제가 끝난 후 마을주민이 남녀로 양분되어 줄다리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여자편이 이기면 장마가 지고 남자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처녀와 총각은 이 줄다리기에 참여할 수가 없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서 전승되는 설화의 특징은 대체로 인물과 결부된 인물전설 및 야담사화류가 많다는 것이다. 고향이 이 고장인 원두표(元斗杓)와 여주시 상거동에 묘소가 있는 이완장군 등에 관한 이야기가 인물전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조반정 때 앞장서서 도끼를 들고 성문을 두들겨 부수었다고 해서 ‘도끼정승’이라고 불렸다는 원두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원두표 형제가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지관은 세도 있는 사람만 묘자리를 보아주고 한미한 사람은 보아주지를 않자 지관을 데려오기 위해 꾀를 낸 이야기가 있다.

원두표의 동생이 지관을 데리고 오다가 “지관노릇을 하려면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보아주어야지 부자만 보아주니 혼나봐라.”하고 나무에 매달아놓고 가버렸다. 조금 뒤 형 두표가 우연을 가장하여 지관을 구해주고 묘자리를 얻었더니 그 명당 덕분으로 원두표가 정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오고 있다.

「이완대장이야기」는 젊은 시절의 이완이 환갑을 하루 앞둔 부자노인의 집으로 들어가 주인을 골탕먹이고 돈을 얻어내어 가난한 노인을 도와 땅을 사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또한 「무학(舞鶴)대사의 탄생설화」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과부며느리가 백일기도 후 하늘이 내린 복숭아를 먹고 아들을 낳았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단둘이 사는데 아이를 낳은 사실이 민망해서 아들을 버렸더니 그 아이를 학이 품었다. 이를 본 어느 대사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고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그 아이가 자라서 무학대사가 되었다.

「말무덤전설」은 주인인 남양홍씨가 전쟁터에서 죽게 되자, 타고 있던 말이 그 주인의 목을 물고 왔기 때문에 말의 무덤과 비를 세웠다는 데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이 밖에 여름에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하고 호랑이를 중국으로 쫓아버렸다는 「강감찬장군이야기」, 신립(申砬)이 그에게 정을 준 여인의 사랑을 거절했다가 탄금대(彈琴臺)에서 패배하게 되었다는 「신립장군이야기」등의 설화를 비롯해서 어희적(語戱的)인 소화(笑話)로부터 성(性)과 관련된 것까지 많은 양의 소화가 구전되고 있다.

이 고장에는 「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상여소리」·「달구질소리」·「터다지기」 등의 기능요와 「노랫가락」·「창부타령」 등의 비기능요가 구연되고 있다. 부요(婦謠)로서 「시집살이노래」와 「베틀노래」는 길쌈노동요이다.

이 고장은 논농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특히 「논매기노래」와 「모심기노래」 등의 농업노동요가 많이 구연되고 있다.

「논매기노래」를 후렴을 가지고 분류하면 대략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논배미를 얼른매고/ 장구배미로 옮겨가세/ 오호일 에히아 에헤야……”이고, 둘째는 “간다간다 나돌아간다/ 어럴럴럴 상사뒤야/ 가길렁은 가드래도/ 어럴럴럴 상사뒤야/ 이내정은 다두구나가요/ 어럴럴럴 상사뒤야/ 내가가며는 아주가나……”이다.

셋째는 「단허리」라고도 부르는 노래인데, “석양은 재를넘고/ 어허오울싼 단허리야……”라고 부른다.

‘골았네’라는, 이듬맬(논밭을 두번째 갈거나 매는 일) 때 부르는 「논매기노래」를 보면, “여봅소사 농부님네 이자리를 매일적에/ 어호 골았네 뎅이만슬슬 굴려라/ 천석군이 만석군이 백만장자가 굴려가네/ 어호 골았나 뎅이만슬슬 굴려라/ 한톨심어 열톨나구 열톨심어 백톨나니……”와 같다. 가락이 아주 단조로우나 비교적 빠르고 힘차며 지루함을 잊고 힘을 내어 일을 하게 하는 내용의 단순한 선창중답식 노래이다.

다음과 같은 「자진방아노래」도 논맬 때 불린다. “……에∼ 이방아가 어디방아냐/ 에히여라하 방아호/ 에∼ 여주이천에는 자체방아/ 에히여라하 방아호/ 어∼ 강태공에는 조작방아……”와 같다.

