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온성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온성 부분
인문지리
지명
광복 당시 함경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군.
정의
광복 당시 함경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서·북쪽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여 중국 길림성(吉林省)·혼춘(琿春)·도문(圖們) 지방과 마주 대하고 있으며, 남쪽은 종성군과 경원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9°50′∼130°16′, 북위 42°45′∼43°01′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429.72㎢, 인구 3만 8459명(1944년 현재)이다. 6개 면 23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온성면 동화동이다.

자연환경

함경산맥(咸鏡山脈)의 여맥이 이곳까지 뻗어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며, 중앙은 낮고 평평한 분지가 발달하였다. 높은 산지는 없고 낮은 구릉성의 산지로, 영와면에 증산(甑山, 340m)과 남양면에 연대봉(煙臺峰, 365m)이 솟아 있다. 낮은 고개로 정관령(鄭關嶺, 550m)·충동령(忠東嶺, 649m)이 있어 인접 군과의 교통에 큰 역할을 한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은 남양면 풍리동 부근에서 곡류하여, 풍서동에서 비교적 넓은 하안평야를 이루고, 온성과 훈융 지역에는 넓은 범람원을 발달시켰다.

이 밖에 남산천(南山川)·월파천(月坡川)·풍천천(豐川川) 등이 북류하여 두만강에 유입한다. 지질은 신생대 제3기 층과 중생대의 화강암층이 발달되었으며, 토양은 하천 퇴적물의 비옥한 사양토이다.

북쪽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겨울에는 삼한사온이 현저하다. 연평균 기온 5.9℃, 1월 평균 기온 -13.4℃, 8월 평균 기온 22.7℃, 연 강수량 547.2㎜이다. 첫서리는 9월 상순, 마지막 서리는 4월 중순경에 내린다.

역사

[고 대]

이 군에서 선사 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으나 인접지인 종성군 동관진(潼關鎭)에서 포유류 동물의 화석과 함께 적록·거록 등의 뿔 또는 골각기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두만강 하구인 경흥군 노서면 해안에서 굴포문화(屈浦文化)라고 부르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이곳에서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고 본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두만강 유역의 이 지방은 옛날 부족 국가 시대에는 숙신(肅愼)·읍루(挹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있던 고지(古址)이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판도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여 그 땅에 당나라의 군정이 실시되었을 무렵에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699년(효소왕 8)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을 때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였다.

[고 려]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된 초기의 영역은 신라 시대의 판도에 지나지 아니하여 발해와 북계를 이루었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무너진 이후 수세기 동안 이 지방은 요(遼)·금(金)·원(元) 등 여러 이민족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발해 멸망 당시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의 일부는 차차 남하하여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이 확대되어 고려와의 충돌이 잦았다. 원·명 교체기인 공민왕 말기에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지금의 함경남도 갑산에서 함경산맥의 동측을 따라서 두만강 하구 지방까지 수복하였다.

[조 선]

1410년(태종 10) 두만강 하류의 경원성에 여진이 침공하였으므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니 그 이북의 땅은 약 25년 동안 공허가 되었다.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하자 1440년(세종 22) 지난날 다온평(多溫平)이라 불리던 이곳에 온성군(穩城郡)이 신설되어 길주 남부와 안변 북부 사이의 여러 고을 백성을 이주시켰다.

1441년에는 도호부로 격상되어 판관을 두고 토관을 설치하였다. 1442년 진(鎭)이 설치되었고, 한때 고을 이름을 전성(氈城)으로 고쳤다가 다시 온성으로 불렀다. 1630년(인조 8) 유원토병(柔遠土兵) 양사복(梁士福)이 유배인과 모반하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3년 다시 부로 환원되었다.

[근 대]

1895년 지방관제가 바뀌어 온성군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래 경원군에 속하였던 훈융면이 이 군에 편입되었으며, 1937년 유포면을 남양면으로 고쳤다.

온성은 지난날 도내에서 가장 면적이 작고 변변하지 못한 농촌 지대였으나, 1935년 남양과 훈융 두 곳에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개통으로 그 분기점이 되었고, 군내 두 곳에 갈탄광이 개발되었다.

