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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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암사동 유적 주거지 복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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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고 내려가 벽체 없이 지붕만 씌운 건축물.
내용 요약

움집은 땅을 파고 내려가 벽체 없이 지붕만 씌운 건축물이다. 움막이라고도 하며 고고학에서는 수혈주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보편적인 살림집으로 이용되었다. 움집을 만들 때는 먼저 두 개의 기둥을 땅에 박아 Y자형으로 고정시킨다. 지붕은 풀이나 짚단으로 만든다. 움집의 평면은 원형과 방형이 일반적이다. 움집은 비바람은 피할 수 있어도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막을 수 없었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온돌이 발명되면서 이러한 불편은 해소된다. 영동지방 등에서는 김치 같은 저장용 건물로 움집을 이용하고 있다.

목차
정의
땅을 파고 내려가 벽체 없이 지붕만 씌운 건축물.
내용

움막 · 움막집이라고도 하며, 고고학에서는 주1라 한다. 벽체라는 개념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려는 요구를 만족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땅을 파서 자연적인 토벽을 만들어 지붕만 덮는 움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집은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인 삼국시대까지 보편적인 살림집으로 이용되었다고 추측된다.

3×6m 정도의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땅을 추운 지방에서는 1m 정도, 따뜻한 지방에서는 50㎝ 내외의 깊이로 파낸 뒤 바닥을 평평히 고른다. 그 후 파낸 땅바닥의 길이 방향 중심선에 3m 간격으로 두 개의 기둥을 땅에 박아 고정시킨다.

Y자형 기둥머리 사이에 주2를 걸쳐 끈으로 고정시키는데, 이러한 방식의 기둥을 외다리형 기둥이라 하고, 도리와 기둥의 결구방식은 가랑이맞춤이라 한다.

서까래주3로 쓰일 약간 굵은 나뭇가지의 한쪽 끝은 파낸 땅 바깥 주위에 비스듬히 구멍을 파고 묻어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 끝은 도리에 비스듬히 걸쳐 고정시킨다.

기둥 높이의 4분의 3 정도 되는 위치에 ‘지르메’라는 짤막한 도리를 묶어 짧은 모서리 부분의 서까래를 고정시키면 주4 형태의 지붕틀이 만들어진다.

서까래 위에 가는 막대기들을 발같이 엮어 그 틈새마다 풀이나 짚단을 아래쪽부터 끼워올라가면서 지붕을 잇고 용마루에 해당하는 부분을 거적 따위로 씌워 빗물이 지붕을 타고 흐르도록 한다.

짧은 모서리의 한쪽에 입구를 내고 출입을 위하여 움집 내부에 계단을 만들거나 입구 바깥쪽 땅을 비스듬히 파내어 경사로를 만들면 움집이 완성된다. 필요에 따라서 길이방향으로 기둥 한 두 개를 더 세워 기다랗게 확장해나갈 수 있으며 이 때는 입구를 양쪽에 내어 출입에 편리하도록 한다.

바닥 면적은 20∼30㎡, 평균 5, 6명의 식구가 사용하였다. 이동 생활이 요구되는 수렵 · 채집 경제 시대의 움집은 원형 평면이 일반적이었고, 정착생활 단계인 원시농경시대에는 방형(方形) 평면이 일반적이었다. 두 평면 사이에 과도기적 형태로 사각형의 모퉁이를 둥글게 한 말각방형(抹角方形)의 평면도 존재하였다.

이렇게 정착된 직사각형 평면은 이후 민가에 있어서 원형적인 평면 형태가 된다. 내부 공간은 점차 기능에 의하여 분화되어 출입구 가까이는 농기구를 둔 남자들의 공간이 되고, 가장 깊숙한 곳은 토기 등을 둔 저장공간인 동시에 여자들의 공간이 되며, 중간은 작업공간이 된다.

이러한 원초적인 기능분화는 후대 민가의 공간 기능의 원형이 된다. 남자들의 공간은 사랑방 · 사랑채로, 여자들의 공간은 안방 · 안채로, 작업공간은 부엌과 행랑으로 각각 발전하게 된다.

움집을 만들어 비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난방은 화로인 노(爐)에 의존해야 하였으므로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불편은 철기시대에 이르러 온돌이 발명됨으로써 해소된다.

철기시대의 움집에 사용된 초기의 온돌은 한줄로 고래를 만들어 바닥의 일부만을 난방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깡[炕]’과 유사하지만 점차 바닥 전부에 구들을 놓아 우리 나라의 보편적인 난방 방식인 온돌이 완성된다.

이와 같이 움집은 구조 · 방법 · 평면의 형태, 공간의 분화, 설비의 면에서 모든 살림집의 원형이 된다. 움집은 내부의 가장자리가 낮아서 활동이 불편하고 창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채광과 환기가 극도로 불리하다. 따라서, 벽체가 땅위로 올라온 이후에는 주거용으로 움집을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임시가설용 주거나 깍정이 · 주6와 같은 하층민의 주거로 이용된 예만 발견할 수 있다. 영동지방에서는 김치를 얼지 않게 저장하기 위한 ‘김치깍’이나 소여물을 저장하는 ‘깍지우리’ 등에 움집을 이용한다. 다른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저장용 건물로 움집을 이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주택건축』(주남철, 일지사, 1980)
『한국의 살림집』(신영훈, 열화당, 1983)
주석
주1

선사 시대 인류의 일반적인 주거 양식. 땅을 둥글거나 네모나게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렸다. 바닥에는 돌을 깔고 가운데에 노를 만들었으며 둘레에는 배수구를 팠다.    우리말샘

주2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우리말샘

주3

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그 위에 산자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4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6

넝마나 헌 종이, 빈 병 따위를 주워 모으는 사람. 또는 그런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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