이 고장에서는 「모심기노래」를 「어리렁타령」으로 쓰는데 “이락에 서산에 해는지니/ 이논배미 심기가 늦어를가네/ 아리랑 어리랑 어러리요/ 어리랑 에헤요 어러리야/ 점심에 참이나 늦어가니 이논에 이배미를 얼른심세/ 아리랑 어리랑 어러리요/ 어리랑 어헤요 어러리요……”와 같다.

그 밖에 「장타령」·「떡타령」·「한강수타령」·「언문풀이」등이 있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49%가 임야이고 경지는 27.8%에 불과하며 하천은 7.0%, 도로는 3.6%. 대지는 2.6%이다. 경지 중 논이 1만 10㏊, 밭이 6,907㏊이며,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녹두·고구마가 생산되고 채소류로 고추·배추·무·참외·수박·오이·호박·가지·파 등이, 특용작물로는 땅콩·참깨·들깨가, 과실류로는 사과·배 등이 생산되고 있다.

임산물로는 밤·도토리·대추·은행 이외에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5.1%이다.

주요 광산물은 고령토·규석·장석 등이 있다. 제조업은 비급속공업·조립공업·섬유공업·식료품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남한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자갈·모래·점토·백토·고령토 등을 원료로 하는 도자기 공장이 북내면 싸리산에 집중되고 있다.

서울·인천 등 대도시와 인접해 있고 토지가 싸고 영동 및 중부고속도로의 개설로 소비지와의 접근성이 높아져 공장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상업활동은 가남장이 1·6일, 여주장이 5·10일, 대신장이 4·9일이 있고 여주시내에는 상설시장이 개설되어 있다. 주요 거래품목으로는 고구마·고추·땅콩 등이 유명하다.

교통은 군의 중앙부를 국도가 십자(十字)로 지나고 있어 외지와의 소통과 교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도로는 영동고속도로가 군의 중부를 동서로 지나고 국도 42호선이 중부를 동서로 지나고 국도 37호선이 군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철도로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경강선이 2016년부터 부분적으로 개통하여, 여주시를 지나고 있다.

과거에는 남한강을 이용하는 하천교통이 발달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이포나루가 있을 뿐이다. 이포나루는 이천과 양평을 연결하는 나루터로 이용되고 있다.

관광

이곳 사람들은 남한강을 여강이라 부르는데 남한강 주변의 수려함은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져 관광지로서의 조화가 잘 되어 있다. 여주시내 여강변에 위치한 신륵사는 그 종소리가 천년을 깨우고 절 앞을 흐르는 여강은 보트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여주는 예로부터 농경문화가 일찍이 발달하여 우리나라 벼농사의 전개경로를 추적해볼 수 있는 역사지이기도 하다.

특히, 여주 지역에는 선사시대 유물은 물론 대신면 보통리, 능서면 용은리, 여주시 상동, 매룡동 등지에 많은 고분이 있고, 대신면 천서리에는 파사성이 있으며, 능서면의 신지리 성터를 비롯해 곳곳에 유적이 풍부하게 분포되어 좋은 문화유적 관광지를 이루고 있다.

중요한 관광명소로서는 능서면 왕대리의 영릉, 변도리의 매산서원, 북내면 천송리의 신륵사와 상교리의 고달사지, 상교리의 석실묘, 신접리의 백로와 왜가리 번식지, 여주시 교동의 여주향교, 능현동의 명성황후 생가, 하동의 삼층석탑, 금사면 후리의 서희장군 묘, 대신면 보통리의 해시계 등을 들 수 있다.

고건축물로는 상동에 영월루와 능현동에 명성황후생가, 대신면 보통리에는 김영구가옥이 있다. 특히, 금사면을 비롯하여 여주 전역에는 장흥사터·절터 등의 불교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불교 문화유적 관광지로서의 발전이 기대된다.

여주의 대표적 관광지는 신륵사인데 절뒤로는 숲이 우거지고 왼쪽 곁으로는 암벽이 절경을 이루고 마당 앞으로는 여강이라 하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절경을 이룬다.

