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유원지(柳原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감(柳浛)이다. 아버지는 현령 유자미(柳自湄)이며, 어머니는 현감(縣監) 유진(柳軫)의 딸이다. 처는 교리(校理) 이영서(李永瑞)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으로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 대교(待敎)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기사관(記事官)으로서 『문종실록』의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교리를 거쳐, 1464년 판관(判官)으로서 유학·시학·문학 등의 진흥을 위해 학문에 능한 젊은 문신을 유학문 등에 배속시킬 때 음양문(陰陽門)에 선발되었다.
1565년(세조 11) 훈련원부사(訓練院副使) 재직 중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외관의 불법사를 규찰하고, 장령(掌令)에 승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면서 집의(執義)에 제수되고, 다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가 되고,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면서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어 1472년 좌부·우승지·좌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에 발탁되고, 1476년에는 종2품 가정대부에 승진하면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입조하고, 호조참판에 개수되었다. 곧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기면서 주문부사(奏聞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8년 대사헌,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 1480년 병조판서, 다음 해 우참찬(右參贊)에 교체, 임명되었다.
1482년 신정(申瀞)이 반인(伴人: 종친·공신·당상관의 호위무사)들의 차첩(差帖: 하급 관원 임명장)을 위조한 일로 사사될 때, 병조판서로서 그 일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받고 파직되었다. 1483년 세자시강원우빈객으로 복직되고, 1485년 지중추부사·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빈객을 지낸 뒤 1489년에 판윤을 지냈다.
이듬 해 정헌대부에 승진하고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1491년에는 건주야인(建州野人)이 침입하자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격퇴하였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중앙에 들어오고, 곧 우참찬이 되었으며, 1493년 좌참찬에 올랐다. 1496년(연산군 2) 종1품 숭정대부에 오르고, 1498년 우찬성(右贊成)에 승직되었으며, 문양군(文陽君)에 옮겼다가 졸하였다.
뛰어난 학식과 정직하고 원만한 성품으로 성종대의 문풍 진작에 기여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묘는 경기도 김포시 남산면(南山面) 월촌리(月村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