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가곡리 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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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가곡리 고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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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석실분. 시도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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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석실분. 시도기념물.
내용

1994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말무덤’이라 전해온다. 또는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에서 순절한 이의정(李義精)의 말이 옷만 물고 와 죽어서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지역은 옛 양산현(陽山縣)이 있던 곳으로 신라 때에는 조천성(助川城) 또는 조비천현(助比川縣)이라 하였다. 신라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곳으로 신라태종무열왕의 사위인 김흠운(金歆運)이 전사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은 비봉산의 동쪽 산아래 논 가운데에 있으며, 698번 지방도의 바로 곁이다. 1993년 여름에 충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당초 봉분의 규모는 직경 5m, 높이 1.9m였다. 석실은 장축을 동남향으로 하였으며 평면이 장방형이다.

벽은 할석으로 쌓고 천정은 커다란 판상할석(板狀割石)으로 덮었다. 내부에는 동쪽으로 치우쳐 시상(屍床)을 마련하였고 북서쪽 모서리에 부장품을 두었다.

석실의 규모는 남북 220∼245㎝, 동서 153∼162㎝, 높이 172㎝이고, 시상의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110∼118㎝이다. 천정은 길이 약 210㎝, 너비 약 200㎝, 두께 38∼40㎝의 돌 1장으로 되어 있다. 시상은 1차로 너비 50∼58㎝의 것을 동쪽벽에 잇대어 만든 뒤, 다시 할석으로 덧대어 2차 시상을 만들었다.

유물은 청동으로 만든 과대금구(銙帶金句) 1점, 쇠칼 1점, 쇠살촉 1점, 뚜껑이 있는 목긴 병 1점, 뚜껑이 있는 합 10점 등이 나왔다. 유물들은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장식무늬가 찍힌 것들이다.

의의와 평가

이 고분은 2차 매장에 의한 유물의 연대가 대체로 7세기 중엽 이후로 여겨지고 있어 신라 통일전쟁과 가까운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고분은 655년의 조천성싸움과 관련될 수 있는 유적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경잡기(東京雜記)』
『영동가곡리고분(永同柯谷里古墳)』(충북대학교박물관, 1994)
「조천성(助川城)의 위치(位置)에 대(對)하여」(성주탁, 『백제연구(百濟硏究)』4, 1973)
「백제조천성고(百濟助川城考)」(정영호, 『백제연구(百濟硏究)』3,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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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차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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