읍·면
  1. 여흥동·중앙동·오학동[구 여주읍(驪州邑)]

면적 73.22㎢, 인구 5만 1520명(2015년 현재). 본래 여주읍이었으나 여주군이 여주시로 승격되면서 여주읍 관할 23개 리가 모두 법정동으로 개편되었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1900년에 여주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산지는 남서쪽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경계 지점에 대포산(大砲山, 251m)·신통산(神通山, 235m) 등이 읍 중심부를 향해 뻗어 있다. 동쪽 면계를 따라 남한강이 굽이쳐 돌아가고, 서쪽의 소양천(昭陽川)과 동쪽의 점동천·연양천 등의 하천이 북류하여 남한강에 합류한다.

이들 수계망을 따라 곡저평야가 펼쳐지나, 경지면적은 군내에서 중하위권에 불과하다. 일부 벼농사를 비롯하여 원예작물과 잎담배 등이 재배된다. 축산업으로 한우·돼지·닭 등이 사육되는데 특히 한우 사육량이 제일 많다. 지역의 중심지답게 각종 상업시설과 숙박 및 음식점업을 비롯한 서비스업 계통이 발달했다.

교통은 예전에는 수운의 중심지였고, 노년층에게는 익숙한 수여선(水驪線) 철도가 놓였던 곳이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읍 중앙을 횡단하면서 여주인터체인지를 지나고, 37번 국도가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북부에는 42번 국도가 가로지른다. 이 밖에도 1번 군도가 남동쪽에서 동쪽을 따라 이어져 국도와 만난다. 군의 중심지역이어서 각종 도로가 교차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창동에 삼층석탑, 하동에 삼층석탑·강한사·대로사비, 상거동에 이완장군 묘, 교동에 여주향교, 상동에 영월루, 능현동에 명성황후 생가·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있다.

모두 23개의 법정동이 있으며, 3개의 행정동이 법정동들을 관할하고 있다. 여흥동 관할 구역은 상동, 홍문동, 점봉동, 삼교동, 능현동, 멱곡동, 우만동, 단현동, 신진동, 연양동, 매룡동, 상거동, 하거동이고, 중앙동 관할구역은 창동, 하동, 교동, 월송동, 가업동, 연라동이며, 오학동 관할구역은 천송동, 오학동, 현암동, 오금동이다.

  1. 가남읍(加南邑)

군의 남서단에 위치한 읍. 면적 75.29㎢, 인구 1만 6246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태평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여주읍내의 남쪽이 되므로 근남면이라 하여 안정·금교·동막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서곡면(加西曲面)·소개곡면(召開曲面)·근남면(近南面) 등 3개 면, 수계면(首界面) 하거리(下巨里) 일부, 음죽군(陰竹郡) 근북면(近北面) 흑석리(黑石里)·자은동(自隱洞) 각 일부가 병합되어 근남의 이름을 따서 가남면이 되었다.

산지는 대포산·신통산(神通山, 235m)·강금산(剛金山, 281m) 등이 주로 동쪽 경계에 위치하고, 남쪽 경계에 연대산(蓮臺山, 227m)이 있다. 나머지 지역은 낮은 저산성 구릉지가 많다.

서부의 양화천 지류인 대신천(大新川)·안금천(安金川) 유역과 동남부의 삼승천(三承川) 유역에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대체로 동북쪽은 산악지대이고 서남쪽은 평야지대가 많은 지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농경지가 넓게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많이 행해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두류·서류와 복숭아·배 등의 과실 산출량이 많은 편이다. 특히 일부 농가에서 생산되는 신고배는 품질이 좋아 지역의 특산물이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닭·산양·오리 등이 사육되며, 그 중에서 젖소·돼지·오리 등의 사육 두수는 군내에서 제일 많다. 유리섬유·식품 등의 제조업체도 분포한다.

교통은 영동고속도로가 북단을 횡단하여 여주시로 이어지고, 남서부에 3번 국도가 이천시를 끼고 그 사이를 종단하고 있다. 331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북쪽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335번 지방도가 동쪽에서 면 중앙을 지나 북쪽으로 종단하면서 331번 지방도와 교차한다. 이 밖에도 2·4번 군도가 남부 구간을 연결하는 등 각종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심석리에 선조어서사송언신밀칠첩 및 송언신 초상과 여산송씨 족보가 있다. 안금리에 대법사(大法寺)가 있다.

태평(太平)·신해(新海)·상활(上活)·대신(大新)·은봉(隱峰)·건장(建章)·심석(心石)·삼군(三軍)·하귀(下貴)·정단(鼎丹)·오산(五山)·화평(花坪)·본두(本斗)·안금(安金)·양귀(兩貴)·연대(蓮臺)·금당(金塘)·금곡(金谷)·송림(松林)·삼승(三承) 등 20개 리가 있다.