또한, 3개 면에 걸친 수리조합이 창설되면서 국경 지방의 곡창 지대로서 그 면모가 일신되어 1945년 당시 6개 면 23개 동에 호구는 7,882호 3만 8459명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일찍이 간도로 망명하여 1920년에 도독부(都督府)의 사령관과 대한독립단의 사령관으로서 봉오동(鳳梧洞)·삼도구(三道溝)·다산리(多山里)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북간도와 시베리아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한 최진동(崔振東, 일명 明祿), 그리고 간도 신민단(新民團) 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각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박승길(朴昇吉), 동간도국민회 회장과 간북총판부 남부총판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일생을 항일 투쟁에 바친 구춘선(具春先) 등이 있다.

유물·유적

축성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온성읍성을 비롯하여, 유원진(柔遠鎭)·미전진(美錢鎭)·영현진(鈴峴鎭)·영달진(永達鎭)·황자파보(黃柘坡堡)·주원보(周原堡)·시건보(時建堡)·낙토보(樂土堡)·풍천보(豐川堡) 등의 여러 옛 성지와 진보(鎭堡) 등이 있다.

온성읍성은 처음에는 주위 1,684m, 높이 2.7m, 성내에 우물 25개소가 있는 석성(石城)이었는데, 1608년(선조 41) 부사 정원(鄭沅)이 토축(土築)으로 길이 4.83㎞, 높이 1.5m로 다시 쌓았다.

유원진은 읍에서 서쪽 7㎞ 거리에 있는 석성으로 주위 1,117m, 높이 2.7m 이며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다. 미포면 미산동에는 주위 1,102m, 높이 2.4m의 미전진이 있는데, 역시 병마첨절제사영으로 사용되었으며, 1484년(성종 15)에 풍천보를 이전하여 설치한 진(鎭)이다.

읍에서 남쪽으로 12㎞되는 영충면 영달동에는 주위 935m, 높이 2.4m의 석축으로 된 영달진이 있으며, 1442년(세종 24)에 보(堡)를 설치하였다.

읍에서 동쪽으로 10㎞ 되는 미포면 월파동에는 주위 51.2m, 높이 2.4m의 석축으로 된 황자파보가 있으며, 읍에서 동쪽으로 4㎞ 되는 지점에는 영현진이 있다. 읍내에는 객사의 문루인 진변루(鎭邊樓)가 있고, 유원진에는 유원관(柔遠館)이 있으며, 남양면에는 개원사(開院寺), 훈융면에는 청계사(淸溪寺) 등의 사찰이 있다.

교육·문화

최초의 교육기관으로는 온성향교가 있으며, 연대 미상이나 어느 유배인이 설립하였다는 충곡서원(忠谷書院)이 있어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까지 존속하여 많은 유생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각지의 많은 서당에서 초등교육이 행하여졌다.

근대 교육기관으로 1911년 온성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사립학교로 보흥학교(普興學校)가 설립되었다. 1920년에는 훈융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 유치원 3개소, 초등학교 13개교가 있다.

종교 분포는 불교 사찰로 석왕사(釋王寺)·영월사(英月寺)·개원사·청계사 등이 있으며, 기독교회는 캐나다계의 장로교회 4개가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사슴의 보은으로 태어났다는 〈전백록설화〉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중엽 어느 해 여름 백록의 어머니가 집에서 삼베를 짜고 있었는데 별안간 흰 사슴 한 마리가 울안으로 뛰어 들어와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틀림없이 무엇엔가 쫓겨온 것이 분명하여 가엾은 생각으로 뒤뜰에 끌어다 누여 물을 먹이고 입고 있던 치마를 덮어 숨겨 놓았다.

한참 있다가 포수 2명이 달려와서 사슴을 찾으며 물었다. 그녀는 태연히 베틀에 앉아 사슴을 본 적도 없거니와 아낙네 홀로 속옷 차림으로 일하는 집에 함부로 뛰어드는 무례가 어디 있느냐고 꾸짖어 쫓아 버리고, 얼마 뒤에는 기력을 되찾은 사슴도 놓아주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흰 사슴이 나타나서 옥동자를 얻으리라고 하더니 곧 태기가 있어 남자 아이를 낳았다. 아기 이름을 처음에는 백록(白鹿)이라 하였다가 뒷날 백록(百祿)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고장은 우리 나라 최북단의 두만강변에 위치한 육진 중의 하나로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또는 지리적인 영향 때문에 뿌리 깊은 향토적인 민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근대요로서 가사나 곡조가 애수에 젖은 소박한 노래로 〈애원성〉과 〈농요〉가 대표적인데, 특별한 악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나 양푼을 두드리며 부른다.

