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당시의 장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신라
주요 관직
사찬(沙?)
관련 사건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목차
정의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당시의 장수.
생애 / 활동사항

생몰년은 알 수 없으며 관등은 사찬(沙飡)을 지냈다. 열기(裂起)는 김유신(金庾信)이 화랑(花郞)일 때 그 소속 낭도(郎徒)였다. 중고시대의 화랑도는 진골(眞骨)귀족을 비롯하여 왕경(王京) 내의 하급귀족, 평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사회계층을 망라하여 조직된 청년단체이다. 이들은 동일한 목표를 위해 3년간 함께 수련하며, 유사시에는 군 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한다. 나아가 이들은 성업(成業) 후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한다. 더욱이 화랑집단의 성원이나, 그 출신자들은 유사시 적전에 임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게 됨으로써 결국 귀족계급과 평민 사이에는 정신적인 일체감이 양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과 열기 역시 화랑과 낭도로써 이와 같은 유대감을 가졌던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의 서울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으나 군량이 떨어져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김유신을 시켜 쌀 4,000석과 벼[租] 2만 2,250석을 당군에 보급하도록 하였다.

당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항쟁하는 신라로서는 당군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와 같은 것이었다. 군량을 실은 신라 군사는 온갖 지세의 험난함을 무릅쓰고 장새(獐塞: 지금의 황해도 수안)에 이르렀으나, 혹심한 추위로 군사와 말이 많이 얼어 죽고 피로하여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기 쉬워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하루빨리 소정방에게 군량을 가져왔음을 알려야 하였다. 그 때 보기감(步騎監) 보행(輔行: 副使)으로 있던 열기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군사(軍師) 구근(仇近) 등 15명과 함께 적지를 가로질러 이틀 만에 소정방에게 이르러 사명을 전하고 그 회신을 받아 다시 이틀 만에 군진으로 돌아왔다.

김유신은 그 용맹을 가상히 여겨, 급찬(級飡)의 벼슬을 주었다. 떠나기에 앞서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국경을 넘은 뒤에 상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서울로 돌아온 뒤에 다시 왕에게 주청하여 열기에게 한 등급 위인 사찬을 주도록 하여 그의 공로를 높이 드러냈다. 열기는 김유신이 죽은 뒤에도 정권을 잡은 김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의 후원으로 삼년산군(三年山郡: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통일전쟁사』(노태돈,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9)
「7세기 삼국통일전쟁과 신라의 군사활동」(강종훈, 『신라문화』24, 2004)
「신라 삼국 통일의 연구」(문경현, 『경북사학』19, 1996)
『신라 골품제 사회(新羅 骨品制 社會)와 화랑도(花郞徒)』(이기동, 일조각(一潮閣),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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