  1. 강천면(康川面)

군의 중앙부 동쪽에 위치한 면. 면적 74.40㎢, 인구 3,80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간매리이다.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역으로 강천면이라 하여 마감·걸촌·기은 등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여주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富論面) 칠리(七里) 일부가 편입된 뒤 10개 리를 관할했는데, 강천면이란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1995년 대둔리(垈屯里)가 강원도 원주시로 편입되는 행정구역 변화가 있었다.

북부와 북동쪽 경계지점에 당산(塘山, 541m)·관모산(冠帽山, 362m), 북서쪽에 보금산(寶金山, 367m)이 솟아 그 자락이 면 전체를 굽어보는 지형이다. 남서부에서 남부 지역 전체를 활처럼 굽어 흐르는 남한강과 남서부의 섬강(蟾江)이 면의 경계를 이룬다.

주변의 가정천(稼亭川)·걸은천(傑隱川)·간매천(看梅川)·부평천(釜坪川) 등의 하천 모두가 이 강줄기에 합류한다. 이들 유역에 충적·곡저평야가 일부 분포하나, 산과 물이 많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특성을 찾을 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모습을 띤다.

농작물로 미곡이 많은 양은 아니지만 산출되며 과수재배도 행해진다. 축산업으로 한우·돼지·닭·오리 등이 사육되는데 특히 오리 사육이 활발하다.

교통은 영동고속도로가 면의 남단을 가로지르고, 42번 국도가 중앙을 횡단한다. 이밖에 7·9·10번 군도가 남북을 종횡으로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이호리에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24·목조각장, 부평리에 한백겸 묘 및 신도비·여주군 경수연도가 있으며, 그리고 이호리에 목아불교박물관이 있다. 부평리의 가마섬유원지와 도전리에 위치한 폭포는 시원한 물줄기와 낙수 등 빼어난 자연조건을 구비하여 주민들의 휴식처로 애용된다. 걸은리에 원주원씨(原州元氏), 간매리에 청주곽씨(淸州郭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간매(看梅)·이호(梨湖)·걸은(傑隱)·가야(伽倻)·적금(赤今)·굴암(窟巖)·강천(康川)·부평(釜坪)·도전(道全) 등 9개 리가 있다.

  1. 금사면(金沙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1.78㎢, 인구 3,10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포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전북·용담·백자 등 2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흥곡면(興谷面)의 충신동(忠信洞) 일부가 병합되면서 1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0년 산북출장소가 개설되었다. 1989년 산북출장소가 6개 리의 행정구역을 둔 산북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남서쪽에 원적산(圓寂山, 564m)·천덕봉(天德峰, 635m), 서쪽에 대렴봉(415m) 등 비교적 높은 산이 있다.

동쪽에서 북단으로 남한강이 면의 경계를 흐르고, 하단의 계장천(桂章川)을 비롯하여 금사천·상호천·소유천 등이 남한강에 합류하면서 연안에 띠 모양의 좁은 곡저평야가 펼쳐진다. 농경지의 경지 면적은 군내에서 최하위이나,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상대적으로 밭농사가 많이 행해지는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외에 보리·콩 등의 경작이 성행하고, 남한강 연안의 모래땅에서는 땅콩의 산출이 많다. 특산물로 금싸라기 참외가 유명하며, 궁리에는 도내 유일한 옹기생산업체가 있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 등이 사육되나 사육두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교통은 남한강을 잇는 이포대교가 건설되어 인근 면과의 연결이 원활해졌다. 365번 지방도가 동쪽에서 중앙을 횡단하며, 383번 지방도가 남동부 지역의 일부 구간을 통과한다. 이 외에 6번 군도가 서쪽에서 남단을 가로질러 흥천면으로 이어진다.

문화유적은 외평리에 포초골 미륵좌상, 도곡리에 석불좌상, 이포리에 기천서원지가 있는데 기천서원지에는 모현사가 있다. 이 외에도 주록리에 천도교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의 묘가 있다. 하호리에 파평윤씨(坡平尹氏), 장흥리에 황주변씨(黃州邊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이포(梨浦)·궁(宮)·도곡(道谷)·장흥(長興)·전북(箭北)·소유(巢由)·상호(上虎)·금사(金沙)·외평(外坪)·하호(下虎)·주록(走鹿) 등 11개 리가 있다.