그중 〈농요〉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에헤 디야디야 헤에/소리를 티자 헤에이/소리를 티고 매여나 보자/나혜 혜이고 허허허/소리를 티며 매여 보자./에헤 디야디야 헤에/밭 갈고 논 맹그러 헤에이/나혜 혜이고 허허허/소리를 티며 매여 보자.”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윷놀이·씨름·널뛰기·그네·연날리기 등이 있다. 정월에는 윷놀이가 성행하고 단오에는 씨름과 그네, 추석에는 널뛰기와 연날리기를 한다. 윷놀이의 윷가락은 나무윷이 아니고, 강낭콩에 세 줄의 금을 새긴 것을 쓰며, 추운 지방이기 때문에 실내 오락으로서만 놀이를 한다.

정월 보름날 밤에는 달맞이 윷점이 있어 소반에 정화수를 떠 놓고 달에 절한 다음 윷을 세 번 굴려서 나온 수에 따라 당년수책을 보고 그해의 운수를 점친다.

동제로는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산천제가 있다. 마을에 맹수가 횡행하여 민가의 가축을 해치거나 열병이 유행하여 민심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재앙으로부터 구호해 달라고 산천 모든 신에게 드리는 치성으로서 대개 음력 3월 중 길일을 택하여 마을의 공동 부담으로 한다.

장소는 마을에서 가장 그윽하고 정결한 노목이나 암석 밑에 임시 제단을 마련하여 그중에 ‘산천지신위’라고 쓴 신주를 모신다.

모든 준비는 미리 선정한 재가에서 여러 명의 소임이 목욕재계하고 이를 집행한다. 제수로는 돼지머리와 제주·시루떡·백미·백포 등을 마련하여 진설하고, 그 밖에 집집마다 메 한 그릇씩을 지어 제단에 바친다. 의식은 제관의 분향·헌작·배례와 고축·소지 등으로 끝난다. 행사 뒤에는 그 자리에서 음복하고 제육은 고루 나눈다.

산업·교통

전체 경지면적은 9,351㏊이며, 이 중 밭이 7,889㏊, 논이 1,462㏊로 경지율은 24.4%이다. 도내 다른 군에 비하여 경지율이 높은 편이며, 두만강 연안의 퇴적평야 지역인 미포·온성·훈융면을 중심으로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밀·콩·조·수수·옥수수·감자·쌀 등이며, 특용작물로 대마가 많이 생산된다. 농가의 부업으로 소·돼지 등의 사육이 많으며, 특히 광복 전에는 남면북양정책(南棉北羊政策)에 따라 면양을 많이 사육하였는데, ‘온성면양’이라 하여 유명하다. 이 군은 목축에 적합한 환경으로, 예로부터 몽고종의 면양을 사육하여 왔으나, 양털의 질이 좋지 않아 호주산 코리데일 품종을 도입하였다.

특히, 온성·미포·훈융면이 대표적 사육지로서, 이곳은 기후 조건이 적합하고 질이 좋은 목초가 풍부하여 각 가정마다 면양을 사육하였다. 따라서, 온성군은 한때 양털과 모사 생산이 많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광산물로는 온성·장사(長砂)에서 갈탄이 채굴된다. 매장량은 약 700만 톤에 달하며, 탄층의 평균 두께는 1∼2m, 휘발분은 약 40% 내외, 고정탄소 35∼42%, 열량은 6, 000㎈이다. 탄질은 흑휘탄이며, 점결성이 적어 코크스 제조에는 부적당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갈탄은 전량이 북선선 철도를 통하여 웅기·나진·청진 등으로 수송된다.

상업 활동으로 군내에는 5일장인 남양장·온성읍장·훈융장이 개시되어 활발한 상거래를 하였다. 훈융은 국경무역의 요충지로서, 북간도의 관문인 남양과 동간도의 혼춘을 연결하는 국제시장이었으나, 1930년대 국제철도와 동만철도(또는 훈융선)가 부설된 뒤에는 국내의 지방 시장으로 전락하였다.

