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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유리 용융 가마터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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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규사 · 탄산석회 등의 원료를 용융된 상태에서 냉각하여 얻은 투명한 비결정 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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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규사 · 탄산석회 등의 원료를 용융된 상태에서 냉각하여 얻은 투명한 비결정 고체.
내용

초자(硝子)·파리(玻璃)라고도 한다. 유리는 특유의 투광성, 다양하고 임의로운 색채의 발현성, 용이한 성형성, 비교적 큰 경도와 불투수성, 재생성 등을 지닌 물질이다. 자원의 순환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옛날부터 제조되어 왔고 귀중하게 다루어져 왔다. 대략 기원전 1세기까지는 매우 귀해서 거의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으며, 곡옥(曲玉)·귀걸이·인조보석 등 장식품의 소재로 사용되는 불투명 색유리가 있었다.

유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Plinius,G.P.)가 지은 ≪박물지≫에 “천연소다를 무역하는 페니키아의 상선이 지중해 연안 강 하구에 이르러 식사 때가 되어서 취사 준비를 하고자 했으나 주위는 모래사장이고 솥을 걸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기들 배에 적재한 소다덩어리를 받침으로 하여 솥을 걸고 불을 붙여서 취사를 하는데, 불길이 세짐에 따라서 소다가 모래와 융합하여 처음 보는 반투명의 액체가 몇 줄기 흘러내려왔다. 이것이 유리의 기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그럴듯한 전설은 후에 실험에 의해 실증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니키아인의 해상무역활동이 있기 오래 전, 즉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부터 유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어 이 전설은 유리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해서도 유리가 만들어졌다는 전설로 인정될 수 있다.

유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집트설과 메소포타미아설이 있으나 모두 확증은 없다. 그 뒤 로마에서 동방의 이란으로도 전해져 이슬람계 유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로마시대의 유리가 우리 나라 신라시대의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널리 보물로서 교역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유리는 낙랑시대의 것인데, 유리구슬·귀걸이 등 장식유리이다. 신라시대 이전의 유리이기는 하지만 이것들과 같은 유리가 중국·중앙아시아·동남아 및 몽고 등지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어 이 유리는 중국 한(漢)나라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며, 낙랑에서 제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 볼 만하고 특징적인 유리기구가 출토된 것은 신라시대 경주고분에서이다. 1921년에 발굴된 경주의 금관총(金冠塚)에서 두 개의 유리잔, 1924년에 발굴된 금령총(金鈴塚)에서 두 개의 유리주발, 1926년에 발굴된 서봉총(瑞鳳塚)에서 암청색의 반투명 기포유리로 된 유리주발이 출토되었다. 이후 1973년 155호 고분 천마총에서 유리잔과 유리그릇이 출토되었고, 98호 고분에서 넉 점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지금까지 동양에서 출토된 유리그릇에서는 볼 수 없는 기종이라고 한다.

이 밖에 유리구슬은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분포도 상당히 넓은 것으로 보아 신라산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그 증거는 미약하다. 그러던 중 1981년 5월 2일에 경상북도 경주군 내남면 덕천리 성부산 기슭에서 유리용 융가마터가 발견되어 신라에서 유리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1989년 8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사가 실려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충남 부여읍 합송리 청동기 유적에서 출토된 관옥(원통형 유리장신구)은 2,200년 전인 기원전 2세기 전반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랜 유리제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성분 분석에 의하면 합송리 유적의 관옥은 납-바륨 계통의 유리이다.”라는 내용이다.

신라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보이는 유리 제조가 고려·조선시대에는 도자기에 밀려 쇠퇴하고 청자와 백자가 찬란한 꽃을 피웠다. 근대에서 본격적인 유리 제조는 1902년 이용익(李容翊)이 건립한 국립유리제조소에서 시작되었다. 이 제조소는 러시아 기술자의 협력으로 건설된 병유리 생산시설을 갖춘 공장이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으로 별 효과 없이 폐쇄되었다.

그 뒤 1909년에 서울특별시 서대문에 유리공장이 건립되었고, 1913년에는 경성초자제조소가 설립되어 병유리와 램프가 생산되었지만 일본 사람의 자본력과 기술을 당하지 못하여 점차 쇠퇴하였다. 그 뒤에도 작은 규모의 유리공장이 병유리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서울·평양·부산 등 대도시에 건설되었는데, 전국에 1931년에는 6개, 1934년에는 19개, 1938년에는 24개의 공장이 있었다.