  1. 능서면(陵西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3.07㎢, 인구 6,66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번도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영릉이 있으므로 수계면이라 하여 신지·매류·매화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계면(水界面)의 대부분과 길천면(吉川面)의 일부 지역이 합쳐져 13개 리로 개편되어 능서면이 되었다.

동단의 북성산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낮은 평지로 이루어졌다. 북단에는 남한강줄기가 관류하며, 양화천(楊花川)이 서부를 종류하면서 그 지류인 매류천(梅柳川)이 중앙으로 흘러들어 그 주변에 충적평야가 조성되었다. 대부분의 면적이 평야지대에 해당하고 경지율도 비교적 높은 편으로,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더 많이 행해진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이외에 맥류·서류 등이 산출되는데 특히 고구마가 많이 재배되며, 복숭아 등의 과수도 있다. 번도리 일대에서는 논에 오리를 방사하여 저공해 농산물을 생산하는 새로운 농법이 도입되어 농가의 수입원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축산업은 돼지의 사육이 많다.

교통은 42번 국도가 여주시내와 이천시 부발읍을 연결하면서 옛날의 역마소(驛馬所)를 그대로 관통해 중앙을 지난다. 335번 지방도가 중서부를 종단하고, 365번 지방도가 북서쪽에서 북부를 지나 흥천면으로 이어진다. 이 밖에 3·12번 군도가 각각 남북의 도로를 잇는 가교역할을 한다. 문화유적은 왕대리에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번도리에 매산서원, 용은리에 고분 등이 있다.

번도(番都)·구양(九陽)·왕대(旺垈)·백석(白石)·내양(內楊)·용은(龍隱)·매화(梅花)·양거(兩巨)·마래(馬來)·광대(廣大)·매류(梅柳)·신지(新池)·오계(梧溪) 등 13개 리가 있다.

  1. 대신면(大神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75.81㎢, 인구 7,48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율촌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우물가에 큰 소나무가 있었으므로 한솔면 또는 대송면이라 하여 천서·당남·송산 등 1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송면(大松面)·등신면(等神面), 양평군 남면(南面) 일부 지역이 합쳐져 18개 리로 개편되었고, 대송면과 등신면의 각 한 글자씩을 따서 대신면이 되었다. 1987년 남한강의 윗쪽인 흥천면의 양촌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19개 리의 행정구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북단에 우두산(牛頭山, 460m), 북서쪽에 파사산(婆娑山, 231m) 등 북쪽 양 경계지점의 산자락이 면내로 뻗어 있고, 남단은 주로 평지가 펼쳐진다. 북서쪽에서 남단까지 남한강이 면 경계를 이루며 길게 이어진다.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는 북쪽의 신래천(神來川)과 남쪽의 한천(寒川)을 비롯하여 그 사이에 후포천·계림천·장풍천 등이 있다. 그 주변 일대에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고, 밭농사와 논농사가 모두 활발한 편이다. 군 전체에서 농경지 면적이 제일 넓은 대표적인 농업 중심지역이다.

주요 농산물로 쌀·보리 이외에 고구마의 생산량이 많으며, 특히 이 지역의 특산물인 땅콩은 퇴적사질토에서 생산되어 품질이 좋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닭·산양 등을 사육하는 농가도 있다. 광산은 천남리에 규석광산이 있다.

교통은 37번 국도가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져 여주시내와 양평읍을 연결하고, 328·383번 지방도가 면 중앙과 북쪽을 지난다. 이들 국도와 지방도에 8·9·11번 군도가 면 사이 사이를 종횡으로 잇고 있다. 문화유적은 천서리에 파사성, 보통리에 고분군·사지·김영구 가옥·해시계가 있다. 이 밖에 상구리에 석불입상과 사지가 있다.

율촌(栗村)·후포(後浦)·당산(堂山)·가산(加山)·천남(川南)·하림(下林)·상구(上九)·장풍(長豊)·옥촌(玉村)·윤촌(潤村)·무촌(茂村)·도롱(道弄)·계림(桂林)·송촌(松村)·천서(川西)·당남(塘南)·보통(甫通)·초현(草峴)·양촌(楊村) 등 19개 리가 있다.