남양장은 군내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곡류·건어·염어·다시마류·가축 등의 농수산물과 생활필수품의 거래가 활발하다. 온성읍장은 우시장과 신탄 거래가 활발하고, 훈융장은 가축 시장과 곡류·야채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이 밖에 북창평은 이 군과 경원·종성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우시장이 유명하다.

철도는 온성에서 종성군과 연결되는 함경서부선과 경원군을 경유하여 웅기에 이르는 함경동부선이 있으며 남양에서 중국의 혼춘에 연결되는 훈융선이 있다.

도로로 신의주와 온성을 잇는 국도가 있으며, 온성을 기점으로, 북창평-행영(行營)-회령, 훈융∼서수라 간 국도가 있다. 이 밖에 온성-남양-도문대교-간도 간 도로는 국제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두만강은 겨울철에 동결되어 약 4개월간 도보로 건널 수 있으며, 남양과 훈융은 개항시로서 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두만강은 협곡이며 유수량이 적어 내륙 수로의 구실을 못한다.

명승고적으로는 대증산·소증산·구암봉 등의 이름난 산이 있으며, 황파진쌍암과 황파진 부근 두만강 연안에는 큰 입석이 있다. 온성읍내에 객사의 문루인 진변루, 훈융면의 훈융진 등이 있다.

읍·면

[남양면南陽面]

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89.99㎢, 인구 4,60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남양동이다. 본래 유포면(柔浦面)이었으나, 1930년대 남양이 국경의 관문으로서 이름이 높아짐에 따라 1937년 남양면이라고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면의 남동쪽은 낮은 구릉이 기복되어 있으나, 서북부의 두만강변에 이르며 평지화된다. 북류하던 두만강이 면의 북쪽에서 직각으로 굽이쳐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이다. 두만강 연안은 충적평야를 이루며, 온성수리조합에 속하여 국경 지방 굴지의 쌀산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피·기장·수수·옥수수·콩·팥·녹두 등이며, 특히 콩은 알맹이가 굵고 유분이 적어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특산물로 삼베가 생산되며, 양잠도 활발하다.

자연환경이 유축농업에 적절하여 소·면양·돼지·닭 등을 많이 사육한다. 이곳의 소는 북선우(北鮮牛)라 하여 성질이 온순·강건하고, 몸매가 크며 번식률도 높아 전국적으로 이름난 품종이다.

북선선(北鮮線) 철도가 두만강 연안을 따라 지나며, 남양-도문 대교-간도 간 국제 교통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남양(南陽)·풍리(豐利)·세선(世仙)·향당(香棠)·풍서(豐西) 등 5개 동이 있다.

[미포면美浦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9.79㎢, 인구 5,63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덕동이다. 본래 미전면과 황파면이었으나, 1904년에 이를 병합하여 미포면이라 하여 지금에 이른다.

면의 북쪽은 증산산맥의 지맥이 점점 낮아져 미포평야를 이룬다. 면의 북쪽과 동쪽의 국경을 이루며 동류하던 두만강은 미산동에서 남류하며, 황파진에서 다시 유로를 바꾸어 동류한다. 훈융면과 함께 국경 지방의 쌀 산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피·보리·수수·옥수수·기장·콩·팥·녹두 등 잡곡생산이 많다. 또한, 유축농업이 발달하여 소·면양·돼지·닭 등의 개량종을 많이 사육한다. 두만강을 따라 북선선 철도가 지나며, 풍인역과 황파역이 있다. 국도로 온성∼훈융 간 도로가 지난다.

명승고적으로 황파진쌍암이 있으며, 1484년(성종 15)에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세운 미전진과 1523년(중종 18)에 세운 황파진이 있으나, 지금은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장덕(長德)·풍인(豐仁)·풍교(豐橋)·미산(美山)·월파(月坡) 등 5개 동이 있다.

[영와면永瓦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69.02㎢, 인구 4,29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남동이다. 본래 영원면의 일부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와면과 영충면으로 분리되었다.