근대적 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인 병유리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에 설립된 제2일본초자주식회사(광복 후 동양유리공업주식회사)이며, 주로 맥주병을 생산했으나 사이다병·됫병도 생산하였다. 그 뒤 광복이 되기까지 자동식과 수동식 시설을 겸비한 조선초자주식회사가 서울 영등포에, 반자동화시설을 갖춘 일광초자회사가 부산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모두 병유리 생산에 치우쳤고, 시설은 근대화되었으나 운영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유리공업도 남북으로 나누어졌는데, 1947년에는 남한에만도 47개나 되는 유리공장이 생겨났다. 그 대부분은 재생유리공장이었지만 간혹 원료조합으로 유리를 제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규사로는 옹진 앞바다의 순이도규사가 사용되었다. 6·25전쟁으로 시설이 크게 파손되어 거의 중단상태에 들어갔으나 정전 후 복구하기 시작해서 1955년에는 소규모공장을 합하여 41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근대적 기계설비를 갖춘 공장은 영등포에 있던 동양유리주식회사뿐으로, 그나마 운전은 못하고 따로 소형 도가니가마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당시의 유리공장은 거의 판유리에 소다회를 섞어서 용융하는 재생유리공장이었다. 그런 중에도 페니실린병과 같은 의료용 유리기구나 세렌적색 유리와 같은 신호등 유리 제조기술도 개발하는 등 품질도 다양화하고 품질 향상에도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맥주의 생산이 본격화함에 따라 맥주병의 수요가 늘어 헌 병의 회수 사용만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아서 1957년 5월 부산에 있던 해남초자주식회사가 영등포에 자동시설을 갖춘 병유리공장을 준공하였고, 후에 대한유리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여 활발한 병유리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 대한유리공업주식회사가 현재 두산유리주식회사에 흡수되어 근대화된 병유리공장의 효시가 되었다.

한편, 1957년 9월에는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가 풀콜방식에 의하여 국내 최초의 현대식 판유리공장을 인천에 준공하여 순조로운 조업으로 정상화시킴으로써 우리 나라 판유리 제조기술을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두산유리주식회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유리공업을 이끌어가는 근대화의 기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유리의 주원료인 규사는 주문진 규사와 서산 규석분이 약간 사용되었을 뿐 판유리 사용이 주였으나, 안면도 규사가 개발되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규사산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수한 경우 규석분을 사용하게 되었고, 만덕산이 유망한 산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1957년에 유리공업협회(현재의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에 등록된 공장의 수는 68개였으며, 그 규모는 도가니가마 설치 정도로 매우 작았으나, 1959년에는 안전강화유리가 개발되는 등 1950년대에도 대체로 유리산업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1960년대 이후 전체 유리공장의 근대화가 촉진되었고, 안면도 규사가 개발되고 소다회가 국산화됨에 따라 유리공장도 급속히 발전하여 유리제품도 크게 다양화되었다. 또 유리 제조기술과 시설도 국제수준화한 공장의 수가 늘어나 도자기와 함께 수출산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62년에는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이 창립되어 중소업체간에 협조하면서 생산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뒤 1964년 유리섬유 생산, 1965년 판유리 자동생산, 1969년 무늬유리 생산, 1977년 소다회 국산화, 1979년 광통신용 광섬유유리 개발, 1984년 광섬유유리 생산, 1988년 플로트 판유리 생산 등 새로운 상품이 개발, 생산되고 있다. 이 밖에도 석영유리·결정화유리·안전유리 등을 비롯하여 각종 산업 분야에 활용될 새로운 종류의 유리가 개발되고 있으며, 일부는 생산단계에 있는 것도 있다.

한편,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유리의 예술적인 이용을 도모하는 유리공예 부문도 새로운 양태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유리제품을 대부분 국제수준급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일부는 수출까지도 하고 있다.

판유리·관유리·병유리·섬유유리·강화유리 등 동질동형으로 된 일정한 제품을 고도의 생산관리에 의해 양산하는 제품이 있는가 하면, 크리스털유리·이화학용 장치유리·주방용구·장식용 유리와 같이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정교하게 만드는 수공업적인 제품까지 매우 다양하다.

조직으로 보면 몇몇 대규모공장을 제외한 모든 중소기업 유리공장은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을 형성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되어 있고, 기타 매우 영세한 공장은 가내공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미조합원 상태로 있다. 두산유리주식회사와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등 대규모기업은 중소기업 테두리를 벗어나 있어 가입하지 않고 있으나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상부상조하고 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유리제품은 판유리와 병류·식기류 등 비판유리계 제품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생산업체는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금강유리공업주식회사·두산유리주식회사뿐이며, 후자의 생산업체는 거의 한국유리협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중소기업인데, 1989년 당시 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업체 수는 77개 소였다.

1988년 판유리의 연간 생산능력은 인상법에 의한 것은 180만c·s이며 플로트방식에 의한 것이 82만5000c·s이었다. 최근 주류·음료·식품·제약·화장품업 등 관련 산업의 발전으로 병유리 수요는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다.

유리업종은 연중 계속 에너지를 사용하는 장치산업으로, 규사·장석·형석·석회석 등 천연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품목을 수시로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어 높은 생산을 기하고 있다. 더욱이 소다회의 국산화와 기술개발에 힘입어 유리공업 발전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유리병·유리식기류 등의 비판유리제품의 생산량은 1971년 12만5000t, 1975년 22만5000t, 1980년 54만7000t, 1985년 61만9000t에서 1988년 61만2000t을 나타냈다. 유리용기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1985년까지는 대체로 생산량이 증가했으나, 1985년도 공업보증금제 실시와 대체품의 출현으로 유리용기의 생산은 1985년 이후 약간 감소 추세에 있다. 1988년의 경우 유리제품 수출액은 약 4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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