  1. 북내면(北內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5.81㎢, 인구 5,24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당우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여주읍내의 북쪽이 되므로 북면이라 하여 옹암·현저·학동 등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면과 강천면 가정리,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池內面) 전체가 합쳐져 19개 리로 개편, 북면과 지내면의 한 글자씩을 따서 북내면이 되었다. 1992년 오학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2007년 여주읍 오학출장소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면세가 크게 줄었다.

산지는 북서쪽에 우두산, 남동쪽에 보금산, 중앙에서 남서부 방향으로 소달산(蘇達山, 358m) 등의 산줄기가 면 전체를 감싸고 있다. 남쪽 면계를 따라 남한강이 흐르고, 이곳으로 모아지는 금당천(金塘川)을 비롯하여 그 지류인 완장천(完長川)·오금천(五今川) 등이 흐른다.

주로 남서부 지역에 드넓은 곡저평야를 중심으로 미곡지대가 조성되고, 평지가 중앙부로 긴 꼬리 모양으로 발달하였다. 농경지 면적은 전체 읍·면 중에서 중간정도에 불과하나, 미곡 위주의 농업지역으로 맥류·두류·서류의 경작은 물론, 보리와 마늘의 수확량도 많다.

배를 중심으로 과수농업도 이루어지며, 이밖에 한우·젖소·돼지·닭·산양·오리 등이 사육된다. 특히 오리 사육수는 군 전체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제조업체가 많이 있어, 공업분야도 군 전체에서 제일 발달한 지역에 속한다. 양질의 백토·점토·고령토를 생산하는 2개소의 광산이 있어 도자기·공예품 제조 등의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달했다. 특히 오금리의 싸리산 고령토광산은 전국에서 품질이 제일 우수한 도자기 원료를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교통은 42번 국도가 남단을 통과하고 37번 국도가 남서부를 종단한다. 331번 지방도가 42번 국도에서 갈라져 나와 면 한 가운데를 종단하고, 328번 지방도가 면의 북단을 가로지른다. 이 외에도 주로 남단을 중심으로 5·9·10번 군도 등 여러 갈래의 도로망이 발달되는 등 편리한 교통망을 갖추었다.

문화유적은 천송리의 신륵사에 극락보전·조사당·다층석탑·다층전탑·보제존자석종·보제존자석종비·대장각기비·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있다. 상교리의 고달사지에는 승탑을 비롯하여 원종대사탑비와 원종대사탑·석조대좌 등이 있다. 그리고 석우리에 선돌, 중암리에 흥왕사(興旺寺)가 있다.

신륵사 주변은 1983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특히, 오금리·현암리·오학리·천송리·지내리 일대에 약 600여 개의 도요(陶窯)가 밀집되어 있다. 신접리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가 있다. 운촌리에 원주이씨(原州李氏), 신접리에 여흥민씨(驪興閔氏), 지내리에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당우(堂隅)·신남(新南)·천송(川松)·오학(五鶴)·현암(峴巖)·오금(五今)·외룡(外龍)·내룡(內龍)·상교(上橋)·주암(注巖)·서원(西院)·석우(石隅)·덕산(德山)·장암(長巖)·중암(中巖)·운촌(雲村)·신접(新接)·지내(池內)·가정(稼亭) 등 19개 리가 있다.

  1. 산북면(山北面)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32.89㎢, 인구 2,54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품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흥곡면(興谷面)의 충신동(忠信洞) 일부가 합쳐져 17개 리로 편성된 금사면에 속해 있었다. 1970년 산북출장소가 설치되고 1989년 산북출장소가 산북면으로 승격, 금사면에서 분리되었다.

대부분의 면적이 산악지대에 해당하는데, 북서쪽에 광주산맥의 지맥인 양자산(楊子山, 710m), 서쪽 경계에 앵자봉(鶯子峰, 667m), 남쪽 경계에 천덕봉 등 고봉들이 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남한강에서 발원하여 면 북부와 중앙을 관류하는 용담천(龍潭川)·주어천(走魚川) 연안에 좁고 긴 곡저평야가 있을 뿐이다. 평지를 찾기 힘든 만큼 농경지 비율은 군 전체에서 가장 낮고, 상대적으로 밭농사가 우세한 곳이다.

특별한 산업시설이 없는 만큼 주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작물은 쌀을 비롯하여 맥류·두류 등이 생산된다. 산지가 많아 산나물과 버섯류의 산출도 많다. 이 밖에 한우·젖소·닭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도 있다.