면의 중앙에 증산이 솟았으며, 대체로 남고북저의 구릉이 기복된 지세이다. 주요 농산물은 조·보리·수수·기장·옥수수·메밀·콩·팥·녹두 등의 잡곡이 많이 생산되며, 특히 콩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가축으로 소는 북선소만을, 면양은 호주산 코리데일 종을 사육한다. 특산물로 누에고치와 삼베가 있다. 온성과 회령을 연결하는 두 갈래의 국도가 면의 중앙과 서부를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용남(龍南)·송북(松北)·석수(石水)·상화(上和) 등 4개 동이 있다.

[영충면永忠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81.34㎢, 인구 3,64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북창평동이다. 본래 영원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충면과 영와면으로 갈라졌다.

면의 동남단에 증산이 솟아 있고 북쪽에 운무령이 있으며, 이들 산령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남북이 좁고 동서가 긴 지형이다. 주요 농산물은 조·보리·기장·수수·옥수수·콩·팥·녹두·감자 등이며, 특히 콩의 품질이 좋다. 유축농업이 발달하여 북선소·면양·돼지·닭 등의 사육이 활발하며, 특산물로 누에고치와 삼베가 있다.

북선선 철도가 면의 서쪽을 지나고 온성을 기점으로 두 갈래의 도로가 영와면을 지나 영달동과 북창평동을 각각 통과하여 종성군에 이른다. 명승고적으로 증산이 있으며, 이곳에 옛 봉수대가 있다.

또한, 증산과 운무령 기슭에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북창평(北倉坪)·회덕(懷德)·영달(永達) 등 3개 동이 있다.

[온성면 穩城面]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4.65㎢, 인구 8,55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화동이다. 본래 다온평(多溫坪)이었으나 1440년(세종 22)에 온성이라 하였다. 이후 한동안 전성(氈城)이라 개칭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다시 온성이라 하여 지금에 이른다.

도내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면으로 동서의 폭이 좁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북선선 철도가 지나며, 온성을 기점으로 훈융면·영와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온성수리조합이 설립되어 있으며, 쌀 생산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조·피·기장·보리·수수·옥수수·콩·녹두 등이다. 유축농업이 발달하여 소·면양·돼지 등을 많이 사육한다.

광산물로 심청동의 남산탄광에서 갈탄이 채굴된다. 유적으로 진변루의 옛 성지가 있으며, 면내 여러 곳에서 강변을 따라 김종서가 쌓았던 행성(行城)의 옛터가 보인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동화(東和)·서흥(西興)·심청(深淸)·주원(周原) 등 4개 동이 있다.

[훈융면訓戎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4.89㎢, 인구 4,60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풍무동이다. 본래 경원군에 속해 있었으나, 1904년에 온성군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른다.

면의 남부는 경원군과의 경계에 마유산(馬乳山)이 솟아, 그 여맥이 동쪽으로 뻗어 두만강 유역에서 평지화되었다. 북쪽 국경을 동류하던 두만강은 면의 동북쪽에서 유로를 바꾸어 직각으로 남류한다.

면의 동북부 일대는 비옥한 충적평야로서 두만강수리조합 구역내에 들어가며, 도내 쌀 산지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조·피·기장·수수·콩·녹두 등이 생산되며, 소·말·면양 등의 유축농업이 발달하였다. 광산물로 풍무동의 훈융광산에서 갈탄이 많이 생산된다.

두만강을 따라 북선선 철도와 강변도로가 지나며, 1939년 두만강에 국제철도가 가설되고, 중국의 혼춘까지 동만철도가 개통되었다. 풍무동에는 육진 개척 당시 김종서가 축성한 훈융진이 있으며, 당시 회령의 독산연대(禿山煙臺)에서 종성과 온성 등을 거쳐 이곳에 이르는 행성을 쌓은 말성(末城)으로, 지금도 면내 곳곳에 그 잔성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풍무(豐舞)·금화(金華) 2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면·온성면·미포면·영화면과 종성군 종성면의 1개 이로 면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이 단위로 통폐합하여 군 행정구역을 개편하였으며, 훈융면은 경원군에 이관하였다.

1954년 온성읍을 고성리로, 남양리를 온성읍으로 개편하고, 영강리를 종성군에 이관하였다. 1974년 5월 종성군이 폐지되면서 이 군에 속해 있던 종성읍·산성노동자구·삼봉노동자구·강안리·영강리·풍계리·풍천리·동포리·하삼봉리·창평리가 편입되었다.

