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성 ()

국방
인물
해방 이후 교육참모부장, 육군중장, 육군대장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7년
사망 연도
1997년
출생지
경상북도 예천
관련 사건
한국전쟁
정의
해방 이후 교육참모부장, 육군중장, 육군대장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개설

경상북도 예천 출생. 단국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원과 미 육군 초등군사반(初等軍事班) 및 고등군사반(高等軍事班)을 이수하였다. 1949년 5월 정훈(政訓) 제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되어 제8사단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대위 및 소령으로서 연대(聯隊) 정보주임과 작전주임을 지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전후(戰後)에는 대대장, 중령으로 진급한 뒤, 사단 작전참모와 부연대장을 거쳐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그 해 혁명최고회의(革命最高會議)에서 치안담당관 겸 선임장교로 있으면서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1962년 내무정책담당관과 1963년 내무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다시 야전부대로 돌아가서 보병 제25사단 제70연대장, 1965년에는 육군 방첩부대 부부대장(副部隊長)이 되었다. 같은 해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에 보임되었다. 1967년에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주월(駐越) 100군수사령관(軍需司令官)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1969년 월남에서 귀국한 뒤 보병 제26사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연구발전사령관, 1974년 동해안경비사령관, 1975년 교육참모부장 등을 거쳐 1977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국방부 군수차관보 및 제3군사령관이던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임명직 10인 중 1인이 되었고, 1980년부터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있었다.

1980년에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가, 이 해에 예편하였다. 그 해 중앙정보부장, 1981년 안전기획부장으로 발탁되어 제5공화국 출범에 기여하였으며, 반공연맹이사장, 총력안보중앙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 그 동안 제12·13·14대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제12대에서는 서울올림픽지원 위원장으로, 제13대에서는 국방분과위원장(國防分科委員長)으로 활동했으며, 제14대에서는 의원직을 중도에 사퇴하였다.

1996년에 12·12 및 5·18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 회부되어 제1심과 제2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았으나, 대법원 상고심 재판중인 1997년에 사망함으로써 공소기각 처분을 받았다.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 그리고 보국훈장 통일장·국선장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대한민국현대인물사』 제4집(대한민국공훈발간위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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