교통은 329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고, 365번 지방도가 동쪽에서 중앙으로 횡단하면서 329번 지방도와 만난다. 남단에는 6번 군도가 중앙으로 향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백자리에 송암 이충원 영정과 호성공신교서, 후리에 서희(徐熙)장군 묘가 있으며, 하품리에 주어사지 등이 있다.

상품(上品)·송현(松峴)·후(後)·하품(下品)·백자(栢子)·용담(龍潭) 등 6개 리가 있다.

  1. 점동면(占東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71.75㎢, 인구 4,83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청안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점량면이라 하여 도리·중리·하리 등 2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근동면(近東面)의 처동(處洞)·흔암동(欣巖洞) 등 25개 리가 합쳐져 점량과 근동의 이름을 따서 점동면이 되었다.

북서쪽에 신통산, 남동쪽에 오갑산(梧甲山, 609m) 등이 솟아 있고, 이 외에도 면 곳곳에 200∼300m 내외의 산지가 많이 분포한다.

면의 북단은 남한강이 경계를 이루며, 북단에서 뻗어나온 청미천(淸渼川)이 중앙 한 가운데를 굽이쳐 흐른다. 그 지류인 관한천(寬閑川)·삼승천(三承川)·금곡천(金谷川) 유역에 충적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우세한 지역으로, 주요 농산물로는 미곡을 중심으로 보리와 잎담배 등의 경작이 많은 편이다. 축산업은 한우·돼지·닭·오리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도 많다.

교통은 37번 국도가 남서쪽에서 서부 지역을 종단하여 여주 읍내로 연결되고, 335번 지방도가 동쪽에서 중앙을 지나 서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 밖에 4번 군도 등 각종 도로망이 정비되어가는 추세다. 남단과 서쪽이 충주시와 접해 있다. 문화유적은 원부리에 정대년 신도비, 처리에 선돌, 흔암리에 선사유적이 있다. 이 밖에 뇌곡리에는 7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청안(淸安)·부구(富九)·덕평(德坪)·원부(元富)·관한(寬閑)·뇌곡(雷谷)·성신(聖莘)·당진(唐辰)·현수(玄水)·사곡(沙谷)·장안(長安)·삼합(三合)·도(道)·흔암(欣巖)·처(處) 등 15개 리가 있다.

  1. 흥천면(興川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4.16㎢, 인구 5,20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효지리이다.

본래 여주군 지역으로 긴 내가 있으므로 길천면이라 하여 효지·상백양·하백양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흥곡면(興谷面) 하다·복대 등 11개 리, 길천면(吉川面) 11개 리, 금사면(金沙面) 궁리(宮里) 일부, 그리고 이천군(利川郡) 부면(夫面) 대왕리(大旺里) 일부, 백사면(栢沙面) 현암리(玄巖里)·온방리(溫方里) 일부가 통합되어 15개 리로 개편되었다. 1987년 남한강 윗쪽의 양촌리가 대신면에 편입되었다.

북서쪽 경계를 남한강이 흐르고, 중앙을 관류하는 복하천을 비롯하여 양화천·내사천(內絲川)·송말천(松末川) 등 하천유역이 분포한다. 농경지가 폭넓게 조성될 수 있는 자연적인 조건 때문에 충적평야가 곳곳에 펼쳐져 있으며, 경지율이 높은 농경지에서 논농사가 광범위하게 행해진다.

농산물로는 쌀의 생산량과 땅콩·고추의 경작이 성하며 포도를 비롯한 과수농업도 발달했다. 복대리 일대에서는 소독하지 않은 자연상태의 느타리버섯이 생산된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산양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가 골고루 분포하는데, 특히 닭의 사육두수가 군내에서 제일 많다.

교통은 335번 지방도가 남단에서부터 면 중서부를 종단하면서 북단의 383번 지방도와 연결되고, 365번 지방도가 남한강의 경계를 따라 북부로 이어진다. 문화유적은 계신리에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 있다. 귀백리에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효지(孝池)·복대(卜大)·계신(桂信)·문장(文章)·내사(內絲)·외사(外絲)·상대(上大)·다대(多大)·하다(下多)·상백(上白)·귀백(歸白)·율극(栗極)·대당(大塘)·신근(莘根) 등 14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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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여주시(www.yj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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