1975년 11월에는 온성읍이 남양노동자구로 되고, 고성노동자구가 온성읍으로 개편되었다. 1976년 2월 심청리가 왕재산리로 개칭되고, 1981년 10월에는 동계리가 강안리로 편입되었다.

이 군의 동쪽은 새별군, 남쪽은 회령시, 북쪽과 서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하여 있다. 동경 129°44′∼130°09′, 북위 42°37′∼43°00′에 위치하며, 인구는 14만6810명이다(1996년 현재).

행정구역은 온성읍과 남양(南陽)·상화(上和)·주원(周原)·풍인(豊仁)·온탄(穩炭)·삼봉(三峰)·종성(鍾城)·산성(山城) 등 8개 노동자구, 풍서(豊西)·세선(世仙)·향당(香棠)·용남(龍南)·왕재산(旺載山)·미산(美山)·월파(月坡)·강안(江岸)·영강(營江)·풍천(豊川)·하삼봉(下三峰)·창평(蒼坪)·풍계(豊溪)·동포(東浦) 등 15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온성읍이다.

함경북도 북부 산지대에 속하는 군으로서 동남부에는 중산(1,040m)를 비롯하여 넓은덕산(894m)·굴산(991m)·방학령(947m) 등이 솟아 있으며, 지형은 동남쪽에서 북부 두만강 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두만강 연안 일대에서는 낮은 언덕과 평탄한 충적지를 이루고 있다.

두만강이 군의 북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며, 그 지류인 용남천·풍천천·월파천·향단천 등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용남천에는 용남저수지가 있다.

토양은 갈색산림토를 비롯하여 두만강 유역에 충적토가 분포되어 있다. 군의 전반적 지역에 널리 발달되어 있는 3기 층에는 약 2억6000만 톤으로 추정되는 갈탄이 매장되어 있으며, 이 밖에 천연스레트·자철광도 묻혀 있다.

연평균 기온 5.5℃, 1월 평균 기온 -12.5℃, 8월 평균기 온 21.6℃이며, 첫서리는 10월 4일경, 마감서리는 5월 7일경에 내린다. 연평균 강우량은 560㎜이다.

산림은 군 전체 면적의 66%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지역에 이깔나무·소나무·참나무·자작나무·피나무·단풍나무 등이 섞여 있다.

이 군의 주산업은 석탄 채굴업과 농업으로 농경지는 군 전체 면적의 30%로서, 그중 밭이 80%를 차지한다. 주요 작물은 옥수수·쌀·콩 등이고, 보리·감자·채소류도 경작하고 있다.

공예작물로는 담배가 기본이고, 과일 생산에서는 과수 단지를 중심으로 이 지방의 특산물인 백살구와 사과·배가 생산된다. 축산은 닭공장·오리공장 같은 가금업 기지들이 있고, 소·양·염소·돼지 등이 많이 사육되고 있다.

한편, 풍부한 석탄자원을 바탕으로 채굴 공업이 발달하였다. 함북 북부탄전에 속하는 온성·주원·상화·풍인 등 대규모 탄광을 비롯하여 40여개의 중·소규모 탄광에 의하여 채굴된 갈탄은 청진공업지구와 함경남도·양강도에까지 공급되고 있다. 군내에는 제약 공장과 가성소다 공장을 비롯하여 식료품·일용품·도자기 등을 생산하는 소규모 지방 공장들이 설치되어 있다.

교통망으로는 함북선(청진∼나진) 철도가 두만강을 연안을 따라 지나며, 함북선과 연결되어 동포선(종성∼동포)·평선(강안∼성평)·상화선(온성∼상화)·주원선(온성∼주원) 등 산업용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특히, 함북선의 남양역과 삼봉역에서는 중국과 통하는 국경 철도가 분기한다. 그 밖에 회령시 및 군내의 남양·미산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군내에는 왕재산 참나무와 1억 년 전 민물호수(중생대 백악기의 담수 퇴적층)에 서식했다는 온성물고기화석층이 있다. 그 밖에 관연대·쌍암 등의 명승지와, 훈제집터·수항루·동관진 원시 유적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온성고등중학교·삼봉고등중학교 등이 있다. →종성군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온성부읍지』
『함북대관』(김성덕, 정문사, 1937)
『함경북도지』(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80)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79)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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